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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논단] 자리이타행에 대한 현대 윤리학적 의미 고찰 | ||||||||||||||||||||||||||||||||||||||||||
-효율적 이타주의와의 비교를 중심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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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들어가면서
대승불교의 보살(Bodhisattva)은 위로는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일으키고(上求菩提), 아래로는 인간을 모든 고통으로부터 구제하겠다는(下化衆生) 서원을 세운 존재를 말한다. 보살은 자비의 이타적 행위를 통해 자신을 구제하는[자리이타] 삶을 추구한다. 자신과 타인의 행복을 증진하고자 하는 보살의 행위는 자비의 이타행으로서의 6바라밀의 제1덕목인 보시(dāna)를 통해 구체화 된다. 이 보시의 현대적 개념이 기부이다. 1. 보시는 자신이 가진 것을 남에게 베풀어준다는 의미를 지니면서도, ‘보시의 완성’ 즉 보시바라밀을 성취하고자 하는 수행의 측면이 보다 강조된다. 그리고 보시는 주로 사찰이나 사찰에서 운영하는 복지시설 등의 재정지원을 위한 용도로 쓰이고 있다. 반면에 기부는 종교적 목적이나 추구와는 별개의 사회적 자선(慈善)으로서 타인의 복지나 행복 달성을 위해 금전이나 노동, 기술, 재능 등을 제공하는 일체의 행위를 일컫는다. 기부는 종교라는 틀을 벗어난 사회적 기여행위라는 점이 보시와는 다르고, 때문에 둘 사이의 의미가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렇기는 하더라도 보시와 기부는 모두 타인의 행복 수준을 높여주고자 하는 구체적 행위라는 점, 공감에 기초한 이타적 측면의 강조, 특정한 대가를 바라지 않고 선행을 베푼다는 측면 등에서 보면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때문에 여기서는 그 차이보다는 유사성에 주목하여 두 개념을 문맥에 따라 적절히 혼용하여 쓰기로 한다. 물론 여기서 자기수행이자 이타행으로서의 불교의 자리이타행을 최근의 서양의 윤리적 흐름인 효율적 이타주의와 비교 설명하려는 시도는 자칫 형식적이거나 외형적인 유사성에 기댄 피상적 논의에 그칠 우려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자리이타행을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현대의 윤리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또 실천 가능한 윤리적 해법을 찾으려는 시도가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 불교윤리 그 자체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킬 수 있음은 물론 새로운 의미 차원을 드러냄으로써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성까지도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는다. 무엇보다 비교의 방법이 유의미한 까닭은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자리이타행을 종교로서의 불교의 도덕원리로만 한정하면 불교의 테두리를 벗어난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도덕원리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는 사실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종교간 상호존중과 관용적 공존을 중시하는 종교다원주의 사회이고 표면적으로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이다. 종교를 믿지 않는 비율은 인구의 절반을 넘어섰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윤리는 특정 종교를 믿고 따르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는 사람이든 모두 공평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적 이성이나 양심에 입각한 윤리일 수밖에 없다. 도덕원리가 유사한 상황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보편화가능성(universalizability)을 요구한다면, 특정 종교에 기반을 둔 윤리적 교설로 이 조건을 충족시키기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본 연구는 종교에 바탕을 둔 윤리는 아니지만, 남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을 돕는 것이 결국은 자신의 안녕을 증진하는 길이라고 말하는 효율적 이타주의를 주목하고자 한다. 모든 유정적 존재(sentient being)는 행복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고 한다는 핵심적 전제를 자리이타의 윤리와 효율적 이타주의는 공유하고 있다. 필자는 효율적 이타주의를 종교로서의 불교를 전제하지 않는 자리이타의 윤리라고 보고 있다. 때문에 현대적 의미의 불교의 자리이타의 실천방안을 효율적 이타주의를 통해 모색해보고자 하는 시도는 불교적 가치의 사회적 구현을 위해서라도 충분히 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도 이롭게 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겠는가.” 는 초기 경전의 한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건강한 자기이익[自利]의 추구를 부정하지 않는다. 3.《법구경》 Dhp. 157송. 즉 이는 자기 자신을 이롭게 못하면서 다른 존재의 이익을 도모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의미이고, 다른 존재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의 참다운 행복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이익은 단순히 현재의 물질적 이익이나 쾌락의 충족의 차원이라기보다는 고차원적이고 넓은 범위에 적용되는 고통의 감소와 함께 최대의 행복을 산출하는 상태를 뜻한다. 4. 예를 들어 초기경전에서는 “그릇된 견해를 일컬어 이익이 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고, 바른 견해를 이익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이익경》 AN10:137)고 하거나, “생명을 죽이는 것을 이익이 없는 것이라고 하고, 생명을 죽이는 것을 멀리 여의는 것을 이익이 있는 것이라고 한다.”(《이익경》 AN10:181)는 식으로 이익을 여러 차원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와 유사하게 대표적 공리주의자인 피어 싱어 역시도 “고통을 피하고, 먹고 자는 데 대한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다른 사람들과 따뜻한 인간관계를 누리고, 방해받지 않고 자유로이 자신의 계획을 추구하는 등과 같은 것들을 인간의 가장 중요한 이익이라고 하여 이익에 대한 단편적 이해를 넘어서고자 한다. (피터 싱어 지음, 황경식·김성동 옮김, 『실천윤리학』, 연암서가, 2013, p. 67) ‘자리’와 ‘이타’의 관계를 붓다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이처럼 ‘자리’와 ‘이타’의 부류는 ‘자리’와 ‘이타’ 모두를 추구하는 것, 둘째는 자리만을 추구하는 것, 셋째는 이타만을 추구하는 것, 마지막으로 자리와 이타의 그 어느 것도 추구하지 않는 순서로 나눌 수 있다. 여기에서 자리와 이타 둘 다를 추구하는 것이 으뜸임은 물론이다. 이때 자리, 즉 ‘자신에게 이로운 것(attattha)’은 아라한과(arahatta)를, ‘남들에게 이로운 것’이란 필수품을 보시하는 자(paccaya-dāyaka)들에게 생기는 큰 결실의 이익(maha-pphal-ānisaṁ)을 말하는데, 5. 각묵스님 옮김, 《상윳따니까야》, 초기불전연구원, 2009, p. 173, 각주 165) 참조. 자리가 이타에 선행한다. 하지만 대승에서는 “자신을 위해 남을 해치면 나중에서 지옥에서 고통받게 되지만 남들을 위해 자기가 해를 입으면 하는 일마다 성공하게 된다네.” 6. 김영로 옮김, 《샨티데바의 행복수업》, 불광출판부, 2007, p. 185. 라고 보는 것처럼, 이타를 우선시하여 그 중심축이 ‘이타를 통한 자리의 추구’로 옮겨진다. 이는 기존의 불교 전통과 차별화되는 대승불교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 강력한 중생 구제의 원력에 있기 때문이다. 자리와 이타의 추구에 있어 초기불교의 자리이타의 자비와는 그 선후의 차이는 있지만, 그렇다고 어느 하나가 배제되는 방식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초기 불교의 아라한이 자리이타적 자비의 삶을 모범으로 삼고 있는 것처럼 대승의 보살도 이와 동일한 삶을 지향하고 있다. 보살의 자리이타의 실천은 《대승기신론》의 어떻게 수행하면 신심(信心)에 이를 것인가[修行信心分]에 대한 수행의 오문(五門) 중 시문(施門)에 대한 설명에서도 잘 드러난다. 자기이익과 타자의 이익의 조화(自利卽利他)의 방법에 의하기 때문에 결국 보살정신의 궁극의 가치인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가 가능하다. 이타주의가 자기희생을 통해 타인의 행복과 복리 증진을 추구한다면, 효율적 이타주의는 자신의 희생을 강요하거나,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결정을 요구하지도 않고, 남을 위한 최선이 자신의 행복으로 이어진다면 이를 최상의 결과로 간주한다. 자기이익에 반하는 자기희생의 거부는 고전적 공리주의자인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밀은 자신의 행복을 희생함으로써 타인의 행복의 증진이 가능하다면, 그 사회는 대단히 불완전한 상태에 있다고 말한다. 10. J. S. Mill, “Utilitarianism”, in Collected Works of John Stuart Mill, Vol. X, ed., John M, Robson (Toronto: Univ. of Toronto, 1969), p. 218. 여기서 우리는 ‘이익’의 추구라고 했을 때, ‘이익’이라는 말이 담고 있는 불필요한 오해를 줄이기 위해, 건강한 혹은 정당한 자기이익(self-interest)의 추구와 이기주의(selfishness)를 구분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다. 레이첼즈는 이기주의(selfishness)와 자기이익(self-interest)의 두 개념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닌다고 간주한다. 예를 들어 내가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갔다면 분명히 나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 것이지만 그 누구도 나를 ‘이기적’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 다른 예로 이를 닦거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나 법을 준수하는 것도 모두 나 자신을 위한 것이지만, 그 어느 것도 이기적인 행위라고 할 수 없다. 12. 제임스 레이첼즈, 노혜련·김기덕·박소영 역, 《도덕철학의 기초》, 나눔의 집, 2013, p. 151. ‘이기주의’가 타인의 이익을 침해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부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면서 말 그대로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모든 행위를 지칭한다면, ‘자기이익’은 타인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기이익적 동기에서 하는 행동들은 당연히 자신을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경우도 충분히 가능하다. 엄밀히 말하면 자기 이익 추구의 삶이 이기주의와는 관계가 없다. 이와 같다면 도덕의 영역에서 ‘자기이익’이 완전히 배제될 이유는 없으며, 이타주의와 양립 가능한 지혜롭고 현명한 이기주의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와 함께 자기이익이 소중한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욕구 역시 동시에 중요하며, 특히 아주 적은 비용으로 기부의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도덕적이다. 이 기부 혹은 선행을 하는 방법에 있어서 효율적 이타주의자는 감정적이고 명분에 따라 할 것이 아니라 냉정하게 따져서 어떤 방법이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며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 것인지를 계산해서 정하라고 조언한다. 가령 굶어서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프리카 소년의 사진을 보고 연민의 마음으로 바로 관련 후원 자선단체에 돈을 기부했다고 치자. 그러면 착한 일을 했다는 심리적 만족감은 느낄지 모르지만, 이 좋은 의도가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고 나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은 늘 열려있다. 즉 제대로 알고 기부하지 않는다면 실질적으로 별 도움도 되지 않을 뿐더러 심지어는 해를 끼칠 수도 있다. 남을 돕고 싶다는 마음에서 기부를 한다고 해서 그것이 제대로 된 도움을 전달하지는 않는다. 13. 그렇기 때문에 기부 관련 비영리단체(NPO) 숫자만 160만개가 넘는 미국에서는 가이드스타(Guidestar), 채러티 내비게이터(Charity Navigator) 등을 비영리단체 정보 매개체로 활용해 단체들의 정보를 공개하고 있다. 또한 비영리단체를 평가하는 단체도 170여개나 있어 기부자들이 기부할 비영리단체를 선택할 때 다양한 방법으로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시민의 후원금이 제대로 쓰이는지 공익법인을 감시하고 평가하는 기관인 ‘한국가이드스타(http://www.guidestar.or.kr)’가 있다. 여기서는 특정 단체의 재정 투명성, 모금 활동내역 등에 관한 평가표를 확인할 수 있다. 최근 한 자선단체 대표가 비영리법인과 주식회사를 함께 차려놓고 후원자들을 물색해 결손 아동후원금 명목으로 3년간 모은 기부금 128억 원으로 호화생활을 즐겼다는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14. “128억 후원금 ‘꿀꺽’…어떻게 가능했나?” (2017.8.16. KBS news). 뉴스에 따르면 한 업체는 2000만 명의 개인정보를 수집해 무작위로 전화를 돌려 5만 명에 가까운 후원자를 모집했다. 후원자(기부자)들은 분명히 ‘후원’, ‘결손 아동’ 돕기 전화를 받고, 좋은 뜻으로 기부했다. 하지만 이 돈은 교육콘텐츠 회사의 '매출'이 되었고, 회사 사장 등은 모금한 돈을 고급 승용차, 요트 파티, 골프 여행, 해외여행, 아파트 구입비 등으로 유용했다는 게 이 뉴스의 주요 내용이다. 이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돕는 확실한 방법은 무엇인지, 선의(善意)가 오히려 해악을 끼치는 부작용 없이 최대한의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 탓이다. 15. 윌리엄 맥어스킬, 전미영 옮김, 《냉정한 이타주의자》, 부키, 2017, p. 18. 우리가 진정으로 남을 돕고 싶다면 그냥 돈만 낸다는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잘 해야’ 한다. 16. 맥어스킬은 기부를 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핵심 질문 5가지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1)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큰 혜택이 돌아가는가? 2) 이것이 최선의 방법인가? 3) 방치되고 있는 분야는 없는가? 4) 그렇게 하지 않다면 어떻게 됐을까? 5) 성공 가능성은 어느 정도이고 성공했을 때의 효과는 어느 정도인가? (위의 책, P. 156) 그래서 맥어스킬(W. MacAskill)은 아래 각주16)에서 제시한 5가지 항목을 참고하면 효율적인 기부처를 가려낼 수 있고, 남을 도울 때 쉽게 빠지는 함정을 피할 수 있다고 말한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최상의 보시는 ‘내가 무엇을 남에게 베풀었다는 생각이 없는 무주상보시이다. 내가 베풀었다는 집착을 가진 보시는 궁극적으로 깨달음으로 이끌지 못한다. 무주상보시라야 생사를 벗어나지 못한 중생들이 누리는 유루복(有漏福)이 아닌, 해탈에 이르게 하는 한량없는 복, 즉 무루복(無漏福)이 된다. 그렇다면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상적 경지의 윤리적 행위를 요구하기보다는 구체적인 윤리적 판단을 이끌어 낼만한 적절한 수준의 원칙부터 명확하게 제시하는 것이 한층 실천가능하고 바람직할 수 있다. 적절한 수준을 제시해야 한다 함은 현실적인 기대를 갖는 사람들에게 권장할 수 있어서 거기에 맞추어 윤리적 실천을 할 수 있는 정도를 요구함을 말한다. 곧 보시를 권유하더라도 보다 자연스러운 방편은 자신의 이익을 바라는 보시, 바로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보시로부터 시작하여 그보다 큰 공덕이 있는 으뜸가는 보시[無住相布施]의 순서대로 설하는 방식이 보다 바람직할 수 있다. 《보시경(Dāna-sutta)》 (AN7:49)을 통해 이에 부합하는 적절한 예를 엿볼 수 있다. 이 경에서는 큰 결실, 큰 이익이 없는 보시와 큰 결실, 큰 이익이 있는 보시를 구분하고 그 결실로 인한 태어남에 대해 설한다. 가장 먼저 기대를 갖고 하는 보시, 부(富)를 기대하며 하는 보시로부터 마지막으로 다만 마음을 장엄하고 마음의 필수품을 위해 하는 보시까지 차례대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마음을 장엄하고 마음의 필수품을 위해 하는 보시’가 가장 큰 결실과 이익이 있음은 물론이다. 《합송경(Saṅgīti sutta)》(D33)에서도 “보시 가운데 마음을 장엄하는 보시가 최상이다.”라고 표현한다. 이처럼 ‘마음을 장엄하는 보시’ 혹은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가 보시 중에서 가장 뛰어난 보시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기대를 갖고 하거나 혹은 상에 머물러 하는 보시라고 말할 수 있는 유주상보시 18. 여기에서 무주상보시의 상대적 개념으로 많든 적든 간에 보시를 한다는 생각이 그 마음속에 있다는 의미로서의 유주상보시를 언급하였지만, 이 글에서 강조하는 ‘효율적 기부’는 유주상보시와 그 의미가 같지는 않다. 효율적 이타주의자는 ‘상(相)’에 대한 집착의 유무와는 관계없이 대가를 바라지 않고 ‘선의 최대 실현과 고통의 감소’를 바라고 기부를 하기 때문이다. 또 기부의 우선순위를 가능한 모든 자료의 분석과 추론을 통해 가늠해보고자 한다는 점에서 무주상보시와도 차이가 있다. 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설사 상이 있더라도 반복해서 보시 공덕을 쌓으면 천상에 태어날 수 있는 공덕을 쌓게 된다. 복덕을 쌓아 천상에 태어나려면 유주상보시라도 꾸준히 해야 한다. 이를 반복해서 하다보면 ‘원래 내 것은 없다’는 무아적 입장과 ‘가진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집착하지 않는 것이 무소유’라는 무주상보시의 참다운 가치를 체득하게 된다. 19. 조성택·미산·김홍근, 《인생교과서 부처: 마음을 깨닫는 자가 곧 부처다》, 21세기북스, 2015, pp. 211∼212 참조. 그렇다면 보통 사람들에게 보시의 실천을 권유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은 각자가 실질적·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부터 출발하여 무주상보시가 아니더라도 보시 행위는 그 자체로서 보시 받는 사람뿐만 아니라 보시하는 사람에게도 이익이 되고 행복이 되는 길임을 보이는 것이다. 보시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들의 일차적 관심은 어떤 보시가 자신에게 심리적 만족감을 주고, 20. 개인 기부자가 비영리조직에 기부를 한 후에 만족을 경험한 정도에 따라서 기부행동이 확연히 달라질 수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즉 개인기부자가 기부를 한 후에 만족을 하면 지속적으로 재기부를 하고 타인에게까지 기부를 하도록 긍정적인 구전행동을 하는 기부 충성도가 높은 기부자가 되어 결국은 기부율이 증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기부를 하고나서 불만족을 경험하면 다시 재기부를 하지 않고 오히려 기부한 단체에 대한 부정적인 소문을 퍼뜨려 잠재적 기부자들의 기부의도마저도 약화시키는 결과를 유발시켜 결국은 기부율이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김주원, 김용준, 〈자선단체기부자의 기부동기와 기부행동에 관한 실증연구〉, 《경영학연구》 제37권, 2008, p. 635) 또 이익이나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에 있기 때문이다. 효율적 이타주의자 또한 기부를 통한 성취감과 행복을 얻음과 동시에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큰 혜택이 돌아가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돈을 벌어서 물건을 더 산다고 더 행복해지지 않는 반면, 남을 돕는 데 쓰는 것은 행복감을 주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기부와 행복감은 상관관계를 보이고, 행복한 사람이 남도 잘 돕는다. 21. 피터 싱어, 이재경 옮김, 앞의 책, pp. 133∼134 참조; 그래서 또 기부의 만족도와 효율을 높이기 위해 효율적 이타주의자는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알게 해야 한다고 권고한다. 이미 모두들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선행을 베풀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규범체계로서 법으로 제정하기는 어려우나 시민생활에 있어서 지켜야할 최소한의 도덕체계로서의, 22. 황경식, 〈도덕체계와 사회구조의 상관성-덕의 윤리와 의무 윤리의 사회적 기반〉, 《철학사상》 32호,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9, p. 234. 인간다운 삶이 가능하도록 하한선을 규정해주는 최소도덕(minimum morality)을 요구한다. 최대도덕이 인간의 도덕적 가능성에 대한 최대의 희망과 당위를 담고 있다면, 23. 박병기, 〈보살과 선비, 그리고 우리 시대의 시민〉, 《윤리연구》 제65호, 한국윤리학회, 2007, p. 352. 최소도덕은 서양 근대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주도적 윤리관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사회 구성원이 반드시 행해야 하거나(도덕적 권장사항), 아니면 행해서는 안 되는(도덕적 금지사항) 규칙 체계이다. 개인들 간의 이익이 갈등을 빚을 때 그것을 절충하고 조화시키기 위한 노력이 요구되는 사회에서는 최대도덕(maximum morality)이 아무리 이상적이고 바람직해 보이더라도 그 현실적 실현가능성이나 적용가능성에 있어서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오늘날 시민사회의 윤리는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하는 최소도덕으로서의 의무윤리(duty ethics)의 형태를 띠게 된다. 이때 최소는 인간됨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윤리적 지점이고, 이 최소도덕이 제대로 이행(履行)되지 못할 경우 아무리 바람직해 보일지라도 최대도덕은 관념적이고 무의미한 구두선에 그치기 쉽다. 이 최소도덕과 최대도덕의 관계는 비첨(Beauchamp)과 칠드레스(Childress)의 설명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24 <표> Beauchamp Tom L, Childress James F, Principles of Biomedical Ethics, 5th ed., Oxford: Oxford Univ. Press, 2001, p. 42.
여기에서 의무(Obligation)를 기초로 하는 최소 도덕은 우리 삶의 존엄성을 확보하기 위한 토대가 된다. 어떤 사람에게 바른 행동이라면 관련된 비슷한 상황에서도 누구에게나 바른 행동이여야 하며, 이렇게 낮은 수준의 공통적 요소를 모든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이 최소도덕의 단계에 해당한다. 반면에 오른쪽의 초과의무적 행위(supererogatory acts)는 절대적 이타적인 행위로서 요청되는 도덕적 의무를 넘어서서 개인의 이상을 위해 수행되는 최대도덕의 차원이다. 세로의 점선이 말해주는 것처럼, 두 개의 범주는 엄격한 구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최대도덕으로서 초과의무는 최소도덕인 의무와 연속선상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다. 윤리적 인간(homo ethicus)은 최소도덕이나 의무에 만족하지 않고 최대도덕이나 초과의무의 영역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26. 윤영돈, 《다문화시대 도덕교육의 프리즘과 스펙트럼》, 이담, 2010, p. 268. 앞서 살펴본 집착과 이해타산이 없는 마음으로 베푸는 보살의 무주상보시가 <표>의 오른쪽의 초과의무에 속하는 영역이라면, 유주상보시는 왼쪽의 <의무>의 영역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타자에 대한 의무와 책임의 한계는 윤리학의 중요한 질문 중 하나이다. 이 윤리학적 질문과 관련하여 공리주의와 효율적 이타주의자는 상대적으로 적은 희생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면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고 있다. 무주상보시와 같은 높은 수준의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가장 일상적인 삶의 현장,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주요 화두로 삼는다. 그렇다고 궁극적 도덕이상으로서의 무주상보시와 같은 최대도덕의 차원을 방기(放棄)할 수는 없다. 최대도덕은 ‘의무를 넘어서는(Beyond obligation)’ 덕목으로서 우리 사회의 삶의 지평을 최대한 고양시키는 역할을 하고, 또 도덕적 이상은 언제나 우리가 지향해야 할 기준점으로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도덕의 이상을 존중해야 함은 마땅하지만, 레이첼즈가 ‘최소도덕’의 개념을 “자신의 행위로 인해 영향 받을 모든 사람들의 이익을 똑같이 고려하면서 이성에 따라 행동하려는 노력” 27. 레이첼즈, 노혜련·김기덕·박소영 역, 앞의 책, p. 48. 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사회가 점점 인간의 가치를 존중하지 않고 비속(卑俗)해지고 있다고 느낀다면 우선 점검해 볼 것은 이 ‘최소 도덕’의 지점이다. 레이첼즈의 ‘최소도덕’의 개념과 유사하게 싱어는 ‘이익 평등 고려의 원칙(the principle of equal consideration of interests)’을 제시한다. 28. 이 원칙은 윤리적 판단을 할 때 우리는 개인적이고 파당적인 관점을 넘어서서 영향을 받을 모든 사람들의 같은 이익에 대하여 동등한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피터 싱어 지음, 황경식·김성동 옮김, 《실천윤리학》, 연암서가, 2013, p. 53 참조.) 이 원칙에 따르면 우리는 인종이나 성별과 상관없이 차별 없는 대우를 해야 하며, 나아가 인간이든 동물이든 고통을 받고 있으면 그 고통은 똑같이 중요하고, 우리는 그 고통을 덜어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받아들여야 한다. 윤리적 의식은 나아닌 타자의 고통에 대한 의식에서부터 비롯한다. 남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준다는 원칙에 의해 윤리적 행동을 결정한다.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윤리공동체의 일원일 수 있는 필요조건일 뿐 아니라 충분조건이기도 하다. 싱어가 제시하는 윤리학은 일차적으로 타자나 다른 생명체가 느끼는 고통에 대한 감수성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에서 불교의 자비의 윤리학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불교의, 특히 대승의 가르침은 굶주림과 질병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면 이들을 도와야 할 의무가 있음을 환기시킨다. 기아에 시달리는 빈민들은 우리의 약간의 원조만으로도 목숨을 구할 수 있으므로 원조는 자선이 아니라 의무이다. 29. 남을 도와야 하는 의무는 칸트의 의무개념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칸트는 인간을 목적 그 자체에 따라 대우하라는 명제를 가지고, 의무의 종류를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이냐 아니면 타인에 대한 의무이냐, 혹은 완전한 의무이냐 아니면 불완전한 의무이냐에 따라 4가지로 설명한다. 완전한 의무는 보편화될 수 없기 때문에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행위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자살’을, 타인에 대해서는 ‘거짓 약속’을 들고 있다. 행위의 구속력이 완전한 의무보다는 약한 경우인 불완전한 의무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자신의 타고난 소질을 확장하고 개선’하는 것을, 타인에 대해서는 ‘타인의 어려운 처지를 돕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을 들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다루고 있는 타인을 구제하기 위한 기부와 관련해서, 칸트에 따르면 타인을 적극적으로 돕지 않는다고 해서 그의 인간성을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타인의 행복에 적극적으로 기여하지는 못할지라도 그의 행복을 저해하지만 않는다면, 타인의 인간성은 어떻게든 유지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각자가 힘닿는 한 타인의 목적[행복]을 향상시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이는 목적 그 자체인 인간성에 단지 소극적으로만 일치할 뿐 적극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나 자신의 행복처럼 여기고 더 많은 사람들과 마음을 나눌 수 있게 된다면, 사회적인 존재인 우리의 인간성은 더욱 완전해질 것이다. (박찬구, 《칸트의 『도덕형이상학 정초』 읽기》, 세창미디어, 2014, p. 97∼113 참조.) 물론 상(相)에 머무름(住)이 없이 온전한 자비심으로 하는 무주상보시가 무루(無漏)의 복을 가져오는 최상의 보시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윤리적 덕목은 현실적이고도 실용적인 대안으로서의 사회적 이타행의 구체적 제시와 실천일 것이다. 이와 함께 무주상보시가 현실세계에서 수용할 수 있는 차원인가 하는 소박한 의문이 있음을 앞에서 이미 밝힌 바 있는데, 이는 자칫 실현 가능성 등을 따지지 않고 무주상보시만을 상찬(賞讚)하거나 요구하게 되면 실천에 옮겨낼 수 없는 공허한 관념적 메아리에 그치거나, 보시의 싹을 자르게 하는 부정적 결과를 가져오게 할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이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깨달음으로까지 이끌 수 무주상보시의 가치의 구현을 위해서라도, 이는 효율적 이타주의의 사유와 방식을 통해 일상에서 실제적으로 수행(遂行)되고 드러나야 한다. 효율적 이타주의에 따르면 남을 돕지 않는 삶은 결코 윤리적으로 올바르지 않다.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실질적인 전략이 기부이고 보시이다. 보시나 기부를 통한 효율적 이타주의자로서의 윤리적 삶은 힘들고 불편한 자기희생(self-sacrifice)이 아니고 열반, 자기완성(self-perfection)을 향한 삶이다. 전반적으로 보면 일본에서든 다른 국가에서든 자신을 불제자라고 칭하는 사람들 중에서 붓다의 삶과 가르침에 드러난 연민의 윤리적 삶을 실천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31. 피터 싱어, 노승영 옮김,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시대의 창, 2015, p. 282. 는 한 윤리학자의 충고가 과장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이제 기부와 보시 등을 포함한 우리 사회가 바라는 윤리적 실천을 담보해내지 못한 종교는 그 존재 이유를 상실할 것이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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