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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린네의 생물분류법에서 힌트를 얻다.
독자 여러분이 구조론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가 구조론을 만나게 된 경로를 추적해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구조론을 생각해 내게 된 데는 여러가지 계기가 있다. 생각하는 것을 취미로 했던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다각도로 구조에 접근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생각이 추구해 들어가는 거의 모든 경로에서 구조가 벽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혹은 구조가 스스로 마중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거의 모든 방향에서 구조를 만났다.
그러나 ‘유레카’ 하고 대발견의 탄성을 지르게 된 하나의 경로가 분명히 있다. 중학교 2학년 쯤으로 기억한다. 린네의 생물분류법을 학습하면서였다. 그 때가 시점에 대해서는 사실 기억이 희미하다.
그러나 나는 유독 그 한 장면만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당시 나는 극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나의 일생을 걸어도 좋을만한 대발견으로 믿었던 것이다.
그 내용은 간단하다. 생물수업시간에 린네의 생물분류법을 배웠는데 왜 그 분류방식이 ‘종속과목강문계’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류기준의 근거가 불명확했던 것이다.
린네는 ‘종속과목강문계’로 생물을 분류했다. 그런데 왜 다른 방법이 아닌 하필이면 ‘종속과목강문계’의 계통수 방법으로 분류했지? 왜 딱 7단계로 분류했지? 왜 이 분류기준이 동물과 식물에 공통적으로 적용되고 있지?
생물의 종은 매우 다양하다. 어떤 생물은 7단계로 구분되고 다른 어떤 종은 10단계로 또는 그 이상의 여러 단계로 구분될 수도 있다. 그런데 왜 린네는 7단계의 확실한 분류기준을 제시하고 있을까? 거기에 절대적인 근거가 있는가?
간단하다. 뒤집어보는 것이다. 생물을 뒤집으면 무생물이 된다. 린네가 생물을 분류했다면 나는 무생물을 분류하련다. 그렇게 하여 만들어진 나의 무생물 분류기준이 점차 구조론으로 발전한 것이다.
생물선생님의 말씀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기억을 대략 옮기면 다음과 같다.
“종친회를 다른 말로 화수회(花樹會)라고도 한다. 이는 족보의 계통그림이 나무(木)를 닮았기 때문이다. 같은 이치로 생물의 계통수를 트리(tree)라고 하는데 이는 족보와 마찬가지로 생물 진화의 계통그림이 나무와 닮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알 수 없는 어떤 위화감이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건 아니다 싶은 느낌이다. 골똘한 생각에 빠져버렸다.
린네의 생물분류 7단계는 동식물의 진화경로를 반영하고 있다. 이 규칙이 무생물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우리가 사용하는 물체나 물건의 발생경로를 추적해보면 어떨까? 생각이 여기에 미친 것이다.
물체 혹은 물건의 최초 출발점은 알 수 없으므로 맨 마지막 단계인 상품으로부터 시작하자. 예컨대 연필을 들 수 있다. 연필이 생물로 말하면 소나 돼지 혹은 개나 사람과 같은 마지막의 종으로 들 수 있다.
연필이 연필로 불리워지기 이전은? 그냥 물건이다. 연필이 하필이면 연필로 불리는 것은 그 물건의 쓰임새가 글씨쓰기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아직 용도가 정해지기 이전에는 그냥 물건으로 불린다.
그렇다면 물건이 되기 이전은? 물체다. 물체가 되기 이전은 물상이다. 물상이 되기 이전은? 물질이다. 물질이 되기 이전은? 물성이다. 물성이 나타나기 이전은? 물리다.
즉 최초에 최고로 추상화된 단계인 물리가 있고 이어서 물리≫물성≫물질≫물상≫물체≫사물≫물건≫상품≫문구≫학용품≫연필≫색연필 순으로 점차 구체화되어 가는 것이다. 처음에는 굉장히 잘게 세분하였는데 많은 경우 열 몇 단계까지 세세하게 나누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앞의 여섯 번째까지는 이상하게도 모두 물(物)자가 붙어있는 것이다. 여기에 어떤 규칙성이 있다. 잘 살펴보니 어떤 반복됨이 있다. 반복을 제외하고 보면 물리에서 물체까지다. 물건부터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이다.
중복을 제거하면 ‘물리≫물성≫물질≫물상≫물체’가 남는다. 이 5가 아래에서 반복되는 것이 ‘사물≫물건≫상품≫학용품≫연필’들이다. 즉 여기에 1사이클이 숨어있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질서는 이 1사이클들의 집적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물리(物理), 물성(物性), 물질(物質), 물상(物象), 물체(物體)’ 이 다섯 개의 어휘가 우연히 눈에 띈 것이 아니라 이 단어들 사이에 무언가 긴밀한 연관관계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보다 하위의 단계인 ‘사물≫물건≫상품≫학용품≫연필’에도 반복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구조론은 사실상 여기서 핵심부분이 완성되었다. 그 이후의 많은 사색들은 이 5열의 의미를 밝혀내기 위한 보완작업이었다.
(2) 초등학교 때의 국어사전찾기
린네의 생물분류법을 접하기 이전에도 유사한 발상을 한 일이 있다. 초등학교 3학년 아니면 4학년 때로 기억한다. 하루는 담임선생님이 도서실의 국어사전은 한 권씩 나눠주고 단어들의 뜻을 찾아오라는 숙제를 내주는 것이었다.
방바닥에 뒹굴뒹굴하며 사전을 뒤적거려 보았는데 내 기억에 인상적으로 남아있는 어휘들은 좆, 씹, 젖 이런 단어들이었다. 좆은 설명이 ‘자지’로 되어 있었다. ‘자지’를 찾아보니 ‘좆’으로 되어 있었다. 혹은 ‘남자의 생식기’등의 설명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젖은 유방으로 설명되고 유방은 젖으로 설명되었다. 씹은 보지로, 보지는 씹으로 풀이되었다. 이건 뭔가 이상하다. 나는 국어사전의 뜻풀이에 일정한 규칙이 없이 그냥 임의롭게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여성’은 ‘여자를 이르는 말’로, ‘남성’은 ‘남자를 이르는 말’로 설명하는 식이다. 이건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국어사전의 뜻풀이에는 절대적인 어떤 보편타당한 규칙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규칙이 지금은 없다.
그 어떤 절대적인 규칙은 무엇일까? 예컨대 ‘개’라면 ‘개과의 동물’로 설명된다. 개과는 개보다 더 큰 범주이다. 즉 보다 큰 개념의 어떤 범주에 소속되는 방식으로 설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보다 작은 개념들을 포함하는 형태로 설명되어야 한다.
예컨대 ‘자동차’라면 ‘내연기관의 힘으로 도로 위를 달리게 만든 차’이다. 여기서 내연기관이라는 보다 큰 개념이 나오고 이 내연기관을 이용한 탈것에 소속되는 작은 개념으로 오토바이와 자동차가 딸려있는 것이다.
이것이 곧 분류다. 나는 국어사전의 기술법은 잘못되어 있으며 ‘분류방식’으로 기술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국어사전의 모순점을 발견하고 크게 기뻐하여 어른이 되면 내 힘으로 국어사전을 새롭게 쓰겠다는 결심을 했다. ‘분류방식 국어사전’의 기술에 타당한 분류공식을 연구하였는데 보다 큰 상위개념을 먼저 쓰고 거기에 딸리는 하위개념을 나중 쓰는 방식으로 결정한 것이 그 내용이었다.
초등학교 때 생각한 ‘분류방식 국어사전’의 기술에 관한 아이디어가 이후 머리를 떠나지 않았는데 중학교 때 린네의 분류법을 보고 무릎을 치게 된 것도 이 때의 아이디어가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으로 본다.
(3) 물질이란 무엇인가?
초등학교 4학년 때다. 담임선생님이 도교육청에서 주관하는 과학경시대회에 나갈 후보 두 명을 선발하게 되었다.
후보를 선발하기 위한 예비시험을 치렀는데 잡학상식의 만물박사였던 나는 우수한 성적으로 다섯 명의 예비후보들 중의 하나로 선정되었다.
다섯 명은 일과 후에도 학교에 남아 한시간식 자연과목의 보충수업을 하게 된 것이다. 그 보충수업에서 나는 커다란 낭패를 겪게 된다.
과학경시대회라 해서 나는 어린이 퀴즈대회 비슷한 과학상식 시험을 치르게 되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선생님이 보충수업하는 수업내용은 완전히 딴판이었다.
내가 기대했던 중학교 수준의 과학상식이 아니라 그 반대로 초등학교 1학년 자연과목을 다시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 내용이 내게는 실로 충격적이었다.
1) 다음 중 물체를 고르시오.
2) 다음 중 물질이 아닌 것을 고르시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초등학교 1학년 자연문제인데 과학상식에 관한 한 만물박사를 자부하던 나는 그때까지 ‘물체’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물체가 뭐지? 물질은 또 뭐지? 자연은 또 뭐지? 생물은 무엇이며 무생물은 또 무엇이지?
초등학교 1학년이 알 수 없는 어려운 문제이다. 과연 내가 1학년 때 이런 내용을 배웠던가? 전혀 배웠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물체니, 물질이니, 물상이니, 자연이니 하는 개념들은 고등학생이나 되어야 배울 어려운 단어가 아닌가?
나는 결국 최종시험에서 탈락하여 학교대표로 과학경시대회에 출전하지 못했다. 잡다한 상식은 많이 알고 있었지만 교과서에 나오는 기본이 안되어 있었던 것이다. 과학에 관한 한 만물박사를 자처하던 나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그 후로 내 관심은 물질, 물체, 물리, 자연, 생물, 무생물 이런 단어들이었다. 특히 생물과 무생물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다.
스님이 화두를 들듯 골똘히 생각하게 되었다. 나의 관심은 생물과 무생물의 근원에 다가섰다. 모든 생물과 무생물이 그저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곡절을 거쳐 비로소 이 땅에 있게 된 것이다.
생물에 있어서 그것은 ‘진화론’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생물은? 무생물은 도무지 어떤 경로로 생성되어 이렇게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일까?
이때의 물질과 물리 및 물성 혹은 물상 그리고 물체들에 대한 관심과 사색이 이후 린네의 생물분류법에서 영감을 받아 구조론을 착상하게 된 계기의 하나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4) 석가의 인연법에 숨은 논리구조
고교 1학년 국어수업 때로 기억한다. 피천득의 수필 ‘인연’을 배운다. 괴짜인 국어선생님이 ‘인연’의 뜻을 질문한다. 돌발적인 사태다. 이전에 이런 식의 질문을 한 예가 없으니 답변을 준비한 학생이 있을 리 없다.
대답하는 학생이 없으니 앞줄부터 한 명씩 차례로 질문한다. 아주 수업을 이 질문 하나로 때울 기세다.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어서 기어이 내 차례가 되었다.
“불교에서는 모든 일에 원인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 원인이 인연입니다.”
훌륭한 대답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대답은 대답이다. 국어선생님은 더 이상 질문하기를 멈추고 인연의 뜻을 설명했는데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으나 앞에서 말한 국어사전 낱말풀이처럼 매가리 없는 설명이었다.
참고로 네이버 국어사전의 ‘인연’에 대한 설명은 이렇다.
‘인연 : 사물들 사이에 서로 맺어지는 관계’
아니 고작 그 정도의 시시한 뜻을 설명하기 위해 학급 60여명의 학생을 일일이 다 일으켜 세워 질문하려 들었다는 말인가? 아주 심오한 철학적인 설명을 기대하고 있었던 나로서는 실망이 아닐 수 없었다.
‘국어선생 맞나?’
존경할 만한 스승을 만나지 못한다는 것도 불행이다. 나는 선생님의 설명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인연’은 무엇일까? 당시 불교철학에 관심이 있었기에 이후 오래도록 인연은 나의 ‘화두’가 되었다.
인연은 원래 불교용어이므로 불교적인 의미로 접근하는 것이 맞다. 네이버 국어사전을 한번 더 인용하면.
『불교에서, 결과를 내는 직접적인 원인인 인(因)과 간접적인 원인인 연(緣). [쌀과 보리는 그 씨가 인(因)이고, 노력˙자연˙거름 따위가 연(緣)임.]』
원인이 있고서야 결과가 있다. 곧 인과율이다. 현대과학은 인과율을 그 최종적인 근거 곧 모든 논리 전개의 대전제로 삼는다. 서구 논리학과 현대과학의 출발점이 되는 인과율이 2500년 전 석가모니에 의해 발견되었다는 점을 새삼 재발견한다는 사실은 신선한 지적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일이든 그렇다.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한다. 논리전개에 있어서 최초의 출발지점을 어디로 설정할 것인가이다. 석가의 인과율이 그 하나의 기점이 될만하다.
석가의 인연법이 중요한 점은 제 1원인과 제 2원인을 구분하고 있다는 것이다. 본질적 원인과 주변적 연관을 구분하고 있는 점이다. 비유하자면 씨앗이 제 1원인, 곧 ‘인’이요 그 씨앗이 자라면서 맞닥뜨리는 환경이 제 2원인, 곧 ‘연’이다.
예컨대 어떤 사람의 성적이 신통찮다면 본질에서 머리가 나쁘다는 것이 인(因)이요 가난해서 공부를 할 형편이 안되었다는 사실이 연(緣)이다. 이러한 ‘인’과 ‘연’의 구분이 구조론과 연결되는 하나의 단서가 된다.
인연설(因緣說)을 연기설(緣起說)이라고도 한다. 연기설에서 기(起)를 독립적인 개념으로 볼 수도 있다. 즉 인이 제 1원인이면, 연이 제 2원인, ‘기’가 제 3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 경우 인이 씨앗이고, 연이 환경이면, 기는 환경에의 대응이 된다.
인(因).. 머리가 나쁘다.
연(緣).. 가난하다.
기(起).. 공부를 않았다.
그 결과로 .. 성적이 나쁘다.
근대 논리학에서의 인과율은 원인과 결과를 1 대 1로 대응시키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 과정은 상당히 복잡하다. 여러 가지 원인이 얽혀있는 것이다. 그 경우 어느 것이 진짜 원인인지 알아내기는 쉽지 않다.
예컨대 환자가 병에 걸렸을 경우 그 원인은 다양하다. 운동부족 때문일 수도 있고, 스트레스로 인한 면역기능의 약화 때문일 수도 있고, 바이러스의 침입 때문일 수도 있고, 불결한 위생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러한 여러 원인들 중 본질적인 원인과 주변적인 환경의 영향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바이러스의 침입이 인(因)이면, 환경의 불량은 바이러스를 끌어들인 연(緣)이고, 스트레스에 의한 면역체계의 약화는 바이러스로 하여금 발병에 이르게 한 기(起)가 된다.
물론 인도나 중국의 불교철학은 이 정도의 엄밀한 수준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 연기설의 논리구조나 구조론이나 닮아있다.
앞에서 말한 바 있는 5단계 무생물분류법인 ‘물리, 물질, 물성, 물상, 물체’들이 연결되는 패턴과 ‘인, 연, 기 그리고 결과’가 연결되는 논리구조가 닮은꼴인 것이다.
그런데 ‘물리, 물질, 물성, 물상, 물체’의 연결공식을 불교의 인연설에 적용하면 인(因)이 제 1원인이 되지 않는다.
씨앗이 제 1원인일 수 없다. 그 씨앗조차 그 이전의 나무에서 떨어진 바 되기 때문이다. 뭔가 중요한 하나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논리전개의 1사이클을 완성시키려면 인연의 전개에 따른 결과까지 포함시켜야 한다.
적당한 단어를 찾자면 금강경의 한 구절인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에서의 공(空)과 색(色)이다.
배경(공)
실체(인)
연관(연)
이행(기)
결과(색)
금강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실로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예의 구조론에 대입하면 시스템 작동의 1사이클과 일치한다. 시스템은 일을 한다. 일은 입력에서 출력까지 1사이클의 주기가 반복된다.
공(입력)과 색(출력) 사이에 인(저장)과 연(제어) 그리고 기(연산)가 있어서 시스템의 1사이클을 이루며 피드백의 가역과정에 의해 회전하고 있는 사실을 ‘색즉시공 공즉시색’으로 표현했을 수 있다.
입력(공)
저장(인)
제어(연)
연산(기)
출력(색)
여기서 출력 측의 입력전환 곧 피드백(feed back)의 가역과정이 시스템작동의 핵심적인 성질로 있는 것이다. 단순구조와 완전계인 시스템의구조의 차이는 가역과정 곧 되먹임현상이 있느냐 혹은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있다.
● 단순구조(닫힌계)..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라 원인에서 결과로만 일방통행한다.
● 시스템구조(완전계).. 되먹임(피드백)기능에 의해 1사이클의 주기가 있다.
정치에 비유하면 상명하달식의 권위주의체제가 원인에서 결과로 일방통행 하는 단순구조라면 하의상달이 이루어지는 민주주의체제가 시스템구조라 할 것이다.
정보의 생산자에서 소비자로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방송이나 종이신문이 단순구조라면 쌍방향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인터넷은 시스템구조라 할 것이다.
어쨌든 고교 1학년 국어수업 중 피천득의 ‘인연’을 공부하면서 국어선생님이 던진 ‘인연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내게는 하나의 화두가 되었고 그런 이유로 ‘인연’을 연구하던 끝에 나의 ‘5단계 무생물 분류법’과 불교의 연기설이 닮아있음을 발견하였으며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탐구한 끝에 구조론을 얻게 되었다.
(5) 헤겔의 변증법과 구조론
헤겔의 변증법은 고 2때 정치경제 수업시간에 배운 것으로 기억된다. ‘정경’과목 선생님이 제자들에게 세상 돌아가는 원리를 가르쳐 준 유일한 선생님으로 기억한다. 다른 선생님들은 모두 세상사에 대해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다.
헤겔의 변증법이 기존의 인과율과 다른 점은 인과율이 시간 상에서의 원인과 결과로 성립하는데 비해 헤겔의 변증법은 시간의 선후가 없이 동시에 성립하는 공간의 문제에 도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헤겔의 변증법에서 정과 합은 원인과 결과에 해당한다. 즉 정이 먼저 오고 합이 나중 오는 것이다. 그러나 정과 반의 모순관계는 동시에 성립한다. 정이 오고 한참 후에 반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주역(周易)의 음양(陰陽)과 같이 동시에 공존한다.
그런데 헤겔은 이를 다르게 설명한다. 정이 먼저 오고 나중 반이 나타난다는 식이다. 이는 잘못된 것이다. 어쨌든 정과 반의 모순된 대립상은 공간상에서 성립하는 상황이다.
태초에 질서가 있었다. 질서는 시간적 순서와 공간적 방향의 질서다. 인과율의 질서는 시간적 순서의 질서다. 공간적 방향의 질서도 규명되어야 한다. 여기서 ‘일’로 보느냐 ‘구조’로 보느냐의 관점이 소용된다.
여기서 필요한 개념이 ‘계’이다. 계는 독립계이며 독립계는 외부적으로 닫혀있어야 한다. 많은 카오스적 혼돈은 계의 구분에 실패한 때문에 일어난다. 즉 중복과 혼잡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계를 독립시키는 작업이 선행되고서야 구조의 논리적 탐구가 가능한 것이다.
‘계’는 공간적으로 성립하며 헤겔의 혼선은 ‘계’의 정립에 실패한 때문이다. 곧 ‘닫힌계’의 설정이다. 단일구조의 범위를 한정하는 바운더리의 구획문제이다.
나는 린네의 생물분류법에서 착안한 무생물분류법의 5단계를 불교의 연기설 곧 논리학의 인과율과 접목시키면서 이것이 시간적 순서대로 성립함을 알았다. 그러나 무언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1사이클의 주기가 반복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반복의 1단위의 정체가 무엇인가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시간적 순서를 따라가고 있지만 나는 정과 반 곧 즉자(卽自)와 대자(對自)를 동양의 주역(周易)에서 말하는 음양(陰陽)과도 같이 ‘닫힌계’ 안에서 동시적으로 성립하는 길항(拮抗)원리로 파악하였다.
정(원인)
반(길항)
합(결과)
● 헤겔의 변증법
정┳반
합
● 구조론의 변증법
정
길╋항
반
여기서 구조론은 한차례 질적인 비약을 일으킨다. 예의 5단계는 시간적으로 차례로 성립하면서 동시에 공간적으로 동시적으로 성립한다는 것이다. 즉 헤겔의 변증법처럼 정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반의 방문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정과 반이 처음부터 동시에 있었다가 일의 진행에 따라 그 중 하나가 두드러지게 드러날 뿐이라는 것이다.
정반합의 진행에 따라 합에 이름으로써 1사이클의 진행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정반합은 공존하였으며 일의 진행에 따라 특정 부분이 부각될 뿐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에 따르면 원시 사회주의 다음에 고대 노예제가 오고 그 다음에 봉건제가 오게 되어 있다. 그 다음에 부르조아 자본주의가 오고 최후에 사회주의가 오게 되어있다. 이는 틀린 생각이다.
이 다섯 단계는 항상 공존한다. 기업의 창업단계는 원시사회주의와 같고 창업초기의 가족회사 단계는 노예제와 같고 중소기업은 봉건제와 같으며 대기업은 자본주의와 같고 국영기업은 사회주의와 같다.
같은 자본주의 안에서도 이 다섯 단계는 공존하고 있다. 이는 일의 진행에 따른 1사이클의 주기에 다름 아니다. 자동차로 치면 원료인 기름은 원시사회주의이며 엔진은 노예제이고 기어장치는 봉건제이며 바퀴와 구동축은 자본주의이고 차체는 사회주의다.
이 다섯은 동시에 공존한다. 원시사회주의에서 노예제 혹은 봉건제로 가는 흐름은 동력전달의 순서에 불과하다. 자동차의 동력은 분명히 연료탱크에서 엔진으로, 기어장치로, 바퀴로, 차체로 전달된다. 그러나 이 다섯은 동시에 공존하는 것이다.
물론 이상에서 마르크스의 논리를 차용함은 어디까지나 비유적인 설명이다. 굳이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어쨌든 구조론에서는 정 다음에 반이 오는 것이 아니며 반 다음에 합이 오는 것은 아니다. 정과 반과 합은 동시에 존재한다. 단지 일의 진행순서가 구분될 뿐이다. 여기서 ‘계’와 ‘일’의 구분이 중요한 문제로 된다.
‘일’은 시간적인 순서로 관찰되지만 ‘계’는 항상 동시에 성립한다. 구조는 ‘일’ 보다는 ‘계’ 측면에서 바라보는 관점이다. 그리고 구조론 이전의 모든 논의들은 ‘계’ 보다는 ‘일’ 측면에서의 접근이었다. ‘계’를 보지 않고 ‘일’을 보기 때문에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6) 병 안의 새를 어떻게 꺼낼 것인가?
구조론을 이해함에 있어서의 수많은 혼돈과 착각은 시간성과 공간성(동시성)의 구분실패에서 일어난다. 즉 시간적 순서와 공간적 방향을 혼동하는 것이다. 보통은 시간적 순서만을 논하려고 한다.
종횡(縱橫)이 있다면 종의 논리는 시간적 순서요 횡의 논리는 공간적 방향이다. 구조론이 답하는 바 일의 진행은 시간적 순서대로 종(縱)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실제의 작동은 공간적 방향을 따라 횡(橫)적으로 동시에 성립하는 것이다.
엔진의 점화가 원인으로 먼저고 바퀴의 구동이 결과로 나중이지만 엔진의 작동이 멈춘 후에 바퀴의 구동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자동차가 서울에서 부산까지 진행한다면 엔진의 작동과 바퀴의 구동은 항상 같이 진행되는 것이다.
● 종래의 인과율과 헤겔의 변증법.. 엔진이 작동하는 동안 바퀴는 쉰다. 엔진이 멈추면 비로소 바퀴가 일을 시작한다.
● 구조론의 길항원리.. 엔진과 바퀴는 동시에 함께 작동한다. 그러나 엔진이 먼저 구동하고 바퀴는 나중 호응한다.
그런데 실제의 사례를 통하여 분석하다 보면 무수한 혼돈과 착각이 일어나는데 이는 인간의 인식체계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구조론의 원리를 착상한 이후 10여 년의 방랑생활 동안 이루어진 나의 모든 탐구가 이 부분에 집중되었다. 그 결과로 얻은 것이 존재론과 인식론의 구분이었다.
● 존재론 대 인식론
길(작용)≪〓≫항(수용)
연역법 대 귀납법
자연의 사물은 연역법의 순서대로 진행할 뿐이며 귀납적 순서로 이행하는 경우는 없다. 그런데 인간의 인식은 항상 귀납의 순서대로 성립할 뿐이며 연역적 순서로 사고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
연역하려면? 깨달아야 한다. 원리를 깨닫지 못하고는 애초에 연역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뇌구조 자체가 도무지 귀납에만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이 구조론을 이해하는데 하나의 장벽이 된다.
● 구조론의 길항원리
배경┳응용
실체┳종합
연관┳분석
이행┳수용
귀결┻지각
왼쪽은 존재론이요 연역법이며 자연의 사물이 이행하는 1사이클의 순서이다. 곧 위에서 아래의 순서대로 ‘배경≫실체≫연관≫이행≫귀결’의 1사이클이다. 오른쪽은 이를 뒤집어서 아래에서부터 위로 곧 ‘지각≫수용≫분석≫종합≫응용’의 1사이클이다.
● 존재론 : 연역법(위에서 아래로, 전체에서 부분으로 진행한다)
● 인식론 : 귀납법(아래에서 위로, 부분에서 전체로 진행한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아니 깨닫지 못한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연역적 사고가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다. 인간은 원래 귀납적으로 사고하게끔 뇌가 세팅되어 있는 것이다. 전체보다는 부분으로 주의가 쏠리게 되어 있다.
본질보다는 표피를 주목하게 되어 있다. 원인보다는 결과를 먼저 바라보게 되어 있다. 요소보다는 효과를 먼저 주목하게 되어 있다. 곧 귀납적 사고이며 연역적 사고는 아주 특수한 경우에 한정되어 성립한다.
그러므로 구조론을 자유로이 응용하기 위해서는 연역적 사고를 하는 훈련을 해야한다. 이를 위해서는 깨달음이 필요하다. 나는 불교의 선문답에서 그 답을 얻었다. 곧 병 안에 든 새를 꺼내는 훈련이다.
‘병 속에 든 새를 어떻게 꺼낼 것인가?’라는 화두는 김성동의 소설‘만다라’에 나오는 이야기다. 새는 병 속에 갇히어 있다. 병에 손을 대지 않고 어떻게 그 병 안의 새를 자유롭게 할 것인가? 이는 곧 무에서 유를 어떻게 창조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19살 때로 기억한다. 친척집 다락방의 먼지 묻은 책더미에서 ‘만다라’를 발견했다. 나는 이 화두고 구조론의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게 되었다.
‘어떻게 새를 꺼낼 것인가’ 하는 질문은 곧 ‘그 새를 꺼낼 수 있다’는 전제가 성립하고 있다는 의미다. 즉 새는 이미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있는 것이다. 즉 나 아닌 누군가가 그 새를 이미 꺼낸 것이며 그 결과로 새는 지금 저 하늘을 날고있는 것이다.
누가 그 새를 꺼냈는가? 신이다. 천지창조의 신이 그 새를 꺼낸 것이다. 비유하자면 신이 천지를 창조하는 과정이 병 안의 새를 꺼내는 과정과 같은 것이다. 이는 또 생물의 진화과정과도 같다. 그렇다면 신은 어떻게 천지를 창조했는가? 생물은 어떻게 진화했는가?
자기복제다. 무에서 유가 생겨날 수 없기 때문에 1이 2로 증식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1은 (1/2+1/2)로 쪼개질 수 있을 뿐이다. 즉 우주는 빅뱅에 의해 더 증가한 것이 아니라 조밀해진 것이다. 무엇인가? 태초의 빅뱅은 ‘질서의 수의 증가’를 의미한다는 뜻이다.
(7) 첫째 날에는 빛을 창조했다
구조론은 연역법이다. 우리가 익숙해 있는 것은 분석적 접근의 귀납적 사고다. 통합적 접근의 연역적 사고는 특별히 훈련되어야 한다. 선종불교의 간화선에서 사용되는 화두(공안)들은 연역적 사고를 훈련하는데 도움을 준다.
한 소식 들은 척 하는 선승이 가짜인지 진짜인지 판단하는 방법도 간단하다. 연역적 방법을 사용하고 있으면 진짜이고 귀납적 방법을 사용하고 있으면 가짜다.
‘병 안에 든 새를 어떻게 꺼낼 것인가?’ 병에 손이 닿아서는 안된다하는 따위의 규칙은 무시해도 좋다. 요는 이 고민이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한 외침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데카르트의 고민은 첫 단추를 어디부터 꿸 것인가이다. 연역은 제 1원인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기점이 어디인가이다. 맨 처음의 처음 말이다. 곧 인덱스(index)다. 목차이고 차례이고 접근경로의 지정이다.
무슨 일을 하려면 일단 주소부터 알아봐야 한다. 서가의 책이라면 도서목록이 꼬리표로 붙어있다. 컴퓨터의 파일이라면 파일명이 지정되어 있다. 병 안의 새를 꺼내지 못하는 이유는 그 맨 처음으로 해야할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연역의 기본원리는 최초의 기준점을 제시함에 따라 다른 모든 일들이 그에 연동되어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인과논리의 사슬에서 제 1원인이 되는 첫 단추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데카르트는 ‘존재’에서 찾았고 샤르트르는 한발 더 나아가 실존이라 말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는 방법으로 성경에서 찾는 낡은 관습을 없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 첫 단추는 돌아가는 판 전체를 장악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집을 짓는다 치자. 맨 처음 터를 닦는다. 그 터는 집 보다 크면서 집 전체를 장악해야 한다. 터가 집보다 작다면?
건물 크기를 예상하지 못하고 너무 작게 터를 닦았다면?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어떤 경우에도 주차장 면적은 자동차의 바닥면적 보다 넓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간단하다. 가장 큰 것을 알아보면 된다. 그것이 첫 번째다.
가장 큰 것, 가장 먼저 첫 번째 손님으로 방문하는 것, 최후의 순간까지 지겹게 따라붙는 것, 그런 것이 있다. 바로 그것을 찾아야 한다. 무엇인가? 분별지에 대해서 통합지다.
● 귀납적 사고 : 분별, 분석, 부분을 본다.
● 연역적 사고 : 통합, 종합, 전체를 본다.
그림을 그리고자 한다면 맨 먼저 무엇이 준비되어야 하는가? 백지 한 장이다. 캔버스 한 폭이다. 맨 처음부터 맨 마지막까지 화가가 그림을 그려 가는 전 과정에 ‘백지’는 개입한다.
화두란 무엇인가? 그것은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전 과정에 개입하는 것이다. 선(禪)의 화두들은 주어져 있는 문제의 정답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최초의 백지상태에서 문제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우리는 귀납적으로 사고한다. 이미 그려져 있는 그림에서 답을 구하는 것이다. 병 속에 새가 들어가 있는 현재상태에서 분석하고자 하는 것이다. 애초의 상태로 되돌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 그림이 그려지기 이전의 백지상태로 비워내는데 성공해야 한다.
소설가라면 첫 페이지를 쓰는 일이 중요하다. 바둑이라면 첫 착점을 어디로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건축가라면 터다지기가 중요하다.
이미 다 지어져 있는 건물을 개조하여 한옥으로 바꾼다거나 혹은 양옥으로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옥이면 처음부터 한옥으로 설계되어야 하고 양옥이면 처음부터 양옥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전체적인 통일성이 중요한 것이다.
어쨌든 신은 ‘우주’라는 집을 지었다. 그 우주 건축의 과정, 곧 천지창조의 과정은 신의 자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필연성의 틀로 사전에 정해져 있다. 그것은 신조차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신은 천지창조의 첫째 날 ‘빛이 있으라’ 하고 말하여 빛을 만들었다고 한다. 둘째 날은 궁창(허공)을 만들었으며, 세째 날은 뭍과 바다를 구분하였고, 네째 날은 해와 달과 별을 지었다.
다섯째 날은 새와 물고기를 만들었고, 여섯째 날은 가축과 짐승과 곤충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알다시피 일곱째 날은 휴일로 하여 일을 쉬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순서를 뒤집을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아직 궁창을 만들지 않았는데 그 궁창 속을 날아다닐 새를 만들 수는 없다. 미처 뭍과 바다를 구분하지 않았는데 그 뭍에 깃들어 살 가축과 짐승을 만들 수는 없다.
신은 최초의 날에 ‘빛이 있으라’고 하였다. 왜 빛이 맨 먼저 방문하였을까? 다른 것은 등장했다가 사라질 수 있지만 빛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일관되게 현장을 지켜야만 한다. 밝음이 없는 암흑 속에서 짐승과 곤충과 새를 만들어봤자 그 새와 짐승과 곤충이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연역에는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일정한 규칙이 있다. 병 안의 새를 꺼내지 못함은 이 규칙을 어기려들기 때문이다. 역으로 병 안의 새를 꺼낸다 함은 이 규칙을 찾아낸다는 의미가 된다. 그 질서와 규칙이 곧 구조이다.
(8) 소피스트 제논의 궤변
고등학교 2학년 화학 시간에 잠시 수업을 들어왔던 교생선생님께 들은 이야기다. 익히 알려진 희랍의 소피스트 제논의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달리기 경주’ 패러독스다.
‘발이 빠른 아킬레스가 한 걸음 앞서 출발한 거북이를 이길 수 없다.’
‘쏜 화살은 날아가지 않았다’
이 외에도 둘이 더 있는데 수업 중에는 예의 두 가지 이야기만 들었다. 이 궤변이 또한 하나의 화두가 될만하다. 물론 아킬레스는 실제로 거북이를 추월했다. 발이 빠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추월할 수 있었을까?
이 문제는 1800년대 수학자 칸토어의 무한급수이론으로 해결했다고 하는데 수학적으로는 쉽게 해결될 수 있을지 모르나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있다. 그것은 ‘시간이란 무엇인가?’, 또 ‘운동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다.
쏜 화살이 날아가기 위해서는 무한히 많은 점들을 지나야 한다.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추월하기 위해서는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사이가 무한히 가까운 어떤 점들을 지나야 한다. 여기서 무한의 개념이 문제로 된다.
수학자는 ‘무한’을 정의하는 방법으로 해결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수 천년 동안 수학자들이 이 문제를 풀지 못했던 이유는 그때까지 ‘무한’이라는 개념이 정의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학자의 방식은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이 질문의 본의에서 벗어나 있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양자 사이에서 성립하는 운동의 실체에 대한 조명이다.
구조론이 문제삼는 것은 ‘처음’이다. 즉 어떤 운동 혹은 변화가 있기 위해서는 최초에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이다. 이 점은 수학이 아니라 물리학과 논리학의 방법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이미 이루어진 변화를 전제로 귀납하여 설명하는 것은 의미없다.
연역이어야 한다. 연역은 기왕에 일어난 변화를, 혹은 운동을 계량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무에서 새롭게 시작하여 운동을 유발시키는 문제이다. 즉 어떻게 순수한 무(無)로부터 최초로 운동을 유발시킬 수 있을 것인가이다.
첫 단추의 위치가 어떻게 결정되는가에 따라 나머지 단추의 위치가 이에 연동되어 결정된다. 역으로 나머지 단추의 위치를 통해 첫 단추의 위치를 추론할 수 있다.
실제로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추월했다는 사실은 어떻게든 이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질서를 합리적으로 규율하는 방법으로 최소운동을 성립시켰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그것을 가능케 한 어떤 근원의 질서는 정해져 있다.
무한은 ‘수학적 편의’일 뿐이다. 수학적 방법은 비(比)를 통한 계량의 수단으로 유의미할 뿐이다. 물리세계에 무한은 없다. 모든 것은 유한하다. 존재는 아날로그가 아니라 디지털이다. 그 ‘디지털 1’의 성질이 문제로 된다.
이 문제는 이론물리학에서 ‘빅뱅’ 이전의 조건을 탐색하는 것과 유사하다. 태초에 천지가 창조되기 이전의 시점으로 돌아가서 바라보기다. 아직 시간과 공간이 성립하지 않고 있다. 우주가 성립하기 이전부터 있었던 근원의 질서 말이다.
비유하자면 컴퓨터가 윈도를 구동하기 이전에 일어나는 일 말이다. 컴퓨터의 파워를 켜면 컴퓨터가 최초로 하는 일 말이다.
자동차라면 최초에 배터리의 동력을 사용하여 전기모터로 시동을 건다. 비로소 엔진이 구동된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그 이전에 어떤 일이 있었던가? 배터리의 스위치를 켜주는 일 말이다.
운동을 성립시키는 것은 시공간의 질서다. 시공간은 아날로그가 아니라 디지털이다. 최소공간단위와 최소시간단위를 결정하는 바 최초 ‘디지털 1’의 성질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 이후의 모든 것이 상대적으로 연동되어 결정된다.
이 부분에 대한 구조론의 최종결론은 나중에 재론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이 문제가 구조론의 핵심적인 부분이라는 점만 말하기로 한다.
(9) 연암 박지원의 법고창신
“옛 것을 배우면서도 능히 변화할 수 있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면서도 충분히 법도에 맞을 수 있다.”
‘르네상스’는 서양에서 들어온 말이고 '법고창신(法古創新)'은 연암 박지원의 말로 알려져 있다. 그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다. 서구인들은 희랍의 전성시대를 동경했고 동양인들은 요순시절을 동경했던 것이다.
그런데 서구의 ‘르네상스’는 근사한 사상으로 알려져 있고 동양의 요순시대 타령은 고루하기 짝이 없는 낡은 생각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렇다면 문제가 있다.
요는 이상주의다. 서구에는 희랍시대를 동경한 서구의 이상주의가 있고 우리에겐 요순시대를 동경한 우리의 이상주의가 있다. 이상주의가 있느냐이다. 마땅히 이상주의가 있어야 한다. 이상주의는 소중하다.
틀린 이상주의는 바른 이상주의로 수정할 수 있다. 그러나 원초적으로 이상주의가 없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싹을 틔울 수 있는 씨앗이 없고, 가지쳐 자라날 수 있는 뿌리가 없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어쩌면 나는 이상주의자일 수 있다.
각설하고.. 이상주의가 왜 과거로 회귀하는가이다. 미래는 답은 미래에서 찾아야 한다. 요순시절이 이상적인 시대였다는 생각은 어쩌면 공자의 환상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인민의 반이 노예였던 희랍문명이 알고 본 즉 우리가 상상한 그런 이상적인 세계는 아니었을 수 있다.
그렇다 해서 공자를 추궁할 필요는 없다. 르네상스를 비판할 이유도 없다. 요는 ‘초기조건의 민감성’이다. 어떤 일이든 그렇다. 처음은 단순하다. 처음은 담백하다. 처음은 소박하다. 처음은 순수하다. 중간에서부터 뭔가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 처음의 순수로 되돌려 점검함으로써 오류를 시정할 수 있다. 옛 사람들이 르네상스를 찾고 또 요순시절을 논함이 단순한 과거로의 퇴행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맨 처음의 근본으로 돌아가서 재검토하려는 자세는 여전히 유효하다. 더욱 유의미하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
동양에는 음양사상과 오행사상이 있다. 퇴계의 이원론과 율곡의 일원론이 있다. 사단칠정론도 있다. 주역의 중용사상도 있다. 이들 역시 일정부분 구조론을 담고 있다. 어느 면에서 이들은 실패한 구조론이라 할 것이다.
왜인가? 성경을 처음 쓴 사람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하느님이 첫째 날에 빛을 창조하셨다고 썼다. 왜 빛이 첫째 날이어야 했을까? 구조론의 문제에 부닥친 것이다. 우선순위는 정해져야만 한다.
주역의 핵심부분을 발상한 사람, 음양사상과 오행사상을 최초로 생각해낸 사람, 퇴계와 율곡이 이원론과 일원론을 정립하면서 부닥쳤던 문제들 역시 구조론의 문제였던 것이다. 즉 그들은 모두 동일한 어떤 문제에 직면하였던 것이다.
서구의 4원소설, 뉴튼의 기계론적 세계관, 돌턴의 원자가설 모두 구조론적인 문제에 봉착하고 있으며 또한 나름대로 그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근래의 이론물리학이 직면하고 있는 통일장이론의 문제 또한 마찬가지다.
모태가 없는 사상은 있을 수 없다. 반드시 자궁이 있다. 근원이 있고, 원천이 있으며, 뿌리가 있고, 뿌려진 바 씨앗이 있다. 그러나 구조론은 그 뿌리가 없다. 모태가 없다. 자궁이 없다. 그냥 알에서 깨고 나왔다. 과연 그런가?
아니 그렇지 않다. 나에게 많은 영감을 준 사상들이 있다. 불교철학도, 유교사상도, 헤겔의 변증법도, 린네의 분류법, 다윈의 진화론, 돌턴의 원자가설도 나에게 분명히 영향을 미쳤다. 나는 그 모든 것들에서 조금씩 영향을 받았다.
초등학교 몇 학년 때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루는 ‘쓰기’ 수업 중에 6하원칙을 배웠다. ‘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이다. 그런데 왜 6개이지?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다. 무엇이 하나 빠졌다는 느낌이다.
이 문제에 매우 오랫동안 매달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다. 다만 그것이 반드시 6개여야 한다는 규칙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 이런 의문의 조각조각들이 어느 시점에 퍼즐 맞추기처럼 일제히 들어맞은 것이다.
나는 그러한 의문의 조각, 느낌표와 의문부호가 붙은 아이디어의 조각들을 꽤 많이 수집해놓고 있었다. 때로는 그 조각들을 한곳에 모아서 퍼즐 맞추기를 시도해보곤 하였다.
구조론을 발상하게 한 작은 아이디어의 조각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가지고 있었다. 그 조각들을 얽어 하나의 형태를 만들어 낸 것은 중학교 때다. 확실히 자신감을 가지고 여기에 내 인생을 걸어도 좋다고 생각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그때는 구조론을 연구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둘 생각을 했다. 책이 도움은 되지만 책에는 답이 없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학교수업은 시간낭비에 불과하다. 학교를 자퇴할 생각을 어머니께 말씀드린 일이 있다. 어머니가 우셨기 때문에 일단은 철회했다.
생각하기에 미쳐 있었다. 하루종일 생각만 해도 즐거운 날들이었다. 구조론에 인생을 걸었다. 다른 그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 달이고, 1년이고, 10년이고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은 채 하루종일 생각만 하고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떠났다. 떠나야만 했던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어쨌든 나는 스스로 당분간 사회와 격리되어 있을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것은 아주 감질나는.. 손에 땀을 쥐는.. 지적인 희열의.. 기쁨에 겨워 며칠 밤낮을 잠들지 못하는.. 그러면서 아주 간절한.. 황금의 도시 엘도라도를 발견하고 정글을 빠져나오면서 그려둔 지도를 잊어버린 사람처럼 아주 간절한.
구조론의 기본적인 뼈대는 완성되어 있었으나 자연의 여러 상황에 적용하여 보면 잘 풀리지 않는 몇 가지 의문점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존재론과 인식론의 구분에 대한 문제이다. 연역과 귀납의 구분에 관한 것이다.
연역과 귀납의 순서는 정반대이지만 그 패턴이 비슷하기 때문에 실제에 적용하여 분석함에 있어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일쑤였던 것이었다.
89년경이 아닌가 생각된다. 언어와 문법의 구조에 주목하면서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았다. 거의 완성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한 것을 대학노트 6권에 기록하였다. 대전 근교의 야산 기슭 어느 바위 밑에 비닐봉지로 세 겹이나 싸서 묻어 두었는데 나중에 가보니 아파트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