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普賢行願의 노래] - ⑦ 균여 스님과 보현십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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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평사 보현보살상]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
⑦ 균여 스님과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
균여 스님께서 지으신 보현행원가에
얽힌 이야기를 잠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공부하고는 거리가 먼 탓이 제일 크겠지만(부끌),
더군다나 아주 예전의 일이라서 자료가 많질 않은 것 같습니다.
먼저 무비 스님께서 쓰신 "보현행원품"중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아무래도 잘 알지 못하는 제가 중언부언 떠드는 것보다는
큰 스님이나 학자 분들의 자료를 그대로 옮기는 것이
더욱 좋을 듯하여 이번 "균여 스님"의 "보현행원가"의 소개는
지금까지 처럼 거의 인용으로만 진행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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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의 불교는 전통적으로 화엄불교(華嚴佛敎)입니다.
의상대사가 당나라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의
지엄(智儼) 문하에서 화엄교학을 공부하고 온 후로부터
신라에 화엄학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물론 신라에 『화엄경』이 전래되고
그에 대한 신앙이 행해진 것은 의상 이전의 일입니다.
기록상으로 가장 앞선 화엄승은 자장입니다.
자장은 636년 당나라에 가서 오대산에서 화엄의 진리를 깨달았으며
우리 나라에 온 뒤에 『화엄경』을 펴는 한편
화엄신앙의 하나인 오대산을 이 땅에 옮겨 놓았습니다.
이처럼 의상 이전에도 화엄에 대한 이해가 있었지만
체계적으로 화엄을 널리 편 것은 의상대사이기 때문에
특별히 의상대사를 일러서 ‘해동화엄초조(海東華嚴初祖)’라고 합니다.
이렇게 화엄정신으로 똘똘 뭉쳐진 신라인들은
삼국을 통일하고 이 국토에 화엄을 더욱더 널리 꽃피워 갔습니다.
그러다가 신라의 화엄은 말에 이르러서는
관혜(觀惠)를 중심으로 한 남악(南岳, 지리산)파와
희랑(希朗)을 중심으로 한 북악(北岳, 가야산)파로
나뉘어져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관혜는 후백제의 견훤의 복전이 되고
희랑은 고려 왕건의 후원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 갈등은 무척이나 심하여 고려 통일 이후에도
그 풍조가 쉽게 수그러 들지 않았습니다.
이를 개탄한 균여대사는 전국을 돌며 설득 작업을 벌였습니다.
그 결과 출가자, 재가자 할 것 없이 균여대사의 뜻을 이해하고
오래 된 분파 간의 갈등을 종식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사는 법을 널리 펴기 위하여
어려운 내용의 책이 있으면 반드시 주석을 붙이는 등
항상 일반 대중을 위한 교화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60여권의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무엇보다도 가장 뜻깊은 일이 바로
이 「보현행원품」을 쉽게 외워 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보현행원가(普賢行願歌)’ 11수를 지은 것입니다.
이것은 보현보살의 십대행원을
모든 국민들이 외우기 쉽도록 하기 위하여
그 당시 문자인 이두로 표기한 것입니다.
이 11수의 ‘보현행원가’는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14수의 향가와 더불어 국문학사로도 빼놓을 수 없는 노래이고
원력 또한 대단하였던가 봅니다.
이 노래는 모든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담벽 여기저기에도 써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평군에 사는
나필급간(那必及干)은 3년 동안 병을 앓았는데 약이 없었으나
이 행원가를 부지런히 외웠더니
어느 날 공중에서 축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대는 대성(大聖)의 가력(歌力)을 입어 병이 반드시 나을 것이다.”
그런 뒤에 나필급간은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실로 대단한 자비이고 가피입니다.
이러한 것은 분열되었던 신라 말 이후의 불교를
끝없는 자비심과 보살도로써 새롭게 재무장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 당시 이 노래가 얼마나 좋았던지 최행귀는
이두로 되어 있는 이 ‘보현행원가’를 다시 한문으로 옮기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을 송나라 사신이 보고는
진불(眞佛)의 작품이라고 뵙기를 원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대사의 열반에도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김해 앞바다에 한 이승(異僧)이 나타나길래
그의 이름과 거처를 물었더니 스스로 비바시(毘婆尸)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후삼국은 통일되었지만 불법이 왕성하지 못하므로
전세의 인연을 생각하여 잠시 송악에 머물러
‘여(如)’의 이름을 가지고 법을 폈는데
이제 일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취를 감추었는데,
나중에 계산해 보니 그 날이 바로 균여대사가 입적한 날이라고 합니다.
---------------------무비 스님著 "보현행원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