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센도
하희경
음악영화 <크레센도>를 보러 갔다. 자신은 이미 봤지만, 다시 봐도 좋은 영화라며 표까지 예매해서 부른 문우 덕분이다. 상황이 좋진 않았다. 눈에 말썽이 생겨 안정해야만 한다. 더구나 평소 가까이 하지 않는 클래식음악을 주제로 한 영화라니 지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앞섰다. 하지만 음악에 일자무식이나 다름없는 나를, 클래식의 세계로 안내하고자하는 배려가 고마워 군소리 없이 나갔다. 가기 전에 <크레센도>란 말이 무슨 의미인지 찾아보았다. ‘점점 더 세게’라는 뜻이란다. 뜻을 알고 보니 스스로도 어이가 없다. 초등학생 아니, 유치원생도 알법한 말을 사전을 찾아야하다니 말이다. 내가 진짜 무식하다는 걸 다시 깨달으면서 오늘은 배우는 자세로 영화를 봐야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건반 위에 손가락이 열심히 내달린다. 연주자의 땀방울이 뚝 떨어진다. 앞머리가 흠뻑 젖었다. 하얀 건반과 검은 건반이 쉬지 않고 껑충 거린다. 극장 안이 온통 음표들의 놀이터다. 부드럽게, 경쾌하게, 진중하게, 깊이 있게 각자의 개성대로 춤을 춘다. 바람이 분다. 햇살 아래 반짝이는 연초록이파리들, 빗방울에 젖은 잠자리가 날개를 꼼지락거린다. 바람결을 타고 낯선 향기가 내게로 온다. 점점 더 세게.
올해 나이 18세라는 임윤찬이 이번 경연의 우승자다. 클래식 연주자가 탄생하는 순간을 다큐멘터리로 보여주는 영화에서 최연소 우승자인 그가 웃고 있다. 수줍고 약간은 어눌한 말투로 인터뷰하는 그를 보면서 문득 마음이 고요해진다. ‘하늘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이야기’라는 그의 연주는 과연 문우의 표현대로 뛰어났다. 클래식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내가 흠뻑 빠져들 정도니 말이다. 게다가 그 나이에 그런 연주를 하다니, 심사위원들 말대로 그의 재능은 하늘이 주신 것이 분명하다.
임윤찬과 함께 출연한 사람들 모두 열성적으로 연주한다. 그중 한 사람, 안나 게뉴시네에게 눈길이 갔다. 31세의 임산부로 경연대회에 나온 여자다. 수수한 옷차림에 뱃속에 있는 둘째아이가 아들이라는 말을 듣고 이름을 제리로 짓기로 했다는 그녀. 첫아들인 톰과 둘째아들인 제리를 합치면 ‘톰과 제리’가 된다며 호쾌하게 웃는 그녀가 맘에 들었다. 전 세계에서 온 연주자들이 모인 경연장에서 임신한 몸으로 힘들 텐데 농담까지 할 수 있는 여유가 보기 좋았다. 꾸미지 않은 옷차림과 편한 신발, 활달한 걸음걸이, 장난스럽게 웃어가며 말하다가도 피아노 앞에 앉으면 달라지는 여자. 오늘 나의 수확은 임윤찬의 순수함과 안나 게뉴시네의 도전하는 정신을 만난 것이다.
여전히 클래식음악에 대해선 잘 모른다. 음악이 들리면 순간 빠져들지만 곡명조차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어쩌다 곡명을 들어도 오래 기억하지 못한다. 흔히 말하는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의 음악조차 내게는 남의나라 이야기다. 내게 있어 음악은 도심에서 흔하게 접하는 자동차 소리, 빗소리,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처럼 거리에서 익숙한 소리들, 어찌 보면 소음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들이다. 딱히 노력하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그 소리들이 없는 곳에선 살짝 불안하기까지 할 정도다.
그 중 내가 즐기는 음악을 고른다면 단연 새소리다. 행동반경이 도심이라 다양한 새를 접하지는 못하지만 새소리만 들리면 나도 모르게 발길이 멈춘다. 그리고는 고개를 치켜들고 가로수 사이에 숨어 있는 새를 찾아 연신 두리번거린다. 아쉽게도 쉽게 발견하지는 못한다. 운 좋게 참새 뒤꽁무니라도 보는 날이면 횡재한 것처럼 신이 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해 조수라고 싫어하는 비둘기조차 내게는 다정한 음악이다. 구구구 꾹꾹 하면서 공원 풀밭에서 연신 부리를 쪼아대거나 후드득 날개 펼치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좋은 연주다.
잊을만하면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 수도꼭지에서 톡톡 떨어지는 물방울소리, 가지에서 털썩 땅으로 내려앉는 목련나무이파리의 소리가 좋다. 지금은 곁에 없지만 목쉰 강아지가 컹컹 짖어대던 소리는 다시 듣고 싶은 음악 중 하나이다. 클래식음악은 이런 일상의(자연의) 소리들을 좀 더 차원 높게 표현한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아직 내게는 들리지 않는다. 어쩌면 클래식은 어렵다는,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세계라는 편견이 앞서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문우의 배려로 처음 클래식음악영화를 보았다. 그 세계에서 열정을 다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작은 다짐을 해본다. 이제부터라도 클래식음악을 들어야겠다고. 크레센도라는 단어의 의미처럼 점점 더 세게 클래식음악에 스며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