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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TV를 움직이는 것들
(1) 문화적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TV를 통해 스타와 만난다. 스타라는 존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TV가 도대체 어떻게 움직이며 그 프로그램은 어떤 원칙과
기준에 의해 만들어지는가를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TV의 속성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지나칠 정도로 스타를 숭배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방송사들이 스타를 부각시키는 이유가 시청률 경쟁에 있는 만큼, 우선 시청률에
대해 알아보자.
광고료를 산정하는 기준이 되는 TV시청률 조사를 처음 실시한 나라는
미국이다. 1932년 MIT대학 교수팀이 개발한 라디오 청취율 조사기를 토대로 하여
전문 조사 기관에서 연구한 끝에 1950년 뉴욕에서 처음으로 시청률 조사가
시작되었으며, 1984년부터 피플미터기 라고 하는 장치가 도입되었다.
시청률 조사 기관인 닐센 사의 경우 미국의 2천1백 개 표본 가구에
피플미터기를 설치해놓고 있는데, 닐센 사는 92년에 새로운 조사 방식인 수동
미터 방식 을 개발했다. 피플미터 방식은 조사 대상인 시청자들이 일일이
TV시청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버튼을 눌러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수동
미터 방식은 컴퓨터 영상 인식 에 의해 가족 구성원의 정면 과 측면 얼굴이
미터기에 저장돼 있어 TV만 켜면 미터기가 시청자의 방을 계속 탐지해 시청률을
자동 조사할 수 있다. 그 결과, 사람이 TV를 보고 있는지, 아니면 딴 곳을 보고
있는지 까지 구별해 낼 수 있다.
아직은 피플미터기 에만 의존하는 우리 나라의 방송사들은 억대의 조사료를
주어 가면서 외부 전문 기관에 시청률 조사를 맡기고, 매일 아침 전날의 시청률
조사 결과를 확인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하고 있다. 시청률조사 전문 기관인
MSK는 서울 지역 2백80대의 피플미터기를 설치하고 있는데, 표본 수가 적고
서울에 편중돼 있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우리 방송 프로그램의 내용이 지나치게
서울 중심적인 것도 그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어찌됐거나 중요한 건 시청률이 TV를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이라는 사실이다.
시청률이 낮은 프로그램은 폐지되거나 축소된다. 시청률이 높은 프로그램만이
살아 남을 수 있다. 그래도 되는 것일까? 물론 시청률은 존중해야 할 가치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프로그램의 수명과 내용이 오로지
시청률에 의해서만 결정되어도 괜찮은 것일까? 이 물음을 놓고 아주 오래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뜨거운 논쟁을 벌여 왔다. 그 논쟁의 역사를 살펴보자.
TV화면에 어떤 내용을 내보낼 것인가? 이것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TV가
본격적인 대중 매체로 등장하면서 한번쯤, 아니 이후 영원히 겪게 되는
쟁점이다. 신문에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가? 이 문제는 별로 사회적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신문이 가는 매체는 희소성의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정해진 법률 규정만 지킨다면 누구라도 신문을 제작할 수 있다. 그 반면에, 전파
자원은 사용할 수 있는 양이 제한되어 있다. 즉, 신문은 종이와 인쇄기만 있다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만, 방송은 전파의 속성상 제한된 수의 채널밖에 가질 수
없다는 뜻이다. 그 때문에 TV 프로그램 의 내용과 성격이 늘 뜨거운 사회적
논쟁의 대상이 된다.
케이블TV의 등장으로 인해 채널이 많이 늘어나 전파 자원의 희소성이
극복된다면 TV도 신문처럼 그 내용에 대한 사회적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사회적 간섭의 정도가 약화되기는 하겠지만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TV는 전파 자원의 희소성과는 별도로 활자 매체와 차원을 달리하는
막강한 영향력으로 인해 사회적 간섭으로부터 영원히 완전한 자유를 누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TV에 대한 사회적 간섭의 당위성을 인정한다는 것과 사회적 간섭이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TV에 대한 사회적
간섭은 TV 프로그램 내용의 범위를 설정해 주는 정도의 잠재적 영향력은
행사하고 있다. 하지만 TV프로그램의 구체적인 내용에 이르러서는 무력하기 짝이
없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늘 TV 프로그램의 건전성이
사회적 논의의 대상이 되곤 있지만 그것이 끊임없이 상호적 논의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 자체가 TV에 대한 사회적 간섭에 명백한 한계가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느 정도의 사회적 간섭이 정당화될 수 있으며, 또 어떻게
그 사회적 간섭에 실질적인 구속력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일까? 이건 대단히
까다로운 철학적 문제임에 틀림없다. 우리보다 TV의 역사가 앞선 미국에선 이
문제가 문화적 민주주의 논쟁 으로 발전되어 지금까지 도 시원한 결말을 보지
못하고 있다.
미국 상업 TV의 경영자들은 적어도 1050년대부터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다수 시청자 를 존중하는 편성 정책을 취하였다. 그 결과는 50년대 후반에
극명하게 드러났다. TV를 주로 시청하는 시간대의 프로그램에 성과 폭력에 관한
묘사가 난무하였으며, 대중의 문화적 취향을 하향 평준화시키는 현상이
나타났다. 어떤 기준으로 보든 배우 우수한 프로그램이 다수 시청자를 끌어
모으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었으나, 대체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는
그레샴의 법칙 이 시장 논리를 존중하는 다수 TV 에 적용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러한 다수 TV 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 빗발치자 TV 방송사 경영진과 간부들
은 문화적 민주주의를 내세워 그들의 입장을 옹호했다. 정치적 민주주의가
다수의 의사에 따라 지도자를 선출하고 국가적 중대사를 결정하는 투표제 에
의해 가능하듯이, TV도 문화적 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라 시청률이라는 시청자들의
투표결과에 따라 프로그램의 내용을 결정하는데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는
항변이었다.
그들은 비평가들이 시청자의 수준을 얕잡아보고 있으며, 그런 엘리트주의 가
정치에도 적용된다면 보통 선거 자체를 부정하는 셈이 아니냐고 반문하였다.
문화적 민주주의론 을 역설하는 데에 앞장섰던 CBS-TV의 사장 프랭크스탠턴은
TV에 대한 주된 비판자인 지식인들을 향해 그 들이 문화적 소수자임을 겸허히
인정하고 괜한 독선을 범하지 말라고 충고하였다.
신문 방송학 박사로서 자신의 학문적 배경을 십분 활용한 스탠턴의 문화적
민주주의론 은 얼른 보기엔 제법 그럴듯했으며, 이는 급기야 지식인 사회의 토론
주제로까지 부상했다. 1960년 5월7일 애틀랜타에서 개최된 미국 여론 연구 협회
의 연례 총회를 겸한 [문화적 민주주의에 관한 대토론회]에서는 시청률에 의해
지배되는 다수 TV'에 관해 열띤 공방이 벌어졌다.
당시에 콜럼비아 대학 응용 사회연구소 소장인 사회학자 버나드 베렐손은
[문화적 민주주의에 관한 대토론] 이라는 발제 논문을 통해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제기했다. 대중 매체는 민주적 원칙에 근거하여 대중이 원하는 걸
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윤리적이고 예술적인 원칙에 근거하여 그 누군가가
대중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대중에게 주어야 하는가? 대중 매체는
사람들로 하여금 삶의 목적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하게 끔 만들어야 하는가?
아니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신념들을 지지하고 강화해야 하는가?
이 토론회의 참석자들은 대체로 문화적 민주주의가 대단히 교묘한 기만이라는
데에 동의하였다. 그들은 시청률이 기존 프로그램들 가운데에서의 선택을
나타내는 것일 뿐, 시청자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반영할 수는 없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또, TV라는 매체 자체에 대한 소비 성향으로 인해 수동화 된
시청자들은 자신이 무엇 을 원하는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거나 생각하길
싫어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또, 시청률 조사는 프로그램에 대한 시청자들의 호
불호(like,dislike)'를 묻는 건 아니라는 점 또한 문제삼았다.
다수 TV 에 대한 지식인들의 부정적인 결론은 개혁을 표방하고 나선 케네디
행정주의 방송 규제 기관인 연방 커뮤니케이션 위원회 의 주요지침이 되었다.
이 위원회의 위원장 뉴톤 미노우는 적극적인 방송 규제를 통해 방송 편성의
다양성[diversity]을 실현하고자 했다. 즉, 방송사들은 다수 시청자들이 즐겨
보는 프로그램만 방송할 것이 아니가 소수의 사람이 원하는 종류의 프로그램도
많이 내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다양성 이라는 기념 은 이후 30여 년 간
미국 방송 정책의 핵심적인 단어로 등장하게 되었다.
미노우는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말을 인용하면서, 중국인이
스테이크를 먹지 않고 쌀을 먹는 것은 그들이 스테이크를 먹어 본 적이 없기
때문 이라고 주장했다. 비유 자체는 그다지 적절치 못한 것이었지만 미노우가
강조하고자 했던 시청률의 맹점은 타당한 것이었다. 그건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 는 세이의 법칙(Say's Law)'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 법칙은 적어도
TV시장에선 큰 설득력을 갖고 있다.
방송 시장에선 시청자들의 바람(want)이든 필요(need)든 시청자들의 수요 가
프로그램이라는 공급 을 창출해 낼 수 있는 경로가 원천적으로 차단돼 있다.
시청자들에겐 오로지 일방적인 공급 에 대해 수요 의 양을 결정할 수 있는
여지가 허용되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알고 있거나 생각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미노우가 방송사에 한 요구는 그렇게 무리한 것이 아니었다. 미노우는
신문들도 독자들의 오락성 추구에 영합하는 기사들을 많이 싣고 있지만 그걸
신문 1면에 게재하진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TV도 오락 위주의 프로그램을
편성하더라도 적어도 주 시청 시간대만큼은 오락성보다는 유익성을 기준으로
편성해 달라는 주문이었다. 불론 미노우의 주문은 실현되지 않았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국 TV는 세계에서 가장 대표적인 다수 TV'로서 시청률의 절대적인
지배하에 놓여 있다.
정치적 민주주의를 근거로 한 문화적 민주주의는 확실히 잘못된 비유임에
틀림없다. 보통 선거는 여러 후보들 가운데 한 명밖에 뽑을 수 없기 때문에
다수의 횡포 가 필요악 으로 인정되는 제도이다. 그러나 TV는 결코 그렇지
않다. 다수의 취향에 부응하는 프로그램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필요하고도 정당하지만, 주 시청 시간대의 모든 프로그램을 그 원칙에 다라
편성한다면 모든 시청자가 사회적으로 대표적인 취향하나에 따라야 한다는 논리
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그 취향의 대표성이라는 것도,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공급이 수요를
창조하는 일방적 경로에 따라 형성되었다는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물론,
문화적 민주주의론 에 반대하는 입장에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도대체
시청자들의 필요 를 무슨 근거로 누가 결정할 수 있는가. 그것은 대단히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거니와, 자칫 엘리트들의 취향을 대중에게 강요하는 독선을 범할
위험마저 안고 있다. 따라서 문화적 민주주의는 시청률을 유일 무이한 근거로
삼는 기존의 방식에서 탈피하여 방송사와 시청자들 사이에 다양하고 쌍방적인
커뮤니케이션 채널을 확대하는 새로운 운용 방식에 의해 실천되어야 할 것이다.
(2) TV는 왜 소아병적인가
노예의 소일거리, 무식하고 비참하며 일과 근심 속에서 지칠 대로 지친
인간들의 오락, 아무런 정신 집중도 요구하지 않고 아무런 사고 능력도 전제하지
않는, 가슴에 아무런 광명도 밝혀 주지 않고 또 어느 날엔가는 로스앤젤러스에서
스타가 되겠다는 가소로운 희망이외에는 아무런 희망도 불러일으켜 주지 않는
구경거리.
영화에 대한 뒤아멜의 정의이다. 빌터 벤야민은 그의 논문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 에서 뒤아멜의 영화에 대한 경멸을 인용하면서, 예술은 정신 집중을
요구하는데 반해 대중은 정신 분산을 원한다는 옛날부터 들어 온 개탄 이 갖는
의미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수용자의 정신 집중 여부와 그 정도에 따라 예술과 오락을 구분할 수 있다는
생각은 TV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아무리 시시껄렁한
TV코미디일 망정 그걸 비디오 예술가인 백남준이 요리하여 구경꾼의 정신 집중을
요구한다면 그건 예술일 수 있다. 그 반면에, 아무리 고급스러운 예술 행위일
망정 그것이 정신이 산만한 시청자의 수용 상황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다소
가공되어 브라운관에 나타난다면 그건 오락일 수 있다.
물론 그러한 구분이 전적으로 타당하단 건 아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어떤
매체를 평가할 때에 그 매체가 수용되는 상황을 최대한 감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TV비평은 모든 면에서 영화 비평이나 그 밖의 매체 비평과는 다를
수 밖에 없으며 달라야 한다.
그런 시각을 갖고 TV와 만나보자. 우리는 흔히 우연한 기회에 어떤 프로그램을
시청하다가 유치하다는 생각을 가질 때가 많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일부러 시청할 때엔 그 프로그램이 매우 유치하더라도 그걸 잘
느끼지 못한다. 이미 우리도 유치하게 길들여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TV의 유치함은 PD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프로그램을 만드는가를 알아보면 쉽게
설명이 된다. 그 누구도 드러내서 말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연예 오락 프로그램의
경우 우리 나라 PD 들이 가정하는 시청자의 정신 연령은 대략 중학생 수준이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TV의 어떤 면들이 유치한가를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주 맑은 정신을 갖고 TV를 유심히 시청하게 되면 꼭 저렇게까지
해 가면서 웃어야 하는 건지 회의를 품게 될 것이다.
막연하게나마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TV의 유치함에 대해 호주 머독대학의 존
하틀리 교수는 아주 그럴듯한 논문을 한 편 썼다. 그는 TV의 유치함을 소아주의
라고 부르면서 소아주의야말로 수용자의 존재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보여 주는 증거라고 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꽤 어려운 말인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별 것 아니다. 하틀리의 말을 더 들어보자.
하틀리의 주장에 따르면 시청률을 최대화하고자 하는 TV는 다양한 속성을 가진
거대 집단을 모두 만족시키기 위해 어린애와 같은 구경꾼들 을 상정한다는
것이다. 즉 지적으로 수준이 낮은 프로그램을 만들면 지적 수준이 높은 사람도
볼 수 있지만 그 반대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어떤 방송사에서
수준이 높은 프로그램을 내보낸다면, 그 방송사는 높은 시청률을 올릴 수 없는
위험을 안게 되거나 시청률이 어떻게 나올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불확실성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방송사에서는 TV를 시청하는 수용자가 그 실제와는
무관하게 아이들과 같은 특성과 속성을 갖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다소 차원이 다르기는 하지만, TV의 소아주의를 부추긴다는 점에서는 방송을
규제하는 기관도 예외가 아니다. 늘 TV가 가족 매체 임을 강조하는 규제 기관은
시청자를 무조건 아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시청자는
사람도 아니고 성인도 아니며 오로지 부모 또는 조부모 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는 아이들에 의해 지배되는 거대한 가족인 셈이다. TV의 성이나 폭력 묘사와
관련해 그런 원칙이 적용되는 건 이해한다 치더라도, 문제는 그런 가정이
오락에까지 적용되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본말의 전도가 일어난다. TV는
성인이 아니라 아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결국, 방송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시청자는 허구 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비단 연예 오락
프로그램에만 한정되는게 아니다. 언론의 수용자도 그런 운명에 처해 있다.
일반적으로 언론인들은 언론 수용자에 대해 너무 모른다. 그들은 그들 자신,
동료, 상관들을 염두해 두고 일을 한다. 자신에게 흥미 있고 중요한 것이라고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데, 미국의 언론인들은 노동 계급의 수를 과소
평가한다든가 과거 소련의 언론인들은 독자의 교육 수준을 과대 평가하고 여성의
수를 과소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우리 나라 언론인들이 수용자에 대해 무지하거나 자기 중심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 중 최악의 것을 들라면 아마도 교육 관련 보도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중앙 언론사 기자들의 절대 다수가 세칭 일류 대학
출신이기 때문에 그들이 입시에 대해 보도할 때 일류 대학을 중심으로
보도함으로써 입시 경쟁을 지나치게 부추기고 왜곡시키는 경향이 있다.
하틀리의 소아주의론 은 그 자체로서도 재미있고 의미 있지만 그것이
수용자의 존재 에 관해 시사하는 바는 더욱 의미 심장하다. 그러나 하틀리의
소아주의론 은 광고의 영향을 외면했다는 점에서 다소의 한계를 안고 있다
하겠다. TV가 유치해지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야말로 맹목적인 청춘 예찬 에
빠져 있는 광고라고 하는 환경 의 영향 때문이라는 점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광고주들은 성인들의 습관을 바꾸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젊은이들을 이용한다. 즉, 광고는 청춘 예찬을 통해 성인들로 하여금
시대에 뒤떨어지고 있다는 불안감을 주입시킨 후, 젊은이들이 즐겨 쓰는 상품을
똑같이 소비하면 젊어질 수 있다는 암시를 끊임없이 쏟아 붓는다.
그리하여 성인들은 새로운 시대에 무엇이 옳고 적절한가를 판단하기 위해
젊은이들을 준거 집단으로 삼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1920년대의 한 역사가
예견한 젊은이에 의한 지배 가 광고를 통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광고 속의
젊은이들은 어떠한가? 그들의 유치함은 청춘이라는 후광을 얻어 미화되고 그것은
알게 모르게 프로그램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어찌됐거나 하틀리의 주장을 벤야민 식으로 달리 설명한다면 TV프로듀서들은
시청자의 정신 집중 상태를 최악의 것 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30초 안에
터지지 않으면 채널은 돌아간다. 고 믿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프로듀서들의
그런 믿음은 시청률에 의해 옳은 것으로 나타나고 그래서 더욱 강화된다.
게다가 리모컨까지 가세하고 있다. 미국이나 일본에서 오랫동안 조사된 결과에
따르면, 리모컨의 보급률과 높은 시청률을 얻는 프로그램의 비율은 반비례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데, 인기 있는 장수 프로그램의 시청시간을 비교해 보면 방송 시간의 거의
전부에 해당하는 49분 이상을 리모컨이 얼마 되지 않았던 1984년에는 약
25%였으나, 리모컨이 꽤 보급된 88년에는 약 17%로 줄어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34%에서 26%로 크게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시청률 30% 이상의 프로그램도
83년에는 9백 28개나 됐지만 90년에는 3백 49개로 줄어들었다.
조금만 지루하다 싶으면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는 시청자를 대상으로 해서
무언가 진지한 이야기를 해보겠다는 건 이만저만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신세대 시청자들 가운데에 그런 식의 시청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 그들을 가르켜
리모컨 세대 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을 정도다.
그런 리모컨 세대 때문에 광고 효과도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광고를 하는 동안 리모컨을 이용해 다른 채널로 도망가 버리니 프로그램의
앞뒤에 광고를 내는 스폰서로선 이만저만 손해가 아니다. 그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광고주와 광고 제작자들은 빠른 속도감과 이미지의 쾌락을 중심으로 한
더욱 자본 집약적이고 테크놀로지 집약적인 광고를 개발하고 있으며, 이는
프로그램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비디오도 리모컨의 영역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요즘 신세대들은 비디오를
보다가도 재미없는 부분이 나온다 싶으면 리모컨으로 그 부분을 빨리 돌려
버리며, 어느 가전 제품 회사는 그런 신세대를 겨냥해 아예 2배로 빨리 돌릴 수
있는 VTR을 만들어 팔고 있다.
TV프로듀서들이 리모컨의 그런 영향력을 모를 리 없다. 그래서 그들은 가능한
프로그램 전체에 걸쳐서 팽팽한 속도감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쓰며, 프로그램을
가능한 한 여러 코너로 짧게 나누고, 수용자들에게 티끌만큼의 정신 집중도
요구하지 않겠다는 자세로 제작에 임한다. 일부 오락 프로그램의 경우엔
진행자가 아예 채널을 돌리지 말아 달라고 사정하기도 한다.
TV프로듀서들이 시청자들의 조급성을 염두해 두는 건 당연하고 필요한 일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채널간 경쟁에 집착하는 TV프로듀서들이 그 조급성을 과대
평가하는 경향이 있으며, 시청자들은 다시 그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TV프로듀서들이 본의 아니게 시청자들의 조급성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고
있다.
TV의 소아병적인 특성은 그런 문제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 TV프로듀서들이
프로그램 제작에 임하기 전에 상정하는 가상 현실 과 실제의 시청 상황의
괴리를 가능한 한 좁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이 분야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가 절실히 요청된다 하겠다. 프로듀서들에 대한 도덕적 훈계만으로는 개선의
여지가 별로 없을 것이다.
(3) TV는 경제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나
1696년 미국의 방송계에는 아주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당시 방송사들간
경쟁에서 선두를 달리던 CBS-TV가 가장 시청률이 높은 프로그램들을 일시에
폐지시켰다. 왜 그랬을까? 당시 CBS-TV는 그 프로그램들이 주로 소득이 낮은
계층, 노인층 및 농촌 지역 시청자들에게 큰 인기를 얻어 있다는 점을
우려하였다. 그런 종류의 시청자들은 광고되는 상품을 살 수 있는 구매력이 낮아
광고주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거니와 CBS-TV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광고주들은 자기 회사 제품을 살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시청하는 TV프로그램의 스폰서가 되기를 원한다. 어떤 TV프로그램을 아무리 많은
사람이 시청한다 하더라도 그 사람들의 경제적 수준이 낮다면 그런 사람들을
상대로 아무리 광고를 많이 해도 제품이 많이 팔리지 않을 것이다. CBS-TV는
그런 점을 걱정해, 구매력이 큰 중산층 이상 의 시청자들이 좋아할 프로그램을
방송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방송사나 신문사를 팔고 사는 일이 자주 이루어지고 있는 미국에서는 파는
값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그 방송사나 신문사가 이미 확보하고 있는
시청자나 독자의 경제적 수준이다. 그래서 판매 상담이 이루어 질 때엔 시청자나
독자의 생활 수준을 통계적으로 분석한 자료가 제시되며 그것을 중심으로 하여
상담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판매 상담이 이루어 질 때엔 시청자나 독자의 생활
수준을 통계적으로 분석한 자료가 제시되며 그것을 중심으로 하여 상담이
이루어진다. 그런 경우 판매되는 건 방송사나 신문사의 건물과 시설뿐만이
아니다. 시청자나 독자도 같이 판매된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수용자들이
상품 으로서 판매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론을 가리켜 수용자 상품론 이라고 한다.
캐나다의 커뮤니케이션 학자인 댈러스 스마이드가 제시한 이 이론에 따르면,
대중 매체를 이용하는 건 일종의 경제적 거래인 셈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TV를
시청하는 건 책을 사서 읽는 행위와는 크게 다른 것이다. 출판사는 책을
독자에게 판 것이지만, TV 방송사는 수용자를 광고주에게 파는 것이 된다
우리는 TV를 시청할 때에 TV의 중심적인 것은 프로그램이고 광고는 주변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프로그램을 위해 광고가 있는 것이지, 광고를 위해
프로그램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수용자 상품론 에 따르면,
중심적인 것은 광고이며 프로그램은 그 광고를 시청하게끔 사람들을 유인하기
위한 미끼에 지나지 않는다.
광고주들은 무조건 어떤 프로그램의 제작비용을 대는 것이 아니라 그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사람들의 수와 생활 수준을 파악하고 그에 따라 돈을 대는
것이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하자면 광고주에게 판매된 것은
방송시간이라기보다는 TV를 시청하는 사람들인 셈이다.
물론 그러한 수용자 상품론 을 그대로 다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스마 이드는
대중 매체가 사람들의 정신과 행동에 미치는 영향에만 지나치게 관심을 기울이는
연구 경향을 비판하고, 대중 매체가 경제적으로 자본주의와 어떤 관계를 맺고
이는가 하는 것이 주된 연구 주제가 되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수용자 상품론 을
제기하였으며, 이 이론을 둘러싸고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론이 분분하다.
수용자 상품론 에 어떤 문제가 있든, 우리가 그 이론에서 안전하게 얻을 수
있는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은 광고가 대중 매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다. 신문을 예로 들어 이야기해 보자. 신문사가 벌어들이는 모든 수입
가운데 광고료가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될까? 신문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80에서 90%에 이른다. 일부 신문들의 경우엔 구독료 수입이 보급소를 운영하는
비용에도 미치지 못해 광고 의존도가 1백% 가 넘는다. 사실 신문의 구독료
수입은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신문 1부의 가격은 종이 값에도 미치지
못한다. 광고 수입은 신문사의 생존을 위해 그만큼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광고주들은 광고를 할 신문을 선택할 때에 독자의 수는 물론 독자의
경제적 수준까지 고려한다. 어느 신문을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본다 하더라도 그
사람들의 경제적 수준이 대체적으로 낮다면 광고주는 그런 신문에 광고하기를
원치 않는다. 중산층 이상의 독자들을 많이 확보해야 광고주들은 보도의 내용도
중산층 이상의 독자 위주로 하게 된다.
우리는 그런 증거를 신문 지면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신문엔
백화점에 관한 생활 정보는 매우 많아도 재래 시장에 관한 정보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신문이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도 중산층 이상의 독자를 염두에
두는 경제적 계산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신문들이 앞다투어 광고주들을
대상으로 하여 우리 신문은 중산층 이상의 독자가 절대적으로 많습니다. 하고
알리는 것도 광고 수입을 가능한 한 많이 얻기 위한 노력의 일부이다.
TV의 경제적 측면에서 광고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전자 산업이다. TV에 관한
논의에서 전자 산업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TV는
소프트웨어(프로그램)의 측면에서만 다루어질 뿐, 그 하드웨어(TV 수신기와 방송
시설)와 하드웨어가 소프트웨어에 미치는 영향이 직접적이라기보다는 간접적이고
미시적이라기보다는 거시적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TV는 하드웨어가 먼저 나오고 소프트웨어는 하드웨어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즉, TV 수신기를 팔기 위해
방송 프로그램을 내보냈다는 뜻이다. 적어도 미국에서 초기의 방송사들은 모두
전자 산업이 소유하고 있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물론 지금은 상황이
다소 다르긴 하지만, 지금도 TV에 미치는 전자 산업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영향력은 계속되고 있다. 일본의 전자 업체들이 미국의 할리우드 에 진출하여
영화사를 매입하는 것도 궁극적으로 그들이 생산하는 영상 매체의 하드웨어를
판매하기 위한 목적에서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그 어느 나라 못지 않게 TV 하드웨어가 소프트웨어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다. 그렇다고 해서 TV 하드웨어가 프로그램의 형식과 내용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뜻은 아니다. 하드웨어, 즉, TV 수신기의 보급률 및
보급 속도가 어느 정도이며 TV 수신기의 보유와 활용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가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프로그램에 어떤 형태로든 그리고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전자 산업은 88년 17조 원대의 생산과 157억 달러의 수출을 기록함으로써 우리
나라의 최대 산업으로 등장했다. 총 수출액에서 점하는 비율 도 26.8%를
기록하면서 만년 수출 1위를 점해 온 섬유를 제치고 게 1의 수출 산업으로
부상했다. 물론 TV는 이제 더 이상 우리 전자 산업의 주종 상품은 아니다.
89년의 예를 보더라도 전자 산업의 생산액 18조8천억 원 가운데 컬러 TV와 VCR이
점하는 비중은 각각 1조3천억 원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1조3천억 원이라는
생산액도 그 자체로선 매우 큰 것이며, 또 전자 산업이 오늘날과 가튼 대
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초기의 주된 원동력은 TV수신기 생산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더욱이 TV와 VCR과 같은 관련 전자 제품은 앞으로도 계속 전자 산업의
희망이다. 전자 산업은 TV수신기의 대형화와 다양화를 통해 새로운 시장을
끊임없이 개척하고 있으며, TV하드웨어의 새로운 혁명이라 할CATV, HDTV, 위성
TV에 전자 산업의 미래를 걸고 있다. 적어도 지난 10년간 가전 업체들이 우리
나라 광고주들 가운데 가장 많은 광고비를 지출해 온 기업들이라는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또 가전 업체들이 모든 영상 매체가 기술적으로 통합되는
추세에 발맞춰 생산 및 마케팅 전략을 수립하고 실천함에 따라 TV 소프트웨어는
하드웨어와 더욱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될 것이 틀림없다.
TV 프로그램의 큰 틀을 결정하는 것은 TV 하드웨어다. 이는 컬러 TV 가
프로그램에 미친 직 간접적 영향을 생각해 보면 분명하다. 현재 전자 산업이
추진하고 있는 화면의 대형화와 고품질화도 궁극적으론 프로그램의 장르와 제작
방식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예컨대, 방송사는 TV 화면이 더욱 커지고
선명해짐에 따라 그런 화면에 잘 어울리는 프로그램을 개발해 야 할 것이고
세트의 제작에도 큰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또 전자 산업이 1가구 2TV' 그리고
더 나아가 1 개인당 1 TV'를 마케팅 목표로 설정하고 추진해 나간다면, 그로
인한 수용자의 TV를 혼자서 보느냐 여러 사람이 보느냐 하는 건 제작자들이
프로그램을 만들 때에 고려해야 할 매우 중요한 정보이다.
물론 그러한 영향은 구체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대중의 일상적 삶에서 가재 도구로서의 TV가 과연 무엇이며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 하는 정체성 규명이 1 차적으로 전자 산업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만약
전자 산업이 소형 포터블 TV의 생산과 마케팅에 전력을 기울이고 나선다면, 그건
전자 산업의 막강한 힘에 의해 우리의 새로운 TV문화로 정착될 수 있으며
프로그램 제작자들은 그런 현실을 결코 무시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또 만약 전자
산업이 TV의 오디오 기능에 주력한다면 일정 부분 프로그램은 그것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그런 계속적인 영향력이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 나라에선 전자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차원에서 TV수신기의 폭발적인 보급이 이루어졌으며, 또 그것이 수용자의
TV에 대한 적응 기간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우리의 TV문화에 미친 영향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전자 산업은 TV 연구에서 소홀히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 그리고 전자 산업이 적어도 결과적으로 TV방송을 판매
촉진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만큼 전자 산업은 TV방송의 발전에
기여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원칙을 분명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국가적 특혜를 입어 성장했으면서도 지금까지 전자 산업이 방송 문화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한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만약에 있다면 광고를 위해 역대의
돈을 주고 방송 연예인들을 CF모델로 기용함으로써 그들의 생활 안정에 기여한
정도가 전수다. 전자 산업이 이익의 일정 부분을 가칭 방송 발전 기금 으로
출연케 한다 든가하는 방안에 대해 이제 진지하게 검토해 볼 때이다.
(4) TV 프로그램 포맷은 어떻게 결정되나
TV가 처음 발명되었을 때에 TV 프로그램의 포맷까지 함께 발명되었던 건
아니다. 사람들은 TV라고 하는 새로운 매체를 통해 과연 무엇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인지 그 가능성에 막연한 기대를 걸면서도 현실적으로 과연 어떤 프로그램
포맷을 만들어 내야 할 것인지 무척 곤혹스러워했다.
그러나 우리 나라처럼 TV라고 하는 하드웨어와 더불어 그 소프트웨어까지
수입해 온 나라에서는 방송인들이 프로그램 포맷을 놓고 고민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외국에서 이미 형성된 프로그램 포맷을 그대로 수입해 한국적인 요소를
가미하는 정도로 끝나고 말았다.
그런 불행한 전통은 지금까지 계속돼 우리 TV는 외국 TV의 프로그램 포맷을
모방하기에 바쁘다. 불론 그런 모방이 무조건 잘못됐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어떤
한 프로그램 포맷이 탄생되기까지 방송사는 오랜 시행 착오를 거치면서 막대한
비용을 투자한다. 때문에 그렇게 해서 탄생된 프로그램 포맷을 모방하는 건
대단히 경제적인 행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모방 행위가 우리
방송인들이 스스로 프로그램 포맷을 창조해낼 수 있는 가능성을 막아 버린다는
데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문화에 적합한 프로그램 포맷의 탄생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된다.
어찌됐거나 오늘날 세계적으로 획일화된 프로그램 포맷의 원조라 할 미국
TV프로그램 포맷의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건 사회적 압력과 경제적
고려라고 하는 걸 분명히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물론 프로그램 포맷의 형성엔
시청자들의 피드백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지만 그 영향에 우선하는 것이
프로그램 제작의 경제성이다. 미국에서 생성된 프로그램 포맷의 결정 배경을 몇
가지 살펴보기로 하자.
(1) 시추에이션 코미디-미국에서 시추에이션 코미디가 등장한 건
1950년이었다. 시추에이션 코미디는 제작비가 저렴하며 스토리, 배경, 등장
인물의 일관성 유지로 시청자들을 일정 기간 동안 계속해서 붙들어 맬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복잡한 성격을 가진 등장 인물은 끊임없는 반복을 생명으로
삼는 시추에이션 코미디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시추에이션 코미디의 등장
인물들은 한결같이 매우 단순한 성격의 소유자로 묘사되었다.
초기 TV의 제작 능력을 감안한다면 시추에이션 코미디의 탄생은 필요악
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충분한 제작 여건이 갖추어진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시추에이션 코미디가 여전히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건 이해를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려고 하는 TV 시청자들의 게으름과 집중을 하기가 어려운 TV시청
상황이기 때문이다.
(2) 호화 버라이어티 쇼-흔히 스펙터큘러(spectaculars)로 불리는 호화
버라이어티 쇼가 미국 TV에 등장한 건 1954년이었다. 그 주도적 인물은 NBC-TV의
사장 팻 위버였다. 미국의 방송 규제 기관인 연방 커뮤니케이션 위원회는
1953년CBS방식을 미국 컬러 TV 시스템으로 인정했던 3년전 결정을 번복하고
RCA-NTSC방식을 최종 승인하였다.
NBC-TV는 모회사인 RCA의 컬러 TV 수상기 판매 촉진을 위해 흑백 TV와 컬러
TV의 차이를 드라마틱하게 보여 줄 수 있는 프로그램을 방영할 필요가 있었으며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호화 버라이어티 쇼였다.
(3) 뉴스의 앵커 시스템-1950년대까지의 TV 뉴스는 단지 오락 프로그램을
방영하기 위한 비용 정도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방송사들은 뉴스 프로그램의
제작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즉, 방송사들이 방송이 지나치게 오락성을
추구한다는 사회적 비판에 우리는 뉴스도 내보낸다. 는 식으로 대응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1959년에 터진 이른바 퀴즈 쇼 스캔들 은 미국의 상업 방송 체제에
일대 위기를 가져 왔다. 당시 큰 인기를 누리던 퀴즈 프로그램들의 대부분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에 정부와 모든 국민이 분노하였으며 사회 일각에서는 민영
상업 방송을 없애고 공영화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챈 방송사들은 방송의 공공성을 강화하겠다는 반성의
표현으로 뉴스 프로그램의 양을 배로 늘렸으며, 이 추세는 뉴스 프로그램을
강조한 케네디 행정부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그 결과 방송사들은 뉴스
프로그램에서도 이익을 보아야 할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으며, 이는 결국
앵커제라고 하는 스타 시스템의 도입으로 귀결되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앵커맨이 스타 노릇을 하면서부터 뉴스 프로그램의 시청률은 크게 올랐다.
(4) TV용 영화-1960년대 중반 이전까지만 해도 TV와 할리우드는 매우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3대 TV 네트워크 방송사들 가운데 만년 3위에
머물고 있던 ABC-TV는 꼴지 신세를 벗어나고자 할리우드와 손을 잡고 경쟁사인
CBS-TV, NBC-TV에 대응하는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ABC-TV는 66년 최초로 대형 영화 콰이강의 다리 를 방영했으며 영화사들과
계약을 맺고 TV용 영화(made-for-TV movies)'의 제작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성과가 좋자 다른 네트워크들도 할리우드와 공생 관계를 맺기에 이르렀으며,
이는 TV에 영화적 요소를 유입 및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5) 드라마의 리얼리즘-1960년대의 TV드라마는 대부분 현실 도피적이고 황당
무계한 내용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CBS-TV는,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1969년 매우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던 그런 종류의 드라마를 일시에 폐지시켰다.
즉 광고주는 무조건 시청률이 높은 프로그램을 원하는게 아니라 시청자들
가운데서 구매력이 높은 도시 중산층이 점하는 비율을 문제삼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결과 70년대부터는 구매력이 높은 계층을 대상으로 하여 리얼리즘적인
요소가 강한 드라마가 붐을 이루었다. 주로 20대, 30대 시청자들은 겨냥하여
제작된 그런 드라마들은 현실적인 인물, 성숙한 주제, 솔직한 대화 등의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또 그러한 붐에 편승하여 의사나 변호사 등 전문 직업인들의
삶을 소재로 삼는 직업 드라마 들도 많이 생겨났다.
(6)드라마 스핀오프(spinoff)-1970년대에 들어 치열해진 채널간 드라마의
경쟁은 매우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의 등장 인물들을 따로 떼어내
독립적인 드라마를 만드는 이른바 스핀오프(spinoff)를 낳게 되었다. 우리말로
새끼 치기 로 번역될 수 있는 스핀오프는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의 시청자들을
그대로 물려받고 싶어하는 방송사의 상업적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예컨대,
MBC-TV가 이미 끝난 드라마인 마지막 승부 의 성공이 아쉬워 그 드라마의
일부를 소재로 삼아 새로운 드라마를 만든다면 그걸 스핀오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7)가족용 드라마-우리 나라에서도 방영된 바 있는 월튼네 사람들 , 초원의
집 , 스타스키와 허치 , 6백만불의 사나이 , 원더 우먼 등과 같은 가족용
프로그램이나 어린이용 프로그램은 자연스런 시장 기능에 의해선 결코 생겨날 수
없는 프로그램들이었다.
이 프로그램들은 1974년 TV영화에 나온 폭력 장면을 모방해 청소년들이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사건이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빚자, 그 비난의 화살을 피하고자
방송사들이 자발적으로 저녁 7시부터 9시까지를 가족 시청 시간 으로 정했기
때문에 제작될 수 있었다. 즉, 그 시간대에는 어린이들도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내보내야 했으므로 방송사들은 불가피하게 가족용 드라마를 만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8)미니 시리즈-1977년 1월 23일부터 30일까지 ABC-TV에 의해 방영된 [뿌리]로
그 위력을 떨친 미니시리즈는 시청률 경쟁의 산물이었다. 미국에서는 TV광고의
요금이 1년에 한 번 내지 두 번 실시하는 1주일 재지 2주일간의 시청률 조사
결과에 근거해 매겨진다. 그래서 방송사들은 그 기간에 집중적으로 높은
시청률을 올릴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으며, 이는 결국
미니시리즈의 탄생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ABC-TV는 [뿌리]의 대성공에 힘입어
사상최초로 시청률 제1위의 네트워크 방송사로 부상할 수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프로그램의 포맷이 나
흐름은 제작자의 순수한 의도와는 무관하게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처음에 어떤 배경과 이유에서 생겨난 것이며 그것을 계속 고집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 끊임없이 회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세계에서 방송의 상업성이 가장 강한 미국에선 지금도 프로그램의 생산성 을
따지는 경향이 배우 강하다. 프로그램에 들인 비용에 비해 이익이 얼마나
남았는가를 철저하게 계산하는 것이다. 심지어 뉴스 프로그램 마저 전문 경영
컨설턴트 회사를 고용하여 기자의 취재 행위에 대해 일일이 시간을 재고 비용을
계산해 뉴스 아이템당 원가를 산출해 내고, 그 결과에 따라 뉴스의 포맷과 제작
방식을 변경시키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우리의 경우엔 방송사 프로그램의 수익성을 기준으로 삼는 원가 계산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것보다는 현재의 프로그램 포맷과 제작 방식이 과연
유익성과 오락성을 동시에 보장하는 데에 얼마나 유효한지를 따지고 또 그
기준에 따가 새로운 포맷을 개발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런 종류의 시도는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단지
제작자들의 막연한 느낌과 경험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 느낌과 경험은
매우 정확한 편이지만, 완전히 새로운 포맷을 개발해 내는 데엔 명백한 한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포맷을 개발해 낼 때 가장 중요한 건 왕성한 실험 정신이다. 그러나
아직도 방송 프로그램의 제작을 방송사가 독점하고 있는 우리의 상황에서 전국
방송을 대상으로 하여 실험을 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거니와 또 방송사
내에 그런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지도 않다. 따라서 방송사들은 편성 기능을
확대하고 강화하는 조직적 개혁을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제작비가 비교적 저렴한 일부 교양 프로그램의 경우 실험은 지방방송에서
왕성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 나라의 지방 방송은 서울의
방송에 비해 더 소심하며 더 소극적이다. 물론 여기엔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지만, 지방 방송의 실험 정신을 진작시켜야 한다는 데엔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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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문화적 민주주의를 말하다가
커뮤니케이션이 소셜 시스템을 다 잡아먹어 버리는 살모사 형태가 이루어지고 있는 세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