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이 (당신을 만나봤으면 합니다 허영엽) p220-222
본당에서 사목할 때의 일이다. 구역에서 반장으로 열심히 활동하던 한 자매님이 암 진단을 받고 수술 날짜를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밝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본당 신자들에게 사랑받던 분이어서 더욱 마음이 아팠다. 그분께 병자성사를 주려고 찾아가자 자매님은 바쁜 시간을 뺏었다며 무척 미안해했다. 병색이 완연했고 목소리에도 힘이 없었다. 그렇지만 미소를 띠려고 노력하는 흔적이 역력했다. 나는 다른 환자들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낮은 목소리로 병자성사를 드렸다. 성사가 끝난 후 주위 환자분들에게 휴식을 방해해서 미안하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옆 침대의 환자가 그 자매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에요. 저분이 성경도 읽어 주고 얼마나 열심히 기도해 주는지 몰라요. 저는 하느님도 모르고 기도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정말 큰 위로와 힘을 얻었어요. 참고마운 분이에요." 자매님은 자신도 아픈 와중에 다른 이를 위해 기도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감동을 받았고, 또 놀라기도 하였다. 내가 어려울 때 다른 이를 돕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매님은 승강기를 타는 곳까지 우리를 배웅해 주며 나지막이 이야기했다. "신부님, 제가 몸은 아프지만 병자성사를 받으니 마음은 행복해요. 그런데 가족들과 구역 · 반 일이 걱정되네요."
나는 목이 메어 제대로 대답도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얼마 후 그분은 사랑하는 남편과 자녀들을 남겨 두고 세상을 떠났다. 결국 병원에서 나눈 짧은 인사가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장례미사 내내 마지막까지 다른이들을 걱정하던 그 모습이 떠올랐다.
인디언 말로 친구를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누군가의 슬픔에 그저 말로 위로를 건넬 수는 있지만 그 슬픔을 함께하고 대신 짊어지기란 쉽지 않다. 특히 내가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을 때는 더 더욱 그렇다. 그래서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에 비로소 다른 이의 고통을 이해하기도 한다.
우리가 다른 이의 아픔을 조금씩 나누어 짊어지다 보면 무겁게 짓눌리던 슬픔이 조금은 가볍게 느껴지지 않을까. 다른 이의 슬픔을 등에 짊어지고 함께하고자 했던 그 자매님은 진정한 '친구'의 모습이었다.
* 세기의 명마 씨비스킷 (따뜻한 편지 2277)
2003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씨비스킷(Seabiscuit)'의 줄거리입니다.
중년의 백만장자가 경마에 관심을 갖게 되며 조련사를 통해 말과 기수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합니다. 이 부탁으로 조련사는 경마장을 찾았고 그때 한 말과 기수를 발견합니다. 그곳엔 우수한 혈통을 이어받은 말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비정한 마주들의 손을 옮겨 다니면서 죽도록 맞고 자란 기억에 미친 말처럼 날뛰어서 어느 사람도 관심을 두지 않는 '씨비스킷'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쪽에선 여러 사람을 상대로 혼자 싸우고 있는 젊은 기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복싱을 시작했지만 경기 중 불의의 사고로 한쪽 눈을 다치며 실명했습니다. 세상에 더 잃을 것 없던 그는 싸움꾼처럼 반항하고 있었습니다.
조련사는 씨비스킷과 젊은 기수를 백만장자에게 소개했고 이렇게 네 사람은 한 팀이 되었습니다. 비슷한 듯 닮은 씨비스킷과 기수는 서로의 상처를 통해 깊이 교감했습니다. 그리고 노련한 조련사의 훈련이 더해져 씨비스킷은 각종 대회에서 우승을 휩쓸기 시작했습니다. 계속된 우승으로 서부 최고의 말로 인정받았고 동부 최고의 말과의 대결을 펼치게 됩니다. 이 대회를 앞두고 훈련 중에 기수가 낙마하면서 다리를 크게 다쳐 입원하게 됐지만 씨비스킷은 이 대회에서도 우승합니다.
그러나 이후 씨비스킷은 경주 도중 발목 근육이 파열되어 더 이상 뛸 수 없게 되었고 고민 끝에 백만장자는 씨비스킷과 깊은 교감을 했던 젊은 기수에게 보내줍니다.
이 둘은 극적인 상봉을 하고 재기를 꿈꾸며 재활과 훈련을 다시 시작합니다.
그런데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일들이 서서히 믿기 힘든 현실로 일어났습니다.
걷기만 하던 씨비스킷이 느린 걸음이지만 경보 수준으로 걷기 시작하고, 이어서 겅중겅중 걷더니 마침내 잡풀이 무성한 언덕을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노력 끝에 재기에 성공해 씨비스킷과 기수는 보란 듯이 경주에 참여해 질주합니다.
씨비스킷은 그 시대 절망과 좌절에 빠진 사람들에게 하나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리고 영화 속의 대사는 힘든 시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한 번의 상처가 있다고 인생을 포기해선 안 됩니다."
# 오늘의 명언
희망은 어둠 속에서 시작된다.
일어나 옳은 일을 하려 할 때, 고집스러운 희망이 시작된다.
새벽은 올 것이다. 기다리고 보고 일하라. 포기하지 말라.
– 앤 라모트 –
* 오늘의 묵상 (220615)
전통적으로 유다인들은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조건으로 자선, 기도, 단식이라는 세 가지 종교적 신심 행위를 강조하였습니다. 자선, 기도, 단식은 하느님과 형제들 그리고 나 자신과도 화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이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거룩한 자녀로 거듭날 수 있는 은총을 얻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선, 기도, 단식을 말씀하시면서 이를 행할 때에 제자들이 갖추어야 하는 올바른 자세를 깨우쳐 주십니다. 여기서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내용은 먼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사람들에게서 칭찬과 존경을 받으려고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하는 이들을 ‘위선자’에 빗대며 경고하십니다. 또한 그들은 받을 상을 현세에서 이미 다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반면에 남몰래 자선을 베풀고, 골방에 홀로 숨어 아버지께 기도하며, 단식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않고 행하는 이들은 장차 하느님 아버지께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자선, 기도, 단식뿐만 아니라 오늘 하루 있었던 작은 노력과 실천들을 어떠한 지향으로 행하였는지 곰곰이 성찰해 봅시다. 그것이 사람들에게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것은 아니었는지, 그래서 세상의 영예와 존경과 보상을 바라지는 않았는지. 아니면 오직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해 드리고자 하였는지, 그래서 하느님께서 갚아 주실 영원한 선물에 마음을 두었는지. 우리 삶의 방향이 사람들의 시선과 세상의 영예를 향할 때,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점점 멀어질지도 모릅니다.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여 하늘 나라의 상을 받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겠습니다.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대구가톨릭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