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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장이 있는 케산의 본진의 모습. 비행장은 육로가 막힌 케산에 있어 동맥이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날아온 수송기에서 공급한 물자와 병력은 케산 본진을 지키기 위한 외곽초소에 전달되었다.
웨스트모얼랜드 대장은 강력한 화력지원이 가능하였기 때문에 케산 기지의 방어에 자신이 있었다. 여기에다 적의 이동을 탐지할 수 있는 전자감시 장비가 가용되었기 때문에 더욱 자신이 있었다. 그는 정보수집 수단과 화력지원 수단을 통합하여 화력을 적을 집중공격하는 작전을 슬램(SLAM, Seeking, Locating, Annihilating and Monitering) 작전이라고 명명하였다.
슬램 작전이란 수색 정찰, 정찰기, 적 무선 감청, 전자 감시장비 등 모든 정보수집 수단에 의해 수집된 정보는 가용한 포병과 해, 공군, 해병대의 항공기, B-52 등의 화력지원 수단과 긴밀히 협조되어 표적별로 화력 지원 수단을 할당하여 24시간 포격과 폭격을 가능케 함으로써 화력으로 적을 선제공격하는 것이다.
미 해병 26연대장 론즈(David E. Lownds) 대령(케산 기지 방어 지휘관)은 방어 중에도 과감하게 기지 밖으로 수색 정찰대를 운용하여 정보를 수집하려고 노력하였다. 한번은 적의 매복조와 조우하여 피해를 입자 증원 병력을 투입하다가 이 증원부대도 적이 상투적으로 쓰는 역매복에 걸려 25명이 전사하기도 하였다.
미 해병 26연대장 론즈 대령
라오스의 호치민 통로 차단 작전에 운용되었던 정찰 항공기(적의 인원이나 장비의 이동을 탐지할 수 있는 적외선 장비나 레이다 장착)가 운용되었고 어쿠시드(Acousid, 음향 및 진동탐지기)가 항공기 및 헬기로 케산 기지와 감제고지 주위의 적 접근로에 투하되었다. 이 어쿠시드에서 적의 이동에 따라 발산되는 전파는 케산 기지 레이다에 포착되고 이 제원은 컴퓨터에 입력되어 표적 제원이 산출되었다.
어쿠시드 전자 발신기
이렇게 수집된 표적은 화력지원 협조소(FSCC)에서 표적에 적합한 가용 화력지원 수단별로 할당되어 즉각 화력공격을 실시하였다.
정확한 지원에 자신을 얻은 미 해병대는 우군진지 배치선으로부터 360m 거리까지 근접 항공지원을 요청하였다. B-52 폭격도 900m 거리까지 요청하였다(B-52 폭격시 안전거리는 3㎞이며, 지상통제 레이다가 설치된 후에는 1.5㎞까지 단축되었음). 이렇게 가까운 거리까지 폭격 시에는 전 벙커가 몹시 뒤흔들렸으나 연대장은 그렇다고 벙커가 무너졌거나 우군의 부상은 하나도 없었다고 TV 인터뷰에서 호언하였다. B-52의 폭격 장면을 기지에서 목격한 미 해병 3사단장 톰킨스(Rathvon McC. Tompkins) 소장은 B-52 폭격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미 해병 3사단장 톰킨스 소장
“비행기는 보이지도 않고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갑자기 천지가 진동하면서 흙더미, 나뭇가지 같은 것들이 하늘로 4~500m 나 솟아올랐다. 곧 이어 또 천지가 진동하였다. 멀리 10여명의 북베트남군이 비틀거리며 도망치는 것이 보였다. 곧 이어 그들은 또 한 번 천지가 진동하여 솟아오르는 흙더미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이 폭격은 마치 아무런 이유도 없이 지구 한 구텅이가 폭파되어 버리는 것 같았다.”
한 주민은 자기가 케산 근처의 북베트남군 보급로 상에 수 백구의 북베트남군 시체가 수집되어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미군에게 제보하였다. 2월 9일 북베트남군의 공격으로 랑베이(Lang Vei)가 점령당하자 미군은 이 일대의 몽타냐(산악부족)와 라오스에서 피난한 소수민족 6,000명을 캄로(Cam Lo)로 후송하였다. 작전제한 요소는 제거되어 무제한으로 케산 일대에 화력공격을 할 수 있었으나 미 언론은 비인도적인 처사라고 웨스트모얼랜드를 비난하였다.
북베트남군의 랑베이 기지 공격도
케산 전투는 77일 동안 전투가 계속되었다. 소강상태가 계속된 날짜도 많았으나 전투 간 일일 평균 야포 2,100발, 근접항공지원 300쇼티 이상, B-52 폭격 45쇼티, 폭탄 투하량 1,600톤 등의 화력이 지원되었다. 북베트남군은 일일 평균 150발의 포격을 가하였고 일일 최고는 1,300여발이었다. 미 해병은 적의 포격에 익숙해져 음향 탐지기에서 포 발사음이 청취되면 기지에 경고를 내려 20여초 후에 습관적으로 엄폐하곤 하였다.
북베트남군은 공격다운 공격을 번번이 하지도 못하였다. 미군은 적의 공격징후가 나타나면 즉각 경고를 하여 전투배치를 완료하고 가용 화력을 총 동원하여 징후가 있는 지역을 화력으로 무력화시켜 버렸다. 웨스트모얼랜드는 이와 같은 SLAM 작전으로 북베트남군의 1개 연대가 공격을 준비하고 기동을 개시하면 연대병력의 반 이상을 화력으로 살상하여 북베트남군의 공격을 사전에 저지해 버렸다고 호언하였다. 악천후도 레이다 통제로 극복되어 전천후 항공지원이 가능하였기 때문에 호언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북베트남군의 공격은 2월 7일과 8일, 2월 29일 두 차례 있었다. 아무리 정교한 전자장비도 100% 믿을 수는 없는 것이며, 적의 역방책도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적의 공격에 대비하여 미 해병대는 적 접근로에 화력지원 계획을 수립하여 진지에 접근하기 전에 격멸하도록 계획하였다.
이 계획은 북베트남군의 공격선두가 소총 유효사거리 내에 들어오면 전 화력이 동시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105㎜와 155㎜ 곡사포 3개 포대가 기지 쪽을 제외한 3면에 대해서 집중사격을 가하면서 점점 내부로 사격을 전이하고 나머지 105㎜ 1개 포대는 내부에서 전후로 사격을 하며, 기지 방향으로 개방된 곳에 나타나는 표적은 보병화력으로 제압한다. 케산 기지 밖에서 지원하는 175㎜ 평사포 2개 포대는 측면에서 내부로 점점 사격을 전이하고, B-52를 포함한 항공화력은 레이다의 통제를 받으면서 원거리 지역을 맹타하여 북베트남군의 예비대를 무력화시키면서 기지방향으로 압축을 가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화력권 내에 들어와 있는 북베트남군을 화력으로 격멸해 버린다는 것이다.
미 해병대는 적의 사기를 저하시키기 위해서 저격수를 운용하였다. 은밀한 곳에서 조준 망원경을 소총에 장착한 저격수는 적이 보이는 대로 사격을 가하였다. 그러자 북베트남군도 저격수를 운용하기 시작하여 어떤 때는 10여 명씩 부상당하기도 하였다.
케산 기지의 저격수
디엔 비엔 푸에서와 같이 북베트남군들이 땅굴을 팔 가능성이 있어 탐지반을 보내어 정밀탐사를 계속하였으나 결국 발견된 것은 북베트남군들이 기지 방향으로 교통호를 구축하면서 접근해 오는 것뿐이었다.
케산 기지에 대한 공중보급은 전투 간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였다. 더구나 화력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많은 탄약을 보급해 주어야만 했고 그 양은 1일 약 150톤이었다. 다행히 북베트남들은 기지 옆으로 흐르는 조그만 하천을 그대로 두어 미 해병대는 하천 물을 사용할 수 있었다. 물론 북베트남군도 그 물을 사용하여야 했을 것이다. 헬기에 의한 보급은 적의 대공사격으로 헬기의 피해가 속출하였고 보급량이 너무 적었다. 그러나 주위 감제고지의 병력에 대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헬기로 보급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전투 간 미 해병의 헬기 피해는 파괴 17대, 파손 35대나 되었다.
미 해병의 CH-46 씨 나이트의 헬기가 적의 공격을 받고 추락하고 있다. 3명의 승무원은 화상을 입었고 1명의 승무원과 12명의 해병대는 사망를 했다.
북베트남의 공격이 계속되던 1968년 미군 제 1공중강습 부대가 케산의 해병대 기지에 탄약을 공수하는 장면
기지에 대한 보급은 미 공군 책임 하에 C-130, C-7, C-123 고정익 항공기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항공기가 착륙하여 하역하는 동안 적의 포격으로 항공기가 피해를 입기 때문에 어떻게 신속하게 보급품을 하역하느냐가 연구되었다.
먼저 저공 투하방법이었다. 다낭(Da Nang) 보급창에서 2000파운드(907㎏)를 한 파레트(Pallet)로 하여 충격에 견딜 수 있도록 특수포장을 하고 낙하산을 부착하였다. 지상에는 투하지대(Drop Zone)을 만들어 놓고 항공기가 일정한 고도와 속도로 진입하면서 레이다 통제에 의하여 화물을 투하하였다. 한 순간의 착오는 활주로를 파손하거나 기지외곽에 떨어지고, 방어진지 상의 교통호까지 굴러가 피해를 줄 수 있는 것이다. 1명의 병사가 벙커 내에서 파레트에 깔려 순직하기도 하였다. 이 방법은 가장 많이 사용되어 600회 보급을 하였다.
케산에서 저공으로 화물을 투하하는 수송기
보급품을 낙하산으로 투하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이 방법은 풍향과 풍속에 따라 부정확하며 대량보급을 할 수 없으며 적에게 낙하지점이 빤히 노출되기 때문에 회수 간 적의 사격이나 포격을 당하는 단점이 있어 시험 보급에 그쳤다.
케산 기지에 공수되는 보급물자
또 한 가지 방법은 지상 근접하역 방법이었다. 항공기가 지상에 근접 비행 중에 뒤 해치(Hatch)를 개방하면서 파레트에 부착한 낙하산을 개방하면 프로펠라의 후류에 의해서 항공기에 적재된 파레트가 밖으로 유출되어 수 미터 전방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항공기가 정지함이 없이 파레트를 유출하여 적의 포화에 노출되는 시간을 최소화하고 화물의 파손을 방지하면서 정확한 위치에 하역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은 무거운 보급품이 활주로를 손상시켜 57회 운용되었다.
전투가 소강상태에 있을 때는 활주로에 정상적으로 착륙하여 신속히 하역하는 방법을 사용하였고 그 횟수는 460회였다. 77일 동안 보급물량은 110,000톤이었다. 전투중 미군 항공기의 피해가 많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최신 과학기술을 동원한 전장 감시체제와 엄청난 화력공격에도 불구하고 북베트남군의 대공화기가 미군 항공기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것이다. 2월 11일 최초로 수송기 C-130이 착륙 중 피격되어 불길에 휩싸인 채 착륙을 강행하여 승무원 8명이 구조되고 6명은 전사하였다. 전투 중 미 항공기 피해는 C-123 3대, C-130 1대, A-4 1대, F-4 1대였다.
두 동강 나는 미 수송기 모습
불타는 해병 수송기... 케산의 비행장은 포위가 좁혀지면서 북베트남군의 장거리 포대의 사정권에 들어갔다. 수송기가 착륙하려하면 포탄이 비오듯 쏟아졌고 운이 나쁜 기체 몇 대가 이렇게 불타 올랐다. 결국 케산에 진입하는 기체들은 비행장을 활주하며 수송물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바로 이륙하였고 그나마도 곧 중단되어 결국 낙하산으로 투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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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시 공중보급은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