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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동래 읍내장에서 출발한 오시게장은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서서히 외곽으로 밀려나 현재는 부산 금정구 노포동에 자리잡은 미등록시장으로 존재하고 있지만, 여전히 사고파는 물건 속에서 사람과 사람 간 인정이 흐르는 곳이다. |
- 동래 읍내장이 시초
- 일제 강점기, 상설시장 들어서자
- 부곡동, 구서동으로
- 민원 탓에 노포동 이전
- 대형마트·백화점은 규칙과 질서만이 존재
- 장터 다양한 질서에서 고립된 현대인 情 얻어
- 주요 이용자는 노년층
- 지하철로 쉽게 접근, 여가·소비공간 역할
- 영세상인에겐 삶의 터전, 사회적 안전망 기능도
오시게 장날이다.
오시게장은 2, 7일에 열리는 5일장이다.
부산의 시장은 등록된 것만 217개 정도며 그 수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미등록시장들도 꽤 된다.
등록되지 않은 장들은 최근 아파트 주변에 서는 장들이 대부분이지만, 오시게장처럼 오래전부터 열리던
장도 있다.
과거부터 열리던 구포장 같은 오일장들은 지역의 상주인구가 많아지고 거래량이 증대함에 따라
대부분 상설 시장화 되었지만, 오시게장은 여전히 미등록시장으로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
■ 동래시장 원조, 밀리고 밀려 노포동으로...
1970년대 오시게장 풍경. |
원래 오시게장은 조선 후기에는 동래 읍내장으로
지금의 동래시장 자리에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상설 동래시장이 등장하면서 부곡동에서 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상인들이 옮겨가 노변에 전을 펼치면서
지금의 오시게장이 되었다고 한다.
'오시게'라는 이름은 당시 마을 이름에서 유래했는데, 까마귀가 많이
사는 까막고개 주변에 있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1972년 무렵 부곡동으로 이전한 오시게장은 1982년 지하철 구서동역 주변으로 이전하였다.
하지만 주민 민원으로 당국과 마찰을 빚다가, 현 위치인 노포동으로 이전해 1994년 9월 27일 개장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행정당국의 허가가 나지 않아 단속과 영업제재로 갈등을 겪는 등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다.
지금은 상인 130여 명이 장터를 지키고 있는데, 50, 60대가 대부분이고 70, 80대와 40대도 조금 있다고 한다.
오시게장은 부산 시내에 있으면서도 전형적인 시골 5일장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일반 재래시장에서 볼 수 있는 농수산물, 의류, 신발류, 주방용품, 약재, 간이음식, 침구류 같은 것들뿐만 아니라, 시골장에서나 볼 수 있는 강아지, 오리, 닭 같은 살아있는 가금류들도 볼 수 있다.
즉석에서 말린 고추를 빻아주고 펑 튀기를 해주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취
급되는 농산물 대부분은 직접 농사를 지어서 나온 것들이지만, 일부는 시골 가서 물건을 걷어 와 팔거나
수입한 것을 취급하기도 한다.
이곳에 가면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과거의 기억들과 대면하게 된다.
장터 한 쪽 양말 파는 곳에서 흥정이 벌어진다.
"마, 두 개 5000원에 주이소."
"안 됩니더."
"마 그래해 주이소."
"아이고 마, 그라이소. 날도 춥은데."
싸거나 비싸거나 손님들은 무슨 지켜야 할 의례처럼 깎아달라는 말을 한다.
장사꾼들도 으레 하는 말쯤으로 받아들이는 듯하다.
하지만 흥정이 벌어지면 결국은 값이 깎이거나 덤이 주어진다.
때로는 흥정 없이 주어지는 인심 좋은 덤도 있다.
"이거 한 소쿠리 주세요."
나물을 담는 손이 한 줌을 더 집어준다.
"이거 팔다 하나 남은 긴데 안 팔리네, 가아가 국 끼리 무우라."
국화빵 1000원어치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할머니에게, "어머이, 이거 드시고 계시이소."
기다리면서 먹으라고 한 개, 주문한 국화빵을 담다가
"모양이 영 그거해서 이건 그냥"
모양이 찌그러졌다고 한 개 더 준다.
하나 더 달라는 실랑이가 없어도 이유를 만들어 하나씩 더 주는 덤. 그것이 상술이고 아니고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추위 속의 기다림을 잊게 하는 따뜻한 정,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지 않고서는 만들어낼 수 없는 풍경이다.
이렇게 주어진 덤은 획일화한 가격의 규칙을 넘는 융통성이 발휘된 것으로, 상거래를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라는 관계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 덤을 통해 단골이 생긴다.
■ 주고받는 흥정에서 인정이 살아나고
이달 초 김장 시즌을 맞아 시민들이 오시게장에서 붉은고추를 둘러보고 있는 모습. 국제신문DB |
마트나 백화점에는 흥정하고 협상하는 사람들의 풍경이 없다.
구매자는 상품 뒤에 숨은 판매자가 일방적으로 제시하는 가격을
선택하거나 거부할 수 있을 뿐이다.
장에서 한 움큼 더 쥐여주는 '덤'이나 '흥정'은
마트나 백화점에서 '저울, 20% 세일, 1+1'처럼 모두 숫자로 대체된다.
정해진 가격, 평등한 서비스, 명확한 계산 같은 균질화된 규칙과
질서만이 존재한다.
틈 없는 질서에 따라 움직이는 곳에서는 조금의 흥정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단순하고 명쾌해 보인다.
그러나 장은 다르다.
그 나름대로 질서가 있지만 언제나 변화 가능한 틈이 존재한다.
사람의 만남을 통한 상거래라는 특성상, 서로의 입장을 헤아려보고
조율하는 기회가 주어진다.
그래서 상황에 따른 융통성이 존재하며 특정 개인에게 베풀어지는
혜택과 신뢰를 전제로 한 배려가 있다.
하지만 명확하고 균질화된 질서에 익숙한 사람들은 오히려
장터에서 만나는 다양한 질서를 부담스러워 한다.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는 타인과의 흥정 자체가 피곤한 일이다.
가격이 정해진 백화점이나 마트의 물건을 구매하는 것이 더 믿을 수 있고 편안하다.
구태여 상대방 입장을 고려하면서 흥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명쾌함은 아이러니하게도 고립된 현대인들의 태생적 갈망인 정을 대신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장은 지역인들의 삶의 모습을 담고 있다고 한다.
주거문화의 변화, 생업과 여가 활동 같은 삶의 리듬의 변화는 장보기에도 영향을 끼쳤다.
바쁜 일상 속에 퇴근 후 장보기를 하거나 일주일 단위로 한꺼번에 장을 봐야 하는 도시의 젊은 층들에게, 일찍
문을 닫고 걸어서 가야 하는 장은 불편한 곳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젊은 층들은 주차시설과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진 대형마트를 주로 이용한다.
오시게장은 이러한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현대화와 도시화에 밀려 이곳저곳 장터를 옮겨야만 했던 오시게장의 이력은, 주요 이용자들이 노년층이라는
점과도 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오시게장에 특히 노년층이 많은 이유 중의 하나는 장터가 노포동역 근처라는 공간적 특성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급속한 노령화 사회로 접어들고 있지만, 이에 따른 노년층의 일자리나 여가공간의 확보 같은
사회적 장치는 미비하다.
마땅히 갈 곳 없는 노인들은 무료승차권으로 갈 수 있는 역 주변이나 공원 등에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지하철역 근처에서 열리는 오시게장은, 이런 점에서 노인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다.
젊은 층과 달리 '그램으로 물건 값 환산하기, 혼자 상품 정보 파악하기'가 낯선 노년층에게, 오시게장은
편안한 소비공간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장에서 비슷한 처지의 노인들을 만나 이야기꽃을 피우며 시간을 보내는 것은, 외로움을 위로 받고 삶의 활기를 찾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오시게장은 소외된 노년층에게는 일종의 해방구이다.
■ 영세상인들 삶의 터전, 햇볕 좀 들었으면
오시게장은 삶의 터전이다.
오시게 상인들은 20, 30여 년 동안 장터를 근거로 삶을 영위해 왔다.
그들은 가게를 얻을 수도, 농작물 판로를 개척할 수도 없을 정도로 영세하다.
기껏해야 오일장마다 다니면서 장사를 하는 게 고작이다.
하지만 스스로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이제 장터에 그만 나오면 안 되느냐는 말에
"집에서 쉴 형편이 안 돼. 우리가 버리 묵어야 하는데"라는 이상호 씨(78)의 말처럼, 장은 여전히 그들의 생계유지를 위한 터전이다.
이들에게는 인근 주민들의 민원이 들어오고 장터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말이, 거대자본의 백화점이나 마트가 재래시장을 잠식한다는 이야기보다 더 가까운 게 현실이다.
최근 침체한 재래시장을 살리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를 위해 시설을 현대화하고 편의시설을 확충하자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물리적인 처방보다 더욱 근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장이 가진 의미, 즉 장과 연관된 인간 삶의 문제를 읽어 낼 수 있는 시각의 전환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시게장은 인간의 다양한 삶의 질서를 체험하는 공간이며 협상과 소통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또 노년층에게는 여가와 소비공간을 제공하는 한편 영세상인들의 삶의 터전이 되어 우리 사회의 주변부를 보듬는 사회적 안전망의 기능을 하기도 한다.
요즘 아파트 주변에 새로운 장들이 많이 들어서고 있다고 한다.
균질화한 도시의 삶에 지친 현대인들이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한다는 의미는 아닐까?
차윤정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교수·문학박사
※ 공동기획 :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로컬리티의인문학연구단
※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