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 지향성과 인간애의 시/김재홍(평론가, 경희대학교 교수) --조병화 전집 9권(학원사,1988)에서 부분 발췌
시인 편운 조병화(1921~2003), 그는 1949년 시집《버리고 싶은 유산》으로 데뷔한 이래 오늘날까지 한국 시단에서 가장 친근감 있는 시인의 한 사람으로 성가를 유지해 왔다. 그의 시가 한때의 유행으로 끝나지 않고 수십 년간 지속적으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의 시가 인생이라는 크고 어려운 주제를 탐구하면서도 그것을 평이한 비유와 소박한 어법으로 노래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시가 지닌 연약하고. 잊혀지고, 착한 것들에 대한 연민과 애수의 마음은 상처받은 영혼들에게 나름대로의 따뜻한 감동과 위안을 던져 준다고 할 것이다. 조병화의 시의 오랜 역정에서 드러나는 특징을 중심으로 살펴볼 때 그의 시는 사랑의 시, 이별과 애수의 시, 긍정과 달관의 시, 어머니와 고향의 시, 갈망과 보헤미안의 시, 인간애의 시, 고독과 허무의 시 등으로 요약할 수도 있으리라. 그만큼 조병화의 시는 인간주의, 낭만주의, 순응주의, 영원주의에 그 정신적 기반을 두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우리가 그의 시에 쉽게 친화할 수 있는 것도 실상은 이러한 정신이 쉽고 간결한 표현 속에 무르녹아 있기 때문인 것이다. 어느 면에서 만남과 헤어짐은 조병화 시학의 소재이며 제재이고. 동시에 주제가 된다고 할 만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그의 시가 존재론으로서의 인생 탐구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만큼 비관적 낭만주의의 세계관에 침윤되어 있다는 사실을 설명해 주는 것일 수 있다. 아울러 그의 시에는 자유와 평화에 대한 동경과 지향이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다.
자유, 그것은 자기를 살 줄 하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적막한 희열, 그걸 말하는 거다 -<자유> 전문 단적으로 뽑아 본 이 시만 하더라도 자유와 평화 지향성이 선명히 드러난다. 그렇지만 그의 자유와 평화는 피의 냄새가 배어 있는 적극적․투쟁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수동적․옹호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이 특징이다. 다시 말해서 착하고 마음 약한 그의 천성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따뜻하면서도 쓸쓸한 것으로서의 자유와 평화에의 갈망이 그의 시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남으로써 그의 시는 인간적인 친근감을 유발한다고 할 것이다. 아울러 이 시집에서도 ‘달에 비쳐오르는 어머님의 큰 얼굴을/ 이렇게, 먼 곳에서 보고만 있습니다// 고향처럼/ 절벽에서’(시 <어머님이 고향처럼>에서) 라는 시에서 볼 수 있듯이 모성 지향성이 강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어머니를 향한 마음이란 현실에서 단절을 느끼면서 영원을 지향하는 것임을 물론이라 하겠다. 30시집《외로운 혼자들》은 첫 시집《버리고 싶은 유산》(1949)이래 40년 가까이 활동해온 시작 생활의 한 결산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앞에서 살펴 본 모성지향성이 죽음 길들이기와 하나의 화해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목숨은 이승에 단 램프 아직은 어머님이 주신 기름이 남아 너를 볼 수가 있다
불빛이 밝은 만큼 뚜렷이 불빛이 강한 만큼 따뜻이 불빛이 퍼진 만큼 넓게 어둠을 헤치며
아직은 어머님이 주신 기름이 남아 멀리서나마, 이렇게 까마득히 멀리서나마 그냥 너를 저리도록 그리워할 수가 있다
간단없는 거센 바람 속에 영원처럼 -<이승에 단 램프> 전문
이 시의 핵심은 모성 지향성이며 죽음의 길들이기라 할 수 있다. 어머니는 현실의 어둠을 헤쳐나가게 해 주는 원동력이며 구원의 등불이고, 나아가서 영원에로 인도해 주는 촉매가 된다. 어머니에게서 생명을 받아 이 세상에 태어났듯이 다시 이승을 떠나면 어머니의 세계로 돌아가게 된다는 인식이다. 아울러 이 시에 등장하는 ‘너’는 영원한 그리움과 갈망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바람과 어둠으로 가득 찬 현실 또는 이승에서 빛을 던져주는 생명의 원천이자 실존의 한 거울인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이 시는 이승과 저승을 함께 바라보면서 ‘어머니’와 ‘너’라는 상징을 통해서 구원을 갈망하고 영원에 이르기를 소망하는 간절한 기도가 담겨져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어머니를 통한 죽음과의 화해 또는 죽음 길들이기의 안간힘이 제시된 것은 이미 조병화의 시가 또 하나의 원숙기를 넘어서 정리기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고 하겠다. 따라서 조병화의 시는 더욱 단독자 의식 또는 고독과 허무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밤 2시경 잠이 깨어 불을 켜면 온 세상 보이는 거, 들리는 거 나 혼자다
이렇게 철저하게 갇혀 있을 수가 있을까
첩첩한 어둠의 바다 -<혼자라는 거>에서
이들 두 편에서 쉽게 느낄 수 있는 것은 생의 고독과 허무에 대한 뼈저린 자각이며 슬픔이다. 어쩌면 이러한 싯귀 속에는 절대 고독과 절대 허무로서의 죽음에 대한 깊은 두려움과 함께 탄식이 깃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조병화의 시는 저승 쪽으로 한 다가가서 죽음과의 친화 또는 죽음 길들이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마침내는 이러한 절대 고독과 절대 허무로서의 죽음이 단지 자기 것만이 아닌 모든 인류의 것으로 보편성을 지니고 된다. 모든 인간은 단독자로 태어나서 지상 위에서 공동체를 형성하며 혼자의 외로움을 앓는 가운데 단독자로서 죽어 간다. 시집《외로운 혼자들》에는 바로 이러한 단독자로서 인간의 허무와 절망이 하나의 성숙한 깊이를 획득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바로 이러한 단독자로서의 보편적인 운명 공동체 의식이 마침내 인류애의 모습을 지니게 된다고 할 수 있다.
타는 대륙에, 끝없는 사막에, 햇볕에, 모랫바람에
검은 젖에 매달린 말라붙은 목숨 달랑거리며, 달랑거리며 여자는 굷주린 배에서도 애를 난다
아, 치욕스러운, 이 쾌락이여 -<아프리카 기아 풍경> 전문
이 시에는 인간 조건으로서의 생존과 본능이 빚어 내는 갈등과 아픔이 제시되어 있다고 하겠다. 그것은 아프리카의 기아 풍경이지만 실상 모든 인류의 모습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단독자 의식이 공동체 의식으로 확대되는 면모를 보여 준 것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변모는 조병화의 시가 보다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는 하나의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 분명하다. 특히《나귀의 눈물》에서부터 두드러지게 시작한 이러한 공동체적 인간애의 발견은 조병화의 시가 보다 깊이 있는 인류애의 차원으로 완숙해 가는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이해된다. 지금까지 간략히 살펴본 것처럼 조병화의 시는 대체로 인간주의․낭만주의를 정신의 기저로 하면서 고독과 허무라고 하는 인간의 본원성을 탐구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고 하겠다. 그의 시가 오랫동안 많은 독자들에게 친근감을 던져 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시가 이러한 인간 본원성의 문제를 다루면서도 소박하고 쉬운 표현으로 진솔하게 정감을 드러내려 노력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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