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내용 |
1919년 3·1운동 이후에 중국 운남군관학교(雲南軍官學校)를 졸업하였다. 1925년부터 정의부(正義府)에서 활동하였다. 그가 활동한 정의부는 1924년 11월 25일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등 8개 단체대표 25명이 참가한 가운데 길림(吉林)에서 조직되었다. 정의부는 조직되자 곧 헌장과 선언을 발표하고 아울러 중앙행정위원으로 이 탁·오동진(吳東振)·현정경(玄正卿)·김이대(金履大)·윤덕보(尹德甫)·김용대(金容大)·이진산(李震山)·김형식(金衡植)·이청천(李靑天) 등을 선임하여 조직을 완료하였다.또한 정의부를 끌고 나갈 분과위원도 선임하였는데, 자치분과위원 이진산·맹철호(孟喆鎬)·최명수(崔明洙), 군사분과위원 이장녕(李章寧)·조성환(曺成煥)·김 철(金鐵), 교육분과위원 이창범(李昌範)·고활신(高豁信)·김동삼(金東三), 재정분과위원 김 호(金虎)·윤덕보·승 진(承震), 생계분과위원 박정조(朴正祚)·김정제(金定濟)·백남준(白南俊) 등이었다. 아울러 부령(府令)으로 명칭공포식, 창립기념일, 기원연호(紀元年號), 공농제도(公農制度), 행정위원회 규칙, 칭호법, 기관보 및 교과서 발간, 행정위원회 결의사항 등을 공포하였다.김원국이 활동한 정의부는 중앙본부를 처음에는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두고 참의부(參議府)의 세력권인 관전현(寬甸縣)·집안현(輯安縣)·환인현(桓仁縣)·통화현(通化縣) 등 4개 현의 일부를 제외한 지역에 10개의 지방총관소(地方總管所)를 설치하였다. 정의부는 이후 본부를 유하현 삼원보에서 화전(樺甸), 길림(吉林)의 신안둔(新安屯), 반석(磐石) 등으로 옮기면서 1926년 말경에는 17개 지방총관소를 설치하고 봉천성(奉天省)과 길림성(吉林省)에 살고 있는 한인 1만 7천여 호, 8만 7천 명을 관할하였다.정의부는 1924년 조직 이후부터 1925년 말까지는 자치활동에, 1926년 초 군민대표회의가 조직되어 무장파가 득세하였을 때는 군사활동을, 1926년 말 다시 민정(民政)으로 이양되었을 때부터 1929년 3월 해체될 때까지는 자치활동에 좀더 비중을 두었다.김원국이 참여한 정의부는 조직 당시부터 자치활동에 비중을 두었다. 그러므로 정의부에서는 실업증진, 교육·선전활동, 재정기반의 확대 등에 일찍부터 관심을 기울였다. 먼저 정의부의 식산흥업 부분에 대하여 알아보면, 정의부는 흥업실업사를 설립하여 경농과 정미업을 개시하였고, 중국 당국과의 협상을 통하여 동포의 농사자금 마련과 농사의 지도, 장려에 힘썼다. 뿐만 아니라 농민조합과 같은 민간단체인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설치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교육에 있어서도 초등교육을 의무화하여 각 마을마다 소학교를 세웠으며, 중등교육을 위하여 흥경현 왕청문(興京縣 旺淸門)에 화흥중학교(化興中學校), 유하현 삼원보에 동명중학교(東明中學校), 길림성 화전현 성내(城內)에 화성의숙(華成義塾), 유하현 왕청문에 남만주학원(南滿洲學院) 등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특히 정의부의 이러한 교육은 중국동북정권이 신교육령을 제정 반포하여 재만한인들에게 중국본위의 교육을 요구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점이 주목된다.정의부에서는 선전활동을 위하여 잡지와 신문도 간행하여 재만동포의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1926년 9월에는 선전기관으로서 대동민보사를 설치하고 정의부의 기관지로서 「대동민보(大東民報)」를, 1926년 9월 15일부터 발행하였다. 아울러 정의부에서는 대동민보사 발행으로 1927년 1월 1일부터 『젼우』라는 국한문 혼용의 잡지도 간행하였다.정의부는 중앙행정위원회에 군사부를 두고 사령관 아래 중대와 소대를 두었다. 이들 군사부는 일본육사 출신의 이청천 또는 대한제국 군대 출신의 김창환(金昌煥), 그리고 오동진 등의 지휘를 받았으며, 정이형(鄭伊衡)·문학빈(文學彬)·양세봉(梁世奉) 등 평안도 출신들이 주로 중대장과 소대장의 직책을 맡았다.김원국도 참여한 정의부의 군대활동은 국내에서의 군자금 모집활동, 독립선전공작, 주구 암살, 일본 관리의 사살, 적기관 방화공작 등이었다. 한편 정의부는 부내의 모든 장정에 대하여 의무병제를 실시하였으며, 상비군으로서는 8개 중대와 민경대(民警隊)를 두었고, 1927년에는 700명 이상의 병력을 가지고 모젤과 브로우닝 권총 그리고 소총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한편 농촌에는 군사보급회를 설립하여 모든 장정과 재향군인들에게도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이처럼 1920년대 중반 남만주지역에서 활발히 대일투쟁을 전개하던 정의부에서 김원국은 1925년에는 의용군 제6중대 제2소대장으로 활동하면서 통화현(通化縣) 쾌대모자(快大帽子)에서 친일파 신한철(申漢哲)을 사살하고, 친일단체인 상조계(相助契)를 토벌한 후, 1926년 9월 14일 대원 서상진(徐尙眞)·김용호(金龍浩)·심영준(沈永俊) 등과 함께 중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