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만제 정치건(1825~1875)
-번역:시인,수필가 인수 정용하
*출처:회최고(문집)
빈하(瀕下)라는 사람은 성은 이씨(李氏)요, 이름은 문근(文根)이며, 시호(詩號:시인의 아호)를 “빈하”라고 불렀는데, 영천(二水)에서 서까래를 얽어매어 기뻐하며 은거 생활을 하셨다. 성격은 질박하면서도 자유스러웠고, 너그러우면서도 기백이 있었으며 또한 마음이 활달하여 거리낌이 없었으므로 군색했으나 곤궁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일상적으로 하는 일은 처소에 머무르거나 방랑을 했는데 아마도 예의와 절조에 갇혀 지내는 것을 하찮게 여겼던 것 같다. 한평생 술과 만나는 것을 지극히 좋아했으며 그윽하게 기울이면서 마시는 것은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며 일백 개의 표주박은 술 취함이 극진하며 탄식을 자아냈던 것이다.
해가 곁눈질하는 천하에서 작은 움집과 더불어 알 수 없는 바다(인간 세상)를 바라보며 난간에 올라 얕은 술잔을 꿰뚫어 보면서 격렬하게 세상을 해부하기도 했었다. 연조비가(燕趙悲歌:기울어가는 연나라와 조나라의 슬픈 노래)의 비파노래로 곧장 고풍스러움에 잠겼던 주객은 자리를 함께했던 동료들을 상서로움으로 이끌어 내었던 것이다. 그것은 최정상에 버금가는 수준이었으며 기교가 넘치는 글씨 또한 기쁨을 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시경(詩經)을 풀이하는 것에도 대다수의 시골마을 사대부들이 동참하면서 즐겼으며 시를 지어 서로 주고받았기에 종종 한양으로 여행도 하셨는데 그곳에서도 말할 나위 없이 호협함으로 인하여 교제에 뛰어났었다.
돌아가신 나의 백부이신 청허공(淸虛公:휘 정희두)께서는 성품이 강직하시어 다른 사람들과는 잘 어울리지 않으셨는데 어느 날 대문 앞에서 은혜를 입은 사람과 더불어 지극히 짧은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시다가 빈하어른을 한 번 대면함으로써 호감을 가지게 되었고 그 기운에 힘입어 다시 만날 것을 서로가 승낙했는데 그 마음이 대수롭지 않게 됨에 따라 격분하고 애석해하시면서도 그 고통을 표출하지 않으셨는데 그것은 빈하어른에게서 극진한 상서로움 같은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런 까닭에 나 역시 서로가 고상하고 그리고 가깝고도 익숙한 관계가 되기를 기대했었다. 수년의 세월이 흘러 백부님으로부터 빈하어른께서 돌아가셨다는 말씀을 들었다. 마침내 마음속 깊고 깊은 곳에 즐거움이 사라져 버렸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득한 옛일이며 이미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다가 더욱이 산수를 구경하시던 중에 용산(龍山:영천시 자양면 소재 지명) 고갯길에서 한 번 만난 것뿐이었다. 서로가 겨드랑이를 잡고 넘어져 기뻐했으며, 전대(돈주머니)는 마땅히 술병과 시 한 축(軸:한시 20수)을 위한 것이었다.
백부님의 말씀에 따르면, 함께 있는 동안 늘 흥취가 넘치고 넘쳐 눈물을 흘렸다고 하시면서 이런 일로 인하여 빈하어른의 인간 됨을 풍부하게 알게 되었다고 하셨다. 백부님께서는 빈하어른에게 “넉넉한 덕이 없다”고 말씀하셨으며, 빈하어른께서는 백부님에게 “넉넉하게 부탁을 할 줄 모른다”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지금은 그것이 원인이 되어 복받쳐 오르는 눈물을 흘리는 것은 그 가운데 존재하는 신의(信義)를 서로가 바꾸지 않았음이 특별해서다. 생사의 존망에 즈음하여(나이가 지긋하여), 세속의 풍류에는 분명히 함께하시지 않았으나 사대부들 틈에 줄을 설 수 있는 처지는 되는지라, 그것을 잊지 못하고 더욱이 깨달으면서 근심과 술로 이어지다 보니 나이가 육십이 안 되어서야 그 수괴(책임의 당사자인 백부님을 지칭)는 탄식하며 그 오동나무(빈하어른을 지칭)가 기이하고 위대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반듯한 모습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수반해야 하는 것은 그 상대방이 이 세상에 없더라도 함께 했던 반딧불을 다시 찾아 돌아가는 것일 겁니다. 갑작스럽게 치솟는 것을 억누르며, 맑고 투명한 옥(玉) 같은 절의(節義:절개와 의리)에 행동을 같이하지는 못했으나 사물에는 함께하여 완수하려고 하는 알 수 없는 조화가 있는가 봅니다. 천 길 높은 가을날의 허공에는 푸른 이슬이 생기지 않고(빈하어른을 묘사), 골 깊은 절벽에 기대어 있는 낙락장송(백부님을 묘사)은 백 년이 지난다면 서로가 방불(髣髴:막상막하)하실 것입니다. 빈하어른의 생애에 돌아가신 백부님과 같은 만남은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백부님께서는 일찍이 그 전말(顚末:처음부터 끝까지)을 풀지 못하셨는데 그것은 지극히 상서로운 빈하어른에 대한 예의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의 원망은 그렇게 유명한 분과 어울리면서 자신에게 없는 것을 함께 핍박(서로에게 배운다는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백부님께서도 후에 뜻을 바꾸어 빈하어른께서 문장을 펼치신 것처럼 표출하는 것을 본받으셨기에 큰 평미레(잣대 또는 본보기)같은 넉넉한 문장은 마땅히 천년토록 이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수시로 빈하어른과 만나지 못함을 슬퍼하셨습니다. 어둠이 깔리는 황폐한 성(城) 밖 교외에는 가축을 기르는 어른과 바쁨을 재촉하며 땔나무 하는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오니, 놀란 새들이 위아래로 날아들고 잘생긴 짐승들은 땅을 밟고 머뭇거리는데, 지저귀는 새가 읊는 책 읽는 소리는 자연의 이치가 성(盛)하고 쇠함을 뚜렷하게 보여주도다! 예로부터 평상심을 유지하려면 오래도록 책을 잡으라고 했건만 슬픔과 그리움에 아픈 마음을 잊고자 바람(風) 앞에 임했더니 바람으로 인한 눈물에 부끄러운 생각이 드는지라 태산에 오른다면 그 정을 잊을 수 있으려나? 임술년(1862년) 동짓달(11월) 하순에 만제군자(저자:만제 정치건)가 그 후손에게 전하고자 쓰다.
*원문의 서두에서 이수(二水)란 세종에서 성종까지 6명의 임금을 모신 조선의 대표적 문신 학자이신 서거정 선생께서 영천을 가리켜 3개의 산과 2개의 강이 유명하여 “삼산이수(三山二水)”라고 명명 한데서 기원한 것임.
□瀕下傳□
瀕下姓李名文根詩號曰瀕下二水縣椽胥隱也性素放曠氣且磊落以濟窘隱困爲能事處流未嘗拘碌碌介莭平生甚嗜酒遇知已飮洞傾百瓢酣極以歎呼也睨天地如小窩視誰海若淺盃軒昻激析有燕趙釼筑之風卽古隱酒者曼卿之儔乎其少也工於書法旣襄喜爲詩解鄕之士夫皆與之從遊而唱酬之往往遊京洛亦多豪俠之交云甭余伯考淸虛公性剛直寡合過門下者荷客與未十數至淂瀕下一見而愛其氣再見而諾其心尋常慨惜之若歐公之於曼卿也故余亦相雅而慣密者有年自伯考捐世而來終不樂源源顧之若昔也不見旣久亦嘗一遇於龍山嶺路山水行也欣倒相握胠其橐只酒壺詩一軸今仍說到伯考往事輒滋然流涕於斯乎益知瀕下人也伯考非有德於瀕下也瀕下非有賴於伯考也今其所以滋然流涕者特其存中之信義不易乎死生存亡之際而非俗流之徒然也可使淂列於士大夫之間其不忘也尤審矣遞甭病酒而終㱓未六十噫其魁梧奇偉之身與貌必隨物同腐復敀於無物而抑突兀琤瑩之氣莭意不與物共盡化爲秋空千丈碧露不然産于窮谷之崖落落孤松後百年而有髣髴者矣然瀕下之生而知遇莫如我伯考而伯考曾未抒其顚末如歐公之於曼卿余怨其英名之與其身而同敀於無物也遂替伯考意倣歐公文鋪其大槩如右適足爲千秋之不朽耶於乎瀕下曾不見夫累累乎暝野與荒城牧叟焦童歌唫而上下驚禽駿獸躑躅而咿嚶固知盛衰之理自古常然感旧把觚悲凉悽愴不覺臨風涕隕者有媿乎太上之忘情歲壬戌至月下浣晩霽子傳以授其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