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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푸른 시의 방 원문보기 글쓴이: 강인한
[시와사람] 시인을 찾아서 -
암울한 시대의 로맨티스트, 강인한 시인
대담: 고성만
일시: 2013. 10. 5
장소: 강인한 시인 자택
대담 장소로 처음에 한강변을 생각했다가 한강변에서 치루어질 불꽃축제를 감상하기 위해 인산인해로 밀려가는 인파를 목격한 후 강인한 시인의 자택이 있는 이촌동 삼성리버스위트 아파트로 향하게 되었다. 현관에 들어서자 커다란 미루나무 한 그루를 중심으로 시원스럽게 펼쳐진 강변이 말 그대로 그림 같았다. 시인님께서 나와 이창수 편집위원을 위해 치킨 두 마리 안주에 다량의 알코올을 함유한 위스키를 내주시어 졸지에 낮술을 홀짝이며 대담에 들어갔다.
고성만 : 선생님, 안녕하세요? 예전에 뵈었을 때보다 건강이 좋아 보이십니다.
강인한: 고성만 시인. 오랜만입니다. 내 건강 상태가 예전 어느 때보다 좋게 보일 수도 있을 거여요.
고성만 : 선생님만의 특별한 비결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웃음)
강인한 : 근래에 내 체중이 생애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스무 살 무렵부터 예순일곱까지 내 체중은 미스코리아 수준이었습니다. (웃음) 사십오 킬로를 넘지 못하고 늘 사십삼에서 사십오 미만의 몸무게를 꾸준하게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그때도 그런 정도 평균 이상의 건강을 유지한 것으로 봐야겠지요.
고성만 :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나요? 사십오 킬로 미만으로 수십 년 간 유지한 것도 그렇고 또 최근에 건강이 더 좋아진 것 같다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요?
강인한 : 특별히 병이 있었던 건 아닌데 체중이 적게 나갔지요. 스무 살 무렵, 대학교 신입생 때 담배를 배웠어요. 그것도 아주 독하게 연기를 뱃속 깊숙이 빨아들였다가 천천히 숨을 내쉬는 게 ‘담배를 피우는 것’이라고 알았지요. 그렇게 일주일간을 독한 맘 먹고 단련을 했어요. 처음엔 진땀이 나고 구역질도 심하고 그랬는데 그 담부턴 심상해지더라구요. 하루에 한 갑을 피웠는데…… 참 오랜 기간이었네요. 삼 년 전 봄 갑자기 자다가 기침이 심해져서 한밤에 잠을 깼는데 각혈이 보였고, 숨쉬기가 어려워지데요.
고성만 : 그럼 그게 혹시 폐결핵이었나요?
강인한 : 폐기흉인지, 폐기종인지 병명은 잘 기억나지 않아요. 아무튼 열심히 육 개월 간 병원 다니면서 치료해서 나았지요. 결국 그 일로 인해서 수십 년 동안 피우던 담배를 끊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체중이 불어나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오십삼, 사에 머물고 있어요. 담배 피울 때와 비교하면 딱 구 킬로 내지 십 킬로의 체중 증가를 보인 거지요.
고성만 : 얼마 전 선생님 시집 속에 보면 「고독한 물고기들의 산책」이란 시에 강변을 산책하는 일과가 그려졌던데요.
강인한 :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이 이촌1동이란 뎁니다. 십 분쯤 걸어가면 한강 둔치로 나갈 수 있는 곳인데요, 한강공원의 산책길을 매일같이 산책하는 게 일과입니다. 내가 독서하고, 일하고, 서재에서 고개만 들면 창밖으로 한강이 내다보이고(아파트 칠층이거든요), 저 건너 동작동 국립현충원, 그리고 멀리 관악산까지 탁 트인 시원스러운 전망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강변 산책을 시작해서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꼭 한 시간이 소요돼요.
고성만 : 아, 그러니까 선생님의 시 「강변북로」가 생각나네요. 어느 잡지에선가 올해(2011년)의 좋은 시로 선정되었었지요? ‘내 가슴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달이 지나갔다./ 강물을 일으켜 붓을 세운/ 저 달의 운필은 한 생을 적시고도 남으리.// 이따금 새들이 떼 지어 강을 물고 날다가/ 힘에 부치고 꽃노을에 눈이 부셔/ 떨구고 갈 때가 많았다. // 그리고 밤이면/ 검은 강은 입을 다물고 흘렀다./ 강물이 달아나지 못하게/ 밤새껏 가로등이 금빛 못을 총총히 박았는데’ 이 중에서도 첫 연이 압권이예요. 저도 참 좋아하는 시입니다.
고성만 : 계간 《시와사람》독자들을 위해 근황을 소개해주세요.
강인한 : 고 선생, 잘 알다시피 내가 광주에서 삼십 년 간 살다가 2006년 봄에 서울로 이사왔거든요. 광주는 지방이라서 문학적인 행사라고 해봐야 지극히 한정돼 있잖습니까. <원탁시〉동인 활동을 한 것, 그리고 오래 전이지만 광주문협 행사로 매년 연말 송년회나 참석하는 게 고작이었지요. 그러다가 서울에 오면 친구도 없고 심심할 줄 알았는데 문단 경력이 사십육, 칠 년 되니까 웬만한 자리엘 가보면 알 만한 이들이 꽤 많더라구요. 한국시인협회의 행사라거나 시단의 여러 행사를 기웃거려보고 뭐 그런 일들이야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겠지요만.
고성만 : 등단 이후 줄곧 지방에만 계시다가 서울로 옮긴 다음 시인들과의 만남도 더 잦은 편이시지요?
강인한 : 그래요. 아무래도 시단의 송년 모임이라거나 신인시상식 등의 장소에서 우리 또래 시인들 그리고 후배 시인들과 만날 기회가 많아서 재밌습니다. 그리고 그런 알음알음으로 해서 지방에 있을 때보다 원고 청탁을 받는 기회도 훨씬 많고요. 청탁 받는 족족 다 응하기로 하면 한 계절에 열 편 쯤 써야 할 거예요.
고성만 : 시 청탁이 드믄 지방 시인이나 신인들에 비하면 부러울 지경인데, 선생님은 청탁이 많은 게 싫으세요? 하긴 발표 지면도 많아지고 보면…….
강인한 : 젊은 시절엔 다작을 했지만 요즘은 그렇게 안 되더군요. 등단 후 20~30년 무렵부터 한 달에 한 편 쓰는 걸 적당한 시작 활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럼 1년에 열두 편, 5년이면 예순 편으로서 딱 시집 한 권 분량이 되지요.
고성만 : 그런 계산이면 5년 주기로 시집 한 권씩 내는 꼴이 되는데요. 선생님, 그건 너무 간격이 뜸한 거 아닐까요?
강인한 : 아닙니다. 그게 시인으로서 게으르지도 않고 지나치게 극성스럽지도 않고 적당한 시작 속도일 겁니다. 요즘 보면 어떤 분들은 일기 쓰듯 매일 시를 쓰는지, 해마다 한 권씩 시집을 내더라구요. 시집 많이 내기 경주라도 하는 것처럼. (웃음) 그런 경우의 시집은 젊은 시절에 비해서 대체로 시적 긴장감이 많이 떨어지거나 말장난으로 시가 풀어지는 걸 보게 되는데 정말 안타깝습디다. 원숙해진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아니거든요. 시의 과잉생산을 스스로 제어할 줄 알아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작고한 조병화 시인은 모두 53권의 시집을 내셨어요. 그게 하나도 부럽지 않더군요. (웃음) 나는 더러 내게 오는 청탁을 고사하기도 하고, 내가 소화할 수 있는 만큼만 청탁을 받습니다. 청탁하는 지면에 대해서 그 성격을 헤아려 까다롭다고 할 거여요. 신인을 등단시키면서 해당 잡지를 백 권 이상 사게 하는 질 낮은 잡지들, 아시지요? 혹시 그런 데서 청탁 전화가 오면 곧바로 나는 “그 잡지엔 작품을 발표하고 싶지 않다.”고 딱 잘라버립니다.
고성만 : 나이 든 습작기의 시인 지망생들이라면 쉽게 유혹을 받는 그런 잡지들이 너무 많지요.
강인한 : 그렇게 질 낮은 잡지에 유명 시인들이 작품을 발표하는 건 문단 정화 차원에서 자제해야 합니다. 오히려 응원하는 꼴이 되므로 결단코 원고를 주지 않는다는 게 내 마음 속의 원칙입니다. 아 그리고 참, 최근에는 《현대문학》의 청탁을 거절한 적이 있네요. 하하.
고성만 : 아니,《현대문학》이라면 정통 월간 문예지로 올해 지령 7백호를 넘긴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한 문학잡지라고 압니다만 그 청탁을 거절한 데에는 무슨 사정이 있었습니까?
강인한 : 요즘 우리나라 문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고 선생도 아시겠지만, 시인의 숫자가 1만 명을 넘는다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시인들이 써내는 시를 읽는 독자는 기껏 천 명 안팎에 불과할 겁니다. 우리네 아파트 주변에 시인이 한 사람도 안 사는 아파트가 없을 정도라 하지요? (웃음) 시인 스스로 자기 시의 독자인 경우가 거의 대부분일 거여요. 그러다 보니 명색 시인이 자기 시를 발표하며 해당 잡지에 게재료를 내는 둥 그런 잡지, 엄밀히 보면 동인지겠지요. 사실 십여 년 전 정기독자가 10만 명을 넘는다는(지금은 많이 줄었겠지만) 《창작과비평》이 처음 편집동인으로 시작했지요. 그리고 《문학과지성》, 이후 《문학과사회》등이 편집동인 체제를 고수하고 있는, 넓은 개념의 일종의 동인지로 봐야 할 겁니다. 1955년에 창간한 《현대문학》은 90년대 중반까진 정당하게 등단한 작가 누구에게나 문을 열어준 진짜 문단의 공기였습니다. 그 잡지 추천 시인, 작가뿐만 아니라 신춘문예 출신들에게도 발표 지면을 제공해줬어요. 1967년 신춘 당선한 해 가을부터 해마다 나도 한 번씩 거기에 발표할 수 있었습니다. 1997년 감태준 시인이 주간에서 물러날 때까지가 정통《현대문학》입니다. 그 이후 발행인이 바뀌고 나서《현대문학》은 이상야릇한 잡지로 변질되기 시작했고, 그게 사실상 몇 사람의 놀이터 같은 동인지로 바뀐 거였습니다만. 독자들이 떨어져 나가고 시인, 작가들도 예전 같지 않은 잡지에 곱지 않은 시선을 던지게 되고. 내게도 옛날엔 해마다 혹은 간격이 뜸해도 1년 반이면 청탁이 오던 《현대문학》이 10년 넘게 단 한 번도 청탁이 오지 않더라구요. 그랬는데 20년 만에, 지난 달 처음으로 선심 쓰듯 ‘육필시’를 청탁하는 전화가 왔어요. 거기가 어디냐고 물었더니《현대문학》이래요. 고맙지만 나는 《현대문학》의 청탁은 사양한다고 했습니다. 하하, 그런데 거기 청탁 거절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고성만 : 아니, 왜 그렇지요?
강인한 : 지난 9월호 《현대문학》에 수필가 박근혜의 1998년 수필집에서 고른 「꽃구경을 가는 이유」외 3편이 발표되고 곁들여 서강대 영문과 이태동 명예교수의 「바른 것이 지혜이다」라는 에세이비평이 실렸어요. “박근혜의 수필은 우리 수필 문단에서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는 일상적인 생활 수필과는 전혀 다른 수신(修身)에 관한 에세이로서 모럴리스트인 몽테뉴와 베이컨 수필의 전통을 잇는다고 할 수 있다. (…) 실로 그의 에세이의 대부분은 우리들의 삶에 등불이 되는 아포리즘들이 가득한, 어둠 속에서 은은히 빛나는 진주와도 같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지극히 평범한 발상의 지당한 말씀에 소박한 사유를 담은 어쭙잖은 수필에 이렇게 터무니없는 찬양을 하는 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어용문학의 극치라 할 것입니다. 오늘의《현대문학》, 이런 잡지인데 하마터면 나도 한 물에 노는 고기가 될 뻔했잖아요. (웃음)
고성만 : 선생님께서는 젊거나 늙거나, 유명하거나 무명이거나 간에 발표되는 시인들의 시를 꼼꼼히 챙겨 읽으시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는데, 힘들지 않으세요?
강인한 : 아침에 눈을 뜨는 즉시 나는 내 연구실로 갑니다. 내 컴퓨터가 있는 방을 우리 집 아이들이 아버지의 연구실이라고 부릅니다. 수많은 잡지나 시집을 통해 진정 좋은 시를 찾아내는 즐거움으로 시를 읽고 삽니다. 별로 돈이 되지 않는 문학이 오늘의 시입니다. 그러한 시에 죽자사자 매달리는 이들이 줄잡아 천 명이라고 칩시다. 그들은 모두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시를 써서 발표하는 것이지만 제대로 읽어주는 이는 극히 소수입니다. 나는 젊은 시절 ‘시인’이 하나의 직업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교직생활을 그만둔 지금 비록 늦었지만 시에 몰두할 수 있음을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게 부쳐 오는 월간 시 전문잡지가 3종, 계간지가 30여 종, 그밖에 간간이 부쳐오는 개인시집들에 대해 매월 혹은 계절마다 공정하고 객관적인 시평이 있어야 마땅하지요. 그런 비평이 실은 참 드뭅니다. 자기네 잡지에 실린 작품에 대한 리뷰로 그치는 경우가 태반이어요. 1960년대에는 한정된 8면짜리 신문이었으나 문학작품에 대한 월평을 다루는 신문들이 몇 개 있었습니다. 예전에 비하여 지금은 별지를 제외한 본지만 32면으로 지면이 많이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발표되는 시나 소설에 대한 월평을 싣는 신문은 하나도 없습니다. 연재만화는 있어도 연재소설이 있는 신문은 드물잖아요?
고성만 : 맞습니다. 요즘 신문 지면은 옛날보다 많이 증면되었으면서도 스포츠에 할애하는 기사와 비교하면 문학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빈약해요. 그래도 몇몇 신문에서 시 감상(해설)을 주기적으로 싣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에요.
강인한 : 평생을 시에 몸 바친다 생각한 마당에 발표되는 시를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읽고 가려내는 일 — 마땅히 눈 밝은 평론가나 30년 이상 시를 써온 중견 이상의 시인들이 맡아 해야 할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일을 나 혼자 운영하는 카페에서 하는 게 보람 있고 즐겁습니다. 시를 감별하기 위하여 내가 생각하는, 시 읽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눈으로 읽는 방법, 둘째 입으로 소리 내어 읽는 방법, 셋째 손으로 베껴 써보며 손으로 느끼는 방법. 잡지에서 눈으로 읽을 때에는 좋은 작품이라 생각하고 좋은 시를 카페에 소개하기 위해 손으로 타이핑해 보면 여기저기 흠결이 드러나는 시가 더러 있어요. 최근 어느 계간지에 발표한 허아무개 시인의 작품을 대충 눈으로 읽을 때엔 괜찮은 생각이 들어서 손으로 타이핑하는데 손끝에 느낌이 안 좋아요. 턱턱 걸리는 게 이건 순 날림으로 쓴 시잖아요.(웃음)
고성만 : 최근 등단한 시인들 중 눈여겨봐야 할 시인 두세 명 추천해주세요.
강인한 : 젊은 신인, 이런 경우를 먼저 이야기할게요. 5년 전에 등단한 O라는 신인이 하나 있어요. 약관 스무 살 무렵 시를 공부하기 시작해서 일 년 반 만에 등단했다는데 표절도 아니고 그게 실은 속임수를 쓴 가짜였습니다. 사기나 다름없었습니다. 그의 등단작이라는 게 X라는 중년 시인이 대신 손봐준 작품이었거든요. 처음에는 그런 사실을 몰랐는데 X시인이 일종의 등단사업을 직업으로 삼아 활발하게 전개하는 과정에서 초기의 행적을 검토해 보니 예전의 O도 가짜였음이 판명된 거지요. 소리 없이 그런 사실이 전파되고, 그러다보니 이제 와서는 O와 가까운 주변사람들만 그 사실을 모르고(등잔 밑이 어둡다는 격으로 이거 완전 코미디 같아요) 거의 모든 이들이 내색은 안 하지만 O의 정체를 알고 있어요. 재작년에 낸 그의 시집에 사춘기 소년의 목소리(O)와 장년의 목소리(X)가 넘나들며 혼재한 건 다 그런 사정이 작용한 까닭이었습니다.
아 참, 눈여겨볼 만한 신인을 말해본다면 신인을 규정하는 기준으로 2007년 등단부터라고 선을 그어볼 때 이병일, 김선재, 박준, 한세정, 최호일, 유병록, 신철규 등을 주목하고 싶습니다. 먼저 이병일은 1981년 전북 진안 출생. 2007년 《문학수첩》으로 등단. 시집 『옆구리의 발견』. 좋은 시 「올랭피아」. 김선재는 1971년 통영 출생. 2006년《실천문학》에 소설, 2007년《현대문학》에 시로 등단. 소설집 『그녀가 보인다』, 시집 『얼룩의 탄생』. 좋은 시 「태양의 서쪽」. 박준은 1983년 서울 출생. 2008년《실천문학》신인상 당선. 시집『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좋은 시 「꾀병」. 한세정은 1978년 서울 출생. 2008년 《현대문학》에 「태양의 과녁」 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 『입술의 문자』. 좋은 시 「오렌지 저글링」. 최호일은 1958년 충남 서천 출생. 2009년 《현대시학》신인상에 「저곳 참치」외 4편의 시로 당선. 좋은 시「엑스트라」. 유병록은 1982년 충북 옥천 출생. 2010년〈동아일보〉신춘문예 당선. 좋은 시 「두부」. 신철규는 1980년 경남 거창 출생. 2011년 〈조선일보〉신춘문예 당선. 좋은 시 「권총과 장미」. 좀더 폭을 좁혀서 80년 이후 출생의 신인으로 국한한다면 신철규(1980), 이병일(1981), 유병록(1982), 박준(1983) 시인들로 추려볼 수 있겠네요. 고 선생도 마음에 두고 있는 신인들이 있을 텐데 한번 말해 보세요.
고성만 : 네 저도 200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신미나 시인, 2011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한 송승언 시인, 올해《문예중앙》으로 등단한 신두호 시인 등 사유가 부드럽고 자기만의 표현법이 있는 시인들을 눈 여겨 보고 있어요.
고성만 : 선생님은 다음 카페 <푸른 시의 방> 주인이십니다. 누적회원 수 1,600여명, 하루 방문자 500여명, 좋은 시 5,100여 편을 기록 중이고, 우리 문단에서 가장 정론을 펼치는 사이트로 강호제현의 사랑을 받고 있는데, 지난 12년간의 소회를 밝혀주세요.
강인한 : 인터넷으로 바둑을 두기 시작한 게 2001년 겨울방학 때부터일 겁니다. 동네 PC방에 가서 스피커 틀어놓고 인터넷 바둑을 두는데 거기에 푹 빠져버렸지요. 저녁 먹고 PC방 가서 뚝딱뚝딱 시작한 바둑을 새벽 세 시까지 둔 때도 있었거든요. 밖에 나와 보니 함박눈이 펄펄 내리고. 그 이후 집에 컴퓨터를 마련하게 됐고, 독수리타법으로 타자를 연습했답니다. 지금도 독수리타법을 못 벗어나고 있는 형편이고. 그러다가 2002년 3월 컴퓨터에 능통한 이웃의 문우가 다음(Daum)에 이메일과 함께 카페를 만들어줘서 <푸른 시의 방>이 시작됐습니다. 올해로 12년째입니다. 회원이 1천 6백여 명이라고 하지만 꼭 회원이 아니라도 이 카페는 누구든지 찾아와 ‘좋은 시 읽기’도 ‘비평/에세이’도 모두 찾아서 읽어볼 수 있도록 조건 없이 열어놓고 있습니다. 초기의 ‘비평/에세이’에는 내가 쓴 시 창작 이론서 『시를 찾는 그대에게』가 전체 수록돼 있고요, 안도현 시인이 한겨레에 연재한 「시와 연애하는 법」도 모두 들어있어요. 그게 나중에 책으로 나올 때 제목이 『가슴으로도 쓰고 손으로도 써라』로 바뀌었지요. 이제는 시인들 중에서 인터넷 검색을 할 줄 아는 거의 모든 시인들이 <푸른 시의 방>을 알고 있을 겁니다. 신인들이나 시를 이제 배우기 시작한 습작생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공부방 혹은 시 독서실이 될 테니까요. 우리 카페에 조용히 들어와 시를 공부해서 등단한 신인들도 몇 사람 있어요.
요즘 우리 시단은 시적 경향이 뒤죽박죽 백화난만이잖습니까. 비록 나 혼자의 눈으로 보는 한계가 있을지라도 진짜 시와 가짜 시를 구별하고, 잘된 시와 엉터리 시를 가려내고, 경향에 관계없이 참된 시를 찾아내 제시하는 일 — 이게 <푸른 시의 방>이 지향하는 목표입니다. 난해시를 빙자하여 무잡하고 설익은 시를 보란 듯이 내놓는 것도 여기저기 많이 볼 수 있지 않겠어요? 내가 시를 쓰기 시작한 지 올해로 46년입니다. 물론 등단 이후부터 쳐서 그렇지, 준비하는 과정의 습작시절까지 치면 50년 동안 시를 써온 셈이거든요. 아무리 난해한 시라고 해도 오랜 경륜을 지닌 시인이 읽어서 이해할 수 없는 시가 있다면 그건 시가 아니라 그 시인 자신만 아는 이상한 자폐적인 독백이겠지요. 아니, 요즘 잘 나가는 일부 시인들을 흉내 내 본답시고 심지어 시인 자신도 모르는 해괴한 말, 어불성설 따윌 뻔뻔스레 늘어놓는 것도 많습니다.
고성만 : 상당 수 시인들의 시는 시가 아니라 은어 수준의 의사소통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또 요즘 등단하는 시인들은 그것을 일종의 멋으로 생각하고 따라하는 것 같아 우려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강인한 : 오랜 교직 경험으로 볼 때 내가 자신 있게 잘 아는 단원은 학생들에게 정말 쉬운 말로 학습시키는 게 충분히 가능하였다고 봅니다. 내가 좀 어설프게 아는 단원에 대해선 아무래도 학생들에게 어렵게 가르쳐주고 말거든요. 시에서도 그래요. 난해시를 쓰는 이들의 어떤 작품은 성공하는 것도 있겠지만 사실 자기 욕심만 앞세우다가 제대로 시적 표현이 미숙한 경우가 더 많을 거라고 봅니다. 비평가들이 그런저런 것을 생각지 않고 무조건 대단한 것인 양 추켜세우며 나팔 부는 게 문제지요. 금년의 미당문학상이 꼭 그런 케이스 아니던가요. (웃음)
고성만 : <푸른 시의 방>을 앞으로 언제까지 운영하실 계획이신지요?
강인한 : 내가 일할 수 있을 때까진 계속할 생각입니다. 한두 가지 재밌는 에피소드를 말해줄게요. 서안나 시인이 얼마 전 어느 월간 시지에 「개인적인 현무암」이라는 시를 발표했습니다. “진흙의 아이들을 빚는다 진흙 인간으로 솟아 태양을 안아 들었다 해가 둘이다 도솔가를 부르리라 해를 물리치면 돌 속에 숨결이 돌 것이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도솔가’를 시인이 ‘혜성가’로 착각하고 발표했기에 제대로 일러주고 카페에는 바르게 고친 시를 올렸습니다. 그런 후 바르게 고쳐진 서 시인의 시를 많은 이들이<푸른 시의 방>에서 가져다 쓰는 걸 봤지요. 내 생각에 카페에 소개 할 만큼 그 시가 좋은 시였기에 망정이지 그저 그렇고 그런 시였더라면 어디 한 곳이 틀리거나 말거나 그냥 지나쳤을 거예요. 또 하나는 새로 나온 《포지션》가을호의 경우입니다. 신작시들을 살펴보는데 강정 시인이 「큰 꽃의 말」을 발표하였는데 그 뒤에 나오는 강성은 시인도 「큰 꽃의 말」을 발표하고 있잖아요. 어라? 둘 중 하나의 제목에 미스가 있다고 직감했습니다. 편집인에게 전활 걸어서 내 보기엔 아무래도 강성은 시인의 시 제목이 「밤 기차」라거나 뭐 그런 종류일 거라고 말해 줬지요. 잡지는 이미 서점이나 구독자들에게 모두 배본이 완료된 상태라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편집인은 필자인 강성은 시인에게 먼저 전화 걸어 백배사죄를 하였노라고 했습니다. 「객차」가 맞는 제목이라고 했습니다. 마침 “카페 <푸른 시의 방>은 독자들도 많고 파급력이 크므로 카페에 올바르게 올려준다면 좋겠다”는 편집인의 부탁대로 제목을 고쳐서 올리고 ‘한 줄 메모장’에 그 사연도 간단히 소개하였지요.
고성만 : <푸른 시의 방>에 있는 선생님의 시집을 세어보면 『이상기후』(가림출판사), 『황홀한 물살』(창작과비평사), 『강변북로』(시로여는세상) 등등, 9권, 시선집 『어린 신에게』(문학동네) 1권 등 총 10권인데 이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시집은?
강인한 : 가장 최근의 시집에 애착이 갑니다. 바로『강변북로』입니다. 현실에 대한 풍자와 비판적 태도를 보이는 시편들(「농담에 대한 예의」), 낭만적 서정을 좀더 깐깐하게 천착하는 시편들(「브릭스달의 빙하」), 그리고 탐미적 미학을 추구하는 시편들(「봄날」) — 이런 몇 가지 내가 평생토록 추구해 나가고 있는 시적 경향을 시집 한 권에 웬만큼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애착을 느끼는 거죠. 초기 시집으로는 등단 이후 7년 만에 모두 101편을 수록한『불꽃』과 광주민중항쟁 이후 계엄 검열 속에 초판 5천 부를 찍은『전라도 시인』을 들고 싶습니다.
고성만 : 선생님의 시세계를 폭넓게 보아 광주 거주기와 광주 거주 이후로 나눌 수 있다고 보면 어떨까요.
강인한 : 제 시세계를 구분하기 편리한 대로 거주지별로 나눠볼까요? 신춘문예 당선 이후 10년 간 정읍에서 살았고, 그 후 30년 간 광주에서 살았고, 이제는 서울에 와서 살고 있는데 벌써 8년째입니다. 정읍에서 살았던 청춘 시기는 연애와 유신 독재와 꿈의 좌절 같은 게 뒤범벅된 때였고, 내 시에도 그런 상황이 혼재하고 있을 것이에요. 결혼하고 나서 유신을 맞닥뜨렸을 때 그 치욕스런 삶은 시로 표현함에 풍자와 상징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죠. 「빈자일등(貧者一燈)」이라는 시에 보면 “쉽게 길들여졌어. 나는 / 밤이면 일찍 잠드는 것에/ 새벽의 확성기 소리에 깨는 버릇에/ 잘 길들여졌어/…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진실한 기쁨인지 진실한 슬픔인지/ 도무지 희로애락이 모호한 안개 속을”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비참하게 느껴졌지요. 광주로 이사하고 3년 만에 만난 건 광주민중항쟁이었습니다. 나는 광주를 떠나오기까지 ‘광주’라는 부채의 족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고스란히 광주를 생체험으로 겪었으므로 타지역 시인들보다 비겁하지 않을 수 있겠으나 그 당시 우리 광주 시민들을 대신하여 죽은 이들에 대한 정신적인 부채는 세월이 흘러도 탕감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안타까운 건 똑같이 광주를 견딘 사람들끼리인데도 흑백논리로 동지 아니면 모두 적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광주를 겪은 젊은 문학청년들이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거기에 매몰되고 마는 건 비극입니다. 이제 비로소 족쇄에서 풀려나 조금씩 새로운 비상의 날갯짓을 하는 신인들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김경주, 송승환 그리고 요즘 두각을 드러내는 신인들이 어두운 그늘을 떨치고 일어서는 새로운 기대주라고 할 만하지 않은가요. 그렇게 되기까지 꼭 30년 세월이 걸렸다고 봅니다. 저 역시 ‘광주’라는 그런 부채의식에서 벗어나 서울로 옮긴 이후엔 새로운 각오로 임하고 있지요. 서울에 와서 펴낸 시집『입술』과 그것을 좀더 심화하고 단련한『강변북로』가 그런 세계일 겁니다. 최근의 시들에서 현실을 육화한 시들이 있는데 나는 비록 그와 같이 의미가 강조되는 시라고 하더라도 미적인 승화가 선행하여야 한다고 스스로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시청 앞에서 출발하여 불타버린 숭례문을 돌아 나오는 촛불 행렬을 다룬 시 「숭례문 오감도」가 일테면 그와 같은 예가 될 법하지 않나요? 자화자찬이나 모수자천(毛遂自薦) 격입니다만. (웃음)
고성만 : 선생님은 어떤 책에서 “시는 언어의 보석이다. 그 속에서 빛나는 것은 시인의 영혼이다.”라고 쓰신 적이 있고, 저는 선생님의 시를 ‘정교한 이미지의 꽃’이라 명명하고 싶은데 요즘의 시 세계를 그렇게 볼 수 있겠지요?
강인한 : 그렇습니다. 고 선생이 잘 짚어냈어요. 시는 언어를 재료로 하여 만들어낸 보석이다, 그 보석을 아름답게 빛나게 하는 것은 그 시를 쓴 시인의 영혼이라는 것입니다. 내 딴에는 나름대로 정의해 본 시에 대한 에피그람입니다. 50년 가까이 시를 써오면서 나름대로 시에 대하여 응결된 한두 마디로 정의를 내려보고 싶었습니다. 공자라거나 에드거 앨런 포나 발레리 혹은 에즈라 파운드만 시에 대하여 정의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고성만 : 선생님은 고등학교 시절 신석정 시인께 시를 배웠고, 대학 재학 중에는 서정주, 김춘수, 박목월 이런 분의 시를 좋아하셨고,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김수영 시인의 심사로 시단에 나오셨는데, 어떤 분의 영향이 가장 컸나요?
강인한 : 습작시절 펜팔 친구가 있었어요. 한번은 그 친구에게 내가 사서 가지고 있는 서정주 시인의 『신라초(新羅抄)』를 거의 다 필사한 다음 생일 선물로 보내줬지요. 그런 다음엔 나도 모르게 미당의 투가 저절로 몸에 익어서 나오고, 「내 이마의 꽃밭에서」가 그런 옙니다. 김춘수 시인의 시가 좋아서 이미지 위주의 미학을 연습해 보기도 했어요. “…제왕의 홍옥빛 의자를 침몰시킨/ 사람들의 연둣빛 눈물./ 눈물 속 뼈를 깎는/소금이 있어.// 이것봐, 이것 봐/ 홍옥의 달빛을 문지르던/ 여자의 늑골이 있어.”라고 끝맺는 「바닷속의 언어」는 첫 시집의 맨 앞에 실린 시인데 관능을 색채 이미지로 표현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고교 은사님인 석정 선생님께는 시적 기교에 앞서 의연한 지사의 품성을 본받고 싶었습니다. 김수영 시인의 자유로운 정신을 흠모하는 이들이 많은데 나는 시보다 그분의 산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소년처럼 천진하고 무구한 정신세계가 좋았습니다. “노 선생이라는 어떤 여성과 같이 극장에 가서 영화를 봤는데 그저 그런 정도였지만 극장을 나와 걸으면서 노 선생이 참 좋았다고 감상을 말하기에 자신도 그 영화가 좋았다고 맘에도 없는 얘길 했대요. 그리고 느끼기를 이런 게 사랑인가 보다 하는 것”(웃음)
고성만 : (여담으로)최근 모 출판사에서 ‘한국현대시명시선 100’을 발간하였습니다. 제가 볼 때는 시인 선정에 문제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예를 들어 황동규 같은 시인이 빠지고 별로 영향력 없는 시인이 들어가기도 했다는), 선생님 생각은 어떠세요?
강인한 : 막대한 출판 비용을 댄 어느 종교단체 대표와 평소 교분이 두터운 시조시인이 선정한 100명의 현대시인, 시조작가들이라는 소문입니다. 평생 문지에서 시집을 낸 시인들은 문지 측에 지켜줘야 할 도의적인 책무 때문에 문지가 아닌 다른 출판사 선집에 선뜻 응할 수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문제 아니고도 시조 쪽에 무게가 많이 기울고, 이해할 수 없는 시인 선정 문제가 눈에 띄지만 어떤 선집이 되었건 독자들의 기대를 충족하긴 어렵지 않겠어요? 해마다 몇 군데 출판사에서 나오는 ‘올해의 좋은 시’ 선정에도 선정 주체와의 친분이 많이 작용한다고 느꼈습니다.
고성만 : 최근 <포지션>, <발견> 등등 시 잡지가 창간되고, 반대로 <시인세계>, <시안> 등 시 잡지가 휴간하거나 폐간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는데, 이런 현상에 대한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강인한 : 서점에서 시 잡지를 구매하는 독자가 지극히 한정돼 있습니다. 간행되어 나오는 종류가 많다 보니까 자연히 적극적인 후원단체가 결성되지 않고서 시장에 내놓고 독자들의 구매에만 기대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게 된 겁니다. 지금은 각각의 수준 차이는 있지만 후원단체가 잡지를 뒷받침해주는 현대적인 동인지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동호인)은 많고 독자는 오히려 시인들의 수효보다 적은 기현상이 나타나게 된 겁니다만.
고성만 : 요즘 시단 문제 하나 덧붙여, ‘문예지 등단’, ‘첨삭지도’를 빙자한 대필, 대학입학 ‘스펙 쌓기’를 이용한 학원 수강 고액 과외 등등 문학을 사고파는 등 문학의 질을 스스로 떨어트리는 행위를 어떻게 해야 막을 수 있을까요?
강인한 : 시인이 되고 싶은 뜨거운 열망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어떤 시를 몇 구절 따다가 엇비슷하게 써서 등단한다면 그건 표절이지요. 사실 표절을 통해 등단하는 건 요즘에 비춰보면 애교가 있다고 할 거예요. 아예 송두리째 남이 대신 써준 작품으로 당당히 당선하는 예를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중견 시인들 가운데도 자기가 대신 써서 당선이라는 소원을 이루게 한 다음 신인이 그 뒤로도 계속 뒤를 봐달라고 하는 걸 뿌리쳐서 그 신인은 당선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더러 있고요. 요즘 대학교 부설 사회교육원이 얼마나 많습니까. 심지어 백화점 문화센터에서도 구청 관련 문화원에서도 시 창작 교실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중에는 단순히 습작생의 작품을 첨삭 지도하는 정도를 벗어나 거의 지도교수(시인)가 대신 써주다시피 해서 당선하고 그 사례비로 생활비를 충당하는 희한한 직업도 있는 게 큰 문제거든요. 그 방면에 내가 알고 있는 유명한 사람들이 있는데 한 사람은 몇 해 동안 벌어서 큰 빚을 다 갚았다는 소문이고, 또 한 사람은 재작년 한 해에만 수입이 억대에 달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어디까지 믿어야 할는지 모르지만…. 최근의 신춘문예에서도 보면 〈광주일보〉, 〈부산일보〉, 〈서울신문〉, 〈중앙일보〉 등에서 당선작이 표절 또는 중복 투고 등 불미스런 이유로 당선이 취소되곤 하였는데, 밝혀지지 않은 의혹은 훨씬 더 많습니다. 《문학사상》, 《현대시》, 《창작과비평》에 이르기까지 의혹을 벗기 어려운 당선작들이 눈을 비비고 들여다보면 정말 너무 많습니다. 아마 우리가 모르고 넘어간 가짜 당선작들도 더…더… 있을 겁니다.
고성만 : 대학 특례입학을 노리는 고등학생들의 문제가 심각합니다.
강인한 : 그렇습니다. 지난 여름호 어느 계간지에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시만 쓴다는 학생이 당선된 적 있는데 가을호에 편집위원들이 그의 당선을 취소하였더군요. 아마 그 학생이 그 계간지 신인상 당선을 빌미로 대학의 문예창작과에 수시입학을 꾀하려고 대필 작품으로 당선작을 산 것이 아니겠는가 싶습니다. 그런 문제에 대한 근본대책이라면 심사위원들이 최근 각 지면의 당선작들을 널리 읽어보고 특히 직업적인 대필시인의 작품 성향에 대해서 통달하는 수밖에 뾰족한 수가 없습니다. 그도 아니면 세월이 많이 흘러 문단에서 저절로 도태되는 정화과정을 믿어볼 도리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고성만 : 선생님, 여러 가지 재밌는 말씀 오늘 많이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강인한 : 별로 영양가 없는 이야기만 많이 늘어놓은 것 같아서 미안합니다. 고 선생, 수고 많았어요.
ㅡ<시와 사람> 2013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