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도대사께서 판별하신 요문과 홍원
수당隋唐시대에 이르러 『관경』은 불교계로부터 보편적인 중시를 받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관경』에 대해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들은 모두 투철하지가 않았고 또 부처님의 본의에 완전히 계합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오해하고 곡해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아미타불의 화현이신 선도대사께서 다시 『관경』에 대해 해석하여 고금 이래 정토문의 잘못된 해석을 바로 잡아주심과 동시에 정토문의 규범과 기준을 세워주셨습니다. 예컨대 ‘요문’과 ‘홍원’·‘정행’과 ‘잡행’·‘정정업’과 ‘조업’ 등등은 모두 고금의 오류를 바로잡은 것(楷定古今)에 속합니다. 이는 이전의 사람들이 여태껏 언급하지 않은 것들이고 뒷사람들은 모두 따라야 하는 것으로, 따르지 않으면 빙빙 돌아서 가야하고 잘못된 길을 가야 합니다. 마치 산을 깎고 길을 닦는데 예전에는 길이 없었지만 길을 다 닦고 나면 이 길을 따라 가기만 하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부터 우리는 선도대사께서 하신 정토문의 판석에 대해 배워보도록 하겠습니다.
선도대사의 판석은 도작대사께서 일대기 불교를 전체적으로 판별한 성정이문聖淨二門의 기초위에서 정토문 속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세부적으로 판석하신 것입니다. 이 세부적인 판석에는 두 가지 다른 교문이 있으니 하나는 ‘요문要門’이고 하나는 ‘홍원弘願’으로서 그 목적은 일체중생을 인도하여 요문으로부터 홍원으로 들어가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요문과 홍원은 간단히 말해서 제선만행諸善萬行을 회향하여 왕생을 발원하는 것을 요문이라 부르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원력에 힘입어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홍원이라 부릅니다.
용수보살·담란대사·도작대사·선도대사께서 정토종을 전승하는 조사님이 된 데에는 그분들이 정토종의 교리에 대해 탁월하고 이정표적인 공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용수보살은 『이행품』중에서 전체 불법에 난행도와 이행도가 있다고 분별하여 판석하시면서 아미타불의 본원칭명에 의거하여 현생에 바로 불퇴전에 들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을 이행도라고 부른다고 명확히 지적하셨는데, 이것이 후대에 정토종 교판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담란대사께서는 이행도가 쉬운 이유는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탁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시면서 우리에게 마땅히 부처님의 원력에 힘입어 서방에 왕생해야 한다고 권장하셨습니다. 이것은 담란대사의 공헌입니다.
도작대사께서는 체계적으로 대승불법에 성도문과 정토문이 있다고 판명하시면서 말법시대에는 중생들의 근기가 하열하다고 하시고, 하나는 ‘대성(석가모니불)의 시대와 멀리 떨어져 있고’, 또 하나는 ‘이치는 심오한데 이해는 미미함’으로 인해 성도문의 수행은 우리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명확하게 지적하면서 우리에게 유일하게 ‘통하여 들어갈 수 있는 길’인 정토문으로 들어가라고 권장하며 인도하셨습니다.
도작대사께서 지목한 정토문은 제선만행을 회향하여 왕생을 구하는 게 아닙니다. 이것을 정토문의 주지主旨로 삼지 않으시고, 『대경』의 뜻을 인용하여 ‘만약 어떤 중생이 설사 일생동안 악업만 지었을지라도, 임명종 시에 열 번을 이어서 나의 명호를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왕생할 수 없다면 성불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아미타불의 48원 가운데 제18원을 정토문의 근본핵심과 유일하게 통하는 길로 삼으신 것입니다. 당연히 역시 『관경』의 하품하생에서 임종의 십념왕생과 결합하여 해석하고 설명하신 것입니다.
도작대사의 ‘성정이문판’이 비록 분명하기는 하나 그래도 어떤 사람은 자신이 본래 닦던 수행법문에 집착하여 그 자리에서 바로 아미타불의 본원에 계합하여 들어가 전수염불하기가 어렵습니다. 마치 계단이 너무 높아서 한걸음으로 올라갈 수 없는 것과 같지요.
선도대사님은 『관경』의 교의에 근거하여 정토문을 요문과 홍원 두 가지로 분류하였는데, 이렇게 되면 아주 쉽게 올라갈 수 있습니다. 마치 높은 계단을 밑에다가 반절 깔아놓으면 쉽게 올라갈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요문이란 제선만행을 닦아서 그 공덕을 회향하여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발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본래 선을 닦던 사람이라면 당신의 선정의 공덕을 회향하여 극락왕생을 구하고, 당신이 본래 지계를 하던 사람이었다면 당신이 지계의 공덕을 회향하여 극락왕생을 구하며, 당신이 본래 교리를 배우던 사람이었다면 당신이 대승경전을 독송한 공덕을 회향하여 극락왕생을 구하시면 됩니다. 이러한 갖가지 수행법문을 회향하여 서방극락세계왕생을 구하는 것을 선도대사의 교판사상 가운데 요문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어떤 이점이 있을까요? 각종파의 사람들에 대해 섭수하는 문이 생기게 됩니다. 당신이 본래 무엇을 배웠다면 당신의 그 방법을 바꾸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이 선을 닦아서 깨달음을 얻기란 어렵다는 것을 느껴서 왕생을 원하지만 참선하는 방법을 내려놓을 수 없다면 그래도 괜찮습니다! 당신은 그 자리에서 회향하여 극락왕생을 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정토문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정토문과 성도문의 차별은 어디에 있을까요? 정토문은 서방정토의 왕생을 구하여 거기서 성불한 다음 다시 오셔서 중생구제를 하는 것이고, 정토왕생을 구하지 않고 이 땅에서 자력으로 증오證悟하여 아라한과를 얻고 무생법인을 증득하며 나아가 성불하기를 발원하는 것을 성도문이라 부르는 겁니다.
당신이 본래 닦고 있던 공덕을 회향하여 정토왕생을 구하기만 하면 전부 정토문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정토문에 들어온 다음 다시 방편으로 ‘기왕 정토문에 들어온 이상, 여기에도 우열이 있어서 온당하고 만인이 닦아서 만인이 왕생하며 정정의 업이 되는 게 있고, 그다지 온당하지 않고 왕생이 결정되지 않은 게 있으며,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탁하는 게 있고 아미타불의 본원과 상응하지 않는 게 있다……’라고 인도해주는 겁니다. 이미 정토문 속에 들어온 사람에게 다시 이렇게 인도하고 권장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천천히 근기가 성숙되면 당신은 아미타불의 본원의 구제를 믿고 전수염불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요문은 대내든 대외든 모두 수승한 의미가 있습니다. 대외적으로 각종파의 수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정토문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합니다. “당신은 본래 하던 수행을 그대로 하시고 그 공덕으로 회향하여 왕생을 구하기만 하면 됩니다.” 대내적으로는 이미 정토문에 들어와서 정토왕생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진일보할 수 있도록 직접 전수염불을 하여 왕생의 정정업으로 들어가게 할 수 있습니다.
이상은 선도대사님 교판의 위대한 공헌이었습니다.
이러한 교리를 이해한다면 우리자신의 수행에 있어서 굉장한 도움이 됩니다. 흔히 정토문을 닦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분명하게 구분하지 못하고 있어서 어떤 이는 전수염불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여러 가지 수행으로 회향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누구의 말이 정확할까요? 두 가지가 다 정확하고 모두 정토문내의 행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방편이 있고 진실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요? 오로지 명호를 부르는데 있습니다. 물론 방편도 없어서는 안 되겠지요. 그 사람의 근기를 봐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모두 안립安立이 있고 위치가 있고 방향이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 모두가 자신이 정토왕생을 구하는 행법을 대조해보면 아마도 자신이 현재 아직은 홍원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여전히 요문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럼 당신은 홍원 쪽으로 진보해야 합니다. ‘염불만 해서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을까? 정말 그렇게 쉬울까?’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요문만을 집착하며 홍원을 버리는 것이니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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