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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정 이종환(오른쪽)의 생가- 그는 '돈을 버는 데는 천사처럼 못했어도 쓰는 데는 천사처럼 하겠다'며 교육재단도 세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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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풍광이 아름다운 고을이 관광지로 이름이 높다. 그러나 흔하지는 않지만 고을에서 배출된 인물들이 걸출해 명승지 못지않게 유혹하는 곳이 있다. 경남의 중심에 자리한 의령(宜寧)이다. 의령은 예부터 물 좋은 곳이라 재물이 넉넉했다. 그 때문일까. 이 땅에 병란이 일어났을 때 내 고을을 지키고 더 나아가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충절의 인물이 많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근세에는 이 나라 최고의 부자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고, 최근에 와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돈을 기부한 사람도 이 고장 출신이다. 주말 고속도로 정체를 뚫고 의령에 도착하자, 목적지에 왔다는 안도감에 갑자기 시장기가 몰려온다. '금강산도 식후경'. 여행길에서 항상 써먹는 말이다. 의령 특산물 망개떡이 눈에 아른거리고, 여기에 빠질세라 구수한 의령 소고기국밥 생각에 침이 돋는다. 아니 최근에는 의령 소바(메밀국수)가 유명하다는 아내 이야기에 무얼 먹어야 할지 혼란스럽다. 결국 예전에 먹어보지 못한 소바를 먹기로 하고 읍내시장으로 향했다. 역시 소문대로 소바 식당 입구에는 아침부터 줄을 섰다. 차례가 늦을 것 같아 발길을 돌려 소고기국밥집으로 향했다. 무쇠 가마솥에서 펄펄 끓는 소고깃국으로 아침을 때우다 보니 온몸이 땀으로 젖는다.
의령 여행의 첫 번째 코스로 정암루(鼎巖樓)를 택했다. 이곳에 가면 의령 여행의 주제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왔던 길을 되돌려 의령관문으로 향했다. 정암루에 오르자 아래로 남강이 흐르고 이곳이 그 옛날 사람들이 나룻배를 타고 오갔던 나루터였음을 알 수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 유서 깊은 '승전지'여서 그런지 의병의 혼이 살아 숨 쉬는 것 같다. 1935년 일제강점기에 이 지역의 유지들이 그런 의미를 가지고 정암루를 지었다고 하니 더욱 감회가 새롭다. 더군다나 누각 아래로 남강이 유유히 흐르고 풍광이 좋아 절로 시 한 수가 나올 만도 하다.
# '기부왕' 된 삼영화학 창업주 이종환의 생가
이렇게 의령관문 정암루에서 여행 주제 파악이 끝나면 다음 코스는 충과 부를 상징하는 인물들의 생가가 있는 현장으로 찾아가는 일이다. 마치 나 자신이 지관이 되어 명당을 둘러보는 것처럼 마음이 설렌다. 먼저 정곡면의 호암(湖巖) 이병철 생가를 찾아가는 부의 코스다. 가는 길 중간쯤, 최근에 각광을 받는 곳이 하나 생겼다. 관정(冠廷) 이종환 삼영화학 창업주의 생가(용덕면 소상로 504)가 복원되어 손님을 맞는다. 관정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기부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관정교육재단을 설립하고 '돈을 버는 데는 천사처럼 못했어도 쓰는 데는 천사처럼 하겠다'는 소박한 뜻으로, 우리나라의 미래를 짊어질 인재양성을 위해 '후손에게 한 광주리의 황금을 물려주기보다는 한 권의 경서를 가르치도록 하라'는 선대의 교훈을 실천하기 위해 장학재단을 만들었다고 했다. 가슴이 뭉클하다. 생가 대문을 들어서면 회경당(會敬堂)이라는 현판이 붙은 사랑채가 나타나고, 뒤편에는 여성들의 공간인 안채 곳간 안사랑채 그리고 장독대가 자리하고 있다. 특히 담 너머 왼쪽에는 관정헌(冠廷軒) 정자가 있는 연못정원이 일품이다.
# 우리나라 최고의 재벌 이병철 고향도 여기
호암 이병철(오른쪽)의 생가- 삼성 창업주 호암의 조부가 1851년 손수 지은 한옥. 풍수지리에 의하면 집터가 명당 중의 명당으로 꼽힌다. |
여기서 10여 분 정도 진등재를 넘어 달리다 보면 호암 생가가 나타난다. 최근 마을 주변의 하천보수공사가 한창이어서 주변이 약간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우리나라 최고의 부자가 태어난 곳이어서 그런지 찾는 사람의 발길이 계속 이어진다. 호암생가는 안채 사랑채 대문채 광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1851년 호암의 조부께서 전통 한옥 양식으로 손수 지었다고 한다. 호암은 유년시절 결혼을 해 분가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특히 남서향인 생가는 아담한 토담과 바위벽으로 둘러싸여 외부와 구분되어 있고, 울창한 대숲이 조성되어 운치 있는 경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풍수지리에 의하면 이 집은 곡식을 쌓아 놓은 것 같은 노적봉(露積峰) 형상을 하고 있는 명당 중의 명당이라고 한다.
# 조선 의병장 곽재우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제는 충의 길로 들어설 차례다. 먼저 의병장 곽재우의 생가(사진)가 있는 유곡면 세간리로 가기 위해 오후의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20번 국도를 달린다. 드디어 세간교가 나타나고 마을 입구에는 520년이 넘는 느티나무 노거수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나무 여기저기에서 세월 속에 겪은 갖은 풍상이 우러나왔고, 후대인이 붙여준 명찰은 현고수(懸鼓樹).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왜구가 침입하자 당시 41세의 유생이었던 곽재우는 4월 22일 이 느티나무에 큰북을 매달아 치면서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다고 한다. 새로 복원된 생가는 여기서 조금 떨어져 있었는데 조선 초기 건축 양식으로 안채 사랑채 별당 대문간 등 7개의 건물로 단장되어 있었다. 나오다 보니 생가 앞에도 역시 은행나무 노거수 한 그루가 마을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었다. 곽재우는 의령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조부는 부사(府使)였고, 부친은 관찰사(觀察使)를 지냈으니 이 정도면 사대부의 세도가 집안이라 할 만하다. 그는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지니고 있던 많은 재산을 거침없이 내놓았다고 한다. 요즘 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이다.
# 백산상회 세워 독립자금 모은 안희제 선생
백산 안희제(오른쪽) 선생의 생가- 목조 기와집 안채와 초가 사랑채 2동이다.백산은 백범 김구와 백야 김좌진과 함께 '삼백'으로 불린다. |
이어서 백산(白山) 안희제의 생가로 향했다. 임진왜란에 곽재우가 있었다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는 안희제였다. 백산은 부산과 인연이 깊다. 그러한 사유로 부산 중앙동에 백산기념관, 용두산공원에 흉상이 서 있다. 생가는 의령군 부림면 입산마을에 있다. 건물은 목조 기와집인 안채와 초가인 사랑채 2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 중앙 마루 위에는 백산고가(白山古家)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백산 선생은 1914년 부산에 사무소를 둔 백산상회를 설립·경영하면서 실제로는 독립운동 자금 마련 및 항일투쟁을 위한 비밀공작원의 연락거점 역할을 했다. 1943년 순국할 때까지 평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한 애국자였다. 백범(白凡) 김구 선생, 백야(白冶) 김좌진 장군, 여기에 백산 안희제 선생까지 이렇게 세 사람을 두고 삼백(三白)으로 부르기도 한다. 훗날 백산이 세상을 떠나고 백범 김구 선생이 경주 최부자를 만나 독립자금과 그에 관련된 영수증을 보여주며 고마움을 전하게 되었는데, 당시 백산에게 전달했던 자금과 영수증은 한 푼도 오차가 나지 않을 정도로 정확했다는 일화에서 선생의 일면을 엿볼 수가 있다.
# 개인이 세운 힐링수목원·부채박물관도
어느 나라, 어느 고을마다 그 지역을 대표하는 진산이 있다. 의령에선 자굴산(해발 897m)이 그 역할을 한다. 이 산의 동남 기슭에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숲 속의 '힐링' 수목원인 자굴산치유수목원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수목원이 총 46개소가 있는데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것이 23개소, 개인이 운영하는 사립수목원이 20개소, 대학교의 학교수목원이 3개소다. 자굴산치유수목원은 개인이 운영하는 수목원이다. 지금부터 11년 전 부산에서 조림사업을 하던 일준(一駿) 이일원 선생이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이곳 자굴산 2만 평의 산자락에 수목원을 열었다. 식물을 통해 자연의 생태환경을 보존하고 그것의 소중함을 가르치면서 생의 활력이 되도록 '인생이모작'을 이곳에서 거둔 것이다. 가례면 지방도로를 따라 면사무소를 조금 지나니 수목원 표지판이 나타났다. 도로변 공용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20여 분 등산로와 같은 숲길을 오른다. 자연의 훼손이 없이 경사도를 그대로 살려서 식물의 군락상태를 관찰하게 되어 있었다. 이곳에는 난대식물과 한대식물 1400여 종을 비롯해 13만6000그루의 수목이 자라고 있다.
오후 늦은 시간이어서 그런지 수목원은 한가했다. 그런데 숲 속에 웬 유별난 하얀 건물이 하나 서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일준부채박물관. 무슨 연유로 이곳 숲 속에 부채만이 전시된 특수박물관을 만들어 놓았을까. 사연이 궁금했다. 일준 선생은 20여 년간 취미 삼아 부채를 하나둘 수집했다. 부채는 그 시대 그 나라의 문화가 집약된 예술품으로서 휴대보관이 용이하고 큰 공간이 필요없었기 때문에 더욱 선망의 대상이 되어 수집을 했다고 한다. 소장품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국 일본 등의 부채 600여 점이며, 1·2층을 조선유물전시관 근현대전시관 외국관 등 3개의 테마 전시관으로 꾸몄다. 조그만 부채 하나에 1000만 원이 넘는 고가품도 있어 아무나 섣불리 다가설 수집품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화단의 주역인 이상범, 천경자를 비롯해서 김은호, 변관식, 남농 선생 등의 그림이 그려진 부채도 진열되어 있다. 더위를 식히기 위해 바람을 일으키고, 때로는 얼굴 가리개용으로, 위험 시에는 방어기능으로 사용되었다는 부채. 인간이 개발한 생활문화도구로서 오랜 역사를 지닌 다양한 부채를 이렇게 자연 숲 속 치유공간에서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가죽을 남긴다고 했다. 사람이 살아서 어떤 일을 했을 때 후세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길 수 있을까. 임진왜란 때 홍의장군 곽재우는 직접 왜군과 싸운 용장으로서 고을을 지켰다면, 독립운동가인 백산 선생은 독립운동을 위해 뒤에서 자금지원이나 조직원을 관리하는 역할을 했다. 호암은 사업보국 인재제일 합리추구라는 경영철학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최고의 갑부가 되었다면, 관정은 벌어들인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그리고 일준은 수목원을 통해서 식물자원의 보존가치와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부채라는 예술자원을 수집하여 후대에 전해주는 문화전령사 역할을 하고 있다. 이번 의령여행을 통해서 이들의 생가를 비롯한 삶의 흔적이 묻어 있는 현장을 둘러봄으로써 내 인생을 새롭게 반추해 보는 시간이 되었다.
이용득 부산세관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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