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첫날 저녁에 피아노 소나타 리사이틀이 열렸다. 어둠을 밝히는 불빛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하는 행복한 시각에 베토벤 소나타 32곡 전곡연주를 위한 첫 번째 연주회였다. 싱그러운 계절에 아트뱅크코레아(대표 김문준) 주최로 피아니스트 박정희 피아노 리사이틀이 금정문화회관 대공연장을 주옥같은 선율로 가득 채우며 신록과 앙상블을 이루었다. 귀에 익은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과 3번, 22번, 그리고 피아노 소나타 23번 F단조 작품57 '열정‘을 들었다. 부산의 피아니스트 박정희는 이번 연주회를 시작으로 베토벤의 탄생 250주년이 되는 2020년까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회를 4곡씩 묶어 8회의 연주회를 갖기로 했다. '건반의 구도자' 백건우, '베토벤 스페셜리스트'로 꼽히는 프랑스 피아니스트 프랑수아 프레데리크, 차세대를 이끌고 빛낼 피아니스트로 주목받는 김다솔 등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회가 열리는 가운데 부산에서도 피아니스트 박정희의 연주회가 열렸다. 그는 일찍이 부산MBC 음악콩쿠르 최연소 1위로 부산과 인연을 맺은 이후 2013년부터는 오랜 유학 끝에 동아대 음악학과 교수로 부임하면서 다시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동안 독주회는 물론 자매 피아니스트 박미정과의 '소리나 피아노 듀오'와 피아노 3중주 '트리오 피아체' 등으로 관객을 만나 향기로운 여운을 남겼다.
올해는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지 190년이 되는 해다. 세계 곳곳에서는 그의 생몰(生沒)을 기리는 연주회가 마련되고 있다. 칸타타가 ‘노래하다’를 뜻하는 cantare에서 생긴 것과 마찬가지로 소나타는 ‘울려 퍼지다, 연주하다’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동사 sonare의 과거분사형 명사다. 고전파 시대의 소나타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이 대표하는 빈 고전파의 작곡가들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음악사는 정리한다. 소나타는 보통 빠르기나 성격을 달리하는 2~4악장으로 구성된다. 소나타는 성악곡에 대응하는 기악곡의 통칭이다. 흔히 J.S.바흐의《평균율 피아노곡집》을《구약성서》라고 부르는데 비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2곡을 두고 피아노음악의《신약성서》라고 비유한다. 베토벤이 작곡한 32곡의 피아노 소나타는 건반악기를 위해 작곡된 음악 가운데 가장 방대하고 위대한 유산이라는 평가다. 32곡의 소나타 중 어느 한 곡도 그 수준이 떨어진다고 할 수 없지만 그 중에서도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세 곡을 '3대 소나타'라고 일컫는 8번 ‘비창’과 14번 ‘월광’, 23번 ‘열정’이다. 8번은 베토벤 자신이 "비창적 대 소나타(Grande Sonate pathetique)"라고 명명했으나 그 이외에는 작곡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출판과정에서 선전술로 붙여진 것이다.
부산 출신 피아니스트 박정희(44)는 선화예술학교, 선화예고, 서울대학교 음대를 졸업하고, 미국 보스턴 뉴잉글랜드 음악원, 론지 음악원, 보스턴대학교 등에서 공부하며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내외 여러 콩쿠르에서 입상하며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2012년 금호아트홀 독주회 이후 다양한 레퍼토리로 부산과 서울에서 연주회를 열고 있다. 피아니스트 박정희에게 베토벤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 그는 인터뷰에서 "7, 8살 때부터 베토벤을 너무 좋아해서 '이 사람의 무덤이라도 찾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선명하다"고 말한다. "그때 뭘 알고 그렇게 좋아했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엄청난 고난을 겪으면서도 이런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낸 베토벤의 힘은 지금도 저에게 느껴져요. 베토벤은 도전과 정복의 대상이 될 수 없어요. 충실한 매개자로서 그의 옆에서 우리 삶을 들여다보고 느낀 것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을 뿐입니다."라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서 베토벤은 사피오섹슈얼(sapiosexual)의 대상이었나 보다. 그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에 나선 건 클래식 공연기획사 아트뱅크코레아 김문준 대표의 영향 또한 컸다고 한다. 그는 "어떤 형태의 연주회를 갖더라도 연주회가 끝나고 며칠 동안은 화제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준비한다.“고 말했다. 부산에서도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완주한 피아니스트의 탄생을 기다린다.
연주회 이후 귀에 익은 소나타곡의 모티브 멜로디를 흥얼거린다. 리사이틀의 전반부 첫 곡으로 연주한 피아노 소나타 8번, C단조, op.13 "비창"은 3악장으로 구성되었다. 처음 듣는 순간부터 곡이 끝날 때 까지 한 순간도 귀를 뗄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선율은 충격적이었다. 명쾌하고 왼손의 반주도 극히 단순하다. 두터운 화음도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곡의 구성이 너무나 극적이고, 맹렬한 분위기와 감미로운 노래, 연주의 기교를 상회하는 압도적인 연주효과로 산뜻한 효과가 대중적인 인기를 차지하기에 충분했다. 8번 소나타가 파격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1악장의 제시부 앞에 커다란 서주가 붙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곡의 제목인 '비창 (혹은 비애)'라는 말은 이 서주의 분위기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두 번째 곡 소나타 3번은 4악장으로 이어졌다. 1악장은 약박의 강조와 급격한 악상의 대조로 오케스트라적인 풍부함을 표현함으로써 베토벤만의 극적 효과를 나타내고 2악장은 시적인 느낌이 깊어 조용하고 부드러운 악장이다. 3악장은 속력을 내어 뛰는 듯 동적 감정을 느끼게 하고 마지막 4악장은 화려한 기교와 즐겁고 경쾌한 분위기에 빠져들게 했다.
후반부 첫 곡은 피아노 소나타 22번 F장조로 21번 ‘발트슈타인’과 23번 ‘열정’ 사이에 놓였다고 흔히 ‘불쌍한 소나타'라고 불리는 곡이다. 1악장은 아름다운 미뉴에트 풍의 제1주제와 야수 같은 제2주제가 교대로 반복하면서 전개한다. 2악장은 경쾌하고 환상적 분위기를 혼합한 악장으로 마지막 부분에서는 분위기를 최고조로 끌어올려 끝맺었다. 두 번째 곡은 피아노 소나타 23번, F단조, op.57 "열정"으로 베토벤의 모든 피아노 소나타곡 가운데 완성도가 가장 높은 작품으로 알려진 곡이다. 이 소나타는 마치 정열적인 기분을 가지고 격한 감정으로 외치듯 노래하는 1악장은 첫머리부터 팽팽한 긴장감의 연속이다. 마지막으로 급격히 힘을 죽이면서 다시 숨 막히는 고요 속에 악장을 끝맺는다. 폭풍우가 휘몰아치듯 열정은 자취를 감추고 정적과 평화롭고 아름다운 2악장을 거쳐 팡파레 같은 강한 도입부로 시작하는 불꽃 튀는 듯 정열을 뿜어내는 3악장으로 이어진다. 1악장과 2악장은 주제와 변주를 거치면서 음악이 가지는 깊이의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다. 단정하게 정돈된 분위기 속에서 엄숙하게 주제가 제시되고 변주를 거듭해 나갈수록 음악은 고조되며 뒤로 갈수록 음악적인 감흥이 넘친다. 악장의 종결에 이를수록 차오르는 행복감을 참기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