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용석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사무총장)
청소년 시절, 성모성월이면 고향 성당에서 저녁마다 '성모호칭기도'를 한 항목씩 묵상하고 묵주기도를 바쳤던 생각이 난다. 그때 나는 성모님을 통한 묵주기도의 은총을 배웠다.
또 묵주기도성월이면 매일 묵주기도를 빼먹지 않으려고 성당 문이 열리기 전에 성당에 가 성모상 앞에서 묵주기도를 바치고서 미사에 참례한 다음 학교에 갔다. 누나가 어둠 속에 집을 나서는 나를 보고 '성당 귀신'이라고 불렀을 만큼 묵주기도를 바치는 데 열성적이었다.
묵주기도에 대한 나의 이런 열성은 어렸을 때 본당 수녀님으로부터 들은 한 이야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묵주기도의 기적 이야기는 많지만 내게 묵주를 '영생의 구슬 줄'이라 믿게 해주고, 한평생 묵주와 동행을 시작하게 해 준 것이 그때 들은 이야기다. 들은 지 6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한 신심 깊은 홀어머니와 부랑아 아들이다. 불량배들과 어울려 집을 나갔다가 어쩌다 한 번씩 집에 들르는 아들의 호주머니에 어머니는 늘 묵주를 넣어주곤 했다. 무던히도 어머니 속을 썩이는 아들이었지만, 자기를 위해 열성껏 묵주기도를 바치는 어머니 모습을 못 잊어서인지 아니면 어머니가 넣어준 묵주에서 따듯한 모정을 느껴서 그랬던지 그는 늘 손에 묵주를 들고 다녔다.
그러던 그가 부랑배들 패싸움에 휘말려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다.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을 비통해하며 몇 날 밤을 지새워 묵주기도를 바치다 잠이 들었다. 그때 꿈에 성모님께서 나타나 말씀하셨다.
"네 아들이 비록 묵주기도를 바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손에서 묵주를 놓지 않았던 것만으로도 그를 지옥에 빠지도록 내버려둘 수 없어 네 아들 손을 잡아주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날부터 내 손에 묵주가 없는 날은 거의 없었다. 처음에는 나도 그냥 묵주를 들고만 다녔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뒤 성모신심과 묵주기도 묵상법을 배우면서 열성이 더해졌다. 짬이 날 때마다 쉽게 할 수 있는 기도이면서도, 미사 다음으로 힘 있는 기도임을 알게 되면서 묵주기도는 내 신앙의 큰 버팀목이 됐다.
묵주기도를 제대로 안 뒤부터 내 삶에서 지루한 시간은 없다. 사람을 기다릴 때, 차를 탈 때, 걸을 때나 운동할 때도 혼자일 때는 언제나 묵주기도를 한다. 내게는 기도해줘야 할 분이 많아서다. 돌아가신 부모와 조상을 비롯해 은인들과 또 나와 함께하는 이들, 살아서나 죽어서 고통 받거나 아무도 기도해주지 않는 이들이다. 이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지난 내 삶을 되돌아보건대, 그런대로 잘 살아온 것이 모두 고마운 분들의 보이거나 보이지 않은 도움 덕분임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묵주기도를 해야 할 일이 더 많아졌다. 평협에서 하는 '하느님의 종 순교자 124위와 증거자 최양업 신부의 시복시성을 위한 125억 단 묵주기도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또 본당에서는 설립 40주년을 맞아 냉담교우 회두와 가정과 세계 평화와 본당 발전을 지향하는 묵주기도 400만 단 바치기에 함께 한다.
이렇게 늘어난 지향 때문에 평소 하루에 20단을 바치던 나의 묵주기도 분량은 지금 두 배로 늘어나 있다. 이렇게 묵주기도를 하며 지하철에서 길에서 공원에서 묵주를 들고 있거나 묵주반지를 낀 분들을 볼 때면 반갑고 기쁘다. 그래서 지하철역에서 묵주를 들고 정성스럽게 기도하는 젊은 청년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그의 청을 주님께서 들어주시도록 기도한 적도 있다.
묵주는 신자임을 드러내는 좋은 표지이다. 우리도 초기 교회 신자들이 물고기 그림을 표지로 삼아 친교를 나눴듯, 묵주를 가진 사람을 보면 서로 미소 짓는 얼굴로 가벼운 인사를 나누면 좋지 않을까. 이것이 확산되면 친교 차원을 넘어, 세상을 밝게 하는 새로운 복음화의 큰 결실로 이어지리라는 생각이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