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고종 황제(1852~1919)가 러시아 짜르(황제) 니콜라이 2세(1868~1918) 대관식을 축하하며 보낸 외교 선물들이 무려 127년 만에 모스크바 크렘린 박물관(정확한 명칭은 모스크바 크렘린 박물관 무기고 로비, в Парадном вестибюле Оружейной палаты Музеев Московского Кремля)에서 공개됐다. 지난 10일 개막했으니, 벌써 1주일이 지났고, 오는 4월 19일까지 전시된다.
크렘린 박물관 모습(위)와 '한국과 (크렘린) 무기고' 전시회 포스터/홈페이지 캡처
이번 전시회가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2가지 측면에서다. 우선 '러시아의 권부'로 불리는 크렘린궁 안에 있는 몇개의 유명한 홀(건물)을 한꺼번에 묶어 부르는 '크렘린 박물관'에서 한국 특별전이 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또 공개된 작품 5점의 가치다. 당연히 세상에 처음 나온 것이다.
고종 황제가 이 선물들을 러시아에 보낸 것은 1896년. 120년 이상 크렘린의 무기고에 보관되어 있다가 복원 전문가들의 손을 거쳐 햇빛을 보게됐다.
타스 통신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모스크바 크렘린 박물관의 엘레나 가가리나 관장은 9일 개막식에서 "전시품들은 지난 2년간 다양한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에 의해 복원됐다"며 "이들 덕분 우리는 이 멋진 선물을, 1896년에 받았던 그 상태로 볼 수 있게 됐다"고 감사의 뜻을 표했다. 또 "이번 전시가 러시아와 한국의 역사적 관계를 시각적으로 확인하는 시간"이라고도 했다. 복원 작업에는 우리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2020년부터 자금을 댔다고 한다.
고종이 러시아에 선물한 ‘흑칠나전이층농’/사진출처:국외소재문화재재단
러시아인들의 눈길을 가장 먼저 사로잡을 작품은 ‘흑칠나전이층농’이다. 고종의 특명으로 당대 가장 뛰어난 나전 장인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은 농 하단부에 십장생(十長生) 문양 나전을 부착해 '니콜라이 2세'의 무병장수를 기원했다. 일본에는 1920년 실톱이 도입되면서 자개를 실처럼 잘게 잘라 붙이는 ‘끊음질’ 나전 기법이 유행했는데, 이 작품은 일본보다 30년이나 앞선다. 조선 공예사의 정수를 보여준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조선의 마지막 천재 화가로 불리는 장승업(1843~1897)의 걸작 2점도 처음으로 공개됐다. ‘고사인물도(故事人物畵·역사나 신화 속 인물과 관련된 일화를 그린 그림)’ 연작 4점 중 ‘노자출관도(老子出關圖)’와 ‘취태백도(醉太白圖)’다.
두 작품 모두 세로 174.3㎝ 가로 65㎝ 크기의 대작으로, 학계에서도 알려진 바가 없는 걸작이라고 한다. 그림 왼쪽 하단에는 ‘吾園 張承業(오원 장승업)’ 서명 앞에 ‘朝鮮(조선)’이라는 국호를 붙였다. 조선의 외교 선물이라는 뜻이다.
조선 후기 화가 장승업이 그린 ‘노자관출도’/사진출처:국외소재문화재재단
크렘린 박물관에 전시된 백동향로/KBS 영상 캡처
전시회에는 또 ‘진수영보(眞壽永寶·참다움과 장수, 영원한 보물)’를 새긴 ‘백동향로’ 2점도 관람객을 맞고 있다.
KBS에 따르면 개막식에 참석한 장호진 주러시아 대사는 "고종 황제가 대관식에 보낸 역사적인 품목들을 러시아 국민들에게 소개한다는 데 (이번 전시회가) 더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