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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천서당(月川書堂)
- 지정번호 : 경상북도기념물 제41호 (1982. 12. 1)
- 소 재 지 : 안동시 도산면 동부리 539
- 시 대 : 1539년(中宗34 己亥)創建
- 제 향 : 조 목(趙 穆: 工叅)
이 건물은 월천 조목 선생이 1539(중종 34)에 건립하여 후진을 지도하고 수학하던 서당이다. 현판은 퇴계 이황선생이 썼다. 월천 선생은 퇴계 선생의 제자이며 1552년(명종 7)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고, 여러 관직을 거쳐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선생은 원래 벼슬에 뜻이 없어 45차례에 걸쳐 배명이 내려졌으나 대부분은 나아가지 않아 40여년 동안 실제 봉직한 기간은 4년 남짓할 정도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는 의병을 모집, 동생과 두 아들들과 더불어 망우당 곽재우 공과 합세하여 국난극복에 앞장섰던 분이다. 퇴계 제자 가운데 1615년(광해군 7) 유일하게 도산서원 상덕사에 종향되었다.
월천 서당은 강안 산록 마을 뒤에 위치하였다. 국면이 좁으므로 흙담을 집에 가깝게 둘렀다. 전면은 낭떠러지 끝에 있어 문을 낼 수 없을 정도이어서 일각문이 서편에 설비되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一'자형 목조단층 와가로 중앙에는 2칸의 마루를 두고 좌․우에 통간방을 배치한 홑처마집이다. 기둥은 방주이며 흘림을 두고 그에 따라 벽선이 그렝이가 되었다. 두어칸 대청 전면의 문얼굴에는 당판문이 달렸는데 중하반에 널판지를 끼우고 윗부분엔 넉살무늬를 구성하였다. 쉽게 볼 수 없는 고형에 속한다. 대청의 좌측 방 북벽에 감실이 고미다락처럼 구성되어 있다. 신위를 봉안하게된 것이다. 가난한 선비가 가묘를 일으키는 법도로 허용되었던 방법이다.
전면과 측면에 쪽마루가 설치되었는데 그 반대편 측면과 배면에는 쪽마루가 없다. 대청 뒷벽에 머름을 들이고 바라지창을 달았다. 방의 뒷편엔 개구부가 없다. 질박한 구성법이다.
대청에는 우물마루가 깔렸는데 그 구성이 특이하다. 귀틀의 설치가 보통은 병행되는 법인데 이 건물의 귀틀은 병렬과 교차가 혼재하였다. 안통의 동귀틀이 도리에 병행되었는데 앞쪽에서는 동귀틀에 의지하고 다시 작은 귀틀은 만들어 보와 평행되게 하였다. 원형이 아닌 듯이 보인다. 1590년에 개수되었다고 하는데 현재의 건물은 훨씬 후대의 것으로 보인다.
○ 운곡서당
- 지정번호 :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176호(1986. 12. 11)
- 소 재 지 :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339
- 시 대 : 1669년(顯宗10 己酉)創建
- 제 향 : 김학배(金學培:號 錦翁)
이 건물은 금옹 김학배(錦翁 金學培)가 1669년(현종 10)에 옛집 위 시냇가에다 초가집 3칸을 얽어 '운계초당'이라 한데서 비롯된 운곡서당이다. 초당에는 주인이 이름 지은 졸수재․자이헌․서천․일감당․사우단․석도․상관문 등이 있었고, 자작시인 '운계초당팔절'을 남겼다.
운계초당은 금옹 사후 18년간 비어 있자 이에 고제인 적암공이 1690년(숙종 16) 수리하여 학문과 후진양성에 주력하였다. 후진들이 두 분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이를 계승하고자 힘을 모아 1761년(영조 37) 4월 서당을 중건했다.
의성김씨 천전종택을 지나 200여m 골 안쪽으로 들어가면 야산을 의지하여 서당이 배치되어 있다. 정면 4칸 중 가운데 2칸을 마루로 꾸미고 양 옆에 온돌방을 들였는데, 마루방과 한쪽 온돌방 앞에 툇마루를 깔고 원기둥을 세웠다.
대청 전면에 4분합 들어열개문을 달아 마루방으로 하였다. 5량가로 기둥위는 주두와 보아지로 결구하였고, 대량위는 주두와 보아지로 결구된 동자주를 세워 종량을 걸고 그 위에 제형 판대공을 세워 마루도리를 얹었다.
○ 유암서원(流巖書院: 祠)
- 소 재 지 : 안동시 와룡면 주하리
- 시 대 : 1761년(英祖37 辛巳)創建 後陞爲書院
- 제 향 : 이정백(李庭栢: 號樂琴軒 參奉)
안동시에서 도산서원 방면으로 안막재를 넘어 중앙선 철도 밑 국도를 지나 좌측편 명잣 방면 군도를 따라 이하역 앞길로 이상리 마을 뒤편 저수지 위 고개를 넘어 두루 마을 옆 산 밑 북향에 위치하며 안동시청에서 10km지점 진성이씨 경류정 종택 건너편에 소재함. 이 서원은 낙금헌 이정백(樂琴軒 李庭栢) 선생(1553~1600)을 祭享하기 위해 사림에서 세운 서원이다.
그 기원은 두루마을 남쪽 기슭에 퇴계 선생이 왕래하며 강학하던 서재에서 비롯한다.
그 후 동구 밖으로 옮겨 유암서당을 짓고 송계(松溪)선생(李亭男, 生員進士)과 송간(松澗)선생(李庭檜, 縣監),낙금헌 선생을 列享 하였다. 다시 두루마을 앞 지금의 서원자리에 移建하고 사림의 공의로 유암이사(流巖里社)가 되었다. 1787년 서원 훼철령에 따라 송계, 송간 양선생을 북후 물한에 소재하는 작산사(鵲山祠)로 移奉하고 낙금헌 선생 위패는 매판(埋板)한 뒤 묘우와 동서재는 모두 헐리게 되고 강당 10여간이 남아 청년강습 장소로 사용되었다.
100여년 지난 뒤 암고공(巖皐公, 李秀杰, 眞城人)의 발의로 복설을 추진하여 사림과 진성 이씨 후손들의 수연금(收捐金)으로 垈畓을 매입하고 동서재 2간과 존덕사, 전사청 등을 신축하여 유암서원으로 승격하고 낙금헌 선생을 제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낙금헌 선생은 1553년 와룡면 주하리 진성이씨 慶流亭 종택에서 출생하고 36세에 式年司馬試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으며 40세인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분연히 倡義하여 대장에 추대됨. 열읍향병이 예천 용궁에 이르러 대장자리를 金垓公(號 近始齊, 承文院 正字)에게 양여하고 裴龍吉公(號 琴易堂, 翰林)과 좌우 부장으로 협모함.
안동, 예천, 상주, 의성, 군위 등지에서 많은 전공을 거둠. 이듬해 밀양으로 이진하고 응천, 경주 등지에서 왜군을 물리치던 중 2년간의 전란으로 인하여 병을 얻고 가마에 실려 돌아옴.
서애 선생이 공의 행의를 조정에 천거하여 慶基殿 參奉에 제수하였으나 전란에 임하여 구차하게 죽음을 면하고 관직을 받는 것을 부끄러이 여기고 나아가지 아니함. 만년에 강학을 위해 집 남쪽에 小齊를 지어 樂琴軒이라 扁額하고 自號로 삼았으며 거문고를 벗삼아 안분양병함.
서원 건너편 경류정 종택(경북 민속자료 72호) 앞에 세종조 때 영변판관을 지낸 李禎公(선산도호부사, 중이조참판)이 평안도 약산에서 옮겨심은 600년된 뚝향나무(천연기념물 314호)가 있다.
○ 은곡서당
- 지정번호 :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36호(1973. 8. 31)
- 소 재 지 : 안동시 송천동 337-3
- 시 대 : 1537년(中宗32 丁酉)創建
- 제 향 : 박 진(朴 璡: 號隱谷)
이 건물은 1537년(중종 32) 은곡 박진(隱谷 朴璡 1477~1566)이 건립한 서당이다. 오랫동안 황폐해 있던 것을 1645년(인조 23) 유림에 의하여 중건되었고 1974년 12월에 안동댐 수몰로 임하면 천전동에서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서당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一자형 평면을 이룬 단층 팔작기와집이며, 정면에 부속채롤 지어진 살림채는 정면 7칸, 좌우 측면 3칸의 'ᄃ'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어 전체의 구성을 보면 튼 口자형을 이루었다.
서당의 짜임새는 매우 질박견실하며 모든 부재의 규격은 굵직하고 단단하며 특히 대청 전면의 네모기둥은 파격적으로 굵은 것이어서 매우 장중한 느낌을 주는 것이 큰 특색이다. 양편에 온돌이 있으며 가운데가 4칸 대청을 이루었으나 서쪽 온돌은 전면으로 반칸 남짓 줄여서 약간의 여유있는 툇마루를 두었다. 전면 마루끝에는 오르내리는 디딤돌 부분만 터 놓고 一자로 궁창난간을 길게 부설하였다.
아랫채는 대문칸을 중심으로 안방격인 긴 2통칸의 온돌방과 부엌, 헛간, 외양간, 사랑방과 사랑마루, 광 등이 꾸며져 있는데 아랫채에 이와같은 큰 살림 중심의 성격을 띤 공간을 구성하는 것은 보기 어려운 예다. 이는 서당중심이라는 관념 때문에 보통은 행랑채의 위치에 해당하는 공간에 내당(內堂)의 기능을 이행시킨 특수한 사정에 연유한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규모의 서당은 후에 유림의 발기로 계속 개건 유지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규모가 비교적 큰편에 속하는 것으로서 일종 정사에 근사한 성격의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 임천서원(臨川書院)
- 지정번호 :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16호(1985. 8. 5)
- 소 재 지 : 안동시 송현동 740
- 시 대 : 1607년(宣祖40 丁未)創建 臨川鄕祠 1618년(光海10 戊午)陞爲書院.
- 제 향 : 김성일(金誠一: 號鶴峯 監司 贈吏判 諡文忠).
이 건물은 학봉 김성일(鶴峰 金誠一)(1538~1593)의 도학을 숭앙하여 1607년(선조 40) 임하현에 건립하였으나 1620년(광해군 12) 위패를 여강서원에 배향함에 따라 주원이 폐지된 임천서원의 강당이다. 1847년(헌종 13) 사림에서 주원을 석문정사 서쪽 엄곡에 복설하였으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뒤에 유림의 공의로 1908년 현 위치 속칭 호암마을에 중건하여 이듬해에 그의 위패를 묘우인 숭정사에 봉안하여 춘추로 제향하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 팔작지붕, 와가로 자연석 기단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그 위에 각주를 세웠다. 우물마루 상부는 5량가로 비교적 건실한 수법을 사용했고 주두에 대들보 놓고 동자기둥을 세웠고 동자주두에 걸친 종보위 마루대에 포대공 끼워 장식하고 있다. 대청(정면 3칸, 측면 2칸)을 중심으로 해서 좌우에 통칸온돌방이 드리워져 있다.
경내에는 묘우를 비롯하여 동서재, 강당, 전사청, 주사 등 건물이 있다.
임천서원은 1607년(선조 40)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김성일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18년(광해군 10)에 '임천'이라 사액되어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08년에 복원하였다. 이 서원의 경내 건물로는 숭정사, 홍교당, 동재, 서재, 신문, 전사청 등이 있다. 숭정사는 정면 3칸 건물에 맞배지붕 양식이고 홍교당은 15칸에 팔작지붕이다. 동재와 서재는 각 4 칸이고 팔작지붕이다. 그리고 신문과 전사청은 4칸이며 맞배지붕이다. 사당인 숭정사에는 김성일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인 홍교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 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이 기거하면서 공부하는 곳이며 주소는 서원을 관리하는 고자가 사용하고 있다. 이 서원의 강당인 홍교당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6호로 지정되어 있다. 김성일(1538~1593)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의성이고 자는 사순이며 호는 학봉이다. 선생의 아버지는 진이다. 선생은 이황 선생의 문인인데 1556년(명종 11)에 아 우 복일과 함께 도산의 이황 선생을 찾아 <서경>, <역학계몽>, <심경>, <대학의의> 등을 익혔으며, 1564년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그후 다시 도산에 돌아와 이황 선생에게서 수학하고, 그로부터 요순 이래 성현이 전한 심법을 적은 병명을 받았다. 1568년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사가 되고, 이듬해 정자가 되었다. 이 어서 검열, 대교 등을 거쳐 1572년 봉교가 되어 노산묘를 노릉(단종의 능)으로 봉축하고 사육신의 관작을 회복시켜 그들의 후손을 녹용토록 진언하였으며, 군덕과 시폐를 논의하 였다. 이듬해 전적과 형조, 예조의 좌랑을 거쳐 정언이 되었고, 이어서 홍문관수찬으로 지제교,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다. 1574년 부수찬을 거쳐 다시 정언이 되어 변장으로부터 초피덧저고리를 뇌물로 받은 우의정 노수신을 탄핵하였다. 이듬해 이조, 병 조의 좌랑을 역임하고 사가독서를 하였다. 1577년 사은사 서정관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종계변무를 위해 노력하였으며, 돌아와 이듬해 홍문과 교리가 되고, 이어서 장령, 검상, 사인 등을 역임하였다. 1580년 함경도 순무어사로 함흥, 삼수, 길주, 종성 등을 살피고 돌아 와, 변장으로서 직무에 충실한 혜산첨사 김수를 당상관에 승품하고, 영건만호, 우응장과 정 견용, 김광옥 등을 선전관에 기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선생이 1583년 사간이 되고, 이어서 황해도 순무어사로 다녀와 군기관리를 소홀히 하고 창곡을 부실하게 한 황주목사 윤인함의 파직을 건의하였다. 이듬해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민원의 처리에 노력하고, 오랫동안 끌어온 이 고을 임씨, 나씨간의 송사를 해결하는등 선정 을 베풀었다. 또한, 금성산 기슭에 대곡서원을 세우고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등을 제향하는 한편 선비들을 학문에 전념하게 하였다. 1586년 나주 사직단의 화재 에 책임을 지고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주자서절요>, <자성록>, <퇴계집> 등을 편 찬, 간행하였다. 1588년 종부시첨정이 되고, 이어서 봉상시정, 경기추쇄경차관, 예빈시정, 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590년 통신부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이듬해 돌아와 일본의 국정을 복명할 때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 이라는 정사 황윤길과 달리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하여 왜가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상반된 견해를 밝혔다. 그 해 부호군에 이어 대사성이 되어 부제조를 겸하였고, 홍문관 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592 년 형조참의를 거쳐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재직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일의 복명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 서울로 소환 중, 허물을 씻고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을 간 청하는 류성룡 등의 변호로 직산에서 경상우도초유사로 임명되어 다시 경상도로 향하였 다. 의병장 곽재우를 도와 의병활동을 고무하는 한편, 함양, 산음, 단성, 삼가, 거창, 합천 등지를 돌며 의병을 규합하는 동시에 각 고을에 소모관을 보내어 의병을 모았다. 또한 관군과 의병 사이를 조화시켜 전투력을 강화하는데 노력하였다. 그 해 8월 경상도관찰사 에 임명되었다가 곧 우도관찰사로 다시 돌아와 우병규합, 군량이 확보에 전념하였다. 또 한 진주목사 김시민으로 하여금 의병장들과 협력, 왜군의 침입으로부터 진주성을 보전하게 하였다 1593년 경상우도순찰사를 겸하여 도내 각 고을의 항왜전을 독려하다가 병으로 죽었다. 선생은 정치적으로 동인에 가담, 1590년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옥사한 최영경 의 신원을 위해 서인의 영수 정철을 규탄하였으며, 그 후 동인이 남인, 북인으로 갈릴 때 류성룡, 김우옹 등과 입장을 같이하여 남인을 이루었다. 또 학문적으로는 이황의 고제로 서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주리론을 계승하여 영남학파의 중추 구실을 하였으며, 학통은 장흥효-이현일-이재-이상정으로 이어 전해졌다. 또한 예학에도 밝아 아버지의 상을 당하 여서는 모든 예절을 가리에 따라 행하였으며 <두씨통전>, <구씨의절>, <향교례즙> 등 을 참고하여 <상례고증>을 지었다. 1614년에 신도비가 세워지고, 안동의 호계서원, 사빈 서원, 영양의 영산서원, 의성의 빙계서원, 하동의 영계서원, 청송의 송학서원, 나주의 경 현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해사록>, <상례고증>등이 있으며, 1649년(인조 27) 에 문집으로 <학봉집>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선생은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충이다.
○ 임호서당
- 소 재 지 : 안동시 임하면 임하리 912-2
- 시 대 : 1981년 移建
- 제 향 : 김용(金涌: 號 雲川)
운천(雲川) 김용(金涌) 선생을 제향하던 서원이었다. 당초 인천서원 구지(舊址) 옆에 강당을 세워 운천 선생을 제향했는데, 1981년 현 위치로 이건했다.
○ 지산서당(芝山書堂)
- 지정번호 :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49호(1985. 8. 5)
- 소 재 지 : 안동시 임동면 박곡리 산 769
- 시 대 : 1800년(正祖24 庚申)創建
- 제 향 : 김방걸(金邦杰: 號芝村 大司憲)
이 건물은 숙종 때 대사헌을 지낸 지촌 김방걸(芝村 金邦杰)선생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1800년(정조 24) 후손 및 지방사림의 발의로 건립된 지산서당이다.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어 1926년 복원된 바 있으나 임하댐 건설로 말미암아 1987년 임동면 망천동(輞川洞)에서 현재의 자리로 이건 되었다.
남서향이며 정면 5칸, 측면 2칸반의 전퇴칸을 둔 중당 협실형이다. 중앙 마루방을 중심으로 좌우퇴칸에 온돌방이 배치되고 사면에 퇴를 두었다. 그리고 마루전면에 4분합들문을 달아 폐쇄된 마루방을 만들고 방과 마루 사이에 4분합들문을 두어 공간을 넓게 쓸 수있도록 하였다.
2고주 5량으로 대들보를 고주에 걸치고 종량을 받게 한 후 원형판대공을 세워 마룻도리를 지지케 하였다. 건물전면은 2익공양식을 취하고 있으며 살미위에 봉두를 얹었다.
그리고 나머지 살미도 앙서와 수서를 겹쳐 놓은 모양으로 새김하고 주칸은 복화반으로 처마도리를 받게 하였다. 일제시대에 복원된 건축물로서 수법이 매우 치밀하고 짜임새가 있다.
○ 창열서원(彰烈書院)
- 소 재 지 : 안동시 서후면 이개리
- 시 대 : 1804(純祖4년 乙丑)創建 彰烈祠 後陞爲書院.
- 제 향 : 하위지(河緯地: 號丹溪 禮叅 贈吏判 諡忠烈 端宗癸亥賢).
창열서원은 사육신 중 한 사람인 단계 하위지 선생의 학문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였다. 1804(순조 4)년에 창열사를 지어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였고, 1809년(순조 9)에 안동시 서후면 송야리에 창건하였다.
그 뒤 사림의 중의로 안동시 서후면 이개리로 이건해서 춘추향을 받들어오다가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1989년에 사림과 후손들에 의해 현 위치에 복설되어 매년 음력 9월 2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창열사, 4칸의 숭열당, 3칸의 성안재, 2칸의 전사청, 3칸의 신문, 3 칸의 유의문 등이 있다. 사당인 창열사에는 단계 선생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강당인 숭열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3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장소로 사용된다. 성인재는 기숙사로 향사 및 원내의 행사시에 제관과 유림들이 기거한다. 신문은 사당의 대문으로 향사시 제관의 출입문으로 사용되며, 유의문은 서원의 대문이다.
하위지(1412~1456) 선생은 군수 담의 아들로 자가 천장, 중장이며 선산 출신으로 본관은 진주이다. 어릴때부터 남들이 얼굴을 모를 정도로 형 강지와 함께 학문에 정진하였다 한다. 1453년(세종 17)에 생원이 되고, 1438년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집현전 부수찬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자 세종이 약을 내려 고향에 가서 치료하게 하고, 경상감사에게도 전지하여 그의 구료를 하게 하였다. 1444년 집현전 부교리가 되어 <<오례의주>>의 상정에 참여하였다. 1446년 동복현감으로 있던 형 강지가 모함을 당하여 전라 감옥에 갇혀 병이 위독하자 관직을 사임하고 전라도로 내려가서 형의 병을 간호하였다. 그 뒤 1448년 집현전 교리로 복직되고, 이듬해 춘추관의 사관으로 <<고려사>>의 개찬에 참여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 세종때부터 왕을 보좌하여 훌륭한 치적을 쌓은 관계로 문종이 즉위하자 장령에 임명되었다. 선생의 강직한 기개는 이 때부터 펴져지기 시작하였다. 선생은 대간의 직분으로 권세에 굴함이 없이 직언을 꺼리지 않았다. 한때, 대신들의 실정을 적극 공격하다가 왕과 대신들로부터 반격을 받았으나 승지 정이한 과 정창손 선생등의 비호로 무사하기도 하였다. 1453년 (단종 1) 장령에서 집의로 승진하였다. 이해에 문종때 <<역대병요>>와 병서의 수찬에 참여하였던 집현전 학사를 수양대군이 앞장서서 가자시킬 것을 논계하자 이를 반대하였다. 선생은 서적의 수찬 사업은 집현전 본래의 업무이므로 하등 가자될 이유가 없음을 들어 자신이 가자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또한 이 일을 수양대군이 나서서 처리하는데 대해서도 반대하였다. 즉, 관직을 내리고 상을 주는 것은 국가의 공기이므로 경솔히 시행할 수가 없다고 주장하였고, 따라서 종신의 신분으로 사은을 베풀려는 수양대군의 처사는 매우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선생은 자신의 직책이 의리상 불가하다고 청하여 집현전 직제학에 전보되었다. 그러자 사직을 한 뒤 신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경상도 영산의 온정 에 내려갔다. 그 뒤 1454년 집현전 부제학으로 다시 복직되자 대궐 옆에 있는 불당이 왕실에 이롭지 못 함을 들어 이를 훼철할 것을 주장하였다. 한편, 이해에 <세종실록>을 편찬하는데 편수관으로 참여 하였고, 경연에서 시강관으로 왕에게 경사를 강론하였다. 이듬해 집현전 부제학에서 예조참판에 승진되었으며, 곧이어 세자우부빈객을 겸하게 되었다. 세조의 즉위후 선생에게 교서를 내리는 등 잇단 부름을 받아 예조참판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선생의 본뜻은 진실로 단종을 위 하는 일에 있었기 때문에 세조의 녹을 먹는 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세조가 즉위한 해부터의 봉 록은 따로 한 방에 쌓아두고 먹지를 않았다 한다. 한편으로는 세조의 강권정치에 맞서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추국의 명을 받기도 하였다. 즉, 세조가 즉위하자 왕권강화책으로 종전부터 시행하던 의정부 본래의 권한인 서사제를 폐지시키고 육조의 관장사무를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직접 왕에게 상계하는 육조직계제를 시행하여 의정부의 권한을 축소시켰다. 이러한 세조의 조처에 고대 주나라 제도를 들어 의정부 서사제의 부활 을 강력히 주장하였던 것이다. 1456(세조 2)년에 사예 김질의 고변으로 단종복위 운동이 탄로나 선생도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국문을 받게 되었다. 선생은 국문을 받으면서 세조에게 이르기를 "이미 나에게 반역의 죄명을 씌웠으니 그 죄는 마땅히 주살하면 될텐데, 다시 무엇을 묻겠단 말이요"하였다. 선생은 국문과정에서 성삼문 선생등이 당한 작형을 당하지는 않았으나, 사육신 등 여러 절신과 함께 거열형을 당하였다. 선생이 처형되자 선산에 있던 두 아들 호와 박도 연좌 되어 사형을 받았다. 작은 아들 박은 어린 나이였으나 죽음앞에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한다. 그는 금부도사에게 어머니와 결별하기를 청하여 이를 허락하자 어머니에게 "죽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아버님이 이미 살해 되셨으니 홀로 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시집갈 누이동생은 비록 천비가 되더라도 어머님은 부인의 의를 지켜 한 남편만을 섬겨야 될 줄로 압니다."고 하직한 뒤 죽음을 받자 세상 사람들이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하면서 감탄하였다 한다. 뒤에 남 효온 선생은 <<추강집>>의 <육신전>에서 선생의 인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평한 바가 있다. "그 는 사람됨이 침착하고 조용하였으며, 말이 적어 하는 말은 버릴 것이 없었다. 그리고 공손하고 예절이 밝아 대궐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렸고, 비가 와서 길바닥에 비록 물이 고였더라도 그 질펀한 길을 피하기 위하여 금지된 길로 다니지 않았다 한다. 또한, 세종이 양성한 인재가 문종 때에 이르러 한창 성하여졌는데, 그 당시의 인물을 논할 때는 그를 높여 우두머리로 삼게 된다"고 평하였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노량진의 민절서원, 영월의 창절사, 선산의 월암서원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열이다.
○ 청성서원(靑城書院)
- 지정번호 :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3호(1985. 8. 5)
- 소 재 지 : 안동시 풍산읍 막곡리 159
- 시 대 : 1608년(宣祖41 戊申)創建
- 제 향 : 권호문(權好文: 號松巖 內侍敎官).
이 서원은 조선중기 학자인 송암 권호문(松巖 權好文 1532∼1587)선생을 추모하는 서원이다.
1608년(선조 41) 사림의 발의로 연어헌지(鳶魚軒址)에 창건하여 1612년(광해군 4)에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를 지내오다가 1767년(영조 43) 현위치로 이건하였다.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1909년 복설하여 매년 2월과 8월 하정일에 향사를 올리고 있다.
강당, 동서재, 정도문(正導門), 청풍사(淸風祠), 전사청, 신문 등 모두 7동의 건물이 배치되어있다.
○ 타양서원
- 소 재 지 :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
- 시 대 : 1742년(英祖18 壬戌)創建
- 제 향 : 손흥량(孫洪亮: 號竹石 高麗文人 府院君 諡정평)
김자수(號 상촌 高麗文臣)
류중암(號 파산)
이 서원은 1742년(영조 18)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창건되어 정평공 손흥량 선생과 상촌 김자수 선생, 파산 류중암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그들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페령에 의해 훼철되어 서원이 폐쇄되자 그 유적지인 송리 뒷산에 설단하여 향사를 지내왔다. 그 후 1948년 다시 지방 유림과 자손들이 발의하여 복설된 후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서원 내의 건물로는 6칸의 상현사, 10칸의 성경당, 정면 2칸의 전사청, 3칸의 동재, 대문, 주소 등이 있다. 상현사는 묘우로서 주향인 손흥량 선생과 배향인 김자수 선생 및 류중손 선생의 위패 가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전사청은 향사 때에 사용할 제물을 보관하는 곳이며 동재인 진수재는 유생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는 곳이다. 성경당은 강당으로서 중앙의 마루와 양쪽의 협실로 이루어 져 있는데 동쪽에 있는 것은 사의재이고 서쪽에 있는 것은 숭모재이다. 이곳은 서원의 여러 행사 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강론 장소로 사용된다. 그리고 이 서원의 대문에는 경앙문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이 서원의 주향인 손흥량(1287~1379) 선생은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일직이다. 본래의 성은 순씨였으나 현종의 이름과 같아서 그것을 피해 5대조 응 때 손씨로 고쳤다. 충선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충숙, 충혜 양조에 벼슬하고 1348년(충목왕 4) 첨의평리로서 하정사가 되어 원나라 에 다녀왔으며, 1349년(충정왕 1) 추성수의동덕찬화공신에 봉해지고, 도첨의찬성사를 거쳐 판삼사사가 되었다. 이듬해 복천부원군에 봉해졌으며, 1351년 치사하였다. 1362년(공민왕 11) 홍건적의 난으로 왕이 복주(지금의 안동)로 피난할 때 중도에 평복으로 왕을 맞아 치하를 받았으며, 1364년 난의 평정을 축하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서 왕으로부터 궤장과 자신의 초상화를 받았다. 고향으로 돌아올 때 이제현, 이색 등 학자들이 시를 지어 전송하였다고 한다. 시호는 정평이다. 그리고 배향인 김자수 선생은 고려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이다. 자는 순중이고 호는 상촌 이다. 아버지는 통례문부사 지제고를 지낸 오이다. 1374년(공민왕23) 문과에 급제하여 덕녕부주부를 제수받았다. 우왕초에 정언이 되었는데, 왜구 토벌의 공으로 포상 받은 경상도도순문사 조민수의 사은편지에 대하여 회답하는 교서를 지으라는 왕명을 받았으나, 그가 전날 김해, 대구에서 있었던 왜구와의 전투에서 비겁하게 도망하여 많은 사졸을 죽게 한 사실을 들어 거절한 죄로 전라도 돌산에 유배되었다. 뒤에 전교부령을 거쳐 판사재시사가 되고, 공양왕 때에 이르러 대사 성, 세자좌보덕이 되었다. 이때에 왕대비에 대하여 효성을 다할 것, 왕세자의 봉숭례를 서두르지 말 것, 사전에 기재된 바를 제외하고는 일체의 음사를 금지하고 모든 무당의 궁중 출입을 엄단할 것, 천변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숭불로 인한 것이니 연복사탑의 중수공사를 중지할 것, 언관의 신분을 보장할 것 등의 상소를 올렸다. 1392년에 판전교시사가 되어 좌상시 에 전보되고 충청도관찰사,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고려말 정세가 어지러워지자 일체의 관직 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에 은거하였다. 조선이 개국된 후 두 태종이 형조판서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자손에게 결코 무덤을 만들 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이숭인, 정몽주 등과 친분이 두터웠으며, 문장이 뛰어 나 그의 시문이 <<동문선>>에 실려 있다. 류중암(1538~1571) 선생은 풍상인이고 자는 희범 이며 호는 파산 으로 입암 류중영 선생의 종제이다. 퇴계 선생의 문인으로 종질인 겸암, 서애 선생과 동문수 학하여 학문에 침잠하였으나 34세에 조몰하니 비지 남치리와 함께 세칭 '공문의 안자'라 칭하였다.
첫댓글 제춘님. 퍼 갑니다. 고맙습니다. 타양서원에 배향된 분이 류중암이 아니라 류중엄(柳仲淹)입니다. 수정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 선조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