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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룟 유다(마26:14-16)
지난 시간에 우리는 옥합을 깨트려 예수님께 값비싼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닦아 드렸던 한 여인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 여자와 아주 대조적인 한 인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따르는 열두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님과 부름을 받아 함께 동거동락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선생을 은 삼십에 팔아넘긴 배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돈 때문에 자기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어버린 어리석은 실패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삶은 십자가를 향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 서 있는 두 사람, 마리아와 가룟유다 너무 대조가 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서로 다른 행동을 취했습니다. 한 사람은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비싼 옥합을 깨뜨려서 향유를 쏟아 예수님의 장례식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은 십자가를 보는 순간 예수님을 팔아 먹기로 결정하고 은 삼십세겔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주었습니다. 교회 나온다고 모두가 교인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모두 다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가룟 유다가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리아 옆에는 언제나 가룟 유다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마치 농부가 밀을 심었는데 하룻밤 자고 나니 가라지가 자라난 것과 같습니다. 오늘은 가룟유다를 살펴보면서 우리가운데 있는 가룟유다의 성품을 발견하고 그 가룟유다를 우리 속에서 내어 쫓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가룟 유다는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뻔한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26: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것을 아시고, "나를 십자가에 내어 주도록 판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화가 있다는 것은 저주가 있다는 뜻입니다.
가룟 유다는 저주받은 인생, 화가 있는 인생입니다. 이 말의 뜻을 잘 알아야 합니다. 가룟유다는 운명적으로 예수님을 팔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는 공헌을 한 것으로 잘못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지 않았다면 어떻게 구원이 있겠느냐고 하면서 역설적으로 그도 공헌을 했다고 궤변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가룟 유다에게는 화가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누구든지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인간은 예외없이 다 죄인이요, 죄 가운데 태어난 존재입니다. 가룟 유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조심할 것은 그 사람이 배신자로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운명론자들의 말입니다. 비기독교인이나 세속적인 사람들은 그가 운명적으로 그렇게 태어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기회를 저주의 기회로 만든 사람입니다.
그는 열두 제자의 한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먹고 자고, 그분의 기적을 친히 목격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선택된 사람만이 받는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축복을 그는 축복으로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축복을 저주로 바꾸어 버린 사람입니다.
우리 가운데 환경적으로 어렵게 태어나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축복의 환경에서 태어나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느 분이 사생아로 태어났든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든지,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났든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서 주시는 기회를 어떻게 선택하여 받느냐가 중요합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베드로는 가룟 유다보다 실수를 더 많이 한 사람입니다. 어떤 면에서 두 사람을 비교해 보면 베드로에게는 인간적인 실수가 더 많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축복의 기회를 선택했고 가룟유다는 축복의 기회를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선택은 내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눈앞에 다가온 선악과를 따먹을 수도 있고 거절할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나의 의지의 선택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앞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할수 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조차 다 알아서 하나님이 해주셔야지 하고 체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기 의지가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선택할 수도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할 때 그 명령에 따른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룟유다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했다는 말씀에는 그가 운명적으로 배신자로 태어났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축복을 선택하지 못했다는 뜻이 있습니다.
2. 가룟 유다는 도둑입니다.
요한복음 12:6에 보면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아마 그 당시에도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키고 말씀을 전하면 은혜를 받고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이 헌금을 좀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돈을 관리하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가룟유다였습니다.
우리도 돈을 잘 관리할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교회의 재정을 맡깁니다. 계산이 빠르고 정확하고 특별히 돈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은 돈을 넘어설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돈만큼 커다란 맘몬은 없습니다. 돈은 그 사람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재정을 맡았다는 것은 그만큼 믿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가룟유다는 그만큼 열심이고 그만큼 확신을 주었던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돈을 맡겼다는 것은 분명히 그가 좋은 자질과 좋은 은사를 갖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붓는 마리아에게 분노하며 이렇게 비판을 했습니다. "3백데나리온에 해당하는 향유는 한 사람의 일년치 월급이다. 그렇게 많은 돈을 땅에 쏟아 허비하다니‥ 차라리 저걸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았겠는가?" 그럴듯하고 사려깊고 날카롭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볼 때에는 달랐습니다. 가룟 유다가 다른 제자보다 앞서고 똑똑하고 계산이 빠른 사람이지만 실제적으로 돈을 사랑하고 자기 야망을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도둑이라는 사실을 예수님이 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속지 않으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자기의 전문 지식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을 속이고 도적질해 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탐욕입니다. 여러분, 우리 각자 안에도 가룟 유다와 같은 탐욕이 있을 수 있습니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 열정이 있지만 돈에 대해서는 인색했습니다. 돈을 갖고 싶은 유혹이 그를 지배했습니다. 그래서 뭐든지 먼저 돈을 생각하고 돈을 계산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지 못하고 육신의 관점에서만 비평하고 불평을 내놓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많은 일들을 하지만 잘못하면 이런 유혹 앞에 자기를 잃어버립니다. 욕심에 사로잡혀 본질을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물질앞에 깨끗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물질이라고 고백하고 그 물질을 잘 사용할 때 큰 믿음의 사람으로 쓰임받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렇게 물질을 넘어선 믿음을 가질 때 물질을 다스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아낌없이 헌신하는 성도들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계산에 앞서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물질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쓰임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 인정받아 돈궤를 맡았고 충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사랑했다는 구절이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하나도 없습니다. 그는 언제나 제삼자로 객관적인 위치에 있습니다. 자기는 헌신하지 않으면서도 옆에서 비판하는 사람이 바로 가룟유다였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눈물한번 흘려 보거나 가슴 졸여 보거나 몸부림쳐 본 일이 없습니다.
그는 언제나 냉정하게 예수님 주변을 따라다니며 자기에게 유익한 일을 찾고 있었습니다. 한 번도 예수님을 사랑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봉사를 열심히 하지만 가슴이 차가운 사람은 늘 비판만 합니다. 믿음의 알맹이가 사랑인데 그 가슴속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오로지 자기사랑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자기중심의 신앙, 자기 사랑에 빠져있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버리게 됩니다. 부부가 오십 평생, 육십 평생 살아오다가 마지막에 남편과 아내를 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필요해서 같이 살았을 뿐이고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병든 인간입니다. 여러분은 남편을, 아내를 뜨겁게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생명을 다해 남편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녀를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다른 어떤 좋은 관계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그는 두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14-15절,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팔아먹을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요즘 세상의 실태입니다. 무엇이든지 자기 유익과 연결시켜 생각합니다. 내게 조금이라도 유익하다면 신앙이라도 팔아먹을 수 있습니다.
돈이 말씀보다 앞서고 돈이 기도보다 앞서고 돈 앞에 신앙을 내려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요즘 살펴보는 사사기에 나오는 미가집의 제사장입니다. 돈만 준다면 뭐든지 합니다. 우상을 숭배할 수도 있고 돈만 준다면 더 큰 데로 옮겨가기도 합니다. 돈이 그의 삶을 주관합니다. 16절.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이제 그에게는 예수님을 팔아 버린다는 한 가지 목적만 남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최후 만찬을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너희 중에 나를 팔 자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제자들이 서로들 자기인가 하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마26:25절을 보면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유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도적인지 아닌지는 남이 말할 필요도 없이 자기가 제일 잘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라고 묻습니다. 이처럼 뻔뻔하게 예수님을 속이고 외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에게 화있을 진저라고 저주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제자 중 하나가 이렇게 외식하고 예수님 앞에서 뻔뻔하게 자기가 아닌 것처럼 묻고 있으니 이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이 얼마나 마음이 힘드셨겠습니까? 그러나 끝까지 참으십니다. 끝까지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마26:47-49절,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8]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49]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이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가증합니까? 조금 있으면 드러날 것인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가면을 쓰고 예수님을 능멸합니다.
이것이 사단에게 사로잡힌 가룟유다의 실상이었습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에게 다가가서 "랍비여"하고 입맞추며 웃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도적인 가룟유다의 얼굴이요, 인간의 얼굴이요, 곧 죄인의 얼굴입니다. 우리는 다 가룟유다를 하나씩 가지고 있습니다.
4. 가룟유다는 사탄에게 자신을 내맡긴 사람이었습니다.
유다는 돈에 대한 탐욕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는 점진적으로 마귀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길에 들어섰습니다. 요한복음 13장 2절의 말씀을 보면,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사탄은 가룟유다에게 역사할 때 맨 처음 그의 마음속에 한 가닥의 생각을 집어넣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팔려고 하는 생각은 마귀에게서 왔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가룟유다를 이처럼 배신자의 모습으로 가게 했던 근본적인 배후세력을 보게 됩니다. 물론 선택은 가룟유다 자신의 몫입니다. 아무리 시험해도 그가 깨어 있었다면 시험을 이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았습니다. 마귀가 넣어주는 생각을 그가 선택했던 것입니다. 이 잘못된 생각을 집어넣는 것이 마귀가 하는 사역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 부정적인 잘못된 생각 하나가 인간에게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옵니까?
사탄은 우리의 생각 속에 이렇게 육신적인 생각을 집어넣습니다. 그런데 이 생각이 그를 지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생각을 지키지 못하면 그 인생 전체를 그 생각이 끌고 다닙니다. 생각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생각은 믿음의 그릇입니다. 생각을 빼앗기면 모든 것을 다 빼앗길 수 있습니다. 생각은 행동을 하기 전이기 때문에 그게 무슨 죄냐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생각을 빼앗기면 모든 것을 다 빼앗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서기자가 말했습니다.
(잠 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가룟 유다를 봅시다.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우리에게 있어서 생각을 경건하게 관리하는 일처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밝은 것을 생각하고, 아름다운 것을 생각하고,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주님을 묵상하는 경건한 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도 우리가 이러한 규칙적인 삶을 통해서 우리의 생각의 경건한 관리가 이루어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무릇 자신의 생각을 관리하십시오. 내 생각에 성령의 다스리심과 기름 부으심이 있기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가룟유다는 이 생각을 빼앗겼습니다. 그 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지막 순간이 점점 다가오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다 모아놓고 최후의 만찬을 하십니다. 그 때 떡과 포도주를 마십니다. 예수님께서 갑자기 떡 한 조각을 포도주에 적셔서 가룟유다에게 주십니다. 요한복음 13:26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떡 한 조각을 찍어 줄 때 그것을 받게 되는 사람이 나를 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절인 27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사탄은 먼저 잘못된 생각을 유다의 마음속에 집어넣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27절에 와서는 이 잘못된 생각을 통해서 사탄을 따라가기 시작한 유다 속에 아예 들어가서 그를 완전히 소유하고 사로잡은 것입니다. 처음에는 생각에서 시작되었지만 나중에 사탄은 이 사람을 완전히 소유해 버렸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잘못된 한 가닥의 생각을 관리하는데 실패했을 때 한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파국적인 삶의 최후가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가장 슬프고 쓸쓸한 대목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 다음의 30절입니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이 쓸쓸한 배신의 밤, 이 캄캄한 어두운 밤이 아마도 예수님께서 떡 조각을 그에게 건네주시면서 그에 대한 마지막 회개를 촉구하셨던 순간일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이 마지막의 순간에 회개를 거절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는 사탄에게 포로가 되고 맙니다. 사탄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마지막 베드로는 가룟유다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하였습니다. 행 1:25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영광스런 사도의 직무를 버리고 제곳으로 가버렸습니다. 제길로 가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가룟유다는 영광스런 직분으로 버리고 제 길로 갔습니다. 요즘 우리가 묵상하고 있는 사사기의 결론처럼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왕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각기 자기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를 영적 상태를 진단하시는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의 왕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입니다. 결코 우리의 생각을 앞세우지 맙시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가룟유다처럼 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약한 부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혜사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를 돕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내 생각이 아무리 옳은 것같아도 말씀 앞에 겸손하게 자기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내게 주신 십자가를 지고 옥합을 깬 마리아처럼 미련한 것같지만 믿음으로 길을 담대하게 나아가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