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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을 선택한 이유. 바로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그 길 따라, 수백 년 전 그 사이를 거닐었던 선비 또는 유생들과 호흡을 함께 하고자 했다. 무더웠던 어느 여름날, 아무도 찾지 않았던 그 길을 찾아 병산서원을 뒤로한 채 무작정 낙동강을 바라보며 걸었다. 슬슬 산길로 접어들 때, 운이 좋게도 주변을 지나가던 분의 안내에 따라 바로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지도에도 잘 나와있지 않았던 그 길이 본모습을 드러낼 때, 비로소 그들과 호흡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아무도 찾지 않던 길. 흐린 날씨에 수풀이 한 번 더 우거져, 주변보다 상당히 어두웠다. 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과 짙은 녹음은 선비길에 마련된 평상에 앉아 휴식을 취하던 내게 길라잡이 역할을 해 줬고, 망울망울 맺힌 물방울이 참으로 청아하게 다가왔다. 마치 그 길을 전세라도 낸 듯 하염없이 바라봄에, 쌓여있던 피로가 녹아내리며 눈도 덩달아 말끔해지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마을 방향으로 하염없이 이어진 길 따라 터벅터벅 걷다 보니, 스멀스멀 베일에 가려진 마을의 실체가 본모습을 드러냈다.
1. 선비길
오래전, 그들이 낙동강 변 따라다녔던 길에서의 감상은 하회마을에서의 시작을 더욱 알차게 만들어 줬다. 카메라와 더불어 각종 장비 때문에 그 순간 그 길의 아름다움을 남기지 못했다는 건 너무나도 후회스러웠다. 산 길 따라 비탈길을 하염없이 오르면서, 수풀 사이로 스멀스멀 보이던 낙동강과 병산의 모습은 정말 수려했다. 트래킹 동안 하염없이 쏟아지는 땀으로 젖은 몸을 식혀 줄 정도로 시원한 바람이 주변을 감쌌다. 서서히 눈에 담기던 초가집의 그 모습과 드넓게 펼쳐진 논밭을 보며 느껴지는 성취감은 마치 찰나의 선물과도 같았다.
수분이 많이 빠져나가서 그런지, 긴장이 풀리자 급속도로 갈증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마른침을 연신 삼키며, 하회마을 곳곳을 돌아보기 전 우선 매점을 찾아 순삭 간에 음료들을 비워냈다. 그 모습을 본 주인 분과 병산서원을 지나 선비길을 통해 이곳에 도착했다 라는 말을 전하며, 꽤 복잡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자리를 정리한 뒤 펼쳐진 마을의 모습은 참으로 고즈넉했으며, 양동 마을의 그것과는 또 다른 분위기들을 곳곳에서 만끽할 수 있었다.
보통 하회마을로 들어올 때, 주차장에서 입장권 구매 후 셔틀버스를 타고 마을로 들어오게 된다. 하지만 나의 경우, 이곳까지 걸어들어왔기에 입장료를 아낄 수 있었다. 물론 음료 값으로 그 이상의 돈을 지출했지만, 그들이 걸었던 길을 찾아 함께했다는 그 성취감이 날 만족시켰다. 경주의 양동마을과는 다르게 마을 초입부터 넓게 펼쳐진 논밭과 연꽃잎들은 마치 부여의 그곳을 연상시켰다. 마을 주변을 감싸는 초록빛은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과 같은 분위기를 가져다줬는데, 시간이 지나 해가 저 편으로 떠날 즈음 하회마을 에서의 밤의 그 모습도 어떨까? 하는 호기심도 샘솟았다.
하회마을 하면 정말 많은 것 들을 얘기하고,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안동의 대표 관광지로 자리하고 있다. 나는 그것들 중, 이곳을 여행지로 택한 가장 큰 이유는 부용대에서 마주할 수 있었던, 그 돌아들어가는 낙동강과 하회마을의 모습이 정말 극적으로 다가왔다.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듯 한 형상을 한 이곳을 걸어 본다. 마을 깊숙한 곳으로 가기 전, 벚꽃이 필 때 그 몽환적인 매력을 선사한다는 그 가장자리 길은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산책 삼아 거닐고 있었는데, 그 편안함이 오히려 매력으로 다가와 이곳에 흠뻑 빠질 수 있게 만들어 줬다.
2. 풍산류씨 집성촌
병산 서원에서부터 시작된 여정은 결국 하회마을에서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하회마을에는 예로부터 "허 씨 터전에 안 씨 문전에 류 씨 배판"이라는 말이 전해져 내려온다. 이는 곧, 허 씨와 안 씨가 하회마을의 터를 닦고 마침내 류 씨에 이르로 꽃을 피우게 됐다며 회자되고 있는데, 실제로도 이곳은 풍산 류 씨의 집성촌으로 600년에 걸쳐 이곳에서 삶을 유지하고 있었다. 잠시 마을 정취를 간직하고자 카메라를 내려둔 채 주변을 거닐다 보면 드문드문 이곳에서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거주민들을 만나 볼 수도 있었다.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하회마을 전반에는 풍산 류 씨 종택과 더불어 임진왜란 당시의 명재상 '류성용'의 후손들의 집 들도 자리했다. 게다가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이곳에 방문했을 때 안내자로 류성용의 13세 손 배우 류시원 씨가 뽑혀 귀빈들의 길라잡이 역할을 수행했던 적도 있다. 선비길에서 이어진 시간의 발걸음은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깊어질수록 그 폭과 깊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도록 거들어 줬다.
서애 류성룡은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낙향 후 부용대 바로 아래 자리한 '옥연정사'를 오가며 징비록 집필에 힘썼다. 왜란 중에도 한 차례 반대파에 의해 탄핵을 당했으나, 왜란 전 각각 이순신과 권율과 같은 인재 등용과 더불어 한양에서 피란길에 오른 어가가 의주에 도착했을 때 도체찰사를 맡았다. 이후, 그는 명의 장수 '이여송'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한 뒤, 충청, 경상, 전라의 삼도 도체찰사에 올라 한양성 수복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케 된다.
그렇게 7년에 걸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이후의 말로는 좋지 못 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또 다시 반대파에 의해 탄핵되며 자리에서 한 차례 쫓겨나게 되는데, 1600년 다시 복직 됐지만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여생을 하회마을 옥연정사에서 머물며 오늘날 임진왜란 당시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손꼽히는 '징비록'과 같은 책 집필에 힘을 쓰게 된다. 마지막 까지 오는 손님 마저 물리치며 하루하루를 조용히 살다가 세상을 뜨게 됐다고 전한다.
오늘날까지 서애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충효당'은 임종 후 그의 후손들에 의해 규모가 확장되며 현재의 모습에 이르게 됐다고 전한다. 건너편 풍산 류 씨의 종택과 마주한 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머물러 있는 공간에는 문이 굳게 닫힌 채 탁 트인 나머지 공간들을 유심히 살펴볼 수 있었다. 1980년 대 하회마을을 찾았던 사람들의 여행기 혹은 증언들을 살펴보면, 당시만 해도 한국인 특유의 열린 정을 한껏 느껴볼 수 있는 사례들을 자주 목도할 수 있었지만 시간이 흐른 만큼 그 사람 냄새나는 모습을 마주할 수 없다는 것이 한 편으로 그리움으로 다가왔다.
600여 년의 시간 더부러 그 모습들을 간직한 채 모든 것들이 멈춰 있는 듯 한 느낌. 2010년 경주의 양동 마을과 함께 그 가치를 인정 받으며, 세계문화유산 리스트에 등재가 된다. 하회마을은 총 10가 등재 기준 중, 각각 'III -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 와 'IV -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 로 인정 받아 등재가 결정됐다.
마을 곳곳에 퍼져 있는 주거 건축물과 정자(亭子), 정사(精舍), 서원(書院)과 같은 건축물들의 조화와 그 배치 방법 및 전통적 주거문화가 보여주고 있는 특징과 지속성을 최고의 가치로 설명했다. 더불어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남긴 학술 및 문화적 성과와 지속적으로 내려오는 무형 유산들에 대한 서술도 빼놓지 않았다. 우리나라 전반에 걸쳐있는 그 익숙함에서 비롯된 고즈넉함과 한옥 전각들의 고풍스러움이 타 문화권 사람들의 시각으로 바라볼 때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신선함과 사뭇 다른 기분을 실감할 수 있었다.
3. 아쉬움
코로나로 인해 많은 것들이 묶여 있을 때, 평소와 같았다면 당연한 것들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너무 큰 아쉬움을 쉽게 떨치지 못했다. 짙은 녹음 그 이상의 신비로움을 간직한 만송정 숲 그 건너편으로 넘어가 부용대에 오를 수 없었다는 사실은 커다란 실망감으로 되돌아왔다. 부용대로 갈 수 있었던 그 다리 앞에 도착하니, 얼마 전 하회마을 일대를 휩쓸었던 태풍으로 인해 다리가 물에 잠겼다는 사실과 함께 부용대를 보려면 크게 돌아가야만 된다는 문구가 적힌 안내판이 내 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나와 함께 다리 주변으로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번갈아 내뿜던 사람들의 발걸음이 하나둘씩 저 멀리 사라져 갈 때, 다음을 기약한 채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곳이 안동에서의 마지막 종착점이었던 만큼 선택지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끓어오르던 욕구를 간신히 자제시키며 발길을 돌렸다. 흘러가는 강물에 회한의 순간들도 함께 떠내려 보냈다. 그리고 2년이 흘렀다.
굳게 닫혀있던 행사들이 코로나 환자가 줄어듦과 동시에 서서히 그 빗장을 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하회별신굿 탈놀이를 시작으로 매년 단 한 번 밖에 볼 수 없다는 하회 선유 줄불놀이 까지. 놓치지 않고 미리 그 일정에 맞게 하회마을을 찾아 그 아쉬움의 순간들을 털어 버릴 생각이다. 그중, 하회별신굿 탈놀이의 경우 어릴 적, 교과서를 통해서만 마주했었기 때문에 그 실물을 직접 마주 한다는 설렘과 더불어 오랜 시간이 깃들어 있는 그 구성을 마주할 수 있다는 생각이 오직 그 순간을 기대하게 만든다.
희대의 재상, 류성룡의 흔적을 밟아 시작됐던 어느 여름날 하루의 여정은 그 순간을 마지막으로 말끔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자연에 살포시 얹어놓은 듯 한 전각들의 배치와 더불어 걸음을 거닐 때마다 그들이 밟았던 길과 함께 한다.라는 그 생각들은 전각들이 가져다주는 특유의 분위기와 어우러져 한 시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갈수록 여행의 순간들이 길어져 가는 것을 느낀다. '아 이런 것이 있구나?'에서 시작했던 여행은 어느새, 이곳엔 뭐가 더 있을까? 에서부터 시작된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호기심이 자리했고, 그 질문들을 통해 오롯이 순간을 즐기고 있는 내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갈수록 푸르름과 더위가 기승을 부려가고 있을 때, 모든 사람이 빠져나가고 오직 숙박객과 주민들이 남아 있는 하회마을에서의 어느 여름밤은 어떨까? 가 문득 궁금해진다. 진득했으며 정갈했던 그날의 발걸음에 은은함을 더하고 싶은 조그마한 소망 때문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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