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우키시마호
강제 징용자들 처음 고국 돌아오던 배… 폭발로 침몰했어요
우키시마호
김성진 서울 고척고 교사
기획·구성=오주비 기자 입력 2024.08.22. 00:35 조선일보
바다 위에 떠 있는 우키시마호. 우키시마호는 1945년 8월 22일 일본 아오모리현 오미나토항에서 부산항으로 출항했지만, 24일 오후 마이즈루 앞바다에서 갑작스러운 폭발음과 함께 침몰했어요. /위키피디아
최근 우리 정부가 우키시마호 승선자 명부 자료를 일본에 요청했다는 뉴스가 보도됐어요. 우키시마호는 일본으로 강제징용된 한국인과 그 가족들을 송환하기 위해 1945년 8월에 일본에서 출항한 배였어요. 그런데 출항 후 며칠 뒤 갑작스러운 폭발로 우키시마호가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 배에 타고 있던 수많은 한국인들이 사망하거나 실종됐어요. 배가 폭발한 원인은 여전히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는데요. 오늘은 일제강점기 한국인 강제징용과 우키시마호 침몰 사건에 대해 다뤄보겠습니다.
침략 전쟁에 한국인 동원한 일본
1930년대부터 일본이 대륙으로의 침략 전쟁을 본격화하면서,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군수산업에 필요한 노동력이 점점 부족해지게 됐어요. 이에 일본은 ‘국가총동원법’을 시행했습니다. 국가총동원법 제4조는 “전시에 국가 총동원상 필요할 경우, 제국 신민을 징용하여 총동원 업무에 종사하게 할 수 있다”는 규정인데요. 이에 근거해 일본은 1939년 7월 ‘국민징용령’을 공포하고 한국을 비롯한 식민지에도 적용했어요.
많은 한국인이 일본의 노동력 부족을 메우기 위해 일본으로 동원됐어요. 초기에는 모집 또는 알선의 방식으로 한국인 노동자들을 일본으로 보냈는데요. 전쟁 상황이 악화되고 노동력 고갈이 더욱 심화되자, 징용을 통한 강제 동원 방식이 이루어졌습니다. 징용 기피자는 형무소에 수감됐고, 이들은 수형자로서 작업장에 동원되기도 했습니다.
일본 마이즈루시에 있는 우키시마호 희생자 추모 동상. /이동휘 특파원
징용된 한국인들의 노동 환경은 매우 열악했어요. 이들은 일본에 도착한 후 각지의 탄광, 건설 현장, 군 시설 공사장 등에 배치됐어요. 보통 오전 6시부터 오후 6~8시까지 고된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특히 탄광으로 간 한국인들이 많았는데, 작업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연속 30여 시간을 일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이들은 산업 재해의 위험이 높은 곳에 배치됐어요. 그래서 부상과 사망 사고가 잦았습니다. 임금은 일본인에 비해 낮았고, 현금으로 주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어요. 임금 내역이 기재된 봉투와 용돈 정도만 지급하고, 나머지는 강제로 저축하게 했습니다.
우키시마호에 탑승했던 한국인 징용자들은 주로 일본 아오모리현 시모키타반도로 끌려갔던 사람들이었어요. 이곳은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비행기 활주로, 격납고, 항만, 방공호 등이 지어졌지요. 이후 이곳은 미군의 일본 본토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군수 기지 사령부로 조성되기 시작했고, 수많은 한국인 징용자들이 더 동원돼 각종 건설 공사에 투입됐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한국인 징용자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국을 상대로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어요. 강제징용돼 고역에 시달리던 한국인들은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뻐했습니다. 1945년 8월 22일, 일본 아오모리현 오미나토항에서 한국인 징용자와 그 가족들을 태운 우키시마호가 부산으로 출항했습니다. 해방 이후 한국인 징용자를 수송한 제1호 귀국선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키시마호는 부산항으로 향하지 않고 일본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다가 8월 24일 오후 마이즈루 앞바다에서 갑작스러운 폭발음과 함께 침몰했어요. 사람들은 기름이 뒤덮인 바다로 빠졌고, 인근 마을 주민들은 배를 타고 나가 사람들을 구조했다고 해요. 하지만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난 뒤였습니다.
당시 일본 당국은 한국인 524명, 일본인 승무원 25명이 숨졌다고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이 숫자는 정확하지 않다는 의혹이 계속 제기되고 있습니다. 생존자 등에 따르면 배에 탄 사람이 5000여 명이었고, 사망자도 수천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에요. 우키시마호에 8000여 명이 탑승했다는 일본 외무성 기록이 2014년에 공개되기도 했습니다.
일본 고쿠타 게이지 의원이 공개한, 승선자 등의 명부라고 이름 붙은 자료 일부 복사본. /고쿠타 게이지 의원 페이스북
탑승 인원과 사망자 수도 명확하지 않지만, 배가 폭발한 원인에 대해서도 의혹이 계속 제기되고 있어요. 일본 당국은 배가 태평양전쟁 때 미군이 설치해 놓은 기뢰를 건드려 폭발했다고 밝혔는데요. 기뢰는 적의 함선을 파괴하기 위해 물속이나 물 위에 설치한 폭탄을 말해요. 하지만 생존자 등은 기뢰가 터질 때 나타나는 현상인 물기둥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또 배가 폭발하기 전 일본 승무원이 바다에 문서를 버리고 보트를 타고 탈출한 것을 봤다는 증언도 있다고 해요. 하지만 일본 정부는 여전히 침몰 원인과 관련한 여러 의혹에 대한 대답을 내놓지 않고 있어요.
우키시마호의 침몰은 일본으로 강제징용된 한국인들이 광복 이후에도 결국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우키시마호 승선 명부는 배의 침몰로 사라져 버린 것으로 알려졌었는데요. 최근 일본 정부에서 승선자 등의 명부라고 이름 붙은 자료를 70여 개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어요. 우리 정부도 해당 자료를 입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번에 알려진 공식 문서를 계기로 우키시마호 침몰 사건에 대한 역사적 규명이 양국의 협력 속에서 잘 진행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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