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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서울순례길 3코스 일치의 길(1)
당고개 성지-새남터가 바라보이는 언덕
당고개 성지는 1839년 기해박해 때 10명의 남녀 교우들이 순교함으로써
서소문 밖 네거리, 새남터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9명의 성인을 탄생시킨 영광의 땅이며,
기해박해를 장엄하게 끝맺은 한국 천주교회 순교사에서 의미 깊고 거룩한 순교 성지다.
당고개 성지는 1839년 기해박해가 거의 끝나 가던 기해년 12월 27일과 28일
양일(음력)에 걸쳐 이곳에서 10명의 남녀 교우들이 순교함으로써
기해박해를 장엄하게 끝맺은 거룩한 곳이다.
당시 당고개는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던 곳은 아니었지만,
다른 형벌로 죄를 지은 죄인들은 처형한 적이 있었다.
일반 신자들은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고, 사제들은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는데
설을 앞두고 상인들이 닥쳐올 설날 대목장에 방해되지 않도록
처형 장소를 서소문 밖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고 요청하였기 때문에
서소문 밖 형장을 피해 조금 한강가로 나간 곳이 당고개다.
1839년 12월 27일에는 박종원(朴宗源, 일명 이선, 1792~1840, 아우구스티노),
홍병주(洪秉周, 1798~1840, 베드로), 권진이(權珍伊, 1819~1840, 아가타),
이경이(李瓊伊, 1813~1840, 아가타), 손소벽(孫小碧, 1801~1840, 막달레나),
이인덕(李仁德, 1818~1840, 마리아), 그리고 최양업(崔良業, 鼎九, 1821~1861, 토마스) 신부의 모친
이성례(李聖禮, 1801~1840, 마리아) 7명이 순교하였으며,
다음 날에는 홍영주(洪永周, 1801~1840, 바오로), 최영이(崔榮伊, 1818~1840, 바르바라),
이문우(李文祐, 일명 경천, 1809~1840, 요한) 3명이 순교하였다.
이곳 순교자 10명 중에서 갓난아이 때문에 마음이 약해진 적이 있던
이성례 마리아를 제외한 9명이 모두 1984년 5월 6일에 시성되었다.
이로써 당고개는 한국 천주교회 순교사에서 의미 깊은 순교 성지가 되었다.
그 후 6년 뒤 1846년 9월 16일 병오박해 때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성 김대건(金大建, 보명 芝植, 1821~1846, 안드레아) 신부가 새남터를 향하여 마지막 가는 길에서
이곳에 수레를 멈추고 잠시 쉬어 갔던 곳이다.
순교자 증언록에 의하면 땀을 뻘뻘 흘리고 있던
김대건 신부의 풀어진 상투를 포졸 하나가 다시 묶어 주었고,
김대건 신부는 고개를 들고 시선을 좌우로 돌렸다고 한다.
그동안 한국 교회에서는 처형지의 정확한 위치를 알려고 노력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시성식 후 용산구 신계동 1-57번지에 있는 문배산 마루 일대를 매입하여
사적지로 조성하고 순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그러나 2008년부터 주변 아파트 건립 공사로 기념비는 철거되고
아파트 단지가 정리된 후 2011년 다시 성지가 조성되었다.
새남터(沙南基)
조선교회 첫 미사 봉헌한 주문모 신부 순교터
서소문이 ‘평신도의 성지’라면, 새남터는 ‘성직자의 성지’다.
조선의 공식 처형장이던 두 곳의 성격은 천주교와 관련해서는 판이하다.
103위 성인 가운데 서소문 밖 네거리 형장에선 1839년 기해박해 순교자 41위와
1866년 병인박해 순교자 3위 등 44위가 순교했는데
정하상(바오로, 1795∼1839) 등 모두가 평신도였다.
44위 중에서는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 25위와 1819년 기묘박해 순교자 2위
(조숙ㆍ권천례 동정부부는 공식 순교지가 서울로 기록돼 있지만
서소문 순교자로 추정) 등 27위에 이른다.
반면 새남터 형장에서 순교한 14위 가운데 11위가 앵베르(1797∼1839) 주교와
김대건(안드레아, 1821∼1846) 신부 등 성직자이고, 11위 중 성인이 8위나 된다.
주문모(야고보) 신부
이번에 유일한 외국인이자 선교사제로 새남터에서 피를 흘린
주문모(야고보, 1752∼1801) 신부가 복자로 결정돼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직자 가운데 9위가 시복ㆍ시성의 영예를 안게 됐다.
박해 시대에 ‘사남기(沙南基)’ 혹은 ‘노들’이라고 불렸던 새남터는
원래 조선 초부터 군사들의 연무장으로 쓰거나 중죄인들의 처형장으로 쓰던 곳으로,
한양성 밖 남쪽 한강변 모래사장이었다.
죽은 사람의 혼령을 천도시키기 위해 지노귀새남을 하던 터이기도 했다.
지금의 서울 용산구 이촌동, 한강로3가동 일대다.
그러던 곳이 그 많은 사제와 정의배(마르코, 1794∼1866), 현석문(가롤로, 1799∼1846) 회장 등
평신도 지도자 3위의 신앙 증거와 순교로 ‘영광의 땅’이 됐다.
그러나 새남터 형장의 정확한 위치는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현재 3966.9㎡(1200평) 부지에 세워져 있는 새남터 순교기념성당 옆
고가도로 건너편 용산역 철도기지창이 그 자리였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새남터의 순교자 가운데 ‘조선교회의 초석’이 된 주 신부의 삶은 아주 극적이다.
17세기 초부터 천주교가 융성했던 중국 쑤저우 태생인 주문모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모 슬하에서 자랐다.
그런 가운데 20세가 돼 혼인했지만 3년 만에 상처하고 과거 준비를 하다가
30대가 돼서야 베이징으로 가서 대신학교를 졸업하고
1791년에서 1794년 사이에 사제품을 받았다.
조선에 파견될 선교사도 원래는 그가 아니었다.
최초로 선발된 조선 선교사는 오요한 신부였다.
그러나 1791년 베이징을 떠나 조선으로 향했던 그가 조선 신자들을 만나지 못해
베이징으로 돌아왔다가 2년 뒤 사망하면서 주 신부가 조선에 파견된 것이다.
1794년 말 입국 이후 주 신부의 사목활동은 눈부시다.
1795년 4월 5일 예수 부활 대축일에 조선교회 사상 첫 미사를 집전한 것을 시작으로
서울과 경기, 충청, 전라 등 전국 각지를 다니며 ‘발로’ 사목했다.
조선교회에 ‘회장제’를 도입해 조선교회를 발전시키기 위한 장기적 사목 방안을 세운 것도 그였고,
1797년께 베이징 비밀결사단체에서 유래한 명도회를 설립해
교리교육과 전교를 가능하게 했던 것도 그였다.
주 신부가 집필한 「사순절과 부활절을 위한 안내서」는 당시 신자들에게 큰 도움이 됐다.
특히 베이징에 황심(토마스, 1756∼1801)을 파견,
보편교회와 조선교회 신자들의 통교를 이어준 것도 주 신부였다.
이처럼 뜻깊은 새남터가 순교성지로 조성된 것은 생각보다 오래지 않다.
1950년에서야 한국천주교회의 순교사적지로 지정됐고,
전쟁 뒤 1956년에 ‘가톨릭 순교성지’라는 순교자현양비가 세워졌다.
이듬해인 1957년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가 사적지를 관리하면서
본격적으로 개발이 이뤄졌다.
1981년 서울대교구에서 새남터본당을 설립했고,
1987년 한국 전통 양식의 현 기념성당이 완공됐다.
순교성지 새남터성당에는 새남터에서 순교한 9위 등
모두 14위의 성인 유해가 모셔져 있다.
2006년에는 순교자 기념관도 세워 성인 유해실과 한국천주교회 설립과 박해사,
박해 형구와 형틀 등 전시물을 갖추고 있으며,
영상실도 설치해 순교자들의 발자취와 순교 신심을 전해 주고 있다.
[박해와 새남터]
새남터가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로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 때부터였다.
즉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가 의금부에서 군문 효수형을 받고 이곳으로 옮겨져
4월 19일(양 5월 31일) 처형당함으로써 이곳의 첫 순교자가 된 것이다.
당시 주문모 신부의 머리는 장대에 매달렸고, 그 시신은 닷새동안 백사장에 버려졌다가
군사들에 의해 몰래 이장됨으로써 찾을 길이 없게 되었다.
이후 새남터는 성직자들을 비롯하여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신자들의 처형장이 되었다.
우선 1839년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때는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 모방(Maubant, 羅伯多錄) 신부와
샤스탕(Chastant, 鄭牙各伯) 신부가 8월 14일(양 9월 21일)에
주문모 신부처럼 군문 효수형을 받아 순교하였고,
이어 1846년의 병오박해(丙午迫害) 때에는 한국인 최초의 성직자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가
7월 26일(양 9월 16일), 현석문(玄錫文, 가롤로)이 7월 29일에 역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했다.
그리고 1866년의 병인박해(丙寅迫害) 때에는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를 비롯하여
브르느니에르(de Breteni res, 白), 볼리외(Beaulieu, 徐沒禮), 도리(Dorie, 金),
프티니콜라(Pentitnicolas, 朴), 푸르티에(Pourthi , 申妖案) 신부 등이 1월 21일(양 3월 7일)에,
정의배(鄭義培, 마르코)와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이 3월 11일에 군문 효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 중에서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시신은 신자들에 의해 노고산(老故山, 마포구 노고산동)으로 옮겨졌다가
1843년에 삼성산(三聖山, 관악구 신림동 57-1번지)으로 이장되었다.
그리고 김대건 신부의 시신은 와서(瓦署, 용산구 한강로 3가의 왜고개 남쪽)에 일시 안장되었다가
안성 미리내로 이장된 반면에 현석문의 시신은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다음으로 병인박해의 순교자들 중에서 가족들에 의해 시신이 거두어진 정의배를 제외하고,
베르뇌 주교를 비롯하여 7명의 시신은 신자들에 의해 거두어져 와서에 안장되었다.
절두산 순교 성지(切頭山殉敎聖地)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 사적지.
절두산은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한강변에 우뚝 솟은 암벽 봉우리로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이후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이 바위는 처음에는 복자바위라 불렸다.
병인박해(1866)때 순교한 다블뤼 안주교, 오매트리 오신부, 위앵 민신부,
황석두 루가, 장주기 요셉의 사연이 깃든 바위로
다섯 분의 성인을 기리는 뜻으로 오성바위라고 이름을 붙여주었다.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될 때와 충남 보령 갈매못 형장으로 끌려갈 때
쉬었다 간 바위로 이 다섯 성인들이 여기서 쉬는 동안 포졸들이 포승을 풀어 주어서
안주교는 교우들을 만나 격려하고 함께 기도한 후 막걸리로 목을 축였다고 한다.
그 앞의 돌은 김대건 신부와 함께 입국한 다블뤼 안주교가
21년간 숨어 살던 방을 드나들 때마다 밟고 다니던 문지방돌이다.
우뚝 솟은 벼랑 위에 3층으로 세워진 기념관은 우리 전통 문화와 순교자들의 고난을 대변해 준다.
접시 모양의 지붕은 옛날 선비들이 전통적으로 의관을 갖출 때 머리에 쓰는 갓을,
구멍을 갖고 지붕 위에서 내 있는 수직의 벽은 순교자들의 목에 채워졌던 목칼을,
그리고 지붕 위에서 내려뜨려진 사슬은 족쇄를 상징한다.
[절두산의 유래]
절두산은 조선 시대 교통의 요지이자 병선의 훈련장이며
처형·제사·진휼을 하던 곳이던 양화진의 동쪽에 있는 봉우리로
원래 가을두(加乙頭), 혹은 잠두봉(蠶頭峰)이라 하였다.
중국 사신들이 칭송할 만큼 주변 경관이 뛰어난 이곳이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참수형으로 목잘려 죽은 곳이라는 의미의 ‘절두산’으로 불리게 된 것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이곳에서 많은 신자들을 처형한 것과 관련이 있다.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은 천주교에 대한 박해령을 내렸는데 이때 살아남은 프랑스 선교사
리델(Ridel, 李福明) 신부가 조선을 탈출하여 청나라로 건너가 조선 교회의 상황을 알린 후
로즈(P. Roze, 魯勢) 제독의 함대가 1866년 9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입하였다.
조선 정부는 프랑스 함대와의 교전 후 1866년 10월 23일(음 9월 15일)부터 천주교 신자들을
새남터나 서소문 밖이 아닌 절두산에서 주로 처형하였는데 그 이유는
9월에 프랑스 함대가 침략하여 양화진까지 거슬러 올라온 것이나 10월에 다시 강화도를 침략한 것은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한 천주교 신자들이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원군을 비롯한 당국자들은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여 심문하면서
그들의 도움으로 프랑스 함대가 침략해 올 수 있었음을 분명하게 확인하였다.
따라서 프랑스 함대가 정박했던 양화진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함으로써
천주교 신자들의 책임을 확실히 묻고 본보기를 보임으로써
백성들이 프랑스 함대와 내통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이렇듯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를 절두산으로 옮긴 이유가
프랑스 함대의 침략에 대한 책임을 천주교 신자들에게 묻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절두산에서는 프랑스 함대를 불러들인 혐의가 있는 신자들만을 골라서 처형하였다.
그 결과 병인박해 당시 김한여(베드로), 최경원(야고보), 이의송(李義松, 프란치스코),
김이쁜(마리아), 이붕익(李鵬翼, 배드로), 김중은(金重殷, 베드로), 박영래(朴永來),
김진구(金鎭九, 안드레아), 최수(崔燧, 베드로), 김큰아기(金大阿只, 마리아), 강명흠(姜命欽, 베드로),
이기주(李基柱, 바오로), 황기원(黃基元, 안드레아), 이용래(李龍來, 아우구스티노),
원후정(元厚正, 사도 요한), 박내호(朴來浩, 사도 요한), 유 바오로, 강 요한, 조 타대오와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순교자 5명을 합하여 29명이 처형되었다.
절두산 처형자들 중에서 단지 이름만 알려진 최경원과 박영래를 제외한
나머지 22명은 이름과 행적을 알 수 있다.
이 22명 가운데 최수, 김인길, 김진, 원후정, 성연순은 심문 과정에서 배교하였지만
나머지 19명은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가 순교하였다.
절두산에서 많은 천주교자들이 순교하였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절두산에서 신자들을 처형한 일은 병인박해 내내 계속된 것은 아니었다.
1867년 음력 8월 2일 이후의 기록에서는 절두산에서 참수당한 신자들의 예를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고, 1868년 음력 윤 4월 7일부터는
다시 서소문 밖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되었던 것으로 보아서
절두산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기간은 1866년 10월 23일부터
1867년 7월 30일까지 한시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순교 장소 또한 절두산 꼭대기가 아닌 양화 나루터의 평지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이나 《치명일기》 등의 자료에
순교 장소가 ‘절두산 꼭대기’라는 언급이 없고,
대신 신자들의 처형지가 ‘양화진터’, ‘양화진두’ 등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대대로 절두산 근처 동리에 살아온 노인들의 증언과
절두산 꼭대기가 사형을 집행하기에는 너무 협소하다는 점 등을 통해서 추론해 볼 때
병인박해 당시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 장소는 양화 나루터의 약간 언덕진 평지로
오늘날 절두산과 꾸르실료 건물 사이의 한 지점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성지 조성]
1956년 천주교 일각에서는 초기 한국 천주교 순교자들의 넋이 서려 있는
절두산 지역을 성지로 조성하자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한국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이하 ‘현양회’)는 “절두산 치명터를 확보하자”라는
호소문을 발표하여 각계 각층의 협조를 이끌어낸 끝에
1956년 12월 7일 잠두봉 일대의 치명 터를 매입하였다.
현양회에서는 병인박해 100주년을 앞둔 1962년 20평 내외의 좁은 평지를 조성하고,
그곳에 ‘가톨릭 순교 성지’라는 글이 새겨진 높이 12m의 순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이와 함께 돌로 작은 야외 제대를 마련하여 미사를 집전할 수 있게 하였고,
기념탑 위에 십자가를 높이 세웠는데 1965년 낙뢰로 인해 십자가가 훼손된 후
기념관을 건립할 때 야외 제대와 함께 철거하였다.
병인박해 100주년을 맞이하여 순교자들의 신앙을 현양하고,
병인박해를 되새기기 위해 절두산 일원에 기념관의 건립을 결정하고,
1966년 3월 건립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10월 병인순교 100주년 기념 성당과 기념관이 완공되었다.
기념관은 병인박해 당시 신앙을 지켰던 순교자들의 숨결을 오늘날 더욱
생생히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절두산의 원형은 변형하지 않도록 건설되었다.
또한 기념관과 성당은 전체적으로 순교 정신의 상징과 한국적인 토착성,
전통적인 고유미를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기념관은 총 459평으로 본 건물 3층, 종탑과 기념 성당으로 구성되었다.
기념관 내부에는 자료실을 만들었는데 김상기(金床基, 세례자 요한) 박사가 기증한
김대건 신부와 안중근(安重根, 토마스) 의사와 관련된 유물 등이 보관되었다.
기념 성당 지하실에는 서양식 유해 안치소인 성해실이 있는데
처음 이곳에는 병인박해(丙寅迫害) 당시의 순교자 11명과
기해박해(己亥迫害) 당시의 순교자 5명 등 총 16위의 유해가 모셔졌다가
현재는 27위 순교 성인들과 무명 순교자 1명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첫댓글 천주교 서울순례길 3코스 일치의 길(1) 영상과 설명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