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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경]의 <해내경>과 <대황경>은 고조선의 역사
<산해경>은 누가 지었을까?
<산해경>은 선진先秦 시대의 사료로서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지리서이며 총 18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내용은 고대의 지리, 물산, 신화, 무술, 종교 등을 기술하고 있고 또한 고대 역사,
의약, 민속, 민족 등의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
[한서]<예문지>에는 <산해경>이 13편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대황경> 이하 5편을 포함시키지
않은 데 따른 것이다.
<산해경>은 사마천 [사기]<대완전>에 인용되어 있는데 저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한 유흠劉歆의 [산해경]<서록>과 <논형>, <오월춘추> 등에는 우禹, 백익伯益의
저작으로 나타나 있다.
유흠의 <산상 해경표>에서는 “<산해경>은 唐虞 시대에 출현했다” 라고 하였다.
청나라 때 학자 필원畢沅은 [산해경]<신교정서>에서 <산해경>이 전해진 과정에 대해 설명하면서 “우와 백익에 의해 저작되었고 주周나라와 진秦나라 시대에 전술되었다” 라고 말하였다.
오늘날 <산해경>이 하나라의 우와 백익의 저작이라는 사실을 입증할 길은 없다. 그러나 서한의 유명한 학자였던 유흠이 공연히 근거없는 말을 했을 리 만무하다.
또한 사마천도 <사기>에서 인용한 것을 보면 <산 해경>을 선진시대의 사료로서 인정한 것은 확실하다 할 것이다.
다만 오늘날 전하는 <산해경> 18편 전체를 선진시대의 저술로 보기는 어렵다.
<산경山經> 5편은 우와 백익의 저술로 볼 수 있을 것이나 <해외경> 이하는 우와 백익의 저술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도圖를 설명한 내용이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해외경>과 <해내경>에는 탕임금과 문왕을 장례 지낸 장소가 기록되어 있으니 이는 주나라 때 산해도 山海圖를 설명한 문장일 것이다.
또 평택, 조양, 회포 등과 같은 곳은 한나라 때 설치된 현이다.
이는 한나라 때의 기록이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산해경>의 선진 사료로서의 가치를 전면적으로
부정해서는 안 되며 내용에 따라서 구별해 보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산해경>의 주석서
우리나라에 <산해경>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후반이다.
그 후 정재서 교수가 <산해경>의 원문을 완역하여 상당히 주목을 받았다.
정교수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산해경>을 동북아시아 특유의 상상력의 원천을 보여주는 자료라는
입장에서 연구를 진행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런 연구는 중국인 학자들도 아직 시도한 적이 없기 때문에, 어찌보면 정교수의 업적을 통해 국내의 <산해경>에 대한 이해의 수준이 중국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있다고 해도 지나 친 말이 아닐 것이다.<성경호, 김영지 역, <산해경>, 역자의 말 중에서>
* 정재서 교수는 “<산해경>은 발해연안에서 기원하였다” 라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데 혹시 <산해경>이 고조선과의 연관성이 크기 때문에 중국인 학자들이 연구를 기피하였던 것은 아닐까?
(중국에서 나온 <산해경> 주석서로는) 진나라 때 곽박은 <산해경>에 대해 주석을 냈을 뿐만 아니라 <도찬>도 저술했다. 현재 도圖는 없어지고 찬贊만 남아 있다.
<산해경>의 주석서로는 청나라 필원의 <산해경교본>과 학의행의 <산해경전소>가 비교적 학술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청나라 때 오임신吳任臣(?-1689)의 <산해경광주山 海經廣注>가 있다.
오임신의 <산해경광주>와 조선기朝鮮記
오임신의 [산해경광주] 권18 <해내경>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海內經 海內經及大荒經 本逸在外 羅氏路史注 引此通作 朝鮮記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 名曰朝鮮
郭曰 朝鮮 今樂浪郡也 任臣案 殊域周咨錄 以其在東 朝日鮮明 故名朝鮮 朱國貞大事記云 朝鮮 取朝日
鮮明之義 高麗亦如之 前史有曰 丸都 所謂日月兩丸者 此也 錢溥朝鮮國志 朝鮮有三種 一檀君朝鮮 一
箕子朝鮮 一衛滿朝鮮 考箕子 封朝鮮 傳四十一代 至王準 凡九百二十八年 而失國于衛滿 準入漢地金馬
郡 自立號韓王 又傳二百年 倂入高句麗 兼有新羅百濟 又學海云 朝鮮後入海者 爲鮮國
<해내경> : <해내경>과 <대황경>은 본래는 유실되어 <산해경> 안에 있지않고 밖에 있었다.
나씨(나필羅泌)의 <노사路史> 주에는 이를 인용하여 통틀어 <조선기>로 삼았다.
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으니 그 이름을 조선이라고 한다.
<산해경 본문> 곽박이 말하기를, “조선은 지금의 낙랑군이다” 라고 하였다.
임신任臣은 살피건대 <수역주자록>에는 말하기를
"동쪽에 있어 조일朝日이 선명하기 때문에 조선이라 한다.” 라고 하였다.
주국정의 <대사기>에는 말하기를 “조선은 조일이 선명하다는 의미를 취한 것이며 고려도 역시 그와
같다.
전사前史에 ‘환도丸都라는 것은 이른바 해와 달이 모두 둥글다는 것이다’ 라고 말한 것이 그것
이다.” 라고 하였다.
전부錢溥의 <조선국지>에는 “조선이 세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단군조선이고 하나는 기자조선이며 하나는 위만조선이다” 라고 하였다.
고증에 의하면 "기자를 조선에 봉한 후 41대를 전하여 왕준에 이르렀으며 무릇 928년이었는데 위만에게 나라를 잃어버렸다. 기준은 한漢나라 땅 금마군으로 들어가서 스스로 나라를 세우고 한왕이라고 하였다. 또 200년을 전하다가 고구려를 병합하고 신라, 백제를 겸하여 소유하였다” 라고 하였다.
또 <학해學海>에는 말하기를 “조선은 뒤에 바다도 들어간 자들이 선국鮮國이 되었다” 라고 하였다.
(오임신의 주)
<해내경>과 <대황경>은 고조선의 역사
오임신의 <산해경광주>는 한국 고대사와 관련해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언급하고 있다.
첫째는 [산해경]에 나오는 <해내경>과 <대황경>을 <조선기朝鮮記>로 표현하고 있는 점이다.
오임신은 <산해경광주>에서 <해내경>에 대해 설명하면서 <대황경>과 <해내경>을 모두 <조선기>로 보았던 <노사路史>의 이 견해에 동의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해내경>을 고대 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기>로 간주한 것은 비단 <노사> 주注에 국한된 견해가 아니고 다른 여러 저작들에서도 그와 같은 관점들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설략>,<광박물지>, <산서통지>, <지유>, <산대각주초사>, <명의>, <강한총담> 등에서
도 이와 동일하게 <해내경>을 <해내조선기> 또는 <조선기>라고 표현하고 있다.
고조선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약점이 사료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산해경> 안에 들어 있는 <대황경>과 <해내경>이 바로 고대 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기>라고 한다면 우리는 고조선사와 관련된 중요한 직접 사료를 확보하는 셈이 된다.
<산해경>에 포함된 <대황경> 이하 <해내경>까지의 다섯 편을 선진 사료가 아닌 서한 유흠의 저수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송나라 때 저술된 <노사>의 주에서 <해내경>을 <조선기>로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은 송나라 때까지는 <해내경>은 조선의 역사기록이라는 인식이 상당히 확산되어 있었음을 반영한다.
그렇다면 <대황경>과 <해내경>은 유흠의 저술이 아니라, 본래 조선의 역사 기록인 <조선기>였던 것을 유흠이 서한시대에 이르러 <산해경>에 포함시켰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하겠다.
<대황경>과 <해내경>은 그 내용상으로 볼 때 중원의 역사 기록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한서]<예문지>에서 <산해경>을 소개할 때 13편이라 하고 <대황경> 이하 5편은 <산해경>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따라서 한당漢唐 이후 많은 중국 학자들은 <대황경>과 <해내경>의 사료적 가치를 평가절하 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해내경>은 조선국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그 서두를 열고 있다. 또한 군자국, 백민국 등을 다루고 있는 그 전체 내용상으로 보더라도 조선인이 고대 조선의 역사를 직접 기록한 <조선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심백강, <되찾은 고조선>, 75-86쪽 요약>
고조선과 관련한 <대황경>과 <해내경>의 내용
*동해 밖 큰 협곡이 있는데 소호국少昊國이 이곳에 있다. 소호가 일찍이 여기서 전욱을 길렀는데, 전욱이 어렸을 때 가지고 놀던 거문고를 이곳에 버렸다. 이곳에는 산이 하나있는데 감산甘山이라고
한다. <대황동경>
*동구東口라는 산이 있는데, 산 속에 군자국이 있다. 군자 사람은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 보검을 차고
있으며, 우아하면서도 소박해서 군자의 기품이 강하다. <대황동경>
*백민국白民國이 있다. 그 선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제준帝俊이 제홍帝鴻을 낳고, 제홍이 백민白民을 낳았다. 백민국 백성의 성씨는 쇠(銷)로, 오곡을 주식으로 하고 호랑이, 표범, 곰과 말곱을 부릴 수 있다. 청구국靑丘國이 있다. 이곳에 꼬리가 아홉 달린 여우가 산다. <대황동경>
*대황 가운데 얼요군저산이 있다. 이 산 위에 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이름을 부상扶桑이라고 한다. 이 나무는 높이가 300리나 되고 잎은 겨자 풀 같다. 온원곡이라는 계곡이 있는데 양곡湯谷이라고도 한다. 양곡에도 부상이 서 있다. 태양 하나가 막 돌아오고 다른 태양이 나가고 있는데, 모두 세 발 달린 까마귀 등에 실려 있다. <대황동경>
*황제가 ‘기?’ 라는 짐승을 잡아서 가죽으로 북을 만들고 뼈로 북채를 만들어 두드렸더니 그 소리가
500리 밖까지 들려서, 전쟁 때 이것으로 사기를 북돋우며 적군을 떨게 했다고 한다. 황제가 치우를
토벌할 때의 일이다.
치우는 구리처럼 단단한 머리로 돌을 부술 수도 있고 공중으로 날아오를 수 있으며 험한 산길을 달릴 수도 있었다. 황제는 기의 가죽으로 북을 만들어 아홉 번 북을 두드려 치우를 제지했더니, 치우 역시 날거나 달리지 못하고 결국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대황동경>
*동북 대해의 바깥, 대황 가운데, 하수가 흘러 지나가는 곳에 부우산附?山이라는 큰 산이 있다. 전욱 황제와 그의 아홉 비빈이 그곳에 묻혀 있다. <대황북경>
*대황 가운데에 불함산不咸山이라는 큰 산이 있는데 그곳에 숙신씨국肅愼氏國이 있다. <대황북경>
*동해의 해내, 북해 모퉁이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고, 천독국天毒國이라는 나라가 있다. 이곳 사람은 물가에 살며 어질고 착해서 살생을 하지 않는다. <해내경>
*서남쪽에 파국巴國이 있다. 대호가 함조를 낳았고, 함조의 후대가 승리이며, 승리의 후예가 후조다.
후조가 바로 파국 사람의 시조다. 대호는 태호太昊로 복희씨를 말한다. 복희에게는 무상이라는 후손이 있는데 그는 파씨족巴氏族의 아들로 남방의 무락종리산에 산다. <해내경>
*염제(신농씨)의 손자를 백릉이라고 한다. 백릉은 오권의 아내인 아녀연부와 정을 통했는데, 아녀연부가 임신한 지 3년 뒤에 세 아들을 낳았다. 첫째는 고, 둘째는 연, 셋째는 수였다. 수는 처음으로 화살을 만든 이다. 고와 연은 처음으로 종鐘과 경磬을 만들어 악곡의 장법을 만들었다. <해내경>
*제준帝俊이 우호를 낳았고, 우호의 후대는 우경이며, 우경은 번우를 낳았다. 번우는 배를 제작한 시조다. 번우가 해중을 낳고 해중이 길광을 낳았다. 길광은 최초로 나무를 이용해 수레를 만들었다.
제준이 예에게 붉은 활과 흰 털이 달린 짧은 화살을 주면서 해악을 없애 하국下國을 돕도록 명령했다. 예는 사람들의 고통을 없앴고 사람들을 해치는 나쁜 무리를 제거했다.
제준이 안룡을 낳았고, 안룡은 최초로 가야금과 거문고를 만들었다. 제준에게는 여덟 아들이 있다.
이 아들들이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처음 만들었다. 제준의 후대는 삼신국三身國의 백성이다.
삼신국 사람이 의균을 낳았는데, 의균이 바로 교수다. 교수 시대부터 사람들이 각종 농기구를 제작
할 수 있게 되었다.
후직은 농작물을 파종하는 법을 깨우쳐 주었다. 후직의 손자가 숙균인데, 그 시대부터 소를 부려 밭을 경작하게 되었다. 대비적음이 처음으로 한 국가에 봉해졌다. 우와 곤이 천하의 땅을 처음으로 구분하여 높은 산과 큰 하천을 정하고, 구주의 모양을 만들었다. <해내경>
*염제의 아내 적수씨赤水氏의 딸인 청요였다. 염제와 청요가 결합해서 염거를 낳았다. 염거의 후대가 절병이고, 절병이 희기를 낳았다. 희기는 또 축융을 낳았다. 축융은 강수 일대로 귀양 가서 나중에 공공을 낳았다.
공공의 후대는 술기인데, 술기는 머리통이 평평하고 머리 위는 흙으로 덮여 있었다. 그는 언제나 강수 일대에서 거주하였다. 공공에게는 또 후토라는 아들이 있었다. 후토는 또 열명을 낳았다. 열명은 그 어머니가 12년간 임신하여 낳은 아들이다. <해내경>
* 동호국東胡國이 대택의 동쪽에 있다. 고신씨高辛氏가 해변에 이르러 사냥을 하다가 어린 아들
염월을 북이北夷에 살도록 남겨 두니, 후에 국호를 동호라 했고 그 후손이 모용씨慕容氏다.
이인국夷人國은 동호국 동쪽에 있다. 맥국貊國은 한수漢水의 동북에 있다. 연燕나라에 접해 있었던
이곳은 결국 연나라에의해 멸망했다. 맥국에서는 좋은 말과 옥과 담비의 가죽이 나며, 대추처럼 커다란 진주도 난다. <해내서경>
*개국蓋國은 대연大燕의 남쪽, 왜국倭國의 북쪽에 있다. 왜국은 연나라의 관할 하에 있다. 왜국은 동쪽의 큰 바다 안쪽에 있으며, 여자가 가장 노릇을 한다. 그들은 단주丹朱로 몸을 칠하고 있으며, 질투를 하지 않아서 한 남자가 몇십 명의 부인을 맞을 수 있다. 조선朝鮮은 열양하列陽河의 동쪽, 황해黃海의 북쪽, 분려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하도 연국에 속한다. <해내북경>
*숙신국肅愼國이 백민국 북쪽에 있다. 이곳에는 웅상雄常이라는 나무가 있다. 나라에 현명한 천자가
제위를 이으면 이 나무껍질이 쭉쭉 자라서 백성들이 옷을 지어 입을 수 있다고 한다. 이곳 백성들은
평소에 옷을 입지 않고 산다. <해외서경>
<서경호, 김영지 역, <산해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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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경」의 첫머리는 작산(鵲山)이다. 작산의 첫머리는 소요산(招搖山)인데, 서해변에 접해 있고, 계수나무가 많이 자라며, 금과 옥이 많이 난다. 이곳에 사는 어떤 풀은 생김새가 부추 같고 푸른 꽃이 핀다. 그 이름은 축여(祝餘)이고, 이 풀을 먹으면 배가 고프지 않다.
이곳에 어떤 나무가 있는데, 생김새가 닥나무 같으며 결이 검고 빛이 사방을 비춘다. 그 이름은 미곡(迷穀)이며, 이것을 몸에 지니면 길을 잃지 않는다. 이곳에 사는 짐승 가운데 꼬리가 길고 귀가 희며 사람처럼 달리기도 하는 성성이라는 것이 있다. (제1권 「남산경」)
「남차삼경」의 첫머리는 천우산이다. (······) 또한 동쪽으로 500리를 가면 단혈산(丹穴山)이 나오는데, 산 위에서는 금과 옥이 많이 난다. 단수(丹水)는 여기서 시작해 남쪽으로 흘러서 발해에 이른다. 이곳에 사는 어떤 새는 닭처럼 생겼는데, 오색 무늬가 있다. 그 이름을 봉황(鳳凰)이라 한다.
머리 무늬는 덕(德)을, 날개 무늬는 의(義)를, 등 무늬는 예(禮)를, 가슴 무늬는 인(仁)을, 배 무늬는 신(信)을 나타낸다. 이 새는 먹고 마시는 것도 자유롭고, 스스로 노래하며 춤을 추는데, 이 새가 나타나면 천하가 평안해진다. (제1권 「남산경」)
「서경」의 첫머리인 전래산(錢來山)에서 괴산까지는 모두 19개의 산이 있는데, 그 거리는 2,957리나 된다. 화산(華山)은 모든 산의 근원으로, 제사를 지내는 중심이며, 제물은 소 · 양 · 돼지를 이용한다.
유산(羭山)은 신령이 영험을 보이는 곳이므로, 제사를 지낼 때는 횃불을 100개 밝히고 100일 동안 재계하며, 100마리의 희생을 바치고, 100개의 유옥(瑜玉)을 땅에 묻고, 100동이의 술을 데우고, 100개의 규옥(珪玉)과 100개의 벽옥(璧玉)을 바친다.
나머지 17개의 산에는 털빛이 좋고 건강한 양 1마리를 제물로 바친다. 횃불은 온갖 풀로 만들었기 때문에 쉽게 재로 변하지 않는다. 오색 돗자리를 마련하고, 가장자리는 흰색으로 두른다. (제2권 「서산경」)
다시 북쪽으로 200리를 가면 발구산(發鳩山)이 나오는데, 산 위에는 뽕나무가 많다. 이곳에 사는 어떤 새는 생김새는 까마귀 같고, 머리에 무늬가 있으며, 부리는 희고 발은 붉다.
이름은 정위(精衛)라고 하는데, 그 울음소리가 “정위, 정위” 하고 마치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아 붙여진 이름이다.
이 새는 본래 염제(炎帝)의 딸로, 이름은 여왜(女娃)이다. 여왜는 동해에서 놀다가 물에 빠져 돌아오지 못해 정위가 되었는데, 늘 서쪽 산의 나무와 돌을 물어다 동해를 메운다. (제3권 「북산경」)
결흉국은 해외(海外)의 서남쪽 귀퉁이에서 동남쪽 귀퉁이에 이르는 지역에서 그 서남쪽에 있는데, 그곳 사람들은 가슴이 튀어나왔다. 남산은 그 동쪽에 있고, 이 산에서는 벌레를 뱀이라 하고 뱀을 물고기라 부른다. 또는 남산은 결흉국의 동남쪽에 있다고도 한다.
비익조(比翼鳥)는 그 동쪽에 있는 새로, 몸빛이 푸르고 붉으며 2마리가 날개를 나란히 하고 난다. 또는 남산의 동쪽에 있다고도 한다. (제6권 「해외남경」)
기굉국(奇肱國)은 그 북쪽에 있다. 그곳 사람들은 팔이 하나에 눈이 셋이며, 암수가 한몸이고, 무늬가 있는 말을 탄다. 그 곁에는 머리가 둘이고 적황색을 띤 새가 있다.
형천(形天, 염제의 신하로, 천제와 염제가 싸웠다는 신화가 전해짐)이 천제와 신의 지위를 두고 이곳에서 다투었는데, 천제가 그 머리를 잘라 상양산(常洋山)에 묻자, 젖으로 눈을 삼고, 배꼽을 입으로 삼아 방패와 도끼를 들고 춤을 추었다. (제7권 「해외서경」)
해의 그림자를 따라 달리는 과보
과보[夸父, 염제의 후예. 과는 크다는 뜻이고, 보(父)는 보(甫)와 같으며 남자의 미칭이다]는 해의 그림자를 따라 달렸다.
해 질 무렵이 되어 목이 마르자 황하와 위수의 물을 마셨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북쪽에 있는 대택(大澤)의 물을 마시러 가다가 도착하기도 전에 목이 말라 죽었다. 그때 지팡이를 버렸는데, 그것이 변하여 등림(鄧林)이 되었다. (제8권 「해외북경」)
북쪽에 흑치국(黑齒國)이 있다. 그곳 사람들은 이가 검고, 벼와 뱀을 먹는다. 붉은 뱀 한 마리와 푸른 뱀 한 마리가 늘 그 곁에 있다.
그 아래 탕곡(湯谷, 해가 돋는 곳)이 있고, 탕곡 위에는 부상1) 이 있는데, 그곳은 10개의 태양이 목욕을 하는 곳으로, 흑치국의 북쪽에 있다. 물 한가운데에 큰 나무가 있는데, 9개의 태양이 아래가지에 있고 1개의 태양이 윗가지에 있다. (제9권 「해외동경」)
해내(海內)의 곤륜 언덕(昆侖虛)이 서북쪽에 있는데, 이는 천제가 하계에 둔 도읍이다. 곤륜 언덕은 사방이 800리이고, 높이는 1만 길이다.
산 위에는 높이가 5심(尋), 둘레가 다섯 아름이나 되는 목화(木禾)가 자란다. 위에 옥으로 된 난간을 두른 9개의 우물이 있고, 그 위에는 9개의 문이 있는데, 그 문을 개명수(開明獸)라는 신이 지킨다. 이곳이야말로 많은 신들이 사는 곳이다. (제11권 「해내서경」)
개국(蓋國)은 거연(鉅燕)의 남쪽, 왜(倭, 일본)의 북쪽에 있고, 왜는 연(燕)에 속한다. 조선(朝鮮)은 열양(列陽)의 동해 북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은 연에 속한다. 열고야(列姑射)는 바다 한가운데에 섬처럼 자리하고 있다.
야고국(射姑國)은 바다에 있어 열고야에 속하며, 산이 서남쪽을 에워싸고 있다. (······) 봉래산(蓬萊山)은 바다에 있고, 거인들의 시장[해시(海市), 즉 신기루]이 바다에 있다. (제12권 「해내북경」)
계곤산(係昆山)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는 공공대(共工臺)가 있어서 활을 쏘는 사람은 감히 북쪽으로 향하지 못한다. 여기에는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이 있는데, 황제(黃帝)의 딸로, 이름은 발(魃)이라 한다.
치우(蚩尤)가 무기를 만들어 황제를 치자, 황제는 응룡(應龍)에게 명해 기주(冀州, 중원)에서 치우와 싸우게 했다. 치우는 풍백(風伯)과 우사(雨師)에게 부탁해 응룡이 물을 모아 둔 곳에 폭풍이 몰아치게 했다.
그러자 황제는 발을 내려보내 비를 멈추게 하고 치우를 죽였다. 결국 발은 다시 하늘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고, 그녀가 있는 곳에는 비가 내리지 않게 되었다.
숙균(叔均)이 그런 사실을 천제에게 알리자, 천제는 그녀를 적수(赤水) 북쪽에서 살도록 했고, 숙균은 밭농사를 책임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때로 그곳에서 도망치려는 발을 막으려 할 때면 “신이여, 북쪽으로 가시오!” 하고 외쳤다.
그렇게 하여 먼저 물길을 깨끗이 하고 도랑을 터서 물이 잘 흐르게 했다. [제17권 「대황북경(大荒北經)」]
이 책의 18편 가운데 처음 5편을 「오장산경」이라 하고, 분량도 반을 차지한다. 기술하는 방식에는 일정한 틀이 있는데, 예를 들면 ‘「남산경(南山經)」의 첫머리는 작산(鵲山)이라고 한다’,
‘「남차이경(南次二經)」의 첫머리는 거산(袪山)이라고 한다’, ‘「남차삼경(南次三經)」의 첫머리는 천우산(天虞山)이라고 한다’라는 식으로 산맥과 산의 이름을 들고, 거기에 사는 동물과 광물의 이름이나 형상을 소개하고 있다.
그 한 구절의 말미에는 산악의 수와 산맥 전체의 길이, 산신의 형태, 공물 및 제사 방식을 덧붙였다. 산지(山志)와 신기지(神祇志), 물산지(物産志)의 구성 형식을 띠고 있다.
그런데 제6편인 「해외남경」 이하로는 기술 방식이 바뀌어, 가슴이 툭 튀어나온 사람들이 사는 결흉국(結匈國)과 가슴에 구멍이 뚫린 사람들이 사는 관흉국(貫匈國)과 같은 기괴한 나라들을 열거하고 있다.
또 「대황동경(大荒東經)」 이하의 5편에서는 많은 인면수신의 신들과 그들에 관한 신화를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술 방식과 문체의 차이로 보아 이 책은 한 사람이 지은 것이 아닐뿐더러 저작 연대도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작자는 하나라의 우왕(禹王)과 그의 신하인 익(益)이라는 설이 있는데, 연구에 따르면 「오장산경」이 주나라 전국시대 이전의 것으로 가장 오래된 것이고, 「해외경」 이하는 그 뒤의 전국시대와 춘추시대에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도연명의 시에 ‘『산해경』의 그림을 본다’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책에는 원래 그림이 삽입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오늘날 전해지는 판본의 그림은 후세 사람이 그린 것인데, 흉칙한 귀신과 이인(異人), 조수, 어류의 그림에 나타난 기괴성이야말로 고대 종교 그 자체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최근에 장사(長沙)의 마왕퇴(馬王堆)에서 발견된 한나라 초기의 그림에서도 이런 성격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은 중국 고대 신화의 보고(寶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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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경에 등장하는 인물들]
[인면조(人面鳥) '주(鴸)']
[저인국 (氐人國) 남자인어]
[관흉국인 (貫匈國人)]
[혼돈(混沌)의 신(神), 제강(帝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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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경>과 고구려 고분벽화
<산해경>과 고구려 벽화의 상관성 |
(도교의 기원에 대해서는)
대다수의 도교학자들이 동의하고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타당성이 있는 가설은 동방 발해만설이다.
우선 발해만 연안은 전국 중, 후기 이후 신선설화가 최초로 유행했던 지역이고, 원시도교의 사제라 할 방사方士의 요람지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항은 고구려 벽화상에 적지 않이 출현하고 있는 <산해경> 신화의 제재이다.
그 동안 국내학계의 벽화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에도 불구하고, 이에 관한 고찰이 거의 없었다는 것은 기묘한 현상이기도 하지만, 중국신화에 대한 피상적인 파악과 그로 인해 중국학계의 전반영향론을 그대로 접수할 수밖에 없었던 국내학계의 저간의 사정을 짐작케 하기도 한다.
그러나 흔히 중국신화이 보고로 알려져 있는 <산해경>은 오히려 중원문화와는 거리가 먼 주변문화의 집대성이며, 정통의 주변, 한漢 문화보다 비정통의 은 및 연, 제, 초 문화와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는 견해가 정설이다.
따라서 고구려 벽화상의 <산해경>적 제재는 이제까지의 중국신화 인식과는 좀 다른각도에서 탐구될 필요가 있다.
<산해경>이 반영하는 지역은 학자들에 따라
초 혹은 산동山東 등으로, 동이계 신화권의 기반과 일치한다.
이 책이만들어진 시기는 대략 전국시대 무렵이지만 반영된 시기는 은대 또는 그 이전으로 볼 수 있다.
저자는 노신魯迅이 무서巫書로서 규정한 바 있듯이 무당 계층의 인물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산해경>과 동이계의 신화, 그중에서도 특히 고구려 신화와의 상관성은 <산해경> 상의 고대 한국문화에 대한 명시적 혹은 상징적 표현들을 통해 그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동이계 신화의 도교에로의 발전, 이 사실을 신화학과 도교학의 결합하에 가장 일찍 논구한 사람은
칼텐마크 교수이다.
그는 은 및 동이계 종족에게 있어서 공통적이었던 신조神鳥 토템이 도교이 비상하는 존재인 신선- 불사 관념의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에 의하면 초기 신선설화집인 <열선전> 은 동이계 문화요소가 지배적이다. 그가 설정하고 있는 이 동이계의 개념 속에는 고구려, 부여가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
<도교가 중국에서 발생하여 우리나라에 넘어온 것이 아니다.
원시 도교와 <산해경>은 발해연안에서 발생하여 황하유역으로 가서 도교가 되었고, 만주지역에서는 조의선인 등의 선가仙家가 되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에는 아직 노장 등 도가사상과 결합하지 않은 선가가 태동하고 있었다.
초기의 고구려 고분벽화는 이와 같은 원시도교와 <산해경>, 그리고 자생적 선가의 문화적 행위를 반영하였다. 중국식 관방도교가 고구려에 전해진 공식적인 기록은 영류왕 7년(624)이다.
고구려고분벽화는 증대되는 관방도교의 영향 아래, 한대 및 위진남북조에 걸치는 중원문화의 양식을 점차 받아들이게 되었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초기의 원시도교와 <산해경>, 그리고 후대의 관방도교까지 수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가 '신선의발달사'가 되고 있다.
벽화상에서 탐구되는 신선의 발달사는
"인면조人面鳥 - 우인羽人 - 승조신선乘鳥神仙 -
불과 제련신製鍊神, 야장신冶匠神 - 금단술金丹術) "의 과정으로 요약될 수 있다.
아래는 이와 관련한 내용의 상세한 설명이다...>
고구려 및 동이계 신화의 이미지는 ‘비상’ |
고구려 및 동이계 신화의 바탕을 이루는 종교, 습속과 관련한 이미지는 비상飛翔의 이미지로서,
고분벽화 공간을 가득채운 비조飛鳥, 비수飛獸, 비천飛天 등의 존재가 이룩해낸 분위기이다.
즉 샤머니즘과 조류숭배가 그것으로서역사문헌에 의해 이러한 경향은 대체로 입증되고 있다.
가령 고구려에서 관모冠帽에 새깃을 꽂고 그것으로 등급을 표시했다던가,
변한, 진한 등지에서 장례 때 죽은 사람이 승천할 수 있도록 큰 새깃을 함께 매장했다던가 하는 풍속이 있었다는 기록 등은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무속에서의 조류숭배와 상관된다.
(청화대학에서 고대신화를 강의한) 진몽가陳夢家는 본래 ‘무巫’ 는 갑골문에서 춤추는사람의 형상을 본따 만들 글자로서 ‘무舞’와 자원적으로 같다고 풀이한다.
아울러 ‘선仙’의 고자인 ‘선僊’은 춤소매가 펄렁거린다는 의미로서 결국 무와 선 즉 샤머니즘과 도교는 춤, 조류, 비상 등의 이미지를 매개로 발생론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산해경>에서 유래한 고구려 벽화의 인면조 |
고구려 벽화는 이러한 이미지들로 충만되어 있는데 그 가장 원초적인 형태는 <산해경> 에서의 괴조怪鳥이자 신조이기도 한 인면조人面鳥의 형상으로 표현된다.
덕흥리 고분에 그려진 천추, 만세, 삼실총, 무용총 벽화의 이름 미상의 인면조들이 그것이다.
이들의 형상은 모두 <산해경>에서 유래한다.
<산해경>이 본래 무서巫書로서 동이계 신화의 중요한 내용인 신조 토템을 뚜렷이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은 <산해경>에 수없이 등장하는 비조飛鳥, 비어飛漁, 비수飛獸 등의 유익有翼 동물들에 의해 전서全書를 통해 구현되고 있는 조류 비상의 이미지로서도 확인된다.
그중에서도 인면조의 형상은 날개 돋친 인간인 羽人 형상과 더불어 <산해경>내 鳥人一體 신화의 대표적 표현이다.
<해외동경>에 등장하는 동방의 신 구망을 비롯
<남차이경>의 주, <남차삼경>의 구여, 옹, <서산경>의 탁비,
<서차이경>의 부혜, <서차사경>의 인면효, <북산경>의 송사,
<해외남경>의필방 등이 인면조 부류이다.
<남차이경>의 인면조 '주鴸' 와 덕흥리 고분의 '만세萬歲' >
덕흥리 고분의 인면조, 만세 |
그런데 이들 대부분은 흉조이다.
탁비의 경우만이 그 깃텃을 차면 천둥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는 용처가 있을 뿐, 구여와 송사는 무해무익하며 나머지는 가뭄(웅, 인면효), 전쟁(부혜), 귀양(주), 화재(필방) 등을 유발하는 상서롭지 못한 새들이다.
그러나 분명히 이들로부터 유래하였을 덕흥리 고분의 천추, 만세는 이제 길조로 변신해 있다.
갈홍의 <포박자>에서는 이 새들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千歲之鳥, 萬歲之禽, 皆人面而鳥身, 壽 亦如其名
천세라든가 만세라든가 하는 새들은
모두 사람의 얼굴에 새의 몸체를 하고 있는데 수명 또한 그 이름과 같다. (갈홍 <포박자> 내편)
주나라에 패한 은의 신화가 도교와 결합 |
다음으로 신화의 도교에로의 전변과 동시에 일어나는 도교에 의한 신화의 전유專有 현상에서이다.
(주족周族과 유교에 밀려난) 기층문화로서의 도교는 스스로를 확충해나가는 과정에서 주변적 지위에 머물러 있던 동이계 신화 요소에 대해 긍정적 가치를 부여하여 자신의 체계 내에 편입시킨다.
주周에 끝까지 항전하다 패사敗死한 은의 태사문중聞仲이 모든 귀신을 쫓는 강력한 도교 신격인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으로 변신한 것이 그 좋은 예다.
대표적 도교이론서인 <포박자>에서의 인면조 수용은 이러한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조인일체鳥人一體의 우인羽人 형상 |
인면조에서 다시 변모된 형태의 조인일체 표현은 <산해경>에서 날개 돋힌 인간의 모습인 우민羽民, 환두讙頭 등 의 우인羽人 형상으로 나타난다.
<해외남경>에서의 이들에 대한 묘사는 다음과 같다.
羽民國在其東南, 其爲人長頭, 身生羽
우민국이 그 동남쪽에 있는데 그 사람들은 머리가 길고 몸에 날개가 나있다.
驩頭國在其南, 其爲人人面有翼, 鳥喙, 方捕魚
환두국이 그 남쪽에 있는데 그 사람들은
사람의 얼굴에 날개가 있고 새의 부리를 하고 있으며
지금 물고기를 잡고 있다.
우인 형상은 마왕퇴 백화 및 무량사를 비롯한 한대 사당의 화상석 등에서 자주 보인다.
고구려 벽화에서는 이와 동일한 형상이 나타나지는 않으나 집안오회분 오호묘 천장부 고임 부분과 사호묘 널방 벽 부분에 그려진 제신諸神 및 신선들의 우의羽衣를 걸친 모습이 보다 인간화된, 이에 상응하는 표현일 것으로 생각된다.
<<해외남경>의 우인羽人 '환두讙頭' 와 학을 탄 신선....>
조인일체의 마지막 단계, 봉황을 탄 신선 |
조인일체 형상의 마지막 단계는 아마도 학이나 봉황 종류의 조류에 올라탄 신선 형상일 것이다.
이러한 승조乘鳥 신선의 형상은 인면조와 같은 반인반수伴人半獸형이 자연으로부터 미분화된 인간 개념의 소산임에 비하여 이미 분화되어 자연력을 어느 정도 제어하게 된 인간존재의 개념 위에 빚어진 것이다.
아울러 동이계 신화의 도교에로의 발전적 측면을 고려할 때 샤만의 주술적 비상을 도왔던 은대 청동기상의 동물적 조력자들이 후대 도교의 승교술乘蹻術에서 신선의 조력자로서 그대로 수용되었던 사실과 관련하여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원시자료집인 <산해경>에는 아직 승조신선의 형상이 보이지 않으며 후한 말에서 위진 무렵 편성된 가장 오래 신선설화집인 <열선전>에 이르러서야 학을 탄 왕자교나 봉황을 탄 소사 등의 신선이 등장한다.
고구려 고분에서는 무용총, 오회분 오호묘, 오회분 사호묘, 통구 사신총, 강서대묘, 삼실총 등의 벽화에서 학, 봉황 등의 조류를 탄 신선들이 다수 출현한다.
손작운은 일찍이 이들 중 오회분 사호묘 및 오호묘의 승학신선을 <열선전> 상으 신선인 왕자교일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그러나 중국측 자료인 <열선도> 상의 왕자교와 고구려 벽화상의 그것은 분위기나 복식 등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어 동일인으로 보기 힘들다.
특히 벽화상에는 왕자교가 늘 불었다는 생황笙簧이 표현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이러한 승학신선을 굳이 왕자교에 비정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
<산해경>으로부터 유래된 조인일체의 신화관념은 고구려의 신화 속에서도 하나의 체계를 이루어
굳이 중원 인물의 모티브를 빌려오지 않더라도 벽화 공간내에 스스로의 인물형상을 빚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요약컨대
인면조- 우인- 승조신선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조인일체 신화체계는 <산해경> 등 동이계 신화의 도교에로의 발전노선과 같은 궤도 위에서 수립된 것이며, 우리는 고구려 벽화 위에 표현된 수많은 비상의 제제들을 이상과 같은 체계를 통해 다시금 읽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신농씨와 불의 신, 제륜신, 마석신, 야장신 |
통구 사신총과 집안 오회분 오호묘 및 사호묘 널방 천장 주위에는
일련의 약동하는 신화적 인물들이 그려져 있는데
그들의 존재는 그들이 수행하고 있는 초기 문화적 행위와 관련하여 특별히 우리의 눈길을 끈다.
우선 뒤의 두 고분에서 나란히 출현하고 있는 인신우수人身牛首의 신상은 염제 신농씨로 보아도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특히 오회분 오호묘에서의 경우 오른손에 벼이삭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부터 농업신으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식별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회분 오호며 및 사호묘의 신농 형상 주위를 보면 비의飛衣 같은 것을 입고 무엇인가 붉은 것을 손에 쥔 신령이 그려져 있다.
붉은 것이 불씨임이 맞다면 이 신은 염제신농을 보좌하는 축융祝融일 가능성이 높다.
곽박은 축융에 대해 고신씨의 화정火正으로서 화신이라고 주를 달고 있다.
축융의 형상은 <산해경>에서 ‘짐승의 몸에 사람의 얼굴을 하고 두 마리의 용을 타고 있다’ 고 하였으니 벽화의 그것과는 상당히 일치하지 않는 점이 있다.
<화신火神과 농업신, 그리고 아래의 야장신...>
<제륜신과 오른편의 마석신...>
다시 두 고분에서는 공통적으로 수레바퀴를 만드는 제륜신製輪神이 등장한다.
<산해경>을 보면 제준의 후예인 길광吉光이 처음 나무로 수레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태고의 수레는 소박한 통나무 바퀴 수레였으므로 벽화에서와 같이 바퀴통과 바퀴살을 온전히 갖춘 수레바퀴 형태는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벽화상에서 제륜신인 길광은 화신인 축융과 더불어 상당히 문명화되고 인간화된 형태로 표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두 고분의 축조연대가 이미 6세기 무렵인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다시 오회분 사호묘에는 숫돌에다 무엇을 가는 마석신磨石神과 쇠망치질을 하는 야장신冶匠神이 등장하고 있어 흥미롭다.
마석신의 신명神名은 알 수 없으나 <산해경>에서 이미 거친 숫돌, 고운 숫돌, 검은 숫돌 등을 구별하여 다수의 산출처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사실로 미루어 숫돌이 고대인의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도구이었음을 알 수 있다.
“치우는... 구리의 머리에 쇠의 이마를 하고 모래를 먹으며 다섯 가지의 무기, 칼, 창, 큰 쇠뇌를 만들었다”
< 태평어람>는 기록은 무기제작자로서의 치우의 야장신冶匠神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고구려 벽화 속의 신의 계보 |
그러면 이러한 고구려 고분의 신화체계 속에서 신보神譜는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우선 우리는 이들이 각각 농업신, 화신, 야장신, 제륜신, 마석신으로서의 기능적 성격을 띤
문화영웅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볼 수 있다.
문화영웅은 신화에서 창조신 다음에 출현하는 2차적 신격이다.
우리가 이들 신령의 이면에 깔려 있는 얼마간의 종족적 배경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들의 신성이 이처럼 신화와 역사가 겹치는 부분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이들은 각기 직업의 유래를 설명하는 직업신으로서의 성격도 띠고 있다.
마지막으로 신농, 축융, 치우, 길광 등은 모두 동이계 신화상의 중요한 존재들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길광은 <산해경> 내 동이의 대신大神인 제준 곧 순舜의 후예이며 치우는 황제의 강력한 적수였던 동이의 대군장으로 알려져 있다.
신농, 축융 등을 치우와 아울러 남방 묘만계 종족의 대신으로 보는 견해도 없지 않으나 앞서 말했듯이 이들은 동이계 신화로부터 분화된 존재이다.
오늘날 신화연구에 의하면 <초사楚辭>를 중심으로 한 남방신화의 제신諸神의 2/3 이상이 동이계 신령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며 초 문화의 형성데도 은 등 북방문화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초사>에서 발견되고 있는 돌궐어의 흔적이라든가 시베리아 문화요소 등은 이러한 사실을 지지하고도 남음이 있다.
아울러 우리는 고구려 벽화상의 이들의 복식이 조류숭배의 한 표현인 비의飛衣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도 이들이 동이계 신화상의 인물로서 묘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중 염제 신농씨, 축융, 치우 등 3명의 주요 신령들이 모두 불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이계 신화의 유력한 종교적 바탕인 샤머니즘에서 불은 샤만의 능력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다.
엘리아데는 샤만이 스스로를 보증할 수 있는 장기로서 두 가지를 들었다. 그 두 가지란 주술적 비상과 불의 통어이다.
또한 우리는 동이계 신화의 샤머니즘적 기반을 염두에 둘 때, 본래 동이계 종족의 군장이었던 이들이 샤만이거나 은대의 임금들은 무군巫君적 존재이었을 것으로 추정해도 좋을 것이다.
고구려 벽화의 야장신이 연단술로 |
우리는 신농, 축융, 치우와 같은 초기 무군들의 불의 통어술이 야금술적 단계를 거쳐 단약丹藥 합성을 위한 연금술적 단계로 이행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점에서 그라네가 일찍이 야장집단과 도교와의 기원적 상관성에 주목했던 것은 놀라운 착상이었다.
신선가들이 옛날의 야장이 금속을 정련해냈던 것과 똑같은 정신으로 갖가지 광물질 약재를 가열하여 불사의 단약을 추출해내려 했다는 유비는 여기에서 가능해진다.
우리는 <열선전>에 기록된 초기 신선 중의 일부가 야장 출신이거나 최소한 불의 탁월한 운용자라는 사실에 주목 할 필요가 있다.
적송자는 ‘불 속에 들어가 제 몸을 태우는’ 늘력을 지녔고 능?
영봉자는 도공陶工의 우두머리였으며 양모, 사문 등도 모두 불을 다루는 기술을 터득한 인물들이었다.
금단도교의 발생지는 장백산인가? |
이와 같은, 신화에서 도교로의 전이 과정을 염두에 두고 벽화상의 야장신 및 화신 모티브를 해석할 때 고구려 도교에 대한 이제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내용이 부각되어 온다.
그것은 다름 아닌 단약제련을 중심으로 하는 금단金丹도교의 존재이다.
이미 예시한 바 있듯이 송인宋人 증조曾慥가 편찬한 <도추道樞>에서는 금단도교이 기 본서인 <주역참동계>의 내용에 대해 논하면서 이 책이 후한인後漢人 위백양이 장백산長白山의 진인으로부터
금 단의 비결을 전수받아 이루어진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설화를 전술한 내용과의 상관하에 고려해보면 고구려, 만주지역에도 금단도교가 실재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아닌 게 아니라 <증류본초> ‘금설’ 조에는 양 梁의 저명한 도사 도홍경(456-536)의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
生金辟惡而有毒, 不鍊服之殺人...
高麗扶南及西域外國成器, 皆鍊熟可服.
자연산 금은 벽사의 효능이 있으나 유독하여 제련하지 않고 복용하면 사람이 죽는다...
고구려, 부남 및 서역 등 외국에서는 기물을 만들 때 모두 금을 잘 제련하여 복용이 가능하다.
미키(三木榮)는 이 대목을 근거로 중국의 영향을 받은 고구려 금단도교의 존재를 추정했고,
전상운 교수는 이 내용 을 발해만의 삼신산 전설 등과 연관시켜 오히려 고구려의 연단술이 중국에 전해졌을 가능성까지 과감하게 추리하였다.
이러한 추리는 앞서의 <주역참동계>의 성립설화와 상관지워 볼 때 전혀 무리한 것은 아니다.
득선得仙을 위해 치우 등 팔신에게 제사 |
연단술의 기원에 대해서는 일찍이 [사기]<봉선서> 상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少君言上曰,
祠竈則致物, 致物而丹砂可化爲黃金,
黃金成, 以爲飮食器則益壽
이소군이 임금께 아뢰었다.
“부뚜막신께 제사드리면 귓것을 불러올 수 있고 귓것을 불러올 수 있게 되면 단사를 황금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황금을 이루어 그것으로 음식그릇을 만들면 오래 살 수 있습니다.
이소군李少君은 한무제 시기에 활약했던 제齊 출신의 유명한 방사方士이다.
방사란 샤먼에서 도사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존재로 원시 신선가라 말할 수 있다.
다소 종교화된 표현을 취하고 있으나 윗글에서도 화신火神, 야장신가 밀접한 관계에 있는 부뚜막 신이 연단에 있어서 결정적인 작용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벽화상의 야장신에 대한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주목된다.
아울러 같은 책에서 이소군은 득선을 달성하기 위해 산동지역의 팔신八神께 제사를 드릴 것을 무제에게 권유하는데 이중 유일한 인격신으로 치우가 제시되고 있다.
연단술의 기원에 관한 이러한 내용들은 우리가 앞서 고찰한 벽화상의 야장신적 모티브에 대해, 최소한 고구려 문화와 연단술과의 상관성 나아가 발생론적 관계의 측면에서까지 다시 생각해볼 여지를 준다.
고구려 벽화와 금단도교의 존재 |
여기에서 우리는 고구려 벽화공간 내의 야장, 연단술의 신화, 도교적 체계를 검증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앞서의 신화적 자료에 대한 검토에 이어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은, 문헌이 아닌 벽화상에 도교 즉 연단술에 로의 연속관계를 입증할 수 있는 자료가 실재하여 과연 우리가 추론한 바 있는 문화 체계를 구성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일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이병도 교수의 강서대묘 벽화에 대한 이른 탐구가 적절한 시사를 줄 것으로 생각된다.
이교수는 천장부 제1층 개석 북쪽 면에 그려진 비선飛仙에 대한 분석에서 이 비선의 왼손에 들려 있는 것을 약그릇(藥器) 으로, 오른손에 들려 있는 것을 영지靈芝로 논증하였다.
영지는 [포박자]<선약>편에서 중요하게 거론되고 있는 약재로서 단사만은 못하지만 초목성의 약재 중 유일하게 상층의 선약으로 분류되어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단약 이 담겨있는 약그릇의 존재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금단 즉 단약을 빚어내는 연단술의 존재를 무리없이 상정할 수 있다.
<약그릇을 손에 받쳐든 승조신선...>
고구려 금단도교의 존재를 추정케하는 약그릇은 사실상 강서대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논해 온 야장신의 공간인 오회분 사호묘에서도 출현하여 바야흐로 일련의 신화- 도교적 체계를 웅변해 주고 있는 것이다.
널방 천장부 고임 앞면에 그려진 공작을 탄 신선 형상이 그것으로 그는 다름아닌 약그릇을 두 손에 받쳐들고 있다.
이 그림은 강서대묘의 그것이 비천의 형상에 가까운 신선이었음에 비해 완연한 도교적 인물이라는 점에서 더욱 정확히 표명해주고 있다.
결국 우리는 앞서의 조인일체의 세계에 대한 탐색에 이어 벽화공간 내의 동이계 화신 및 야장신의 계보가 수많은 여타의 도교적 제재들과 더불어 또 하나의 연속적 문화체계 속에서 읽혀질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이상으로 우리는 <산해경> 신화를 중심으로 한 동이계 신화의 도교에로의 전이과정을 상정하면서 고구려 벽화상 에 다수 출현하고 있는 <산해경>적 제제에 대해 살펴보았다.
- 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동양적인 것의 슬픔>, 145-167쪽 요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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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산해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