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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의 맛, 떠남과 머무름의 순간들
- 박영의 시집『독백은 일요일처럼』의 시세계
정 익 진 (시인)
1. 미각 산책
박영의 첫 시집『독백은 일요일처럼』의 시들은 우리들에게 포만감을 준다. 박영이 차린 밥상은 우리들이 즐겨 찾는 서민적인 먹거리들이다. 서민의 밥상은 화려하지 않다. 우리에게 너무나 낯익은 음식들 김치찌개, 된장국, 생선구이, 선지국밥, 돼지국밥 등이다.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음식들이다. 음식은 추억을 호출한다. 그때 경험했던 음식과 함께 사람과 사물과 사건에 대한 기억들을 되살려 낸다. 그 기억들이 과거의 일부분으로 자리하고 있다. 여러 예들이 있겠지만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경우를 본다. 성인이 돼 가는 주인공이 어느 날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를 먹는 순간 마음이 기쁨으로 넘쳐 오르면서 예전 기억들이 떠오르는 장면을 말한다. 이 유명한 장면 때문에 `프루스트 현상(The Proust Effect: 특정한 냄새나 맛, 소리로 인해 무의식적으로 기억이 다시 살아나는 현상)‘이라는 심리학 용어까지 생겨났다. 해당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과자 부스러기가 섞여 있는 한 모금의 차가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소스라쳤다. 나의 몸 안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깨닫고, 뭐라 형용키 어려운 감미로운 쾌감이, 외따로, 어디에서인지 모르게 솟아나 나를 휩쓸었다. 그 쾌감은 사랑의 작용과 같은 투로, 귀중한 정수를 채우고, 그 즉시 나로 하여금 삶의 무상을 아랑곳하지 않게 하고, 삶의 재앙을 무해한 것으로 여기게 하고, 삶의 짧음을 착각으로 느끼게 하였다.`
어떤 가수는 팥빙수를 만드는 과정을 가사로 삼아 시원한 여름을 노래했다. 요리를 주제로 한 영화나 TV드라마도 대량으로 양산되는 상황이고 지상파와 케이블방송의 예능 프로에서는 이른바 ‘먹방 프로’가 여전히 강세를 보이고 있다.
박영의 시들에는 음식에 관련된 시들이 자주 보인다. 음식과 요리를 즐긴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남에게 한 끼의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려 하는 배려의 심정이 담겨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한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음식의 맛은 물론 이와 연관된 여러 요소들이 이야깃거리가 된다. 먹는 장소, 좋아하는 메뉴, 식사 예절, 심지어 조리법을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이 음식이라고 말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가 밥이다. 날마다 삼시 세 끼를 먹어야 하는 밥이지만 밥의 의미는 우리에게는 각별하다. "밥 먹었니"가 우리에겐 가장 대표적인 인사말이다. 부산 사투리로는 ‘밥 문나?’가 된다. 심지어 ‘요즈음은 고생 안하고 잘 지내고 있나’ 이 말을 부산말로 번역하면 ‘어째, 밥은 잘 묵고 다니나?’ 로 표현할 수 있겠다. 만나자는 이야기도 흔히 "언제 밥이나 같이 묵자"라는 말로 대신한다.
자갈치시장 가운데 토막 지나
꼬리 어디 즈음 있는 골목
첫 입가심으로
생선 머리 같은 오복식당 안으로 든다
고봉밥 한 그릇
고등어구이 무제한
막 구운 고등어 들고
빈 접시 찾는 주인 아지매
7월 13일 무렵
생 고등어 들어온다고 웃는다
성질 급한 고등어 팔딱거리는 소리
새벽이 생일
생 고등어
오복이면 좋지
건너편 깡깡이마을 옆으로
산동네 불빛
언제부터 거기 있었지 묻는데
고향은 늘 그래 어두워야 보이지
무제한의 어둠이 들락거리는
자갈치시장 지느러미에 서서
우리 어디로 가고 있니
-「고등어구이는 무제한」전문
자갈치 시장의 오복식당이 어딘지는 몰라도 몇몇이 몰려가 밥 한 그릇 먹고 싶어지는 시의 내용이다. 부산다운 특징들이 한눈에 잡힌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용두산 공원 근처, 옛 미화당의 뒷골목을 ‘고갈비 골목’이라고 불렀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부산 중구의 광복동은 부산의 중심가이자 최고의 상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광복동의 핵심 지역인 미화당백화점(현 ABC 마트) 앞을 가리켜 ‘미화당 거리’라 했고, 부산 최고의 젊음의 거리였다. 저녁이 되면 젊은이들과 휴가 나온 군인으로 항상 북적댔다. ‘고갈비’라는 말도 비싼 갈비를 대신해서 서민적인 정서에 맞게 지어낸 말이다. 시의 배경이 깡깡이 마을 건너편이니 어딘지 대충 짐작이 간다. 깡깡이 마을은 원래 포구였으나, 일제강점기였던 1912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조선소가 들어서 크게 활성화 되었다. 바다를 등지고 뭍을 마주는 지형이라 선박 수리가 용이해 특히 수리조선업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깡깡이란 말은 어선 수리 시 쇠망치로 페인트나 녹을 벗겨낼 때 나는 소리에서 따왔다. 또한 그러한 작업을 하던 여성들을 ‘깡깡이 아지매(자갈치 아지매처럼)’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이곳 주변은 노동의 현장이다. 무제한 고등어가 아깝지 않은 사람 인심이 정겹게 묻어나는 작품이다.
작업장에 사람들이 없다/ 깡깡이마을 녹슨 배는/ 등 뒤로 바다를 두고 홀로 외롭다/ 오래된 식당 문은 여닫기 버거운 소리를 내며/ 할머니 눈치를 살핀다/ 누군가 먹고 일어난 식탁 위/ 김칫국물 씹은 생선가시/ 작업복의 웅성임에 합류한다/ 청도식당이면 추어탕 정도는 있어야지/ 마른 반찬 서너 가지 밀가루 푼 시락국/ 배를 만지는 사람들이니/ 생선이라는 이름의 찌개 하나/ 푹 익힌 무가 맛있다고 너스레를 떨면/ 일용할 양식은 배고픔이라고/ 페인트가 잔뜩 묻은 의자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작업의 오점들
-「점심시간」 전문
오복식당에서 청도식당으로 발길을 옮긴다. 이 시의 배경도 깡깡이 마을이다. 왠지 깡깡이 마을엘 가면 싼 가격에 푸짐한 점심 한 끼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메뉴는 추어탕이다. 소주 한잔 곁들이면 더욱 좋지 않을까. 인용시는 노동의 흔적이 흠뻑 스며든 작품이다. 작업복, 페인트가 묻어있는 의자, 녹슨 배, 이런 단어들에서 땀 냄새가 물씬 풍겨온다. 노동은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하여 육체적 노력이나 정신적 노력을 투자하는 행위를 뜻한다. 하지만 그 노동이라는 것은 온전히 일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은 가정과 사회생활을 포함한 모든 세상사를 말함이다.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모든 희로애락과 함께 숨 쉬는 것조차도 노동이다.
최근 변모된 깡깡이 마을 소식이다. 깡깡이마을에 오면 부산의 오래된 산업 현장과 소리·빛·바람·색채 등 다양한 요소를 반영한 예술작품을 동시에 만날 수 있다. 수년 동안 ‘공공예술프로젝트’를 통해 마을에 꼭 필요한 벤치, 가로등, 공원 등 편의시설이 예술가의 창의적인 발상을 거쳐 조성되었다. 깡깡이 마을은 장년층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켜 추억에 잠길 수 있고, 젊은 층에게는 ‘레트로(복고풍)’에 대한 호기심과 즐거움을 제공해준다.
동래산성 오르기 전 배가 고파 들어간 집/ 어느 恨 맺힌 며느리였을까요/ 나이 든 노부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어요/ 2대째라 하니 恨이 곱이겠지요/ 똘똘 뭉친 것 풀지 않고 있는 핏덩이/ 툭 건들며 풀어봐라 했지요/ 꽉 움켜쥐는 것이/ 恨, 恨/ 생각하느라 받아 놓고 먹을 수가 없었어요/ 인생 창백한 날이면 서둘러 찾았던 선지국밥/ 내 핏속에도 돌고 있을 恨/ 별 생각 없이 먹었다고/ 딴청 한 번 부려보고 일어섰지요/ 소의 눈망울을 닮은 주인 내외가/ 되새김질 하듯 말합니다/ 맛있게 드셨어요// 산 곳곳에 슬금슬금 핏기가 보여요/ 가을 산에 오지게 베인 가슴들을 둘러보면서/ 동문을 들어섰는데/ 맛있게 드셨냐는 말씀과 함께/ 내 안의 피 뚝뚝 떨어지는 선지/ 동문 바로 안에 딱 걸려 있지 뭐예요
-「며느리 선지국밥」전문
청도식당에서 며느리 선지국밥 집으로 배경을 옮긴다. 며느리밥풀꽃, 며느리배꼽꽃 이런 식물의 이름이 떠오르면서 며느리란 단어가 나오면 뭔가 한스런 느낌이 들기도 한다. 며느리와 시어머니 간의 전통적인 갈등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가족사의 한 부분으로 자리하고 있다. 지금에야 고부간의 갈등이라는 것이 옛날만큼은 아닐 것이다. 세상이 많이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2대째라 하니 恨이 곱이겠지요”. 굳이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이 문장에서 우린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 限은 순간적인 감정이 아니라 분노, 아쉬움, 안타까움, 또는 이들 모두 한데 묶은 감정이다. 묵은지 같은 감정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이별 같은 감정은 슬픔이 될 수 있겠지만 아직 한은 아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뒤돌아봤을 때 그 안타까운 별리는 한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위의 시에서 의미하는 限은 이별의 감정이 아니라 설움의 감정에 가깝다. 어쩌면 한은 나를 포함한 우리 민족의 고유한 감정표현이 아닐까. “내 핏속에도 돌고 있을 恨”은 어쩌면 선지와 같이 피맺힌 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참고로 '선지국'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선짓국’이 올바른 표기이다.
냄비에 올리브기름 넣고
고기 김치 김칫국물 넣고 볶아요
김치는 팍 삭아야 깊은 맛이 있어요
나락으로 떨어질 위험이 있기는 해도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허공을 휘젓는 것
그게 진짜 깊은 맛 아니겠어요
서로 어울려 한 몸인 듯 익었을 때 육수를 부어요
서로 닮아가는 시간은 어느 정도일까요
끓어오르고도 허공 보며
딴청 부릴 시간은 필요하겠지요
그 시점이 오면 조금은 변화가 필요해요
파 마늘 양파를 넣고 한 번 더 끓이면 돼요
눈이 덮여 있는 들판 한가운데 김치찌개를 올려보세요
밥도 한 공기 고봉으로 담고요
가지런히 숟가락 젓가락도 올리고
뜨거운 물도 한 잔 옆에 놓아요
한결 따스해 보일 거예요
내리는 눈이 김치찌개 속으로 들어가면
피어오르던 김은 살짝 놀라는 척 흩어지겠지요
-「눈이 오는 날은 배가 고파요」 전문
지금까지는 오복식당, 청도식당, 며느리 선지국밥집을 순례하며 식당 밥을 먹었다. 그러나 오늘은 시인이 직접 조리한 김치찌개를 우리에게 선사할 것이다. 김치찌개는 된장찌개와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찌개 요리로 자리하고 있으며 소주안주로도 그저 그만이다. 김치찌개의 역사는 사실상 김치의 역사와 때를 나란히 한다. 너무 시어지고 염분도가 높아 생식이 힘들거나, 양을 불리기 위해 김치를 물에 넣어 끓여먹던 방식이 고기, 대파, 두부, 마늘 등이 추가되어 현재의 김치찌개가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왠지 위의 시가 외롭고 따뜻하지 않은가. 누군가가 자꾸 생각나는 눈 오는 날, 시인은 김치찌개를 보글보글 끓여 여럿에게 대접하고 싶다. 나 혼자 자리하는 밥상이 아닌 모두와 함께하는 두레 밥상 같은 것, 박영 시인의 두레 밥상인 것이다. 단순한 조리법을 설명하는 시가 아니라, 세상을 맛있게 살아가는 조미료인 것이다. 서로를 닮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서로를 바라보며 밥상에 마주하는 시간이 아닐까. 너와 내가 소통하고 만나면 만날수록 그 사람들과 정이 쌓여간다. 성숙한 인간관계, 한번 이루어진 관계는 묵은지 같은 맛이다. 견고하다. 쉽게 단절되지 않는다. 남에게 선을 베풀 수 있는 것은 쉽지 않다. 따뜻함이 느껴지는 시이다.
2. 로드 무비
가까운 여행길이든 먼 여행길이든 현재 내가 있던 시간을 두고 또 다른 시간의 차원 속을 경험하기 위해 우리는 길을 떠난다. 완전히 다른 공간과 시간 속에서 여러 사건과 사물을 만나게 된다. 익숙했던 사건과 사물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사물과 사건을 대하며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할 수 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끝없는 도전을 통해 더욱 풍요로워지고 더 큰 행복과 보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여행길이 혼자일 경우에는 좀 외롭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큰 불편은 없다. 오히려 자신만의 생체 리듬대로 여행할 수 있다. 이 순간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켜야 할 의무가 없다. 유일한 한계는 자기 자신뿐이다. 일도, 타협도, 이래라저래라 하는 사람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좋아하는 일을 즐길 수 있는 귀중한 기회이다. 대낮부터 선착장 근처 소주집에 앉아서 책을 읽으며 술을 마셔도 좋고, 카페의 창가에 앉아 하염없이 뭔가를 바라봐도 좋다. 혼자 여행을 하며 화를 내는 사람이 있을까. 누구라도 선해진다. 마음에 여유가 있으니 마음속에 독한 기운이 발 들여놓을 수 없다. 하물며 시를 쓰는 사람이 혼자 여행을 하면 시심이 저절로 생겨나지 않겠는가. 시를 굳이 쓰려고 하지 않아도 여행 자체가 시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타자를 풍부하게 느끼면서 어떤 깨달음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인류사에 빛나는 별과 같은 인물들은 거의 여행을 통해 다시 태어난 사람들이다.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The Motorcycle Diaries 2004), 이 영화는 쿠바 혁명을 성공적으로 주도한 체 게바라가 어떻게 혁명가가 되어가는 지를 아름답고 감성이 풍부한 화면을 통해 여실히 보여준다. 또한 석가모니(고다마 싯다르타)의 예를 들 수 있다. 왕자로 태어났으나, 왜 인간의 삶은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이를 인식하게 된다. 이후 왕세자의 지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오랜 수행 끝에 '감정이라는 악마'의 유혹을 견뎌내고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이후 인도 북부를 중심으로 가르침을 펼치고 수많은 이들을 교화하다가 마지막 제자인 쑤밧다를 끝으로 80세의 나이로 열반에 들었다. 이와 같이 친구인 알베르토 그라나도(생화학자)와 ’오토바이‘ 한 대를 타고 남미의 여행길을 나선 에르네스토 게바라(체 게바라), 그는 왜 인간의 삶은 굶주림의 고통을 피하지 못하고 평등하지 않는가에 대한 문제에 직면한다. 싯다르타가 출가 이후 깨달음을 얻어 석가모니가 된 것처럼, 청년 에르네스토는 여행 이후 깨달음을 얻어 혁명가 체 게바라가 된 것이다. 하지만 여행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거대한 꿈을 꾸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 각자마다 역할이 있고, 각자 다른 생활을 영위하고 있으므로 개인적인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번 박영의 시집에서는 길 떠난 자의 심정으로 써 내려간 시들도 자주 눈이 띄었다.
삼랑진 북천 순천 벌교 보성/ 수많은 간이역을 지나는/ 부산에서 목포행/ 목포에서 부산행/ 무궁화호/ 하루 한 번 철길을 달린다// 목포행 일박 여행길/ 내일 타고 올 기차가/ 능주역에 서 있다/ 목포행 2호차 39번 자리에서/ 예매한 부산행/ 2호차 37번을 만난다/ 미래와 현재와 과거가 하나가 되는 시간/ 능주역 오전 11시 14분// 건너편 자리에서/ 내일의 나는/ 어제의 나를 볼 것이다/ 정해진 시간/ 정해진 자리// 눈 감았다 떴다/ 졸았다/ 과거는 역시 깜빡이다/ 다음날 부산행 기차/ 능주역 오전 11시 14분/ 나는 그 순간에 없었다// 과거의 나를 만나는 건/ 졸다 놓친/ 이미 예정된 사건이었을까// 미래를 보여주마/ 과거는 두고 가라
-「능주역에서 만나다」 전문
능주역은 전남 화순에 있는 경전선의 간이역 중에 한 곳이다. 오래전엔 붐비는 역이었지만, 지금은 한산한 간이역이다. 역이 주는 낭만성과 쓸쓸함 그리고 미래에 대한 어떤 희망적인 메시지를 얻기 위해 역을 찾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아무런 목적 없이 그냥 바람 부는 대로 떠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결국 사람들이 떠나는 이유는 가지각색이랄 수밖에 없다. 이 시에서는 화자가 죽목하고 있는 것은 시간이다. 현재와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시간. 칸트가 말했다. "시간과 공간이 관찰자의 주관 안에 있다"라고.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과거와 현재, 미래는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 뿐 실제로 그런 구분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속의 화자는 “미래와 현재와 과거가 / 하나가 되는 시간/ 능주역 오전 11시 14분// 건너편 자리에서/ 내일의 나는/ 어제의 나를 볼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시간성보다는 장소성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한 장소에서 서로 다른 시간대에 존재하는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은 낯선 체험이다. 내일 그 시간이 오면 그 내일은 어느새 현재가 되는 동시에 과거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들은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를 향해서만 흐른다고 느낄 뿐이어서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매 순간의 선택이 미래뿐만 아니라 과거까지도 바꿔 놓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알지 못한다. 과거 현재 미래는 한 덩어리로 연동되어 움직인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느냐에 따라 모든 것은 결정되는 것이다
홍룡교 근처에서 잠시 머뭇거릴 것
발밑에 흩어져 있는 때죽나무 꽃 보이거든
아, 이렇게 아름답게 지는 꽃도 있구나
절로 감탄하면서
손바닥위에 올려놓을 것
꽃 하나, 꽃 하나
손바닥 위에서 부르르 몸 떠는 꽃 하나, 하나
얌전히 모아 쥐고
다리 중간 즈음,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서서
살짝 벌린 손가락 사이로 바람이 스밀 때
바람에 스치어 꽃잎이 다시 바르르 떨 때
다리 밑으로
꽃 하나
꽃 하나
손가락 끝에서 도르르 구르듯 떨어지게 할 것
홍룡폭포에서 떨어져 내린 물
꽃나무에서 떨어진 그것
엉키듯 뱅뱅 한 자리에서 맴돌 때
서툰 물살에 꽃 하나, 꽃 하나 흘러 갈 때
오래 그 자리에 서 있을 것
오월 끝 무렵
그곳에 그렇게 서 있을 것
-「홍룡사 가거든」 전문
아, 아름다운 시이구나. 시라는 것이 봄날 무심하게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 자유로운 공간에서 날아다니는 날개처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어주는 마음으로 써 내려간 시이구나. 그러한 느낌을 주는 시편이라 특히 눈길이 많이 간다. 꾸밀 것도 없고 과장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있는 그대로를 시인의 섬세한 눈길로 자연을 읽어나간 것이리라 여겨진다. 시인은 어쩌면 꽃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싶어서 시간이 잠시 멈추기를 바랐을까. 멈춘 시간 속에 흘러가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타자를 위한 시간은 흘러가고 나만 흐르지 않는 시간 속에 머물고 싶지 않았을까. 왜 그랬을까. 오랫동안 한자리에서 꽃의 움직임에 마음을 붙이고 있다. 꽃이 질 때가 그러하듯이 시속의 꽃은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그냥 흘러가 버린다. 오월의 뭇 생명들이 떨어져 저 꽃들처럼 서툰 물살에 하나, 둘씩 시간 속으로 사라지는 것일까. 무심(無心)의 경지까지 다다른 시편이다. 무심은 책임을 회피하는 무관심이 아니다. 굳이 교리를 들추지 않아도 무심이란 사물에 관심이 없음이 아니다. 무심이란 오히려 모자람이 없고, 소유를 초월한 여여(如如)한 상태이다. 걸림이 없고, 시시비비가 없는, 자유로운 상태이다. 무심이야 그렇다 하지만 위의 시편에서는 알 수 없는 비애가 스며있기도 하다. 시인은 오월 그 시간의 끝자락에서 왜 그렇게 오랫동안 서 있어야 했을까.
무턱대고 머리 깎을 거라 찾아간 암자
첫물은 신에게 양보하고
밑에 물은 인간이
또 밑으로 허드레 물
그리 흐른 물은 어디로 가는지
흘러드는 것들 다 품으시던 노스님
잠들지 못한 나를 불러
한약 한 사발 내주셨다
밤이 지나면 기침이 낫는다 했는데
새벽은 오지 않고
동굴 끝 화장실
같이 가자는 말
단박 잘라버리던 삭발한 그녀
머리 민 칼을 내려놓지 못했던 것일까
약수 흐르는 자리도 순리대로
내려놓는 길이 험해
이틀도 지나지 않아 절을 나왔다
노스님의 미소가
화장실 문고리로 남아 서성이던 이십대였다
-「동학사 오르는 어디 즈음」 전문
홍룡사에서 흘러가버린 꽃이 동학사 어디 암자에 닿았을까. 시 속의 화자는 이곳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무엇 때문에 이곳을 찾은 것일까. 화자가 “무턱대고 머리 깎을 거라 찾아간 곳”이라 한다.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란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내가 살아온 혹은 살아낸 속세에서의 세월들이 그렇게나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속세에서 벗어나다’이에 답하는 몇 가지 표현이 있다. 凌雲之志 (능운지지): 높은 구름을 훨씬 넘는 뜻이라는 말로, 속세에 초연한 태도를 말함이고 초탈하려는 마음이다. 不繫之舟 (불계지주) : 매어 놓지 않는 배라는 뜻으로, 속세를 초월한 무념무상의 경지를 말함이고 정처 없이 방랑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方外之志 (방외지지): 속세를 떠나 불문(佛門)에 들어가고자 하는 뜻이다. 江湖歌道 (강호가도): 조선 시대, 은자(隱者)나 시인, 묵객(墨客)들의 현실을 도피용으로 자연을 벗 삼아 지내면서 창작 생활을 영위함을 말한다.
인용시의 화자는 어떤 경우에 속할까(아마도 불계지수, 매어 놓지 않는 배)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암자를 찾아온 이는 시속의 화자뿐만이 아니라 또 한 사람이 더 있다. 이 분이 등장함으로써 시의 내용이 한층 더 드라마틱해진다. “삭발한 같은 방 그녀는/ 머리 민 칼을 내려놓지 못하고/ 던지는 말마다 잘라버리는 중”이라 잘못하다간 큰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다 싶다.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자리를 내려놓다’라는 의미는 마음속의 집착을 내려놓는다는 말일 것이다. 불교에서는 방하착(放下着)이란 한자말을 쓰고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마음을 내려놓기란 불가능한 일이고, 모든 사람이 마음을 내려놓을 필요도 없지 않을까. 다만 타인을 배려하려는 마음자리는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3. 일요일의 미각
누워있는 것과 서있는 것에 대해/ 엎드려서 생각해 봐/ 눈을 뜨면/ 일요일의 베게 일요일의 이불 일요일의 내 오른손/ 일부러 열어 놓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일요일의 공기// 배가 고프면 먹거나 굶기/ 냉장고를 열면 당연히 먹는다는 거야/ 먹는다는 건 많은 대화를 필요로 하지/ 살짝 끼어드는 대화도 매우 유혹적이야/ 책갈피같이 끼어드는 꼴이란 // 8월 마지막 날 의미에 맞게/ 상대를 잘 골라봐// 목이 잘린 닭/ 달아난 닭대가리를 향해 중얼거린다고 생각해 봐/ 날개를 펴지 않을 거라 웅크리고 있다/ 껍질을 벗겨내기 전 내 뒤통수를 칠지도 몰라/ 사과 바나나 밥통/ 꼭지와 뚜껑의 차이// 냉장고 안에 있는 두부/ 유통기한이 이렇게 길어도 되나/ 얼마나 살고 싶은지 물어보지도 않고/ 인간들이란/ 두부같이 머릿속이 차가워지면/ 생각들을 손으로 다 으깨버려도 좋아// 주전자/ 수증기는 잘 도착했을까/ 가스 불빛 너도 반가워/ 사라진다는 도로 일요일
-「독백은 일요일처럼」 전문
일요일이다. 기나긴 여정을 마친 여행자가 닻을 내려놓고 망중한을 지내는 모습이다. 물론 일요일은 쉬는 날이다. 그동안 미뤄두었던 일이나 짧게나마 새로운 계획을 세워 보기도 한다. 거창한 무엇이 아니래도 상관없다. 일요일에 갑작스러운 일로 바쁠 수도 있겠지만 일요일이란 말 그 자체에서 주는 편안함과 평화로운 분위기가 있다. 몇 권의 책을 펴서 뒤적거리다가, 티브이를 보다가, 베란다의 화초를 감상하다가 물도 주었다가 소파 위에 다시 드러누워 멍 때리기도 한다. 인용시에서 시인이 묘사한 일요일의 풍경은 평화롭고 편안해 보이지만 약간은 쓸쓸한 기운이 감돈다. 그렇지만 혼자가 천하무적이다. 약간 외로울 뿐 무엇 하나 꺼리길 것이 없다. 이 시는 여러 가지 면에서 매력적이고 뛰어난 작품이다. 유유자적한 분위기 속에서 위트와 유머, 풍자적인 표현도 섞여있는 반면 날카로운 느낌의 말도 눈에 띈다. “인간들이란/ 두부같이 머릿속이 차가워지면/ 생각들을 손으로 다 으깨버려도 좋아”와 같은 매우 뛰어난 문장에서 시인의 시적 역량을 엿볼 수도 있다. 일요일의 자세는 편안하다. 주로 누워있거나 앉아 있거나 엎드린 자세를 취한다. 내 집의 물건과 사물들과 음식들과 함께 하며 소통한다. 사물이란 용도와 필요에 의한 수동적인 대상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나의 삶에 개입한다. 즉 사물은 물질적인 대상이 아니라 심미적이고 사유적인 대상이다. 시 속의 화자는 느린 것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냉장고와 냉장고 속의 먹거리들과 알콩달콩한 관계를 형성한다.
누워 뒤척이다가 팟캐스트 이동형 김용민 듣다가 까무룩 블랙홀로 빠져 더디게 흐른 몇 분 한참 먼 길 다녀온 듯하다가 눈 뜨고 움직이지 않는 뇌 살짝 찔러보다가 무딘 게 아무 반응하지 않아 뇌가 무딘가 찌른 것이 무딘가 리모컨 발로 당겨 TV 켜니 뇌는 가만히 있는데 뇌막이 부풀어 오른 것 같다가 쉬는 날 쉬는 데 불안한 건 왜 생각하다가 입 꾹 다물고 있는 노트북 째려보다가 TV 예능에 빠져 실실 웃다가 냉장고 수박 꺼내 씨까지 먹어치우고 요즘 대세 바나나 파이 하나 입에 넣고 우유 마시며 라면 끓이다가 하는 짓은 나이 먹어도 그대로라는 생각에 3초 멍해지다가 정익진 샘 시는 계속 쓰냐 전화로 물으시는데 쉬고 있어요,라고 했다가 시를 쉬는 건 안 쓰는 건가 못 쓰는 건가 노트북 열다가
어둠이 짙다 불 들어온다
-「잘 쉬고 있는 나를 툭 건드려보다가」 전문
엎치락뒤치락하며 휴식은 계속된다. 쉬고 있으면서도 불안하다. 아직 아무것도 결론 내지 못해서 불안한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충분히 하지 못해서 불안하다. 쉬고 있어도 마음 한구석에 돌덩이가 자리 잡고 있다. 일을 해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것처럼 쉬고 있어도 쉬는 게 아니다. 행동의 반경이 내 방안에 한정되다 보니 한계에 다다른 것이기도 하겠지만 시인의 입장에서는 시작업을 하지 못하는 것이 불편하기만 하다. 그래서 자문한다. “시를 쉬는 건 안 쓰는 건가 못 쓰는 건가 노트북 열다가 어둠이 짙다 불 들어온다.”라고 토로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여러 가지 정신적인 피곤함을 느낀다. 그중 하나가 번아웃 증상(소진 증후군)이다. 첫째,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자신이 근사하다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 둘째 기억력이 옛날 같지 않고 자주 깜빡깜빡한다. 셋째. 전에는 그냥 넘기던 일도 요즘은 더 짜증이 나고 화를 참는 게 잘 안 된다. 넷째. 어디론가 훌쩍 멀리 떠나고 싶다. 다섯째. 이전에는 즐거웠던 일들이 요즘은 재미가 없다. 꼭 소진 증후군이 아니더라도 이 같은 증상은 누구를 막론하고 몇 번쯤을 겪어보았을 것이다. 시인들의 경우에는 불안감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시를 잘 쓰는 것이다. 시를 쓰려는 마음은 가득해도 왜 작업에 진전이 없는 것일까. 그래서 시를 쓰지 않고 있으면 초등학생이 숙제를 하지 않은 것처럼 마음이 불안한 것이다. 시인들은 이 한 가지만 해결되면 어떤 상황에서라도 꿋꿋하게 잘 살아갈 것이다.
4. 나 좀 내버려 둬
박영의 시에서 또 하나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지점은 자아에 대한 ‘존재 의식’이다. 박영 시인의 시편들에서 이러한 요소들이 전면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기에 보다 세밀한 눈길이 필요하다. 겉으로는 안 아픈척하지만 속은 그렇지 않다. 박영의 시들은 그러므로 엄살을 부리지 않고 척하지 않는다. 아파도 아픈 척하지 않고 오히려 심각하지 않게 마무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시의 행간이나 문장 하나, 하나를 잘 뜯어봐야 한다는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성에 길들여져 있고 소외를 두려워한다. 규격화된 시스템에서 벗어나길 꺼려한다. 나는 아니라고 내가 그럴 리 없다고 주장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그 구조에 익숙해져 잘 느끼지 못할 뿐이다. 그리고 사람은 어딘가에 소속되어야만 심리적 안정을 느낄 수 있다. 어딘가에 소속된다는 것을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사회적인 적응이 심리적 안정을 가져오고 개개인들은 이런 안정감을 바탕으로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 지나칠 때에는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문제는 자기 자신의 입장만 생각하다 보니 타인을 배제시켜야 할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또한 너를 제외시키고 내가 시스템 안에 속해야 한다는 생각이 우선하다 보니 인간관계에 무리가 생긴다. 우리는 과연 남을 배제하지 않고 우리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가.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하고, 검토해서 해답을 얻었을 때는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해 달려가고 있는지를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개별 존재는 상호의존성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네가 괴로우면 나도 괴롭고 네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다. 자연 환경이 오염되면 인간도 오염되고, 생명이 죽으면 인간도 죽는다. 환경과 생명이 살아나면 인간도 건강하게 살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을 가만히 살펴보면 앞서 언급했던 말의 반대일 경우가 더 빈번하다. 네가 괴로워야 내가 좋고 네가 행복하면 내가 불행을 느낀다. 자연이 오염되어 생명이야 죽던 말았던 나만 편리하면 그뿐이라는 생각이 사회에 팽배해 있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독립적인 삶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독립적인 삶, 그것은 그 어떤 것보다 우월하다.
도시 속으로 돌진한 멧돼지/ 자신을 향해 시비 거는/ 차들/ 사람들/ 불빛들// 살기 위해 들이박은 야성/ 피 흘리며 쓰러진 사람/ 눈에 보이는 붉은 피는/ 야성 본능에 불을 붙이고// 낯선 길에서 방황하는 자신이/ 더 낯설어/ 두리번거리는 멧돼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뒷걸음질 치는 멧돼지// 사람들에 의해 포위된 도로/ 길을 잃고 쓰러진 멧돼지// 안간힘을 다해 이야기 하고 싶은 것// 내버려 둬// 끝내 눈을 감지 못한 멧돼지// 돌아갈 길은 진즉 차단되어 있었다고
-「내버려 둬」 전문
결코 길들여지지 않는 야성을 보여주고 있다. 인용시는 시스템에 길들여지지 않고 버티다가는 비참한 최후를 맞을 수 있다는 준엄한 경고장처럼 보인다. 나는 나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데 왜 너희가 나를 해코지하고 차단하고 간섭하고 지레 겁먹고 그 난리를 피우는 것인가. 그래서 제발 나를 내버려 둬! 물이나 한 컵 주시면 감사하겠네. 이런 말이 들려오는 듯하다.
계단 난간에 기대어 있는 나에게 경비아저씨가/ 뭐하냐고 묻는다// 책 읽고 있어요/ 보시다시피 난간에 기대서// 왜 여기에 왔냐고 묻는다// 일이 있어서 왔어요/ 난간에 기대 책 읽는 게 볼 일은 아니지만/ 1301호와 1302호 사이에서/ 경비아저씨 만나기 위해서 온 것도 아니지만/ 여기 와서 벌어진 일들 중 하나는 되겠군요
-「질문을 받다」 부분
잘 드러나지 않지만 시속의 화자는 아파트 경비원의 말에 야간 불편해하는 기색이다. 경비원 아저씨의 입장에서 보면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으로 상대를 파악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요 업무다 보니 이해 못할 바도 아니지만 상대방에게 건네는 말투와 태도에서 예의에 벗어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에 불쾌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점점 사라져 가는 사회에 대하여,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한 이기적인 설정에 대한, 혹은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시스템에 길들여지지 않기 위한 회자의 저항 의식이 저변에 깔려 있다. “나는 누구보다도 법과 규범을 잘 지켜왔고 누구보다도 정의로운 사회가 되기를 바라고, 그 어느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진실하게 살아왔고 살아갈 것이다. 나 좀 쉬고 싶어, 내가 할 일 하고 있어. 나 좀 내버려 둬!”
5. 결론: 연민의 두께
삐, 소리가 나요/ 가만히 있어도 밥통이고/ 소리를 질러도 밥통인데/ 생각이 끓는다고 있는 대로 뿜어내는 머릿속/ 찬물 붓고 싶어져요/ 그만해, 그래 봤자 밥통이야/ 이제는 조용하네요/ 지 풀에 지가 지쳐서 조용해지지요/ 조용해지면 궁금해지기 마련 아니겠어요/ 뚜껑, 한, 번, 열어, 볼, 까,/ 안 열리네요/ 악다문 머릿속/ 보여 달라고 말하기 싫지만 궁금한 사람은 뒤돌아서지 못해요/다시, 힘, 주어서, 픽, 쉽게 열리네요/ 그래서 밥통인가 봐요/ 고슬고슬 잘 지어진 생각들/ 가득한 밥통/ 뜨거운 생각을 한 그릇 담아/ 어디, 네 생각은 무슨 맛/ 배고파 본 사람은/ 밥 냄새만 맡으면 눈물이 난다고 해요/ 내 머릿속은 지금 눈물을 저장중일까요
-「밥통」 전문
밥통이 증기기관차처럼 물이 끓는 힘으로 칙칙칙 연기를 뿜어 올리는 힘으로 나아가듯이 사람도 밥통 속의 뜨거운 밥을 먹고 칙칙 연기를 내며 기운을 차려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고슬고슬 지어진 생각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배가 고파본 사람은 밥 짓는 연기만 봐도 밥통에서 나는 밥 냄새만 맡아도 눈물이 나는 것이다.
뻥튀기 사세요/ 안개를 가르며/ 뻥, 튀기듯 나타난/ 쌀 몇 알 품고 뛰어든 사람/ 꿈은 부풀어 오르고/ 눈물 한 방울에 녹아버리는 삶/ 안개 너머에 있을/ 막힘이 없는 달리는 인생/ 꿈꾸겠지/ 아우토반에 뻥튀기 파는 사람은 없어/ 차가 막힐 때마다 꿈을 먹는 우리/ 쓰레기통에서 발견된 신생아/ 라디오에서 피시식 흘러나오는 소리/ 뻥뻥 튀겨지지도 못하고/ 피시식 울고 있다는데/ 열기가 부족했을 뿐이라는데 /피식 피식 헛웃음 흘리며 살아가는/ 뻥이요, 뻥튀기 사세요
-「뻥튀기 먹으러 갈까」 전문
뻥튀기,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는 않은 간식, 지금은 다이어트 식품으로 각광을 받지만 보릿고개 시절 뻥튀기는 우리에게 훌륭한 간식거리였다. 먹을 때도 소리가 요란해서 뭔가 먹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해서 뻥튀기인지 모른다. 우리의 속어 중에 뻥을 친다는 말은 거짓말이란 뜻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꿈도 부풀어간다. 헛된 꿈이라도 좋다. 결국 사는 것이 뻥이고 인생은 뻥이다.
재미있기도 하지만 마음이 아파오는 두 편의 시들이다. 밥통은 밥을 상징하는 말이고 뻥튀기도 쌀이 주원료이다. 쌀을 오랫동안 품어 밥을 먹게 해주는 밥통은 어머니의 자궁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몸과 영혼을 잉태하는 근원이다. 밥통은 우리의 생명, 우리의 힘, 우리의 희망을 상징한다. 화두는 밥이다. 인류사를 이루어왔던 왔던 모든 것은 밥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밥을 위한 투쟁 혹은 밥그릇 싸움이었고, 이상향을 꿈꾸는 공동체의 삶은 밥을 함께 먹는 것이다.
밥상을 마주하는 가족은 밥을 함께 먹는 '식구(食口)'가 되고, 그 세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한 직장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는 '한솥밥' 먹는 관계를 형성한다. 한솥밥을 강화하기 위해 직장 회식으로 이어진다. 학창시절과 사회생활의 관계도 모두 밥을 통해 이루어지며(그래서 밥통이다), 애인을 사귀는 것도 그러하다. 아이가 태어나고 백일이 되면 '백일상'을 차려 잘 자라왔음을 축하한다. 한 해가 지나면 '돌상'을 차려 친척과 친지들이 모여 무병장수와 행복을 기원한다. 생일을 맞는다는 의미는 태어날 때 어머니가 먹던 미역국과 생일상으로 재생된다. 입학이나 졸업, 취업을 축하하거나, 꼭 그런 일이 아니어도 기쁨을 표시하는 일은 밥을 사거나 함께 먹는 일로 형상화된다. 인생을 함께하기를 기약하는 약혼식이나 결혼식도 언제나 같이 먹는 밥으로 마무리한다.
생의 황혼에 장수를 축하하는 회갑과 고희도 자식과 친지들이 참석해 풍성하게 쌓아 올린 음식들과 함께하는 자리다. 초상을 치를 때도 손님들에게 밥을 먹여 보내야 상주들은 흡족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기일과 명절에는 밥을 사이에 두고 망자와 후손들이 재회한다. 제사를 올리는 자리에 음식이 없을 수 없다. 가난에 시달려 평소에는 거의 굶을지라도 제사상에는 쌀밥 한 공기는 올려야 했다. 지상에서 사람들과의 나눔이 밥이었듯 제사는 망자와 밥상을 마주하고 소통하는 자리이다.
사람과의 관계만이 아니다(신도 밥을 먹어야 한다). 신과의 접촉에도 어느 종교, 어느 문화권에서나 음식이 함께한다. 굿판이 벌어지면 온갖 떡과 음식이 가득한 상이 차려지고 이 음식들로 신을 모신다. 아무리 없는 살림이라도 신과의 만남에 밥 한 그릇이 없을 수 없다. 하다못해 부녀자가 치성을 드리는 데에도 맑은 물(정화수) 한 그릇을 떠놓고 기도한다.
지금까지 박영 시에 돋아났던 주요 주제는 복고(리트로)에 대한 선호와 그리움, 차가운 현실(물질문명)에 대한 비판과 인간의 소외의식,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으로 쟁취한 기득권에 대한 저항의식, 길들여진 구조에 대한 거부, 약자에 대한 연민, 약자뿐 만아니라 모든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애정과 연민의 편린들이다. 이 요인들은 시집『독백은 일요일처럼』전편을 통하여 구석구석에서 발견할 수 있고 또한 그 연민의 가지가 부챗살처럼 퍼져나가 박영 시인의 시세계에 중요한 모티프로 광범위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아무쪼록 박영의 첫 시집 『독백은 일요일처럼』이 여기저기에서 꽃 피우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끝으로 시인의 말을 들으며 마무리한다.
상위에 놓인 맛있는 반찬, 시
누군가의 시도 맛있게 먹고
내 시도 상위에 올려 즐겁다
시 쓰는 일은 즐거움이다
그래서 사는 게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