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99:1-4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본 시편은 한 가지 면에서 앞에 나온 시편들과 다릅니다.
본 시편은 하나님의 나라로 말미암은 복이 유대 안에 제한된 것으로 언급합니다.
또한 주위의 민족들과 구분하여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저희가 얻은 특권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요구합니다.
1. 본문 1절은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요동할 것이로다” 입니다.
앞서 기뻐하라는 요구를 받은 백성이 이제는 떨라는 분부를 받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희가 하나님의 보호아래 있는 한 모든 원수의 증오와 분노로부터 항상 완전히 안전을 누리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도록 하나님의 권능이 저희 가운데 크게 나타나는 것은 극히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רנו(라가즈)는 어떤 때는 ‘떨다’ 를 의미하고, 또 어떤 때는 ‘노하다’ 를 의미합니다.
분노나 아니면 두려움에서 일어나는 어떤 강력한 감정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기 택하신 백성을 해방시키실 때 그의 권능을 손으로 만질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하게 나타내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모든 민족들로 당황케 하시며 저희가 얼마나 미친 듯이 저희 파멸로 치달었던가를 깨닫게 하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말씀은 사람들에 관한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권능을 엄청 크게 나타내셔서 자신을 높이실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베푸시는 도움이 보이지 아니하는 상태로 남아 있을 동안에는 불신자들이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라도 한 듯이 더욱 방자하게 날뛸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본문 2-3절은 “(2)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광대하시고 모든 민족 위에 높으시도다
(3)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 입니다.
시편 99 편
우리는 저자가 언급한 대조법을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모든 원수들을 다 파멸시키기 위해 시온에서 크시다는 표현을 씁니다
또 시편 기자가 사용하는 “모든 민족 위에 높으시도다” 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저희의 복지를 증진시키기 위해 저희를 관장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희 계략을 깨뜨리고 저희 의도를 좌절시키며 저희 모든 세력을 멸하시기 위하여 저희를 다스리신다는 뜻입니다.
이어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찬양’ 은 일반 민족들에게 해당된 것이 아닙니다.
친히 택하신 믿음의 백성들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이들에게서만 감사의 예물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은 그분께서 정복하신 원수들로 자기를 인정하게 하셨을지라도 아직 저희가 그분의 영광을 거슬러 말하고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모독하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니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는 권면은 저희에게 대한 것이 아닙니다.
이 권면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해당합니다.
그리고 매우 성실하게 그 찬양에 응할 믿음의 백성들에게 대한 것입니다.
3. 본문 4절은 “왕의 능력은 공의를 사랑하는 것이라 주께서 공평을 견고히 세우시고 야곱 중에서 공과 의를 행하시나이다” 입니다.
이 말씀은 원수들을 당황케 하기 위해 의도된 위협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마치 의와 공평에 대한 관심이 그러하므로 하나님께서 원수들이 그에게 입힌 손상들을 보응하시기 위하여 권능으로 옷 입으셨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교회에 대해서 적용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이는 교회가 의와 거룩을 시행할 특수 목적으로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코 반대할 수 없는 해석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 말씀이 폭군 개념을 하나님 통치에 연관시키고 있지 않다는 해석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권세와 공평 사이에는 항상 균형을 이룬 상태가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체 문맥을 살필 때 선지자가 하나님을 그의 왕의 보좌에 좌정하신 것으로 소개하고 난 후에 이제 하나님이 그의 나라를 다스리시는 방법을 언급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주께서 공평을 견고히 세우시고 야곱 중에서 공과 의를 행하시나이다”는 말씀을 덧붙이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두 해석이 가능합니다.
시편 99 편
하나님이 그의 율법 안에서 그의 백성들에게 완전한 공평을 행할 것을 명하셨다는 것입니다.
또 저희를 보살피시고 지키실 때에 그가 한결같이 공평과 의에 대한 그의 큰 관심을 나타내 보이셨다는 것인데 이 해석이 더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과 심판은 항상 지극히 고상한 공평으로 특징 지워진 것이 가장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공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 베푸신 통치를 말씀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를 성실과 정직한 생활로 이끄는 데에 있어서 최상의 통치체계 혹은 통치 형식을 가리킬 가능성이 더 큽니다.
그러므로 ‘행하셨다’는 말은 ‘명하셨다’ 혹은 ‘분부하셨다’는 뜻으로는 부적합합니다.
이 마지막 구절을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언급으로 간주해도 좋습니다.
이는 자기가 하나님 아버지의 보살핌의 대상이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말씀들 가운데서 자기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의가 그의 편에서 친절하신 보살핌으로 보답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보다 더 믿음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격려와 활기를 불어넣어 주거나 혹은 그의 율법을 준행하는 일에 보다 큰 열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시편 99 편
시99:5-9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1. 이 시편도 주의 통치 곧, 주께서 이 세상에 오심을 염두에 둔 예언입니다(1-5).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다” 는 친히 땅위의 성전에 오실 것을 말합니다.
또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광대하시리라”는 것, “모든 민족 위에 높으시리라”는 것(2절)
“야곱 중에서 공과 의를 행하신다”는 것은 모두 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서 그 백성을 구속하실 것에 대한 진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전과 달리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사 그의 구원의 의(義)를 실시하시기에 한편 만민이 떨 것이며(1절 상반), 땅이 요동하는(1절 하반) 반면에 다른 한편 하나님의 백성은 그를 찬송하며 그를 경배하게 됩니다(5절).
2. 이 시인은 위에 말한 것과 같이 장차 오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 사상(救援史上) 에 알져지신 여호와 자신이라고 말씀합니다(6-9).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실현되는 하나님의 통치는 돌연한 것이 아니고 일찍부터 이스라엘에게 알려진 것의 연속이라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과 사무엘의 기도를 응답해 주신 분이시고 그들은 그를 섬겼습니다(6, 7).
그가 이스라엘의 구원 사상에 있어서 나타내신 것은 그가 그 백성의 행한 대로 갚는 동시에 그들을 용서하시어 그 백성을 끝까지 구원하신 사실입니다.
그가 이제 땅 위에 친히 오셔서도 그와 같은 원리로 구속하신다는 뜻이 이 부분 말씀에 표현되었습니다.
이 시인은 결론하기를 여호와의 통치가 신약 시대에도 그 백성을 벌하는 일도 있는 동시에 용서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그를 경배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시130:3, 4).
1. 본문 5절은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 입니다.
1) 이 권면은 당연히 교회에만 한정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마땅히 하나님을 섬기고 경건을 사랑하는 일에 더욱 열심을 품고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저희가 그처럼 분명한 도움을 받았던 그 하나님을 높이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저희에게 그의 율법에 지시한 그 경배를 드릴 것을 명합니다.
시편 99 편
성전은 성경 다른 곳에서 자주 ‘하나님의 보좌’ ‘집’ ‘안식’ ‘처소’로 불려집니다.
여기서는 ‘발등상’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 은유가 사용되고 있는 데에는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와 같은 방법으로 자기 백성 중에 거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저희 생각을 땅에 있는 외적인 성전과 언약궤에 돌리기 위함이 아니라 보다 위에 있는 천상의 보좌와 그의 말씀들에 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집 혹은 거처라는 말은 저희에게 신실한 자들은 다 자진하여 저희를 만나러 임하신 하나님께 자유로이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담력을 갖도록 용기와 확신을 주려는 의도로 사용되었습니다.
2)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미신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저희가 하나님에 대한 관념들을 육적이며 세상적인 것들에 연관시키지 않게 하는 방식이 필요합니다.
또 저희 생각들이 전적으로 예배 형식에만 치우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 같은 경향을 철저히 경계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1) 그러므로 선지자는 성전을 하나님의 발등상이라는 용어로 부를 때 경건한 자들이 저희 생각을 그 발등상 위를 향하여 들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얼굴을 향하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일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그분의 무한한 영광으로 가득 채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다른 곳 아닌 시온산에서 하나님께 참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경건한 자들의 생각을 이 세상 위로 향하게 하는 문제를 취하고 있는 동시에 이 세상의 모든 곳을 다 제쳐놓고 하나님께서 그가 경배를 받으시고자 택하신 처소인 성전의 거룩함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이 사실에서 우리는 어거스틴 시대 이후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헛되이 선지자가 하나님의 발등상이 경배를 받도록 명하고 있는 이유를 확인하는 일에 골몰해 왔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문제에 만큼은 어거스틴의 답변은 참으로 교묘하였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인성을 바라본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발등상을 경배해도 좋을 것이다. 또한 그것이 우상숭배의 죄에 해당하지 않을 이유를 깨닫게 될 것이다. 이는 그가 경배받기를 원하신 그의 몸을 땅에서 취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땅 위에서는 다름 아닌 하나님이 경배를 받으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땅이 하나님의 거처가 되고 또한 하나님께서 친히 땅이 되시기 위하여 자신을 낮추셨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 모든 내용은 매우 그럴듯합니다.
시편 99 편
(3) 그러나 그것은 선지자의 의도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지금 선지자는 율법이 요구하는 합법적인 예배(이것이 하나님께서 승인하시는 유일의 예배였다) 와 이방 백성들의 미신적인 의식들 사이를 구별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성전으로 소집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소집하는 것은 거기서 신령한 방식을 좇아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하늘 영광 중에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에게는 신령한 예배를 드려야만 합니다.
3) 이제 그림자적이고 예표적인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이야말로 우리가 신성의 모든 충만이 거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직접 그에게 나아가는 방법 말고는 바로 경배를 받으실 수 없는 것으로 믿습니다.
누구든 하나님을 ‘발등상’으로 부르는 것은 전적으로 부당하고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이는 선지자가 단순히 하나님께서는 보이는 성전에 제한되시는 분이 아니라 그분께서는 온 세계 위에 높이 계시는 분이시라는 것이요, 그러므로 하늘 전체 위에서 찾아야 할 분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이와 같이 말하기 때문입니다.
제2회 니케아 회의 시에 광란한 헬라 감독들은 본 구절로부터 하나님은 신상들이나 초상화들을 통해 경배 받으셔야 한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애쓸 때 본 절을 아주 악하게 왜곡하였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높이고 그의 발등상에 경배하라고 한 이유는 “그는 거룩하시도다”라는 대조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선지자가 한 분 하나님의 이름에 거룩을 돌릴 때 이교의 모든 우상들은 다 거룩하지 않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비록 이교도들이 저희 우상들에 대해 상상적인 거룩을 주장한다 할지라도 저희 우상들은 헛것들이며 저희 행위들은 가증한 죄악들이다’ 라고 말한 것과도 같습니다.
이 말로써 하나님과 모든 우상들 사이를 구분하고자 한 것이 선지자의 의도였다는 사실이 본 시편 끝에서 분명해 집니다.
2. 본문 6-7절은 “(6) 그 제사장 중에는 모세와 아론이요 그 이름을 부르는 자 중에는 사무엘이라 저희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응답하셨도다,
(7)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에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니 저희가 그 주신 증거와 율례를 지 켰도다” 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 자손에게 매우 특별한 방법으로 베푸신 은혜를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위하여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을 세우셨습니다.
시편 99 편
하나님은 구원의 언약을 실제로 증명하시기 위해 자기와 백성들 사이에 중보자를 세우셨습니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이전 시대에 유명했던 인물 셋을 언급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 화목하도록 하기 위한 중보자였습니다.
아론도 모세와 동일한 직분을 받았습니다.
또 그 후에 사무엘 역시 동일한 직무를 이어받아 계속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세 인물들 아래에 시편 기자가 의도한 것은 하나님께서 더불어 언약을 맺으신 모든 백성들을 다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시편 기자는 값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이 보화를 맡아서 그 보화를 지키는 자들이었던 인물들의 이름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모세를 “제사장 중에” 포함된 인물로 언급한 것은 부당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이는 모세의 아들들은 아론의 자손이 아닌 일반 레위 자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세 자신도 율법을 주고 난 다음에는 대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왕의 아들들 같이 신분이 높은 분들을 가리켜 בוחנים(코하님) 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이 명칭을 모세에게 사용하는 것을 막을 이유가 없습니다.
마치 모세가 교회의 거룩한 지도자들 가운데 하나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더욱이 우리가 최초 시기 곧 율법이 제정되기 이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 당시 모세가 대제사장 직분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지자의 의도를 명심해야 합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을 택하셨을 뿐 아니라 저희 중 몇몇을 따로 구별하여 중보자로 세워서 그의 언약이 더욱 확실하게 증명되도록 그의 이름을 부르게 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이는 시편 기자가 언급하고 있는 “간구”는 구별 없이 아무 모양으로나 “구하는 것”으로 이해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모든 백성의 이름으로 저희를 위해서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갈 중보자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제사장들에게만 속하는 방법으로 간구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2) 6절 하반에 “저희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그의 은혜로우신 언약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시고 아브라함의 자손들 곧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은총을 베푸신 사실을 보다 충분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희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체험한 것만큼이나 자주 저희에게 하나님의 베푸신 이전의 자비를 상기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시편 99 편
3) 7절 상반에 선지자는 보이는 상징이었던 “구름기둥” 에 대해 특별히 언급합니다.
하나님은 그 구름기둥을 통해 모든 시대에 자기 백성과 항상 함께 계실 것을 입증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시적인 표적을 택하셨던 것은 그 표적을 본 사람들의 유익만 위함이 아니요 또한 저희 뒤를 이를 사람들의 유익도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옛 백성들에게 구름기둥을 항상 보여주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역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이 너무나 무뎌서 저희가 외적인 표적들을 마음에 두기 전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매우 적절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기억에 남을 만한 표적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저희 조상들에게 공개적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희 자손들 역시 그 사실을 기억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저희들에게도 가까이하시리라는 것을 얼마든지 확신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4) 시편 기자는 이어지는 다음 세대들에게 순종과 같은 의무를 강조할 목적으로 7절 하반에서 “저희가 그 주신 증거와 율례를 지켰도다” 라는 말씀을 덧붙입니다.
3. 본문 8-9절은 “(8) 여호와는 우리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저희에게 응답하셨고 저희 행한 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저희를 사하신 하나님이시니이다
(9)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경배할지어다 대저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시도다” 입니다.
1) 선지자는 여기서 저희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저희 경건이 일치되었기 때문에 저희 간구를 들으셨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저희 모범 기도의 성공에 자극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저희 자손들이 되는 우리들도 마땅히 하나님께 간구해야만 합니다.
간구하되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만 입술에 오르내리게 할 것이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면서 간구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만일 그의 영광을 모든 시대에 그처럼 풍부하고 그처럼 아낌없이 나타내지 아니하신다 해도 저희 자손들이 저희 조상들의 믿음을 아주 버리거나 아니면 그 믿음에서 크게 떠난 잘못이 저희 자신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서 경건이 식어지는 것을 보실 때 그의 손을 거두시거나 적어도 어떤 두드러진 방법으로 그의 손을 내밀지 아니하시리라는 것은 놀랄 사실이 못됩니다.
시편 99 편
2) “주께서 저희에게 응답하셨고” 라는 이 구절에서는 시편 기자가 앞서 모세와 아론과 사무엘에 관하여 언급한 바가 모든 백성에 대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이는 분명히 저희가 단순히 자신의 유익을 위해 제사장 직무를 수행한 것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통적인 유익을 위해 제사장 직분을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이 이들 세 지도자를 통해 나머지 백성 전체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3) 우리는 온 교회의 상태가 지적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의 기도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응답하시는 한편 저희의 죄악들을 엄히 징벌하신 사실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그처럼 친절히 대하시고 저희 죄악을 그처럼 너그럽게 용서하신 그의 은혜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선지자가 하나님께서 저희의 배은망덕한 행위를 벌하신 무서운 징벌의 실례를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그것은 저희 자손들이 하나님께 충실히 순종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처럼 은혜스럽게 대하시는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의 관용을 멸시하는 것은 그분께서 그만큼 더 용서치 않으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4) 본 시편 마지막 부분에서 시편 기자는 우리가 5절에서 살펴본 내용을 단지 ‘그 발등상 앞에서’를 ‘그의 거룩한 산에서’ 라는 말로 바꾸어 그대로 반복합니다.
그는 앞에서 다소 애매하게 קדוש חוא(카도쉬후) ‘그는 거룩하시도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보다 분명하게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시도다” 라고 말합니다.
선지자의 의도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엉터리로 경배 받으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교도들이 상상에만 의존하여 그들의 우상들에게 경배하듯이 경배를 받으실 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하신 바 된 그대로 믿는 믿음의 확신 위에 기초된 경배를 받으실 분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하는 데에 있습니다.
시100:1-3 온 땅이여 여호와께
본 시편의 표제는 곧 본 시편의 내용에 대한 요약으로 볼 수 있습니다.
더우기 그 간결성은 본 시편에 대한 긴 강해가 불필요함을 시사합니다.
시편 기자는 특별히 신자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요청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저희를 자기백성으로 택하시고 그의 돌보심 아래 두셨기 때문입니다.
감사의 시
본문 1-3절은 “(1)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소리를 발하게 - 칼빈) 부를지어다
(2)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
(3)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입니다.
시편 기자는 여기서 하나님이 베푸신 그의 은총을 다시 헤아려 보고 그에게 감사를 드리고 있는 예배에 관한 부분에 대해서만 언급합니다.
또 차별 없이 온 땅의 거민들을 여호와께 찬양을 드리는 일에 초청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예언조로 각기 다른 민족들로부터 교회가 모아지게 될 시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라고 명합니다(2절).
이것은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자비가 저희에게 기뻐할 충분한 이유를 제공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크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이 사실은 3절에 더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3절에서 시편기자는 사악하게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를 위하여 많은 신들을 만들어 내고 여러 가지 모양으로 그 우상들을 섬긴 자들의 헛된 생각을 꾸짖습니다.
수많은 신들은 오직 한분 하나님에 관한 참 지식을 파괴하고 가리며 그의 영광을 손상시키므로 선지자는 아주 당연히 모든 사람들에게 스스로 깊이 반성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도둑질하는 일을 그칠 것을 요구하는 동시에 한 분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저희가 허망한 생각에 빠지게 된 어리석음을 통렬히 책망합니다.
이는 저희가 저희 입으로 한분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고백하도록 아무리 강요를 받아도 항상 이내 그 하나님에게서 그의 영광을 탈취하게 되고 이와 같이 하여 저희 힘이 미치는 데까지 하나님을 헛된 존재로 끌어내리기 때문입니다.
시편 100 편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순수한 예배를 드리도록 하는 것은 하나의 극히 어려운 일이므로 선지자는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온 세상에 저희가 습관적으로 빠져있던 헛된 것들로부터 떠날 것을 요구하고 저희에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할 것을 명합니다.
이는 우리가 이처럼 짧은 하나님께 대한 지식의 정의에 유의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저희의 어리석은 행위들에도 불구하고 손상되지 아니한 채로 보전되며 어떤 신 혹은 우상도 그에게 도전하여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가리울 수 없음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만 합니다.
사실 교황권 안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으로서 그의 이름을 유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의 영광은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으로 유지되고 있지 아니하므로 그 교회 안에서는 그가 하나님으로 인정을 받고 계시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참된 예배는 미신 혹은 우상숭배에 반드시 수반되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근본적인 침해가 완전히 개혁되기 전에는 완전무결하게 보전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바랍니다.
다음에 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큰 은헤를 언급하고, 특별히 신실한 자들이 그 은혜를 깊이 생각하기를 열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다’ 라는 말은 매우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배은망덕하여 감사할 줄 모르는 자들에게 한 말씀은 아닙니다.
사람들 중에 그와 같은 자들은 너무 흔해서 자기가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백 명 가운데 한 사람도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저희가 비록 자신이 무에서 창조된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았다는데 대해서는 한사코 부정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만 속하는 것으로 선언하신 바를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돌릴 때 그는 자신을 하나님으로 삼고 실제로 자신을 섬기는 것이 됩니다.
더우기 선지자가 여기서 일반적인 창조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자들 안에 그의 형상을 새롭게 하시는 심령의 중생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자들은 선지자가 여기서 하나님의 솜씨로 선언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저희가 어머니의 모태에서 지음을 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바울이 에베소서 2장 10절에서 저희를 Το ποιημα 곧 하나님의 ‘솜씨’로 부르고 있는 의미에서 저희가 하나님이 지으심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는 저희가 하나님께서 이전에 저희로 그 가운데서 행하도록 하셨던 바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것은 다음 문맥에 가장 조화가 잘 되는 의미입니다.
시편 100 편
이는 시편기자가 ‘우리는 그의 백성이요 그의 초장의 양이라’고 말할 때 분명히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그의 날개 아래 품어 양육하시기 위하여 저희를 그의 기업으로 구별하여 세우신 특별한 은혜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인간을 탄생시키는 것 이상으로 훨씬 더 큰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새 사람이 되었다고 자랑하고 싶어 하는 자가 있다면 하나님에게서 그에게 속한 것을 강탈하려는 근본적인 시도를 하지 않을 자가 그 누구이겠습니까?
우리는 또 우리의 영적인 탄생을 마치 우리의 이 세상 부모가 스스로의 능력으로 우리를 낳기라도 한 것처럼 생각하여 그 부모들에게 돌려서도 안 됩니다.
아직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영적 생명에 대한 모든 찬사를 저희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의지의 자유를 가르치는 자들은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아담의 아들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 외에 달리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이에 반대하여 선지자는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를 때 우리에게 우리가 영적으로 거듭난 것이 하나님 자신의 기쁘신 뜻으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또 우리를 ‘그의 창조의 양’이라 칭하여서 그는 우리에게 우리가 이전에 한번 받았던 그 동일한 은혜를 통해서 끝까지 안전하게 아무 해를 입음이 없이 보전되리라는 사실을 깨우쳐 줍니다.
그 말씀을 달리 번역한다면 ‘그가 우리를 그의 백성으로 삼으셨도다 ......’ 입니다.
시편 100 편
시100:4-5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본문 말씀을 살피면서는 칼빈의 해설을 위주로 하며 박윤선의 해설을 곁들이겠습니다.
1. 먼저 박윤선의 강요부분입니다.
이 시편도 땅에 오신 여호와께 찬송하는 것입니다.
곧 그가 장차 이 세상에 오시어서 그 백성을 구속하실 사실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 사실에 관하여 이 시인은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1) 시인은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겨야 할 것을 역설(力說)합니다(1, 2).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의 생활 특징입니다.
2) 이 시인은 하나님과 그 백성과의 관계가 어떠한 것임을 말합니다(3).
그 관계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지으셨고, 그들은 그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 란 말은 우리를 구속하여 그를 경배할 자로 만드신 것을 가리킵니다.
3) 이 시인은 이 세상에 오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감사와 기쁨으로 되어야 할 것을 다시 예언합니다(4,5).
하나님을 그렇게 섬겨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자와 성실의 덕으로 그 백성을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구원하심은 그들에게 의(義)가 있는 까닭이 아니고 다만 불쌍히(“인자”) 여기시사 구원하시기로 약속하신대로 성실하게 성취하여 주시는 것 뿐입니다.
2. 본문 4-5절은 “(4) 감사(찬양 -칼빈)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기뻐 - 칼빈)함 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5) 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리로 다” 입니다.
1) 칼빈의 해설을 살펴보겠습니다.
본 시편의 결론 부분은 그 시작부분과 거의 동일합니다.
다만 결론 부분에서는 시편 기자가 율법 아래서 행해지던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가리키는 문체를 택하고 있을 뿐입니다.
시편 100 편
그러나 시편 기자는 여기서 우리에게 신자들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때 또한 지속적으로 확고한 신앙고백을 유지하지 않는다면 저희의 의무를 바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킵니다.
한편 성전의 이름 아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엄밀히 율법에 서술된 방법에 일치되지 않고서는 달리 경배를 받으실 수 없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밖에 또 시편 기자는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진리 - 칼빈) 하심이 대대에 미치리로다” 라는 말씀을 덧붙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로 인하여는 결코 손해를 보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그렇다면 만일 하나님께서 그침 없이 우리를 이와 같은 식으로 대하실 경우 우리가 마땅히 그에게 돌려야 할 찬양에 싫증을 내는 것은 우리 편에서 배은망덕한 처사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진리가 자비와 연관된 이유를 살펴본 바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너무나 어리석어서 하나님이 그의 자비를 공개적으로 가장 확실하고 분명히 나타내 보이실 때도 그가 그의 거룩하신 입술을 열어서 우리에 대한 그의 아버지로서의 관심을 선언하시기 전에는 우리가 그의 자비를 거의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 박윤선의 해설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4-5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시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는고로 감사합니다.
특별히 5절에 “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리로다” 는 말씀은 매우 귀중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성도를 일시동안만 사랑하시다가 중도에 변역하심이 없으십니다.
성도의 생활에도 여러 가지 굴곡이 있습니다.
그 진로(進路) 가 혹시는 곤고하고 혹시는 평이(平易)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 합동하여 그에게 유익을 주나니 모두가 주님의 인자하신 권고입니다 그가 성실히 우리를 돌보심이 대대로 미칩니다.
3. 본문에 대한 박윤선의 설교를 살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하나님이란 말은 그가 모든 택한 백성의 하나님이시란 뜻입니다.
1) 여호와께서 그 택한 백성을 지으셨기에 여호와는 저희 하나님이십니다.
(1) 지으심의 두 가지 계단, 우리 본문에 이른 바 “지으신 자” 란 말은 실상 그 택한 백성에게 관한 두 차례의 조성(造成)을 가리킵니다.
시편 100 편
곧 하나님께서 그들의 존재를 창조하신 사실과 그들을 구속하여 새롭게 만드신 사실(重生케 하심)을 가리킵니다(시102:18, 고후5:17, 갈6:15).
첫째 번 창조는 그의 말씀과 생기(生氣)로 하셨고(창1:26, 2:7), 둘째 번 새로 지으심, 곧 구속은 그 독생자의 고난과 피로서 하셨습니다.
그 택한 백성이 첫 창조에서는 모든 다른 피조물들 중 가장 귀한 것이었으나 둘째 번 지으심, 곧 구속을 받은 때에는 사람들 중 가장 귀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2)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지으신 것은 우연적 발생이나 필연적 유출과 달라서 그의 거룩하신 의지의 자유로우신 기쁜 결정으로 하신 일입니다.
그것은 그의 간절한 소원의 결과이고, 또한 다른 피조물들과 다르게 두 차례의 사역으로 이루신 보배로운 것입니다.
그만큼 택한 백성은 그 지음 받은 역사에 있어서도 하나님과 특수 관계를 가집니다.
2) 택한 백성은 여호와의 소유이기에 여호와는 저희 하나님이십니다.
(1) 본문 3절에 “우리는 그의 것이니”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인간은 자존자(自存者)가 아니며 따라서 자율자(自律者)도 아닙니다.
그러니만큼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보다 높은 자,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있습니다.
롬14:8, 9절에 말하기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2) 우리는 우리를 소유한 자가 마귀가 아닌 것을 생각하여 기뻐할 일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소유자가 아닌 사실도 기뻐할 만한 일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 자신은 할 수 없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존재의 이유가 죄인된 우리 자신을 위하는 것이 되고 만다면, 그것은 허무할 뿐 아니라 극히 해로운 일입니다.
우리는 오직 모든 영광과 존귀를 받으셔야 마땅한 하나님이 우리의 소유주이신 사실로 인하여 기뻐하며 감사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시기만 하시고, 그 이상 아무 관계도 안하시고 우리를 그의 소유로 여기지도 않으셨다면, 우리는 공중에 떠도는 티끌과 같아서 의지할 데도 없고, 가치도 없고, 아무 소망도 없었을 뻔하였습니다.
3) 택한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백성”이란 말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그의 다스리심을 받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곧 하나님은 저희의 왕이십니다.
백성은 왕을 바로 만나야 행복을 누리며 망하지 않습니다.
시편 100 편
예부터 나라들이 망한 이유는 악한 왕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백성은 얼마나 복되겠습니까?
하나님은 그의 말씀(성경)을 가지시고 그의 백성을 다스리십니다.
인간은 그 누구에게든지 다스림을 받을 연약한 처지에 있습니다.
그가 마귀에게 다스림을 받으면 죄악의 노예가 될 것이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다스림을 받으면 진정한 자유를 잃어버릴 것입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음으로만 진정한 자유와 복을 누립니다.
4) 택한 백성은 여호와의 기르시는 양이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저희의 하나님이십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를 따릅니다.
그것이 그의 유일한 살 길입니다.
그와 같이 택한 백성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듣고 그를 신종(信從)하는 것이 금생 내세에 유일한 또는 안전한 살 길입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의 수효에 비교하면 소수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신종하는 한(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적은 무리여 무서워말라” 라고 하신 말씀에는 큰 뜻이 있습니다(눅12:32).
바다 가운데 배가 파선된 때에도 그 바다에서 뜰만한 장비만 있으면 염려 없습니다.
신자들에게 세상을 이길만한 신앙만 있으며 그들의 단체의 인수(人數)가 적어도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로 계시고 우리는 그의 양으로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정하신 관계입니다(시23:1, 요10:11).
그러므로 여호와는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 관계는 실상 생명과 같이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별도로 진정한 영생(永生)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습니다(딤전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