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양성 유람(牟陽城 遊覽) 할제
가을은 깊어가고 모양성은 깨끗하여 티끌하나 없는데, 아직 짙게 물들지 않은 단풍잎은 시나브로 말라가는 잔디 위에 떨어진다. 누가 올해부터 여름이 길고 봄가을이 짧아진다 했는가. 아침저녁으로는 바람이 이따금씩 서늘한 국화향기를 성안 가득 보내오고 있는데. 놀면서 모양성 여기저기 구경을 해본다. 먼저 모양성의 역사부터 알아보자.
모양성은 조선 세종 32년(1450)부터 단종 원년(1453)까지 전라좌우도 19개 군. 현에서 구간별로 분담하여 축성하였으며 그 흔적이 성벽 구간마다 새겨져 있다.
이 성의 둘레는 1,684m, 곡선까지 포함하면 1,725m, 높이 4-6m, 면적은 50,172평으로 동서북문과 옹성(甕城) 3개소, 치성(雉城) 6개소(7m), 수구문(水口門) 2개소, 성밖의 해자(垓字) 등 전략적 요충이설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
성 내에는 동헌과 객사 등 22동의 관아 건물과, 2지(池) 4천(泉)이 있었으나, 병화로 대부분의 건물이 손괴된 것을 동헌과 내아, 객사, 장청, 관청과 작청, 서청, 향청, 성황당, 1지(池) 등을 1976년부터 복원해오고 있다. ‘고창읍성’은 정유재란, 동학혁명, 6.25 등 3번의 전화를 입었다.
모양성에 관한 뚜렷한 기록은 없고, 동문 옹성 성벽에 계유소축감동송지민(癸酉所築監董宋芝玟)이란 각자가 새겨져 있다. 그 계유년(癸酉年)을 추리하자면, 고창읍성에 관하여 처음 언급한 신증동국여지승람 고창현성곽조(新增東國輿地勝覽 高敞縣城廓條)에 관하여 살펴보아야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중종(中宗) 25년(1530)에 간행했으나 단지 증보처에 신증이라는 두 글자만 표시하였으므로, 성종 때 왕명에 의하여 김종직 등이 동국여지승람의 제2차 수정을 거쳐 탈고한 성종 17년(1484) 이전의 계유년(癸酉年)으로 축성연대가 압축된다 할 수 있으며, 무장현은 태종 17년(1417)에 무송현과 장사현을 통합하여 무장현이 되었으므로 계유소축(癸酉所築)의 계유년은1417 이후의 계유년이 되므로 고창읍성은 1453년의 계유년에 축성된 것이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무장시면. 무장종(茂長終)이란 각자가 있고, 동문 옹성 성벽에는 계유소축감동송지민(癸酉所築監董宋芝玟) 각자가 남아 있어서 고창읍성이 계유년에 축조되었으며, 무장현이 축성에 참여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고창읍성의 특징으로는 첫째, 읍성이면서도 읍을 둘러싸지 않고 산성화했으며, 둘째, 성이라면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이 있어야하는데, 내성만 있어, 성 밖에 해자(폭 5-10미터, 깊이 3미터)를 파서 외성(산성(山城)은 해자에 풀 등을 덮어 위장해 놓는다. 그 흔적 없음) 대리역할을 했다.
셋째, 성문에 옹성(擁城)이 있다. 수원성은 도성이기 때문에 문이 정면에 있고, 읍성은 산성이기 때문에 옆면에 문이 있는 편문식(片門式)이다.
또 한 가지 특징은 모제석축이 아니라 모서리 이음의 공법으로 축조하여 외면만 돌로 쌓고 안쪽은 흙과 잡석으로 다져진 내탁법(內托法)으로 3분씩 물림쌓기로 축성하였다.
넷째, 읍성은 자연석의 평평한 부분이 앞으로 내미는 고려말 축성 양식을 따랐다.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 썼는데, 초석(礎石), 당간지주(幢竿支柱) 등을 깨뜨려 쓴 것도 있다.
조선시대 읍성에서 흔히 보이는, 육축(陸築)에 홍예문(문의 윗 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원형이 되게 만든 문)을 열고 초루(草樓)를 세우는 방식과 달라, 성곽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북문은 2층처럼 생긴 다락집이고, 아래층 어간(御間)에 문짝 둔테(문장부를 끼는 구멍이 뚫린 나무. 문둔테의 준말) 구멍이 있다.
산성의 형태는 남쪽 성주봉인 장대봉(108m)에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의 지세를 최대로 이용하여 축조하였으며, 좌청룡 우백호의 소(‘小’)자 모양의 지형은 여자가 가랭이(다리)를 벌리고 북쪽을 향하여 앉아있는 형국이고, 산성과 평지성을 절충한 평산성(平山城)이라 할 수 있다.
성 위 적의 직사화기를 피하는 여장에 정사각형과 직사각형 모양의 구멍은 총안(銃眼)이라 하며, 직사각형으로 된 것은 근총안(近銃眼:가까운 적을 쏘는 총안),이고, 정사각형으로 된 것은 멀리 있는 적을 쏘기 위한 원총안(遠銃眼)이다.
정문이 공북루(拱北褸)인데, 고창읍성의 북문이며 정문이다. 낄 공(拱:팔짱을 끼다)를 쓴 것은 현감이 정문으로 드나들 때, 북쪽 임금을 향하여 두 팔을 옷소매에 끼고 공손하게 드나든다는 뜻으로 공북루라 하였다. 왜 팔짱을 끼는가? 북문을 나갈 때는 북쪽 임금이 계신 곳을 향하여 나가기 때문에 임금을 향하여 예를 표하는 것이다. 고로 한양 이남에 있는 모든 성의 북문은 공북루(拱北樓)라 하는 것이다.(진주성도 북문은 공북루이다)
옥이 정문 바로 옆에 있는 것은 현감이 출입할 때 수시 감독 및 확인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현에 출입하는 백성들이 옥을 봄으로써 ‘죄를 짓지 않아야겠다.’는 경각심을 일으키게 하려는 목적도 있다.
성은 돌을 쌓아 전투를 준비한, 또는 전투를 한 곳이란 단순한 생각보다 성을 쌓기까지의 우리 선대들의 힘들었을 당시의 상황이나, 삶의 애환 등을 깊이 생각해보고, 성과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와의 관계, 문화유산으로서의 모양성이 미래에 끼칠 수도 있는 영향 등에 대하여 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깊이 생각하고 넓게 살피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답성놀이의 유래
앞의 성의 특징에서 말했다시피, 모양성은 앞면만 돌로 쌓고 뒷면은 흙이나 잡석으로 매웠기에 추운겨울에는 얼부풀어 뜨게 되어있다. 얼부풀어 뜬 성을 봄에 밟아 다져주어야 하고, 보수도 해야 하며, 전쟁 때 무기가 떨어지면 석전(石戰)이라도 하기 위해서는 많은 돌이 필요하였다.
성을 튼튼히 하는 일이라지만 그냥 성을 밟고 돌을 가져다 놓으라고 하면 누가 자발적으로 성을 밟고 돌을 가져오겠는가. 그래서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머리에 돌을 이고, 한 바퀴 돌면 다리 병이 났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며, 세 바퀴 돌면 극락승천한다.’고.
4년 만에 한 번씩 드는 윤달의 ‘초엿새, 열엿새, 스무 엿새 등 엿새 자가 든 날은 저승 문이 열리는 날’이라는 민간신앙을 여기에 살짝 끼워 넣어, ‘엿새 자가 든 날에 머리에 돌을 이고 성을 돌면 더 큰 효험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을 널리 유포하여 뭔가 소망을 가지고 성을 밟게 하였다. 그랬더니 과연 부녀자들이 머리에 돌을 이고 성을 돌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랬던 것이 풍습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다.
‘돌을 머리에 이고 성(城)을 돌면서 옹성(甕城)과 치성(雉城)에 백지를 펴고, 손수 가꾼 오곡을 백지 위에 놓고 지성으로 3배(三拜)를 올리며, 소망과 무병장수를 기원하면 모든 소원이 다 이루어진다.’는 민간신앙까지 접목시켜 성(城)밟기를 하였던 것이다.
3배를 올리며 조금씩 놓은 오곡이 산에 사는 날짐승과 길짐승의 먹이가 되었을 것이니, 자연 사랑도 같이 하는 선인들의 혜안(慧眼)에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여기에 고창군에서는 해마다 음력 9월 9일(중양절)에 모양성재를 열어 전국에서 유일하게 답성놀이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으니, 우리 전통문화의 맥을 잇는 아름답고도 훌륭한 창조적 문화군민의 자랑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다른 성들은 남녀가 다 도는 풍습이 있었으나 현재는 모두 사라지고, 유독 ‘모양성만은 여자들이 소복단장으로 현세와 내세에 복 받기를 기원 드리며 영원이 이어지는 답성놀이를 하고 있으니, 우리 선인들의 뿌리 깊은 민간신앙, 그 문화를 이어옴에 가슴이 뿌듯하다.
고창읍성 성곽의 명칭과 기능
옹성(甕城)은적의 정면 공격을 막기 위해 북문과 동문, 서문에 세 개의 옹성(甕城)을 두었고, 치성(雉城)은 성 밑에 붙어서 공격해올 때, 옆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며 치(雉)자(字)는 꿩 치자를 쓰는데, ‘꿩이 대가리를 내밀고 있는 것 같다’ 해서 치성(雉城)이라 하고, 6곳이 있다.
그 외 정문이며 북문인 공북루(拱北樓), 동문은 해가 떠오른다 하여 등양루(登陽褸), 서문인 진서루(鎭西樓)는 서쪽을 누른다는 뜻이 있다. 서쪽은 서해바다가 있어 해적 및 왜구들이 쳐들어와 노략질을 하기 때문이다.
모양성은 나주진관의 입암산성과 연계되어 호남 내륙을 방어하는 전초기지이며, 입암산성의 삼십리 밖에 전초기지인 모양성이 있고, 그 후비성(後備城)으로 삼십리 밖에는 무장읍성이, 또 그 삼십리 밖에는 법성진성이 있다.
나는 여기서 성과 주변의 지리적 여건 등을 중점적으로 살펴 단순한 산과 들, 성이 아닌 마음속의 산과 들과 성을 글제에 담는 유람을 해보리라 마음먹어본다.
관아건물과 맹종죽, 척화비
객사(客舍)는 조정에서 파견된 관원들의 숙소로, 현판은 모양지관(牟陽之館)이고 객사 중앙에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셔놓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또는 나라에 애경사가 있을 때, 대궐을 향하여 예를 올리고, 나라의 편안함과 임금님의 만수무강을 빌었던 곳이다. 객사의 동쪽과 서쪽에 각각 방이 있는데, 동쪽은 높은 분이, 서쪽은 수행원 등이 묵는 숙소다.
고창읍성의 서쪽에 대밭이 있다. 큰 대나무를 맹종죽(孟宗竹)이라 하고, 대밭 안에 보안사(菩眼寺)란 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성 밖으로 옮겼다.
동헌(東軒)과 내아(內衙), 동헌은 고을 수령이 정무를 보던 건물이며, 동헌 옆에 건물이 내동헌(內東軒) 곧 내아(內衙)라고 하는 수령의 살림집이다. 동헌에 평근당(平近堂)이란 당호(堂號)가 쓰여진 것은 ‘백성과 가까이 할 수 있는 수령이 되어라’는 뜻으로 악필 석전 황욱 선생이 쓰신 것이다.
성안 중앙부에 보이는풍화루(豊和褸), 내아 밑에 있는 건물이군관들이 근무하는 장청(將廳)이며, 작청(作廳)은수령을 보좌하는 6조(六曹)(이. 호. 예. 병. 형. 공) 아전(衙前)들의 근무하는 곳이며, 관청(官廳)은官員들의 식사업무 및 잔치 등에 필요한 물품 등을 대주는 조달업무를 담당하는 곳이다.
서청 앞에 척화비(斥和碑)가 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의 상징으로서 병인년(1866년)에 만들고 신미년(1871년)에 세웠다. 내용은 ‘양이침범비전즉화주화매국(洋夷侵犯非戰卽 和主和 賣國)“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을 하자는 것이고 화친하자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임을 온 백성에게 경계한다.”는 뜻이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1959년도에 고창 여. 중고를 지을 때 도자로 밀어 일부 훼손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유서 깊은 곳에서 아침마다 산책 겸 운동을 한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때로는 꽃길도 걷고 작청 마루에 앉아 쉬어도 가며 모양성의 역사와 지명 등에 관하여 명상도 한다.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냐! 나는 이 행복을 건강하게 오래오래 누렸으면 하는 소원을 장대봉 성황님께 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