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노인
명향기
코로나로 전 세계가 정지되고 있을 때 유독 시끄럽게 떠오르던 단어가 있었다. 바로 ‘노약자'란 세 글자다. 예전에는 ’어린이나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세요‘ 라는 문구가 있듯이 노인이란 보호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겼지만 가슴에 와닿는 사회적 이미지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코로나를 겪는 동안 노인의 이미지가 실추되어 노인이 어르신으로 대접받기는커녕 세금이나 축내며 젊은이들에게 짐이나 지우는 부담스런 존재가 되고 말았다.
바이러스가 한창일 때 연일 집계되는 국가별 사망자 수의 중심에는 ‘노약자’들이 있었다. 실재로 집단 발병지인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서 많은 환자가 발생되고 있었다. 그곳에서 노인들은 거리두기로 격리되어 면회도 하지 못하며 지내다가 한 줌 흙이 되어서야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이 현실이었다. 세월에 쌓인 지혜가 도서관 하나로 비유되던 노인의 모습이 연일 매스컴에 너무나 값싸고 혐오스럽게 비추어지고 있었다. 거기에 지금까지 어느 시대에서도 볼 수 없었던 수명의 연장이 노인인구의 수를 늘려 고령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하여 이제는 노인이란 존재가 젊은이들에게 어르신이 아닌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어쩌랴, 나도 어느새 그 노인 열차를 타고 있으니 말이다.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65세만 넘으면 무조건 ‘노약자'가 되는 세상에서 그 범주에 들어간 지도 어언 10년이 되어간다. 처음에는 지하철 무임 승차하는 것도 낯설어 쭈뼛거렸지만 이젠 내가 낸 세금으로 나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자부하며 당당하게 다닌다. 그러니 젊은이들이 보기에 얼마나 못마땅할까 싶다.
세상은 소란스럽고 냉담한 곳이다. 젊을 때는 아이들 잘 키워내려는 일념에 아무것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자식을 번듯하게 키워내기만을 바라며 살았다. 그렇게 키운 자식들이 직장따라 바다건너로 모두 떠나고 나니 나간 자리가 너무 커 자꾸 어딘가가 시려왔다. 젊을 때의 당당하던 패기는 어디로 가고 헛헛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이 소란스러운 세상에서 한 사람의 노약자가 된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세상은 더 복잡해지고 냉랭해지고 있었다. 모바일 하나만 있으면 지구의 끝과도 소통할 수 있고 지식이 넘쳐나 혼자서도 잘 놀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지식의 양적인 팽창으로 더 많은 것을 획득하며 더 빨리 목적지에 도달하고 싶어 한다. 지식의 축적과 신속한 판단은 현재를 인간보다 기계가 더 잘할 수 있는 시대로 만들었다. 그러나 속도가 만들어낸 지식은 내적인 성숙과 인간적인 내면의 깊이는 가져오지 못한다. 그것은 오랜 시간 넘어지기도 하고 성공도 하며 경험을 쌓은 인간에게서나 나타나는 지혜로움이다. 지혜로움은 인간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요소가 아닐까. 기계가 시나 그림을 아무리 멋지게 표현했다고 해도 인간의 섬세한 내면을 드러내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노인의 가치가 실추되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겉모양만 보고 내면을 읽지 못하는 자들의 가벼움이 아닐까.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매순간 열심히 살다보니 어느새 손주를 둔 노인이 되었다. 이 냉랭한 세상에서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하면 씽씽 달리는 젊은이들의 속도에 뒤쳐지지 않고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까. 꼰대나 꼴통 소리를 들으며 허우적거리지는 말아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을 많이 하지 말고 귀를 열어 듣는 자의 자세를 취해야 하리라. 달리는 세상에서 존재감을 느끼며 멋있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허물어진 가치를 탓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치를 높이도록 노력해야겠다. 새로 나오는 기계는 부지런히 배워 젊은이들의 도움 없이도 당당하게 살아가리라 마음먹는다. 나를 잘 보살펴 오래도록 책을 많이 읽고 쓸 수 있으면 좋겠다. 짐이 되는 노인이 아니라 베풀며 살아가는 지혜로운 어른이 되리라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