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슨Ⅲ 주석>, p. 2016.
5:1-7:29 산상수훈의 배경 성경 전체, 나아가 세계 문화 전체를 통틀어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어야 할 가장 완벽한 수준의 윤리 체계를 보여 주는 산상수훈이다. 한편 서론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마태는 예수께서 공생애 전기간에 걸쳐 행하신 여러 강화(discourse)를 다섯 부분으로 나누었는바 산상수훈은 그 첫 부분이다. 한편 산상수훈이 갈릴리 지방의 어느 한 산지에서 행해진 예수의 설교 전문(全文) 그대로인지 아니면 마태가 다른 여러 기회에 예수께서 나누어 하신 말씀까지 함께 편집 구성하였는지에 대해서는 각각 견해가 다르나 예수께서 여기 기록된 내용 그대로의 산상수훈을 하셨고 유사한 내용으로 다른 기회에도 자주 설교하셨다고 보는 것이 가장 지지받는 학설이다. 그러나 본 강화가 예수의 설교 내용을 조사 하나까지 그대로 옮겼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마태가 예수의 어록을 집성하면서 핵심 부분만을 정리 게재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IVP 성경주석 복음서/사도행전>, p. 48.
5:1-7:29 첫 번째 강화: 제자도
마태의 대‘강화’(이에 대해서는 서론을 보라) 가운데서, 이 첫 번째 강화는 일반적으로 ‘산상수훈’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강화는 누가복음 6:20-49에 기록된 설교와 똑같은 일반적인 구성으로 되어 있지만, 훨씬 더 길며 누가복음의 다른 곳에서 발견되는 자료와 마태복음 안에서만 발견되는 상당히 많은 자료를 포함한다. 이 자료 수집의 바탕이 된 주된 주제는 제자도 즉 ‘천국의 삶’이다. 예수님은 첫 제자들을 부르신 후에 그들을 위해서 그들이 처한 새로운 상황의 특권과 요구 사항에 대한 개관을 제시하신다.
강화의 몇 부분은 이제 제자들이 충성을 바칠 분으로 예수님께 초점을 맞춘다. 그것은 제자를 위한 행동 규범일 뿐 아니라 7:28-29이 우리에게 일깨우듯이 메시아의 권위에 대한 일종의 계시다. 이와 유사하게 8-9장의 예수님의 기적 행위 모음은, 메시아의 권위에 대한 강력한 진술을 매듭짓는다.
<개혁주의 스터디 바이블>, p. 1612.
5:1-7:29 산상수훈은 마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위대한 가르침 다섯 토막 중 첫 번째에 속한다(서론의 “특징과 주제” 참조).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윤리에 대한 고전적인 진술이기도 하다. 초대 교회는 문자적 해석을 선호했지만, 이 산상수훈을 특정 계층의 그리스도인들, 특히 수도사들에게만 온전한 형태로 적용했다. 재세례파들 같은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똑같이 문자적으로 적용하려 했고 심지어는 사회와 국가에도 그렇게 하고자 했다. 또 다른 이들(루터)은 산상수훈을 회개를 위해 모세 율법을 강화한 것으로 이해했다. 어떤 이들은 산상수훈의 요구들을 현 시대에 실행하는 데는 무리가 따르며, 예수님이 다스리실 미래의 천년 왕국 때 적용할 수 있는 것으로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또 다른 이들은 산상수훈의 요구들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이는 예수님이 외적인 행위보다는 내적인 성향에 더 관심이 있으시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또는 이 가르침이 지닌 엄격함은 듣는 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요구에 대해 따를 것인가 반대할 것인가를 결정해야만 하게끔 의도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 산상수훈이 제자들을 향한 것이고, 그들을 통해 오늘날의 모든 교회에 주어지는 것임을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 산상수훈은 내면의 동기와 외면의 행위를 모두 언급하며(5:21-22, 27-28), 하나님의 자녀로 양자된 자들을(5:9) 하늘 아버지의 성품을 반영하도록 부르고 있다(5:16, 48, 6:1, 6, 9, 32-33). 이런 합법적인 요구들은 그 기준을 매우 높이 정해 놓고 있는데(5:48), 왕이신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이를 흠 없이 온전하게 지킬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사함받기 위해(6:12), 믿음과 신실함이 시험받을 때 성령의 능력을 얻기 위해(6:13)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이끌리게 된다.
* 마태복음의 5분법적 내용 구성
<톰슨Ⅲ 주석>, p. 2001.
복음서는 오늘날의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및 그의 사역에 대한 완벽한 계시를 준다. 한편 사복음서 기자가 각각 나름대로의 독특한 관점에서 예수를 제시하고 있는바, 특히 마태는 매우 특이한 원칙으로 복음서를 전개하고 있다. 즉 마태는 모세 오경, 시편 5권 분류 등 구약성경의 주류인 문서 5분법을 따라 서론(1,2장), 결론(26:3-28:20)을 제외한 전체 내용을 5부로 나누고 있다. 이와 같이 마태는 전체 내용을 5부로 편집하면서 비교적 시간적 선후 문제보다 주제별 구성 원칙에 더 충실하였다.
5분법으로 나눈 본서의 각 부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다룬 기사 부분과 주제별 관점에서 연결된 예수님의 강화 두 부분이 합쳐져서 한 부를 형성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 서론 | 예수의 탄생(1:1-2:23) |
| 1부 | 기사- 세례 요한 및 공생애 초기 사역(3:1-4:25) |
| 강화- 산상수훈(5:1-7:29) |
| 2부 | 기사- 각종 이적과 열두 제자 임명(8-9장) |
| 강화- 제자의 삶, 선교와 순교(10장) |
| 3부 | 기사- 예수와 세례 요한의 운명, 안식일 논쟁(11-12장) |
| 강화- 천국의 비유(13:1-52) |
| 4부 | 기사- 예수와 세상 지도자들의 대립(13:53-17장) |
| 강화- 하늘나라 시민의 생활(18:15-19:2) |
| 5부 | 기사- 각종 논쟁과 수난 예언(19:3-23:39) |
| 강화- 감람산 강화(24:1-26:5) |
| 결론 | 예수의 수난과 부활(26:6-28:20) |
<개혁주의 스터디 바이블>, p. 1601.
마태복음 서론- 문예적 특성: (전략) 둘째, 같은 형태의 문구가 반복적으로 예수님의 다섯 가지 주요 교훈적 담화를 각각 매듭짓는다. “예수께서……[말씀, 교훈, 비유 등]을 마치시고.” 이 담화들은 각각 하나님 나라의 윤리(5-7장), 제자도와 전도(10장), 하나님 나라 비유(13장), 교회에서의 관계(18장), 마지막 종말(24장)에 대한 것들이다. 비록 이 다섯 가지 담화의 내용을 모세오경의 다섯 책과 일대일로 맞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예수님이 모세와 마찬가지로 약속된 선지자라는 주제를 강화하고자 마태가 그 횟수를 의도한 것일 수 있다(신 18:18). 각 담화와 그에 선행하는 내러티브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을 수도 있다. 내러티브 부분은 근본적으로 왕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다루는 반면, 담화는 왕의 백성에 초점을 둔다.
<IVP 성경주석 복음서/사도행전>, p. 35.
(전략) 마태복음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와 그분의 말씀 가운데 특히 교회 생활에 관련된 이야기와 말씀을 수집하여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사가 쓸 수 있게 정리했다. 마태 자신이 그러한 교사였기 때문에 이미 자신의 교인에게 제시하면서 사용한 자료를 복음서 안에 포함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가장 뚜렷한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모은 다섯 개의 대‘강화’(discourses)다. 이 강화는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등의 형식으로 끝맺으며(이 형식은 번역본보다 헬라어로 읽을 때 훨씬 더 인상적이다), 5-7, 10, 13, 18, 24-25장을 구성하고 있다. 그것들은 각각 다른 공관복음서(마가와 누가)의 강화에 있는 훨씬 더 간단한 ‘말씀’(address)에 기초를 둔 것 같다. 그리고 각 강화에는 관통해 흐르는 명확히 통일된 주제가 있다. 그렇게 수집된 많은 말씀이 다른 공관복음서의 다른 곳에 나온다. 그래서 마태가 어떤 주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다섯 개의 정교한 ‘선집’(anthologies)을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첫댓글 좋은 내용입니다.
혹시 초신자가 어려워 할만한 단어는 국어사전적인 것도 설명해 올립니다.
---------------------------------------
강화(discourse)는 특정 주제나 논점에 대해 논리적으로 전개되는 말, 즉 강연·설교·토론·담화 등 다양한 형식의 언어적 표현을 의미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산상수훈 (<영> Sermon on the Mount)
마 5-7장에 걸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다. 복음서 가운데서 기록자의 개인적인 언급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만으로 기록된 것 중에서 가장 긴 부분이다. 이 내용들은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서 가르치시는(5:1) 장면에서 묘사된 ´산상수훈´ (the Sermon on the Mount)이라는 제목으로 불리워진다. 예수께서 가르치시기 위하여 올라가 앉으신 산은 전통적으로 디베랴의 서쪽에 위치하고, 막달라의 남쪽(south of Magdala)에 위치한 하틴의 호른산(Horns of Hattin)과 동일한 곳으로 여겨진다.
I. 마태복음 : 가르치시기 위해 않으심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다섯 번의 설교 가운데서 첫 번째 부분인 산상수훈에는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 대부분이 기록되어 있다. 이 산상수훈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영적이며 윤리적인 본성(the spiritual and ethical nature)을 가르치신다는 점에서 마태복음의 다른 설교들과 구별된 주제와 기원을 갖고 있다.
이 산상수훈의 주제는4:17-25에 기록된 예수님 사역의 출발과 함께 드러난다.
예수께서 하신 설교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the coming of e kingdom)이다 (17,23절). 예수님은 먼저 사람들에게 자신을 따를 것을 명하셨고(18-22절), 그 뒤 많은 무리들이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으로부터 치료를 받기 위해 모여 들었다(22-25절, 참조. 8-9장).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주요 자료들에서 전래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마가복음, 마태복음-누가복음에 공통적으로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들(´Q ´자료라고 불리운다), 그리고 마태복음에만 독특하게 실려 있는 말씀들(´M´자료라고 불리운다).
마태복음과 산상수훈에서 볼 수 있는 구조적 연관성이 뛰어나고, 각 복음서들이 각각 다른 관점과 구조로 산상수훈을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산상수훈은 단 한번 행해진 선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번만 행해진 설교라면 그 설교가 갖고 있는 핵심적인 내용이 하나로만 정리 되었을 것이다. 산상수훈의 경우는 여러 차례 행해진 설교 가운데서 마태복음의 기록자가 독특한 자신의 관점과 의도로 구성했기 때문에 다른 복음서들과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Ⅱ. 내용과 신학
산상수훈의 내용이 너무 높은 수준의 윤리적인 삶을 요구하기 때문에(어떤 사람은 불가능하다고까지 한다) 이에 대한 해석도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로 제시된다.
(1) 산상 수훈은 종교 지도자들이나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수도사들을 기준으로 제시된 것이지 일반 평신도들에게 제시된 것은 아니다.
(2) 개신교도들 가운데는 산상 수훈이 갈 3:23-24에 언급된 율법과 마찬가지 역할을 하는 것으로써, 이 수훈의 내용을 사람으로서는 결코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의 노력에 의지하지 말고 그리스도께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다.
(3) 산상수훈이 얘기하고 있는 ´궁극적인 섭리론´ (EXtreme DIspensationalis-m)은 이 세대(this age)에 해당되는 언급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천년 동안 계속될 ´천국의 시대´(kingdom age)에 관한 언급이다.
(4) 산상수훈은 예수께서 현 세대의 종말이 오기 전의 짧은 시간에 관해서만 언급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 의도는 다가올 공동체(a continuing community)의 윤리관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관점의 윤리관(interim ethic)을 말씀하신 것이다.
(5) 산상수훈은 이 세대를 살아가는 모든 기독교인들의 삶의 기준을 설정해주는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이다. 이 마지막 견해에 다음과 같은 견해들이 종종 첨가된다. 즉 "산상수훈이 요구하고 있는 것(예. 마5:42)은 모든 인간관계의 형성과 상황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 또는 "예수께서 의도하신 것은 어떤 특별한 행동의 규례를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삶의 원리를 말했을 뿐이다 "라는 견해들이다.
산상수훈의 여러 내용 중에서 가장 크게 차지하는 부분은 다른 복음서에 기록된 내용과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부분이다.
이러한 내용으로 볼 때 산상 수훈의 의도가 이 세대의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기준이 되는 삶을 제시해 주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산상수훈의 내용 중에는 과장되게 여겨지는 부분도 있다(예.마 5:29-30). 그러나 산상수훈이 요구하는 사항에 대해서 지나치게 그 의도를 찾고자 하는 것은 오히려 그 본래의 의도를 간과할 우려가 있다. 어쨌든 산상수훈은 단순히 윤리적인 기준을 설정하기 위해서 제시된 것은 아니다.
천국의 현재성으로 인한 복(마5:3)은 산상수훈의 전반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명령형 앞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산상수훈을 파악함에 있어서 명령형이 있는 문맥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즉 이 산장수훈은 도래할 하나님 나라에 대해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응답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영적이며 윤리적인 본성에 그 방향이 맞추어져 있다.
결국 산상수훈은 일반적인 집단을 대상으로 하여 윤리적인 삶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세속적인 삶을 포기한 자들에게 선포하신 것이다. 맨 처음에 언급된 두 가지의 복(福,beatitude)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성취감을 맛보는 자들이 아닌, 역설적으로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들에게 임한다(5:3-4). 이러한 자들은 교만하지도 않고, 쉽게 만족하지도 않으며, 일상적인 기준에 의해서 승리의 삶을 살았다고 얘기하는 자들이 아니라, 겸손하고 핍박받으며 언제나 하나님의 공의가 성취되기를 간구하는 자들을 말한다(마 5:5-12) .복(福)개념에서 언급된 겸손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의(義)는 서기관들이나 바라새인들의 의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의 삶이란 예수님 당시의 시대에 모세의 율법을 따라 살아가는 이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자들로서, 일반 유대인들로부터 칭송을 받는 삶이었다(마5:20).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이들보다 더 큰 의(義)를 가졌는데 그 이유는 율법의 외적인 명령에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 그 내용이 갖는 깊은 의도에 따라 살며, 율법의 외적인 형식에 만족하지 않고, 그 내용이 의미하는 바에 따라 사는 삶을 의미한다(마 5:21-48).이와 같이 그들은 하나님 사역의 증거를 삶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 준다(마5: 13-16). 무리에게 말씀을 강론하시면서, 예수께서는 모세의 율법과 자신의 말씀과의 관계와, 자신이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백히 하셨다(마 5:17-19).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율법에 대한 랍비적 설명들과 명백한 대조를 이룬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한 의도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행위의 기준을 찾기 위해 율법의 문구에 대한 정확한 해석에 집착하는 것이 랍비적인 해석이라면, 예수께서는 단순히 율법의 해석자로서가 아니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5:22, 28, 32, 34, 39, 44)라는 말을 사용하여
선포하는 자로서의 권세있는 선생의 모습을 보여 주셨다(참조. 7:29). 예수께서는 삶에 적용하는데 있어 많은 제한성을 갖고 있는 율법의 가르침에 대해 정확한 이해를 가질 것을 언급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태도와 관념 속에서 행해지는 삶에 대한 전반적인 자세를 가르치려고 하셨다.
이와 같이 랍비적인 입장과 다른 예수님의 해석은 적대자들에게는 반드시 되갚음을 하였던(마 5:38-39) 당시의 법 개념을 뛰어넘는 것이었다(43절에 언급된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두 번째 인용 구절은 구약에서 인용하신 것이 아니라, 당시 행해지던 유대적인 해석의 한 의도를 인용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영적으로 신실하며 소박한 자들이다(6: 1-18). 그들은 물질을 땅에 쌓아두는 자들이 아니라 하늘
나라에 쌓아두는 자들이 다(6:19-34). 또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데 마음을 쏟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향하여 스스로를 판단하는데 온 마음을 쏟는 자들이 다(7:1-5,13-14,21-26). (一>복, 주기도문)
Ⅲ. 누가복음 : 평지에서 행하신 설교
눅 6: 20-49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설교는 그 대부분이
마태복음에 나타나는 산상수훈의 내용들과 병행구를 이룬다. 누가복음에 나타난 설교의 서두 부분은 마태복음의 서두 부분과 꽤 다른 점을 보여 주는데, 예수께서 산이 아니라 ‘평지에 서셨다´는 점, 병고침을 받은 기사,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에 대한 언급, 심지어 이방 지역(눅 6:17-19)이라 할 수 있는 두로와 시돈의 해안지역에서 온 자들에 대한 언급 등이 그러한 점들이다.
두 복음서는 대체로 거의 같은 윤곽을 가지고 있는데, 복들에 대한 비슷한 설명들(마 5:3-12,눅 6:20-23), 관계에 대한 가르침, 원수를 사랑함, 판단에 대한 언급(마 5:38-48, 7:1-5, 눅 6:27-38, 41-42), 열매를 통해 나타나는 선악의 증거들에 대한 교훈(마 7:15-20, 눅 6:43-45),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여, 주여라고 부르느냐”와 같은 물으심(눅 6:46, 마 7:21-23에서는 길게 제시되어 있다), 집 짓는 두 사람에 대한 비유(마 7:24-27 눅 6:47-49)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마태복음에서는 나타나지 않으나 누가복음에서만 유일하게 나타나는 부분이 세상적인 복을 받은 자들에 대해 화가 임하리라는 내용(눅 6:24-26)과
눅 6:39-40절에 해당되는 부분들이다(병행구. 마 15:14, 10:24-25).
두 개의 설교가 비슷한 면이 있지만, 복에 대해서는 두 복음서가 약간씩 다른 입장을 보인다. 누가복음이 현재 이 땅 위에의 가난함, 굶주림, 울고 웃는 사람의 외적인 모습을 하늘나라의 복된 삶에 참여하는 모습과 강하게 대조하고 있는 반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윤리적이며 영적인 본질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모세의 율법에 대한 기독교 공동체의 특별한 관계성이 마태복음에는 나타나고 있지만 누가복음에는 언급되지 않았다.
* 참고 문헌
D. Bonhoeffer, the Cost of Discipleship(New York: 1963) , W.D Davies, The setting of the sermon on the Mouut(Cambidge 1964) , R.A. Cuelich. The Sermon on the Mount (Waco, 1982) , H.K. McArthur. Understanding the Sermon on the Mount (1960, repr. Greenwood. Conn, 1978).
출처: <GODpia성경사전: 아가페출판사>.
포스팅 본문을 읽고 이 아가페 글도 읽으니 시너지 효과가 나는 것 같습니다.
@노베 공감합니다^^
*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복음.
복음의 주체이신 예수는 유대 지도자들이 강조하는바 문자적 율법 수행을 종종 거부하심으로써 율법 파괴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 그러나 예수는 친히 율법의 완성자이심을 선포하셨고, 또 율법과 복음의 긴밀한 연결성과 그 발전적 관계성을 강조하기도 하셧다. 한편 이 같은 율법과 복음, 또는 율법의행위로 인한 의(義)와 복음의 은혜로 인한 의(義) 사이의 관계는 매우 심오한 것으로 깊은 통찰이 요구되는 성경 주제 중 하나이다.
우선 구속사 전개의 방법론적 측면에서 이 양자의 관계를 살펴보면, (1) 율법 수여의 동기와 정신은 모두 다 그리스도의 등장과 사역을 예표하고 있다는 점에서(히8:5), (2) 예수께서는 구약 율법에 포함된 죄인을 향한 공의와 요구를 모두 충족시키셨다는 점에서(요 19:30), (3) 예께서는 율법의 정신을 더욱 승화시키고 그 참 뜻을 나타내심으로써 완전한 천국 시민의 도덕률을 제시하셨다는 점에서 율법을 완성하신 것이다. 따라서 율법과 복음은 부정과 폐지와 대치의 관계가 아니라, 긍정과 완성과 발전의 관계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양자의 관계를 비유하여 성경은 '그림자와 실체','몽학선생과 참 선생'의 관계로
묘사하고 있다(갈 3:24; 히 8:5).
그런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율법과 복음을 구원의 유효성이라는 관점에서, 또는 그 목적 및 기능론적 측면에서 고찰할 때에는 양자는 첨예하게 대조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갈 3장 주제 강해 '율법과 복음의 비교', '율법과 복음의 관계 및 단절성'을 참조하라).
한편 예수께서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자신(복음)을 역설하신 이유는 (1) 당신의 율법에 대한 신앙 개혁적 가르침을 자신들의 종교적, 정치적 기득권(旣得權)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는 자들의 오해를 불식(拂拭)시키기 위해서이고 (2) 율법 정신의 승화를 가르치는 당신의 교훈을 빌미로 율법 폐기론까지 주장할지도 모르는 방종한 자들을 동시에 경계하기 위해서였다.
출처: “마태복음 5장”, <호크마 주석>.
호크마 답지 않은 뭔가 합리화의 분위기가 느껴지지만 공감은 됩니다.
@노베 읽고 보니 공감이 됩니다.
이 글을 읽고 산상수훈에 대해서 더 잘 앍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관련 성경구절을읽고 은혜를 받게 되어 감사합니다.
네, 공감합니다.
산상수훈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조금 다르게 기록된 것은 솔직히 모르고 있었습니다. 코람데오님의 글과 댓글을 통해서 성경을 더 공부하게 됩니다.
네, 저도 그래요. 공감합니다^^
산상수훈을 여러 양질의 주석 내용으로 파악하니 참으로 좋습니다. 성경을 더 열심히 읽는 계기로 삼겠습니다.
공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