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金正喜의 畵論 1. 金正喜의 學藝一致思想의 淵源 2. 文字香과 書卷氣
Ⅲ. 金正喜의 寫蘭論 1. 蘭品評論 2. 蘭畵法 3. 金正喜의 墨蘭에 대한 考察
Ⅳ. 金正喜의 산수화 1. <歲寒圖>에 나타난 金正喜의 文人精神 2. <歲寒圖>에 나타난 金正喜의 禪思想
Ⅴ. 조선 말기 書畵에 있어서 金正喜의 영향과 평가 1. 조선 말기 미술에 미친 김정희의 영향 2. 金正喜의 畵論에 대한 평가
Ⅵ. 結論
Ⅰ. 머리말
조선조 후기 문예부흥의 난숙기라 할 수 있는 정조 10년에 충남 예산에서 태어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는 급진북학파의 한 사람이었던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1750-1805)에게 사사하여 북학파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청대 학술의 새롭고 실증적이며 과학적인 학문을 접하고자 갈구하다 1809년 그의 나이 24세 때 생부 김노경(金魯敬;1766-1837)이 동지겸사은사(冬至兼謝恩使)로 연경으로 갈 때 자제군관으로 동행하여 홍유석학(鴻儒碩學)인 옹방강(翁方綱)·완원(阮元)을 만나 학문적인 인연을 맺고 그들을 통하여 중국의 여러 학자와 지속적으로 교류하였다. 그의 말년은 계속된 가화(家禍)로 말미암아 불운했지만 이 시기에 학문과 예술에 대한 수양을 쌓아 경지를 이루었으며 백파(白坡)와 초의(草衣) 등 선사(禪師)들과 선담(禪談)을 통하여 불교에 심취, 선학에도 깊은 조예를 가졌으며 경기도 과천에서 노후를 보내다가 71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이와 같은 평탄하지 못한 생애와 그의 뛰어난 재능과 지성, 박문다식(博聞多識)하여 천하에 이름을 떨쳤으므로 그를 일컬어 송대(宋代)의 동파(東坡) 소식(蘇軾)에 비견하기도 하였다. 이런 비교가 결코 과장되지 않음을 그가 이룩한 추사체(秋史體)란 창조적인 서체는 물론 그가 남긴 많은 서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추사의 고결한 인품과 도야된 학문적 성숙에서 나온 높은 경지의 문기(文氣)를 그의 <세한도>(歲寒圖)와 같은 서화작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그림 속의 송백(松柏)은 추운 겨울을 당하여서도 변하지 않는 지조와 정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추사에 대한 후학들의 찬사는 거침없는데 오세창은 그의 학문적 성과에 대해 ''겨우 약관 때에 백가(百家)의 글을 다 읽어서 그 학식의 넓고 깊음이 마치 하해(河海)같이 헤아릴 수 없었다. 전심으로 공부한 것은 십삼경(十三經)인데 그 중에서도 주역(周易)에 조예가 깊었고, 또 금석, 도서, 시문, 전예(篆隸)에 대해서도 그 근원을 탐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1]라고 칭송하였다. 특히 김정희는 ''학문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 학문의 실용성에 뚜렷한 신념을 두고 무학대사의 비(碑)로 와전되고 있던 진흥왕순수비를 고증함으로써 자신의 실사구시적 태도를 실천한 바 있다. 즉, 그는 비석을 답사, 반복하여 정밀하게 관찰함은 물론 공평한 식견으로 진흥왕순수비의 동류인 황초령비(黃草嶺碑)의 탁본과 북한산비를 대조하였으며,『삼국사기』,『문헌비고』등의 전거를 인용하여 그것을 실증해 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대표적 업적이라 할 수 있는 진흥왕순수비 고증의 과정과 결과를 보면 첫째,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고증방법의 도입 둘째, 이러한 고증을 통해 신라의 강계(疆界)가 황초령 너머에까지 미쳤음을 밝혀내고 셋째, 신라시대에 천자(天子)의 제도를 사용하여 짐(朕)이란 말을 쓰고 왕제의 건호를 사용했음을 밝혀 고대 우리 나라의 자주성을 확인했을 뿐만 아니라 넷째, ''진흥대왕''이란 칭호가 생존시부터 사용되었으며 다섯째, 무학비로 알려진 비석을 진흥왕순수비임을 밝혀내 금석학의 실증적 유용성을 확고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2] 이러한 실증적 태도는 서화감상에도 나타나고 있거니와 능력이 닿는 한 중국의 고서화를 직접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그 가치를 평가하고자 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김정희를 일컬어 ''조선 고유의 전통문화를 계승하면서 청조 고증학을 철저하게 소화한 새로운 사상의 대성자(大成者)로서 해박한 식견과 탁월한 감식안을 겸비한 위대한 학자요 대예술가''로 높이 평가하는 추세이다.[3] 나아가 그에 대해 내려진 ''경학(經學)과 노장(老莊) 및 불학에 깊은 이론을 실사구시(實事求是)로 옮기려 한 학자인 동시에 금석과 고증으로 그의 서화는 실로 동방에서 전인미도(前人未到)의 경지를 전개한 대학자''였다는 평가는 한국사에 있어서 그의 권위가 얼마나 높은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4] 그러나 김정희와 그를 추종한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1789-1866), 소치(小癡) 허유(許維;1809-1892), 고람(古藍) 전기(田琦;1825-1854) 등을 위시한 남종화가들은 사의를 존중하고 형사를 경시하는 남종문인화를 크게 발전시켰으며, 동시에 조선 후기에 유행을 본 토속적인 진경산수(眞景山水)와 풍속화에 쐐기를 박는 결과를 초래하였다.[5] 따라서 이 글의 목적은 학자이자 서화가로서 학예일치를 추구했던 추사 김정희의 높은 예술적 경지를 알려주는 것 중에서 그의 화론, 특히 사란(寫蘭)과 관련한 창작론과 비평론을 분석함으로써 그의 예술관을 파악해봄은 물론 그의 화론이 조선 말기 회화의 흐름에 미친 영향을 비평적으로 재조명하는 데 있다.
Ⅱ. 金正喜의 畵論
1. 金正喜의 學藝一致思想의 淵源
추사 김정희의 화론을 파악할 수 있는 많은 글 중에서 현재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畵法書勢>란 예서로 쓴 짧은 글이 그의 사상과 성격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칠언대구 형식의 이 글에서 그는 "그림의 법은 만리에 이르는 긴 강이 있어야 하고, 글씨는 외로이 서있는 나뭇가지 하나와 같이 해야 한다"(畵法有長江萬里 書勢如孤松一枝)라고 했거니와 이를 보충한 협서(夾書)에서 밝히기를 "근래 사람들은 붓에 먹을 적게 찍어 가지고 원대(元代) 화가들이 즐겨 사용하던 황한간솔(荒寒簡率)한 맛을 내려고 하는데 이는 모두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짓이다. 왕유(王維), 이사훈(李思訓), 이소도 부자(李昭道父子), 조영양(趙令穰)[6], 조맹부(趙孟採)는 모두가 청록색을 사용한 것이 더 우수하였다. 품격이 높다는 것은 형태가 아니요 정신이다. 이 정신을 체득한 사람이면 청록이나 니금(泥金)을 사용해도 좋다. 서법도 마찬가지다."라고 하였다.[7] 이는 김정희가 제자인 조희룡의 그림에 붙인 글로써 그림을 그림에 있어서 그 형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신이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즉 고매한 인품과 높은 학식을 닦은 사람이라면 그 방법이 어떠하든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데 글씨 또한 이와 같은 이치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김정희에게 있어서 그림과 글씨는 서로 다른 영역의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같은 것임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정희의 이러한 서화론은 기본적으로 학예일치 사상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 김정희의 서화론이 어떤 연유로 나타난 것인지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 그의 서화론은 단지 이론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그의 독창적인 서체에서 실천되고 있는 바 학예일치사상의 연원을 추사체 형성의 과정을 설명함으로써 그 근거를 밝혀볼 수 있을 것이다. 서론에서 말한 것처럼 김정희의 학맥은 조선 중기의 양란을 거치며 주자성리학에 바탕한 양반사대부들의 사회경영 능력이 의심을 받기 시작하던 때에 형성된 북학파와 연관을 맺고 있다. 패망한 명을 대신하여 조선이 중화사상(中華思想)의 계승자를 자임하는 조선성리학이 형성되었는데 이러한 시대사조에 따라 회화에서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가 만개하였고, 서예에 있어서도 백하(白下) 윤순(尹淳;1680-1741)과 그의 제자인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1705-1777)에 의해 왕희지체에 기본을 둔 동국진체가 나타났으나 구세(救世)의 이념에 불타던 조선성리학도 치세의 능력을 상실하고 말폐를 드러내게 되었다. 그러자 신예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조선성리학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면서 새로운 학문을 도입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는데 이를 열망했던 개혁세력이 북학파였으며 정조(正祖;1752-1800)가 그 후견인이 됨으로써 이들은 규장각을 중심으로 현실정치 속으로 개입할 수 있었다. 특히 북학파들은 당시 청조에서 난만(爛漫)하던 고증학을 받아들였는데, 금석고증만을 중시하는 중국학자들은 금석골동취미와 서화골동 전반에 걸친 감식고증에 치중함으로써 종래 문인화가들이 주장하던 서화일치의 막연한 문인취미를 뛰어넘어 진정한 의미의 학예일치의 예술세계를 지향하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김정희가 젊은 시절 만났던 옹방강(翁方綱)은 이런 경향을 대표하던 학자였다. 이러한 학예일치사상이 점차 예술지향적인 경향으로 기울어 서예를 단순한 의사전달의 매체인 문자로서 시정표출(詩情表出)이나 의사전달의 보충적 수단이라는 의미에서의 시서화 일치가 아니라 서예 그 자체로 즐기려는 순수예술정신이 형성되었다. 이런 시대상황 속에서 김정희는 북학파의 사상을 계승하되 철저한 고증학에 바탕하여 먼저 옹방강의 서체를 터득하고 곧 문징명, 동기창(董其昌)을 거쳐 다시 조맹부(趙孟採)와 미불(米揷), 동파(東坡) 소식(蘇軾)을 거쳐 해서(楷書)의 구양순(歐陽詢)의 <화도사비>(化度寺碑), 우세남(虞世南)의 <공묘당비>(孔廟堂碑) 등을 익힘으로써 북비(北碑)와 남첩(南帖)을 두루 터득하고 더 거슬러 올라가 한예(漢隸)의 묘리를 통달하여 독자적인 추사체를 창출하기에 이른 것이다.[8] 여기에서 김정희가 사란(寫蘭)을 논하면서 끊임없이 문자향과 서권기를 강조하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즉 글씨와 마찬가지로 난그림에 있어서도 학문적 도야가 결여된 상태에서는 겉모양만 베끼는 것(摹)에 불과하다는 비평관이 여기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김정희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고전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많이 보고 많이 그리는 것) 위에 바야흐로 좋은 난그림이 가능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2. 文字香과 書卷氣
김정희에게 붙여졌던 해동제일통유(海東第一通儒)란 명예로운 칭호에 값할만한 대석학이자 실학자이며 뛰어난 서화예술가이기도 했던 그의 서예는 타고난 천품에 더하여 지속적인 단련과 수많은 명적의 직접경험에 바탕한 높은 수준의 이념미를 갖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슴 속에 청고고아(淸高古雅)한 뜻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문자의 향기와 서권의 기미에 무르녹아 손 끝에 피어나야 한다''는 김정희의 서화관은 현재까지도 유효한 탁월한 이론임에 분명하다. 철저한 정도(正道)와 수련을 중요시했던 김정희의 이러한 태도는 소식으로부터 이어지는 철저한 시, 서, 화 일치의 문인취미를 계승한 것으로서 그림에서도 문자향과 서권기를 강조하여 기법보다 심의(心意)를 존중하는 문인화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이념에 따라 그 자신 또한 마치 예서를 써 듯이 필묵의 아름다움을 주로 하여 고담(枯淡)하고 간결한 필선으로 심의를 드러내는 문기(文氣) 높은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김정희의 이러한 문인화풍의 작품관은 이인상(李麟祥;1710-1760)의 서화를 높이 평가한다던가 자신에게 배우거나 영향을 받은 후학 중에서 이하응(李昰應)의 난초그림과 소치 허련의 산수, 신관호(申觀浩;1810-1888)의 예서를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김정희의 시각으로 볼 때 이들이야말로 문자향과 서권기를 갖춘 바탕 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썼던 까닭에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자향과 서권기에 기초한 고담청아한 예술세계는 김정희 화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Ⅲ. 寫蘭論
1. 김정희의 蘭品評論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많은 진작을 풍부하게 경험했던 김정희는 난그림에 대한 품평에 있어서 거의 미술사 전반을 훑고 있는데 그것을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題石坡蘭卷>을 들 수 있다. 김정희는 이 글에서 이르기를 "난을 그리기가 제일 어렵다. 산수·매화와 대나무·화훼·새와 물고기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그에 능한 자가 많았으나, 유독 난을 그리는 데는 특별히 소문난 이가 없었다. 이를테면 산수로서 송·원대 이래 남북의 명적이 하나 둘로 헤아릴 바가 아니나 숙명(叔明) 왕몽(王蒙)[9], 황공망(黃公望)[10]이 아울러 난마저 잘 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며, 대나무의 호주(湖州) 문동(文同)과 매화의 양보지(揚補之)[11]도 역시 난마저 잘하지는 못했다. 대개 난은 소남(所南) 정사초(鄭思肖)[12]로부터 비로소 나타나서 이재(彛齋) 조맹견(趙孟堅)[13]이 으뜸이 되었으니, 이는 인품이 고고하고 특절하지 않으면 하수하기가 쉽지 않다. 문징명(文衡山)[14] 이후로 강소성과 절강성 사이에서 마침내 크게 유행되었지만 그러나 문징명은 서화가 심히 많으며, 그가 난을 그린 것은 또 다른 작품의 열에 하나도 안 되니 그것을 드물게 그린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함부로 그려 황소난말(黃所亂抹)하기를 요즘처럼 조금도 꺼림이 없이 사람마다 다하게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정소남이 그린 것을 일찍이 본 바 있는데 지금 세상에 남아있는 것은 겨우 일 본일 따름이다. 그 잎과 그 꽃은 요즈음에 그린 자들과는 너무도 달라서 함부로 의모(擬摹)할 수도 없으며, 조맹견 이후로는 오히려 그 신모(神貌)와 계경(磎徑)[15]을 찾을 수는 있으나, 방모(戃撫)에 이르러서는 또 갑자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때문에 정소남과 조맹견 두 사람은 인품이 고고하고 특별하므로 화풍도 역시 그와 같아서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그 뒤를 쫓아 따를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했다.[16] 이 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김정희는 역대 중국의 많은 문인화가들의 작품을 꿰면서 특히 난그림이 왜 많지 않은지 그 이유를 추궁하고 있다. 결국 난을 그림에 있어서 고고하고 빼어난 인품을 갖춘 연후에야 가능한 것이므로 중국에서도 예로부터 산수·화조·영모화 등에 뛰어난 작가는 많았으나 난을 잘 그린 작가는 드물었는데 많은 서화를 남긴 문징명 조차 난그림이 많지 않으니 난이란 함부로 그릴 것이 못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소남과 조맹견의 출현으로 비로소 난의 정수를 볼 수 있으니 이는 그들의 고고하고 높은 경지의 인품에서 나온 것이라고 그 원인을 밝혔다. 나아가 그는 "근대에는 진원소(陳元素)[17], 스님인 백정(白丁)[18]과 석도(石濤)[19]로부터 정섭(板橋 鄭燮)[20], 전택석(錢擇石)[21] 같은 이에 이르러서는 본시 난을 전공한 이들로서 인품 또한 고고하여 무리에 뛰어났으므로 화품 또한 따라서 오르내리게 되며 단지 화품만을 들어 논정할 수는 없다.[22]라고 말함으로써 정사초와 조맹견 이후 난그림에 있어서 일가를 이룬 인물로 진원소, 백정, 석도, 판교 정섭, 전택석 등을 들고 있는데 특히 전택석의 난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도 "전시랑(錢侍郞)의 난그림은 근세에서 으뜸으로 여기거니와 신의 경지에 들어가서 서가(書家)의 유석암과 더불어 병칭하는 것은 당연하다."라며 그 품격을 높이 사고 있어 주목된다.[23] 결국 이 글은 김정희의 난그림 품평관이 고고하고 높은 인품에 있음을 밝혀주고 있다.
2. 金正喜의 蘭畵法
<題石坡蘭卷>에서 김정희는 그림의 품격에 대해 논하면서 화법에만 얽매이는 것을 크게 경계하였으니 이 글에 이르기를 "또한 그림의 품격을 쫓아 말한다면, 모양을 비슷하게 하는 것(形似)[24]에도 있지 않고, 길을 따르는 것에도 있지 않으며, 또 그리는 법식(畵法)으로 들어가는 것도 대단히 꺼린다. 또한 많이 그린 연후에야 가능하니 선 자리에서 부처가 될 수도(成佛) 없으며, 또 맨손으로 용을 잡으려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비록 구천 구백 구십 구분에 이를 수 있다 하여도 그 나머지 일분은 가장 원만하게 이루기 힘드니, 구천 구백 구십 구분은 거의 모두 가능하나 이 일분은 사람의 힘으로는 가능한 것이 아니며 역시 사람의 힘 밖에서 나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리는 것은 모두 이 의미를 알지 못하는 것이니 모두 망령되게 그리고 있을 뿐이다. 석파 이하응은 난을 치는 것에 깊이 들어가 있는데 대개 그 타고난 기틀이 맑고 신묘하여 그 묘처에 가까이 가 있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25] 그래서 진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일분의 공력 뿐이다."[26]고 했다. 이는 난의 정신보다 잔재주만 추구하는 것을 꾸짖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김정희가 완전히 법식을 도외시한 것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김정희는 <君子文情帖)>에서 난을 치는 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난을 치는 데는 마땅히 왼쪽으로 치는 한 법식을 먼저 익혀야 한다. 왼쪽으로 치는 것이 난숙(爛熟)하게 되면 오른 쪽으로 치는 것에 따라 가게 된다. 이것은 손괘(損卦)의 먼저가 어렵고 나중이 쉽다는 뜻인 것이다. 군자는 손 한 번 드는 사이에도 구차스러워서는 아니 되니, 이 왼쪽으로 치는 한 획으로써 가히 이끌어 위의 것을 덜고 아랫것을 보태는 것을 대의(大義)로 하되 겉으로 여러 가지 소식에 통달하면 변화가 끝이 없어서 간 데마다 그렇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군자가 붓을 대면 움직일 때마다 문득 계율(戒律)에 들어맞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군자의 필적을 귀하게 여기겠는가. 이 봉안(鳳眼)이니, 상안(象眼)이니 하여 통행하는 규칙은 이것이 아니면 난을 칠 수가 없으니, 비록 이것이 작은 법도이기는 하나 지키지 않으면 이룰 수가 없다. 하물며 나아가서 이보다 큰 법도가 있겠는가."[27]
김정희가 아들 상우(商佑)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이러한 화법이 독립된 것이 아니라 서법과 동일시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김정희는 "난을 치는 법은 또한 예서(隸書)를 쓰는 법과 가까우니, 반드시 문자의 향기와 서권(書卷)의 정취가 있은 다음에야 될 수 있는 것이다. 또 난 치는 법은 그림그리는 법칙대로 하는 것을 가장 꺼리는 것이니, 만일 그림 그리는 법칙을 쓰려면 일필(一筆)도 하지 않는 것이 옳다."[28] 즉 그는 화법만 쫓아 난을 그리고자 한다면 차라리 안 그리는 것이 나으며, 난을 그림에 있어서 먼저 서법을 익혀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김정희의 예서 몇 점을 보자. 아는 바처럼 예서(隸書)란 진(秦)이 천하를 통일하였을 때 진시황이 재상 이사(李斯)의 진헌책에 따라 문자의 통일을 단행하여 나타난 대전(大篆)을 모체로 한 소전(小篆)의 성립 이후 보다 간략하면서도 직선적이며 장식성이 적은 고예(古隸)의 출현으로 비로소 서체로서의 형태를 나타내었다. 이 고예에 미의식이 가미되어 통상 예서라고 부르는 팔분체(八分體)가 나타났으니 예서야말로 모든 서체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금석학과 고증학에 정통했던 김정희가 난그림의 출발점을 예서로 상정한 것은 바로 고전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도모하고자 하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학문적 접근없이 함부로 난을 그려댄다면 그것이야말로 원리도 깨치지 못한 상태에서 흉내만 내는 것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김정희는 아들 상우에게 부친 글에서 계속 이르기를 "조희룡(趙熙龍) 같은 무리는 나에게서 난 치는 법을 배웠으나, 끝내 그림 그리는 법칙 한 길(一路)을 면치 못하였으니, 이는 그의 가슴속에 문자의 향기가 없었기 때문이다."라며 자신의 제자를 호되게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29]
3. 金正喜의 墨蘭에 대한 考察
여러 글에서 김정희는 지속적으로 난을 그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토로한 바 있는데 <題石坡蘭卷>에서 오랫동안 난을 그리지 않은 연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배우려고 심히 노력하였으나, 지금은 또한 남김없이 할 마음을 잃어버려서 이리저리 떠돌면서 그리지 않는 것이 이미 이십여 년이나 되었다. 사람들이 혹시 와서 요구하지만 일체 하지 못하는 것으로 사절하여 고목 나무나 찬 재에서 다시 싹이나 불길이 나오지 않는 것 같이 하였다. 그런데 석파(이하응)가 친 것을 보니 하남에서 사냥하는 것을 보는 것 같은 생각[30]이 들어서, 비록 내 스스로 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옛날에 알던 것으로서 대강 이와같이 제(題)하여 석파에게 붙인다. 모름지기 뜻과 힘을 한가지로 쏟으면 다시 이 물러앉은 늙은이[31]로 하여금 억지로 하지 못할 것을 강요하지 않게 할 것이다. 내가 손수 치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32]
그러나 김정희는 이십여 년 동안 전혀 난을 그리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함부로 그리는 것을 경계했는데, 그런 그의 심정을 잘 나타낸 것이 <不作蘭花二十年>이란 화제가 붙어 있는 일명 <不二禪蘭>[33]이란 난그림이다.
이 난초 그림에 붙여 김정희는 ''난초를 그리지 않은지 20년만에 우연히 그려보았다. 문을 닫고 마음속의 자연을 거듭 찾아 생각해 보니, 이것이 바로 유마(維摩)의 불이선(不二禪)이다.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설명하라고 강요한다면 또한 비야리성(毘耶離城)에 있던 유마의 말없는 대답으로 응하겠다''[34]라고 적었다. 유마의 불이선은 『유마경』「불이법문품」에 있는 것으로써 모든 보살들이 앞을 다투어 선열(禪悅)에 들어가는 상황에 대해 말하고 있을 때 유독 유마만이 최후의 순간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자 모든 보살들은 말과 글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진정한 법이라고 감탄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난화를 설명한 것은 곧 종이 위에 그리는 것보다는 마음속으로 체득하는 것이 예술의 경지에 속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이에 덧붙여 김정희는 ''초서(草書), 예서의 기이한 글자(奇字)의 법으로 그린 것인데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이를 알겠으며, 어찌 이를 좋아하랴.''[35] 라고 스스로 이 그림을 그리게 된 연유를 설명하였던 것이다. 김정희는 이미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난을 그리고자 할 때 예서를 쓰는 방법과 같다고 했는데 이미 예서의 경지를 터득한 그는 그 서체의 발전형태인 초서의 서법을 원용하여 이 난을 그렸던 것이다. 그래서 이 난초그림을 보면 난초의 모양을 묘사했다기보다 글씨의 법을 그림에 응용하여 상징적으로 난초의 정신을 나타내려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을 암시하는 다른 난그림으로서 아들 상우(商佑)에게 준 글이 있는 <不欺心蘭>에서도 잘 나타나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난초를 그릴 때는 자기의 마음을 속이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잎 하나, 꽃술 하나라도 마음속에 부끄러움이 없게 된 뒤에 남에게 보여야 한다. 모든 사람의 눈이 주시하고 모든 사람의 손이 다 지적하고 있으니 이 또한 두렵지 않은가? 이것이 작은 재주이지만 반드시 생각을 진실하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비로소 손을 댈 수 있는 기본을 알게 될 것이다. 아들 상우에게 써 보인다.''[36]라고 적혀 있어 난그림이 고도의 인격수양을 위한 것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난은 언제나 그리기 어려운 것이기에 김정희는 <寫蘭最難蘭>에서 "난초를 그리는 것이 붓을 대기가 가장 어렵다. 옛 사람도 많이 그리지 아니 하였으니 조맹부, 문징명 같은 이도 그들이 산수나 화훼를 그린 것과 비교하자면 겨우 10분지 일에 불과하다"[37]
이렇듯 사란의 어려움에 대해 토로하고 있으나 김정희는 자신의 문기와 즉발심(卽發心)에 따라 그린 몇 점의 난그림을 남겼으니, <불이선란>을 보면 어떤 법식에도 얽매이지 않는 파격의 구도를 드러내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런 점은 동기창이 향조암을 지었다는 일화에 바탕하여 그린 <향조암란>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거니와 화면의 왼쪽 상단부로부터 뻗어 내린 난잎이 사선으로 화면을 가르며 공간을 장악한 파격적 구도에서도 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세를 엿보게 된다. 갈필의 고졸한 필묵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김정희의 글씨는 또한 그의 작품의 품격을 고양시키는 서화일치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Ⅳ. 金正喜의 산수화
1. <歲寒圖>에 나타난 金正喜의 文人精神
김정희의 대표적인 산수화인 <세한도>는 그의 나이 58세이던 1844년 제주도에 유배해 있을 당시 제자인 우선(藕船) 이상적(李尙適;1804-1865)의 스승에 대한 변함없는 공경심과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찾아온 인간적 의리를 높이 평가하여 고마움의 징표로 그려준 것으로써 수묵 저지본(楮紙本)의 횡권으로, 제발(題跋)까지 포함하면 그 길이가 708.3cm에 이르는 대작이다. 그 구조를 보면 오른쪽 위에 횡으로 ''세한도''라고 쓰고 종으로 우선시상(藕船是賞)이란 글을 적었으며 한 줄 바꿔 완당이란 호(號)로 서명하고, 그림의 왼편에 20행 295자의 이상적에게 주는 단정한 해서체의 자서(自序)를 기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자서에 세한도를 그리게 된 동기를 밝히고 있는 바 그 내용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그대가) 지난해에『晩學集』과『大雲山房集』두 책을 부쳐주고, 올해 또『黃朝經世文編』을 보내주니, 이는 모두 세상에 흔한 일이 아니다. 천 만리 먼 곳에서 사온 것이고, 여러 해에 걸쳐 얻은 것이니, 한꺼번에 가능했던 일도 아니었다. 지금 세상을 휩쓰는 풍조는 오로지 권세와 이득만을 쫓을 뿐이다. (이런 풍조 속에서도 서책을 구하는) 일에 마음을 기울여 힘들여 그것을 하고서도 이 뜻을 보살펴줄 사람에게 주지 않고 바다 멀리 초췌하게 시들어 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것을 마치 세상에서 잇속을 쫓듯이 하였구나. 太史公 司馬遷은 ''권세와 이득을 바라고 합친 자들은 그것이 다해지면 교제 또한 성글어진다''고 말하였다. 그대 또한 세상의 도도한 흐름 속에 사는 한 사람으로서 이익을 챙기는 세상의 바깥으로 초연하게 나왔구나. 이익을 챙기려는 마음으로 나를 대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태사공의 말이 잘못되었다는 말인가. 공자께서 ''한 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더디 시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소나무 잣나무는 본래 사계절 없이 잎이 지지 않는다. 추운 겨울이 오기 전에도 같은 소나무 잣나무요, 추위가 닥친 후에도 여전히 같은 소나무 잣나무이다.…"
스승으로부터 뜻밖의 칭찬과 그림을 받은 이상적은 감동하여 스승에게 답신을 보내었고, 그림을 받은 그해(1844) 겨울 마침 동지사 이정응 일행을 수행하여 연경에 가게 되었을 때, <세한도>를 들고 가 이듬해 정월 이것을 청의 명사 16명에게 보여주고 그들의 찬문과 찬시를 받아 돌아왔다. 청의 학자 명사들로부터 친필 소감을 받은 이상적은 그것을 <세한도>와 함께 표구하여 여전히 제주에 있던 김정희에게 다시 보내 그를 감격케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38]
2. <歲寒圖>에 있어서 金正喜의 禪思想
나무 네 그루와 집 한 채만이 덩그러니 그려진 <세한도>는 전통산수화처럼 근경과 원경을 설정하지도 않았고, 황량한 분위기 외에 겨울을 암시하는 묘사도 배제되어 있다. 이 그림의 중심 소재인 네 그루의 나무와 은사의 거처임을 알 수 있는 고적한 가옥, 넓은 배경은 원말사대가 특히 황공망이나 오진의 산수화를 연상케 한다. 집을 중심으로 왼쪽의 측백나무 두 그루와 오른쪽의 측백나무와 소나무 각각 한 그루씩만 그려 넣음으로써 김정희가 자서(自序)에서 밝힌 공자의 말을 그림으로 구현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네 그루의 나무는『論語』(述而24)에 나오는 군자가 갖추어야 할 네 가지 덕목 즉, 文(학문), 行(실천), 忠(성실), 信(신의)을 상징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또한 그는 주역에도 능통했으므로 주역의 문언전(文言傳)이 세계를 만물의 시초인 元, 만물의 성장을 의미하는 亨, 만물의 완수인 利, 그리고 그것의 완성을 의미하는 貞으로 분류했던 것처럼 주역의 세계관을 형상화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 그림이 이상적의 신의를 높이 평가하여 그에게 주기 위해 그려졌던 만큼 군자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절개와 신조를 표상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그 내면세계에 있어서 불교에 깊은 식견을 가지고 있던 김정희의 선사상이 배여 있음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김정희는 초의선사와 오랫동안 교유했을 뿐만 아니라 백파(白坡)와의 논쟁을 통해 불교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개진하기도 했었다. 어쨌든 현재까지 남아있는 자료로서는 그가 이 그림 속에 자신의 선사상을 표출하려고 했다는 증거가 희박하지만 그 가능성을 도외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한도>에 나타나는 ''간일한 구도, 갈필을 구사한 담백한 표현, 사의지상주의적 특징''[39]이 문자향 서권기에 바탕한 것이긴 하나 지나치게 문기와 사의만을 강조하여 앞 시대에 발전하였던 진경산수와 풍속화의 발전을 저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고도 할 수 있다. 게다가 그의 묵란과 세한도를 제외한다면 나머지 산수화들의 경우 그 수준이 세한도에 미치지 못함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Ⅴ. 조선 말기 書畵에 있어서 金正喜의 영향과 평가
1. 조선 말기 書畵에 미친 金正喜의 영향
김정희는 이른바 ''완당바람''이라 불려질 만큼 당대는 물론 후대의 서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그 대표적 작가로 조희룡, 허련, 전기, 권돈인을 비롯하여 묵란의 이하응 등을 들 수 있다. 이중 전기의 고담하고 한졸한 <溪山苞茂圖>는 김정희의 <세한도>부터 깊은 영향을 받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가 만 24세 때인 1849년에 독필을 휘둘러 장난하듯 그려낸 이 그림은 지극히 간일하고 거칠면서도 선미(禪味)가 감돌고 있는데 구도와 운필은 김정희의 해석을 거친 예찬 계통의 것으로서 왼편 위쪽에 전기 자신이 쓴 추사체의 관지가 있어 더욱 김정희로부터의 감화를 느끼게 한다.[40] 화가 중에서 김정희의 전적인 사랑을 받았던 제자는 역시 소치 허련이었다. 전남 진도 태생의 그는 어릴 때 이름이 유(維)였으나 후에 련으로 바꾸었으며, 27세되던 해 초의선사의 소개로 김정희의 문하에 입문 월성위궁(月城尉宮)에 머물면서 본격적인 서화수업을 받았고, 1840년 김정희가 낙향하자 김정희의 고향인 예산으로 따라가 그의 집에서 서화수업을 받았다고 한다. 그 후에도 계속 김정희와 사제관계를 유지하면서 헌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기도 했던 허련은 원말사대가인 예찬이나 황공망의 화풍을 토대로 자신의 독자적 화풍을 달성함으로써 김정희로부터 "압록강 이동(以東)에는 소치를 따를 자가 없다"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김정희를 필두로 허련은 조선 말기 서화계에 남종문인화풍을 고착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그가 지향했던 회화세계가 숭고한 사의의 표출에 뜻을 둔 남종화였음은 김정희가 원말의 대표적 문인화가였던 황공망을 염두에 두고 붙여준 ''소치''라는 호에서도 엿볼 수 있다.[41]
2. 金正喜의 畵論에 대한 評價
그러나 김정희는 제자 중 가장 나이가 많던 조희룡에 대해서는 늘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는데 그것은 묵란에 있어서 석파 이하응을 높이 평가했던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김정희의 비평관이 편협함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이하응의 난그림에 대해 ''자기보다 나으니 그에게 가서 알아 보라''는 등의 표현은 김정희가 신분을 떠나 문기를 닦은 사람을 높이 평가했다는 사실과는 달리 당시 신분사회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증거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앞 시대의 진경산수나 풍속화에 대한 폄훼에서도 나타나거니와 특히 역관 출신으로 묵란을 잘 그렸던 임희지(林熙之;1765- ?)에 대해서 평가하지 않았던 것에서도 그런 점을 확인 할 수 있다. 특히 김정희가 서권기만을 강조한 화론에는 어떤 하자도 보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런 사의법(寫意法이) 급기야 다시 매너리즘 현상을 일으켜 사생을 무시하고 사의만 추구하는 그림이 유행하게 되었을 때 박규수가 실사(實事)의 미학을 논한 글은 매우 단호한 것이었다.
"무릇 화도(畵道)는 예술 중의 하나이다. 실로 배움(學)과 큰 관련이 있는 것인데 오늘날 사람들이 그것(배움)을 소홀히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아마도 사의로 그린다는 화법이 일어나고 사물과 물상을 그리는 것이 폐기된 데 연유할 것이다. 요즘 사람들의 정교하고 세밀하게 그리는 공부가 옛날 사람을 따라가지 못하고 또 번거롭고 수고스러운 일을 참아내지 못하여, 물 한 줄기, 돌 하나를 거리거나 몰골법(沒骨法)으로 절지(折枝) 하나 그려놓고, 대충대충 선염(渲染)하고서는 스스로 간결하고 고고한 척하고 정세(精細)하게 하는 공부는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것이 고인일사(高人逸士)가 여기(餘技)로 한묵(翰墨)하는 것이라면 아닌게아니라 즐길 만한 일이고 또 귀중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사람마다 이와 같이 하여 화원에서 제일 간다는 화원 중에서 열심히 해야 할 사람, 능히 해낼 수 있는 사람까지 이 정도로 그리고 만다면 그림을 배운다는 것은 완연히 망해버리는 것이다.……이것을 미루어 논할진대, 산수, 인물, 누대(樓臺), 성시(城市), 초목, 충어(蟲魚) 이 모두가 진경실사하여 마침내는 실용에 귀속된 연후에야 비로소 화학(畵學)이라고 할 것이다. 무릇 배운다는 것은 실사이니, 천하에 실이 없고서야 어찌 학이라고 하겠는가."[42]
당대의 사의 일변도로 치닫던 서화계로 향한 박규수의 일갈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금석·고증학 등의 학문에 있어서 실증주의적 태도로 역사적 사실을 규명해내었던 김정희가 유독 서화이론에 있어서는 실사구시·이용후생의 실학정신과 모순되는 고식주의로 깊이 침윤해버렸음은 그를 실학자의 한 사람으로 평가하는데 있어서도 의문을 가지게 만든다. 즉 18세기 조선 미술계에 풍미하였던 사실주의를 낮게 평가하고 정신적 귀족주의를 지향함으로써 그는 시대적 모순을 극복하지 못한 유학자란 한계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Ⅵ. 結論
조선 후기 최고의 학자이자 예술가였던 추사 김정희는 문자향과 서권기에 바탕한 화론을 주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그런 이념에 바탕한 많은 글씨와 그림을 통해 이론과 실천 양 방면에 있어서 지고의 경지에 도달하였다. 이미 어릴 때부터 천부적인 총기와 재능으로 당시 노재상(老宰相)이었던 번암(樊巖) 체재공(蔡濟恭;1720-1799)으로부터 칭찬을 들었다고 전해질만큼 재능이 특출났던 추사 김정희는 조선사회가 변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가고 있을 때 새롭고 혁신적인 학문의 습득을 열망하여 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가 청조의 고증학을 습득하고 수많은 문인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학문적 깊이를 더할 수 있었다. 그 이후에도 옹방강은 물론 그 문하의 문인학자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경학·금석학·문자학·사학·지리학·음운학 등의 각 방면에 통달하였던 김정희는 드디어 추사체란 독자적이고 창의적인 서체를 창안하였고 ''해동제일통유(海東第一通儒)''란 칭호까지 듣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그에게 닥친 현실적인 고난이 김정희로 하여금 더욱 학문과 예술의 세계에 정진하도록 만들었으니 그를 조선의 동파(東坡) 소식에 비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당시 새로운 사조인 학예일치사상에 바탕하여 문인화풍의 화론을 정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림을 통해 실천하기도 했던 김정희는 조선 후기가 낳은 천재요, 그에게 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른바 ''완당바람''을 불러일으킨 거대한 예술가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지나친 사의지상주의로 말미암아 조선 말기 서화계에 남종문인화풍을 고착시킴으로써 서화의 다원화를 저지시키는 한계도 드러내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 특히 조선 말기의 급변하는 국제정세에서 조선에 실사구시의 실천적 학문과 예술이 절실하게 요청되었으나 그는 다른 모든 그림의 가치는 무시해버리고 묵란을 그리는 것이 제일 어렵다고 거듭 강조하거나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에게마저 편애를 보임으로써 오히려 창의성을 가로막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김정희의 업적과 한계에 대한 냉철한 재평가가 더없이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주] 1) 서경요,「추사 김정희」,『한국인물유학사』(한국인물유학사편찬위원회 편), 한길사, p.1720. 2) 최완수,「秋史書派考」,『澗松文華』, 澗松美術館開館10周年記念論集, 한국민족미술연구소, 1981, p.256. 3) 김응현「阮堂의 書法과 書品」, 앞의 책, p.25. 4) 안휘준,『한국회화사』, 일지사, p.288. 5) 조영양(趙令穰) : 송나라 사람으로 자는 대년(大年)으로 덕소(德昭)의 현손인데 벼슬은 숭신절도(崇信節度)·관찰유후(觀察留後)에 이르렀으며, 단오절에 자기가 그린 부를 진상함으로써 철종(哲宗)의 칭찬을 받았다. 본래 미재(美才)와 고행(苦行)이 있어 한묵(翰墨)에 유심하고 더욱 초서에 공했으며, 죽자 영국공(榮國公)에 추봉하였다. 6) 近以乾筆儉墨 强作元人荒寒簡率者 皆自欺而欺人也. 如王右丞 大小李將軍 趙令穰 趙承旨 皆以靑綠見長 盖品格之高下 不在跡而在意 知其意者 雖靑綠泥金亦可 書道同然. (阮堂全集 第六卷 題趙熙龍畵聯) 7) 최완수, 앞의 글, pp.240-241. 8) 왕숙명(王叔明;1322-1385) : 원말의 화가로서 절강의 오흥(吳興) 출신이며 이름은 몽(蒙), 숙명은 그의 자이다. 송설(松雪) 조맹부(趙孟採)의 외손인 그는 외가의 법을 얻어 산수화는 물론 인물화도 잘 그렸으며, 또 당송(唐宋)의 명가를 널리 섭렵(泛涉)함은 물론 동원(董源)과 왕회(王淮)를 스승으로 삼음으로써 종일(縱逸)하고 묵법이 수윤(秀潤)하여 원말 남화동거파(南畵董巨派) 사대가(黃公望·王蒙·倪瓚·吳鎭)의 한 사람으로 불린다. 전란이 일어나자 황학산(黃鶴山)에 은거하며 스스로 황학산초(黃鶴山樵)라고 칭하였으나 끝내 호유용(胡惟庸)의 모반에 연좌되어 옥사하였다. 그는 평생 비단을 쓰지 않고 종이에만 그려 그의 그림에는 특히 초묵준찰법(焦墨猚擦法)이 많다. 9) 황공망(黃公望;1269-1354) : 원말 사대가의 한 사람이며 소주(蘇州) 출신으로 이름은 견(堅), 자는 자구(子久), 호는 일봉(一峯), 대치도인(大癡道人)이다. 북송의 동원, 거연에게 배우고 미불(米揷), 고극공(高克恭)을 따라서 산수화를 그렸다. <富春山居圖>가 유일하게 현존하는 진작으로 알려지며, 전해지는 작품으로 <秋山無盡圖卷>, <秋山圖> 등이 있다. 10) 양보지(揚報之) : 명나라 사람인데 사매(寫梅)로서 고금에 유명함 11) 정소남(鄭所南;?-?) : 송말의 학자이자 화가로서 복주(福州)의 연강(連江) 출신이다. 일명은 사초(思肖)인데 태학상사(太學上舍)로서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응시하였으며, 강개하여 지조가 있었다. 송이 망하자 사초라고 이름을 고쳤으니 조실(趙室)을 잊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줌이요, 소남이라 한 것은 다시 다른 성(姓)에게 북면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노장학(老莊學)에 능하였으며, 오하(吳下)에 은거하여 조객(朝客)과 서로 내왕하지 않은 채 살다 절에서 사망했다. 특히 난초를 잘 그렸으나, 난만 그리고 땅은 그리지 않았다. 12) 김정희는 <석파란첩>의 뒤에 제하기를 "난초를 그리자면 역시 고인의 극적인 발자취(劇迹)를 많이 보아야 하는데 소남(所南;鄭思肖), 구파(埖坡;趙孟採)의 난같은 것은 대강(大江)의 남북에도 역시 드물어서 쉽게 구경할 수 없다. 겨우 소남의 한 본을 얻어 보았는데 원·명 이래의 여러 작품과는 크게 다르다. 오직 우리 선조(宣祖)께서 그린 묵란(御花墨蘭)이 소남의 필의가 있을 뿐이며 그 한 잎, 한 화판(花瓣)도 아무나 규방(規戃)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밝힘으로써 석파 이전의 우리나라 난그림 중에서 선조의 난을 높이 평가하였다. (阮堂全集 第六卷 題石坡蘭帖後) 13) 조이재(彛齋 趙孟堅) : 조맹부(趙孟採)의 형이다. 14) 문형산(文衡山) : 문징명(文徵明)을 일컬음. 강소(江蘇)의 장주(長州) 출신으로 명나라의 서예가이자 문인화가로서 어릴 때의 이름은 벽(璧)이었으나 징명으로 더 유명하며, 자는 징충(徵盓), 호는 형산(衡山)이다. 한림대조(翰林待詔)를 제수하였는데 뒤에 벼슬을 그만두었으며(致仕), 시서화에 뛰어났으나 특히 그림이 훌륭했다. 글씨는 이응정(李應禎)에게 배우고 그림은 심주(石田 沈周)에게 배웠다. 원말의 사대가를 계승, 문인화의 발전에 기여하여 조맹부(趙孟採), 예찬(倪瓚), 황공망의 장점을 두루 겸비했다고 평가받았다. 흔히 심주, 당인(唐仁), 구영(仇英)과 함께 명사대가로 불리고, 당인, 축윤명(祝允明), 서정경(徐楨卿)과 함께 오중(吳中) 사재사(四才士)라 일컬어졌으며 오파(吳派)의 영도자로 알려진다. 아들(文彭·文嘉·文臺) 및 종질(文伯仁)도 역시 시서화에 능했으며, 이름있는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다. 문헌으로 <人間佳境圖卷>이 있고, 시문집으로『浦田集』이 있다. 15) 계경(磎徑) : 좁은 길, 소로(小路), 또는 경계(經界) 16) 寫蘭最難. 山水梅竹花卉禽魚 自古多工之者 獨寫蘭無特聞. 如山水之宋元來 南北名蹟 不一二許 未聞 王叔明 黃公望 拄工蘭 竹之文湖州 梅之揚補之 亦無拄工蘭. 盖蘭自鄭所南始顯 趙彛齋爲最 此非人品高古特絶 未易下手. 文衡山以後江浙間 遂代行 然文衡山書畵甚多 其寫蘭 又不十之一二 其罕 作可知 所以不可以妄作 橫掃亂抹 如近日之無少忌憚 人皆可以爲之也. 鄭所南所畵 嘗及見之 今世所存 瀮一本而己 其葉其花 如近日所畵者大異 不可以妄擬戃摹 趙彛齋以後 尙可以求其神貌磎徑 至於戃撫 又猝不可能. 所而鄭趙兩人 人品高古特絶 畵品亦如之 非凡人可能追晾也. 17) 진원소(陳元素) 명대의 장주(長洲) 사람으로 자는 고백(古白), 제생(諸生). 시문과 서화를 모두 잘 하였다. 글씨는 구양순(歐陽詢)의 해법(諧法)과 이왕(二王)의 초법(草法)을 익혔고, 그림은 문징명(文徵明)을 배웠는데 특히 난을 잘 쳐서 청람(靑藍)의 칭(稱)이 있었다. 사시(私諡)를 정문선생(貞文先生)이라 한다. 18) 백정(白丁) : 명나라 운남(雲南)사람. 화승(畵僧)으로서 난초를 잘 그렸다. 난초를 치는데 남에게 보이지 않았으며, 치기를 끝마치고 조금 마르면 안개같이 물을 뿜어서 그 붓과 먹을 쓴 흔적을 지워버렸다고 한다. 석도(石濤)와 정섭(鄭燮)이 모두 그에게 배웠으나 그에게 미치지 못하였다고 한다. 19) 석도(石濤) : 청나라 청상(淸湘) 사람. 화승(畵僧)으로서 법명은 도제(道濟) 호는 청상진인(淸湘陳人), 청상유인(淸湘遺人), 대척자(大滌子), 고과화상(苦瓜和尙), 할존자(秺尊子) 등. 석도는 자이고, 명나라 황족의 후예로서 산수난죽(山水蘭竹)을 모두 잘 하였다. 법도에 구애되지 않고 필의종자(筆意從恣)하나 형외(形外)의 뜻과 의외(意外)의 묘(妙)가 있었고 담채(淡彩)와 갈필(渴筆)을 교묘히 운용하였다. 화어록(畵語錄)을 저술하였다. 20) 정섭(鄭燮:1691-1764) 청나라 양주(楊洲) 흥화(興化) 사람. 자는 극유(克柔), 호는 판교(板橋). 건륭(乾隆) 병진(丙辰 : 1736)년에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벼슬은 지현(知縣)에 그쳤다. 시(詩), 사(詞), 서(書), 화(畵)를 모두 잘 하여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다. 그림은 화훼(花卉), 난죽(蘭竹)을 잘 쳤다. 평생을 시, 서, 화, 주(酒)로 벗하여 거리낌 없이 살았다. <판교제화>(板橋題畵) 한 권을 남겼다. 21) 전재(錢載) : 청나라 사람으로 자는 곤일(坤一) 호는 택석(擇石), 포존(匏尊), 경사(京師)에 여거(旅居)하였으며, 남루노인(南樓老人)의 종증손(從曾孫)이었다. 건륭(乾隆) 년간에 진사(進士)가 되었으며, 학문의 폭이 넓고(淵博) 품행이 수결(修潔)하며 공시선화(工詩善畵)하였다. 그가 그린 난석(蘭石)은 신취(神趣)가 과실(過失)을 비껴나 있어(橫逸) 진속(塵俗)을 벗어났다. 22) 近代陳元素 僧白丁 石濤 以至如鄭板橋 錢擇石 是專工者 而人品亦皆古出群 畵品亦隨以上下 不可但以畵品論定也. 23) 錢侍郞畵蘭 近世宗之 入於神境 當與書家之石庵拄稱.)라고 하였다. (『阮堂全集』 卷六 題跋 篇 「題呂星田畵梅蘭菊竹幀」) 24) 형사(形似)란 중국 전통회화에서 대상(對象)의 모양과 비슷하게 표현하는 것을 일컬음. 사실(寫實)과 같은 뜻으로 사의(寫意)에 대립하는 말. 그림의 육법에 있어서 제3조인 응물상형(應物象形)이 이에 해당한다. 화가의 주관이나 전통성이 중시되는 문인화에서 형사는 일반적으로 경시되는데 김정희 역시 난을 침에 있어서 단순히 그 형태를 본떠 그리는 것을 크게 경계하였다. 25) 석파(石坡)는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1820-1898)의 호로서 그는 조선조에 있어서 난의 제일 명수로 알려지고 있다. 순조20년(1820)에 태어나 광무2년(1898)에 서거하였다. 자는 시백(時伯). 영조의 현손으로 20세에 흥선군으로 피봉되었으나, 순조, 철종비가 다 안동 김씨로 척족(戚族)의 횡포에 불우한 처지에서 부랑(浮浪) 생활로 빈민굴의 생활실태까지 잘 알고 있던 터에 철종이 후사없이 죽자 그 결정권을 가지고 있던 익종(翼宗)비인 조대비(趙大妃)와 밀계가 있어 둘째 아들 명복(命福)으로 하여금 세자로 삼고 자기는 대원군이 되어 섭정하며 정책결정권을 부여받았다. 난그림에 있어서 석파 이하응은 김정희의 직계로 알려진다. 김정희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석파(石坡) 이하응은 물론 난초 특히 춘란으로 유명하나, 그의 그림이라고 알려진 것 가운데 진적을 식별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당시 ''귀인(貴人)의 난초''라고 해서 그의 난그림을 요구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명대의 동기창이 그랬던 것처럼 석파 역시 소호(小湖) 김응원(金應元) 등에게 대필을 시켰으며, 대원군 생전에도 많은 위작이 나돌아 다녔다고 한다. (이동주,『우리 옛그림의 아름다움』, 시공사, 1996, pp.312-315.) 26) 且從畵品言之 不在形似 不在磎逕 又切忌以畵法入之. 又多作然後可能 不可以立地成佛 又不可以赤手捕龍 雖到得九千九百九十九分 其餘一分 最難圓就 九千九百九十九分 庶皆可能 此一分非人力可能 亦不出於人力之外. 今東人所作 不知此義皆妄作耳. 石坡深於蘭 盖其天機淸妙 有所近在耳. 所可進者 惟此一分之工也. 27) 寫蘭 當先左筆一式. 左筆爛熟 右筆隨順. 此損卦先難後易之義也. 君子於一擧手之間 不以苟然 以此左筆一畵 可以引而伸之於損上益下之大義 旁通消息 變化不窮 無往不然. 此所以君子下筆 動취 寓戒. 不何貴乎君子之筆. 此鳳眼象眼 通行之規 非此無以爲蘭 雖此小道 非規不成 況進而大於是者乎.(阮堂全集 第六卷 君子文情帖) 28) 蘭法 亦與隸近 必有文字香 書卷氣然後可得 且蘭法 最忌畵法. 若有畵法 一筆不作可也. 29) 如趙熙龍輩 學作吾蘭 而終末免畵法一路 此其胸中 無文字氣故也. 30) ''하남선생이……생각'' : 정명도(程明道)의 이름은 호(顥)요, 자는 백순(伯淳)인데 하남인이다. 일찍이 주염계 무숙(周 溪茂叔)을 뵌 자리에서 스스로 말하기를 "16-17세의 나이에 전렵(田獵)을 좋아하였는데 그 이후로는 그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자 염계는 "어찌 말을 쉽게 하는가. 그 마음이 잠은(潛隱)하여 바라지 않은 뿐일세"라고 했는데, 그 뒤에 저물게 돌아오면서 사냥꾼을 보고 저도 모르게 기쁜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무숙의 전언을 생각했다고 함 31) 노추(老錐) : 노고(老古)한 송곳도 능히 물건을 뚫는 용(用)이 된다는 것인데, 노고란 것은 존칭이고 사가(師家)의 설득하는 기봉(機鋒)이 초준(痒峻)함을 말한 것임. 『허당백엄록(虛堂柏嚴錄)』에 "널빤지같은 치아나 터럭 하나라도 능히 쓸모가 있으니 깊은 밤 화롯가에 앉아 물소리를 듣는다(版齒生毛老古錐 夜深聽水爐邊坐)"라 하였음. 32) 余推鹵甚 今又頹唐無餘 鸞飄鳳泊 不作己 二十餘年. 人或來要 一切謝不能 如枯木冷灰 無復生趣. 見石坡所作 有河南見獵之想 雖不能自作 以前日所知者 率題如是 寄付石坡. 須專意拄力 更不使此退院老錐 强所不强 有勝於吾之自作. 33) ''不作蘭二十年''으로 시작하는 제가 붙은 이 그림에 대해 ''불이선란''이란 이름을 붙여준 사람은 임창순 선생이며, 제문(題文)중 ''維摩不二禪''이란 문구에 착안하여 작명한 듯하다. 34) 不作蘭花二十年 偶然寫出性中天 閑門覓覓尋尋處 此是維摩不二禪. 若有人强要爲口實 又當以毘耶 無言謝之. 曼香 35) 以草隸奇字之法爲之 世人那得知 那得好知也 36) 寫蘭 亦當自不欺心始 一葉一點瓣 內省不域 可以示人. 十目所視 十手所指 其嚴乎. 雖此小藝 必自誠意正心中來 始得爲下手宗旨 書示佑兒. 37) 寫蘭最難下筆 古人亦無多作 如趙松雪文衡山 較其所作山水花卉 瀮十之一耳 38) 김정희는 제주에서 <세한도>와 함께 붙어온 중국 명사들의 찬문을 읽은 후 이것을 다시 이상적에게 주었는데 그의 후손들이 문중에서 보관해오다 1930년대 초에 경성제대의 후지쓰까(藤塚隣) 교수의 수중에 들어갔다고 한다. 후지쓰까는 1935년 김정희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으로서 김정희와 관련된 韓, 中 양국 주요 명사들의 전적을 상당수 수집했으며,1975년에는『淸朝文化東傳の硏究』란 저서를 출판하기도 했다. 후지쓰까가 소장하던 세한도를 1944년 서예가 손재형이 어렵게 구입하여 오세창, 이시영, 정인보 등 당대 명사 세 명의 감상문을 받아 중국인들의 글 뒤에 붙여 표구했다. 현재 이들의 글을 포함하여 그 길이가 7미터에 이르는 것이다. 39) 안휘준,『한국회화의 전통』, 문예출판사, p.298. 40) 안휘준,『한국회화사』, p.296. 41) 앞의 책, p.294. 42) 유홍준,『조선시대 화론 연구』, 학고재, 1998, pp.248-249에서 재인용.
참고문헌
추사 김정희전집 김정희,『阮堂先生全集』, 新星文化社 김정희,『완당선생전집』, 민족문화추진회 편역, 도서출판 솔, 1998. 김정희,『秋史集』, 최완수 옮김, 현암사, 1978.
단행본 및 논문집
김기승,『한국서예사』, 정음사, 1975. 김원룡·안휘준,『신판 한국미술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6. 안휘준,『한국회화사』, 일지사, 1980. 안휘준,『한국회화의 전통』, 문예출판사, 1988. 오세창,『국역 근역서화징』, 홍찬유 감수, 시공사, 1998. 유홍준,『조선시대 화론 연구』, 학고재, 1998. 유홍준·이태호,『조선 후기 그림과 글씨』, 학고재, 1992. 이동주,『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 시공사, 1996. 최순택,『추사 김정희의 서화』, 원광대학교 출판국, 1994. 김응현,「완당의 서법과 서품」,『간송문화』, 한국민족미술연구소, 1981. 최완수「秋史書派考」,『간송문화』, 한국민족미술연구소, 1981. 캐힐, 제임스, 『중국회화사』, 조선미 옮김, 열화당, 1995. 설리번, 마이클, 『중국미술사』, 한정희·최성은 옮김, 예경, 1999.
화집
간송미술관, 『秋史名品帖』, 지식산업사, 1976. 임창순 감수,『추사 김정희』, 중앙일보사, 1981. 정양모 감수,『화조 사군자』, 중앙일보사, 1981. 서울대학교 박물관, 『한국전통회화』, 서울대학교출판부, 1993. 허문 편,『小痴一家四代畵集』, 양우당,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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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귀한 자료를 잘 읽어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