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초, 영국의 유력지 ‘더 타임스’는 예술가 25인의 명단을 발표하면서 이들을 역사상 가장 고뇌에 찬 천재들이라고 추켜세웠다. 이 기사를 집필한 리처드 모리슨은 “아직도 천국에 오르지 못하고, 연옥에 머물고 있는 25인을 디너 파티에 초대한 기분”이라고 말했다. 같은 시기에 열린 미국 작곡가 찰스 아이브스Charles Edward Ives(1874~1954·미국이 낳은 최초의 급진적 모더니스트 작곡가)를 기념하는 페스티벌에 맞춰 발표된 이 목록에는 아이브스를 비롯해 25명의 예술가들이 포함됐다. 동양인으로는 유일하게 윤이상(1917~1995)이 꼽혔다. “1995년 11월 베를린에서 눈 감을 때까지 고난으로 가득찬 일생을 훌륭한 음악으로 승화시켰다”는 게 선정 이유였다.
사실 이 목록은 권위 있는 목록이라기보다는 영국인 특유의 문화적 감식안과 재치가 반영된 독특한 기사였다. 그 이유는 카프카와 고흐처럼 생전에는 혹독한 시련을 당했으나 이제는 명예의 전당에서 영면하고 있는 예술가들이 중세 때 미치광이 악사 에클레스Henry Eccles(1670~1742)나 정신병으로 모진 고생을 했던, 영화 <내 책상 위의 천사>(1990)의 실제 주인공인 호주 작가 자넷 프레임Janet Frame(1924~) 등과 아무 연관 없이 서로 섞여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 목록에는 1920년대 초에 파리를 무대로 독창적인 발레를 선보인 뵐린이나 고대 희랍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제논이 끼어 있는데 이들 때문에라도 이 목록은 이채로운 구성을 해보려는 ‘더 타임스’의 유쾌한 장난으로 보이는 것이다. 뵐린을 일컬어 “발레와 관계 있는 예술상이 있다면 모조리 그에게 수여해야 할 것”이라고 극찬한 것이나 제논의 논리체계가 “2300년 건너 뛰어 러셀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평가한 것은 재치 있는 주석이긴 하지만 주관적인 평가에 불과하다. 뵐린을 드높이기 위해서는 니진스키와 이사도라 덩컨을 언급해야만 하고 제논과 러셀을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수많은 철인들을 삭제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해도 ‘더 타임스’의 독특한 발상이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천재 예술가 25인’을 선정한다면서 예술가가 아닌 ‘그레고리오 성가’를 꼽은 것이 그 이유다. 이 곡은 교황 그레고리 1세가 좋아했던 성가로 지난 1400년 동안 수도원 수사들의 입을 통해 불려왔다. 그런데 왜 ‘마태수난곡’이나 ‘니벨룽겐의 반지’가 아니라 하필 ‘그레고리오 성가’인가. 아마도 그 까닭은 발매되자마자 수개월 동안 빌보드 차트를 석권했던 스페인 수도사들의 ‘그레고리오 성가’ 앨범 때문일 것이다. 이 앨범은 각박한 현대 사회에서 정신적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도시인들에게 잠시나마 평정의 상태를 만들어주었다는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이 앨범을 시작으로 중세풍의 음악이 갑자기 유행하기 시작했고 국내에도 이 앨범과 더불어 재즈 색소폰 연주자 얀 가바렉이 힐리어드 앙상블과 함께 만든 성가와 에스토니아의 아보 패르트가 작곡한 성가들이 히트를 하기도 했다.
이런 곡들이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정서적 황폐를 반증하는 것이다.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고 했던가. 나날이 살인적인 속도 경쟁에 내몰리는 도시인들이 잠시나마 중세풍의 고즈넉한 무반주 합창에 귀의하려고 하는 까닭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황폐한 정서 상태에 처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