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그녀는 먼바다를 바라보고 앉았다. 밤이나 낮이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산마루에 앉아 그님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수많은 날을 하루 같이 기다려도 그님은 돌아올 줄을 모른다. 신라시대 박제상(朴堤上)의 아내가 치술령에서 남편을 기다리다 그대로 굳어버린 망부석 설화는 절개 굳은 아낙의 표상으로 널리 회자되고 있지만, 망부송 설화는 생소하다.
미포와 구덕포 사이에 위치한 청사포는 부산의 대표적인 해안 경승지(景勝地)중에 하나이다. 갯바위로 점철된 해안을 따라 파도가 하얗게 부셔지고 와우산 송림사이로 스카이 캡슐이 관광객을 싣고 나르는 절경이다. 다릿돌 전망대가 설치되어 수려한 해안 경관을 즐길 수가 있고 일출과 낙조의 자연풍광을 만끽할 수 있다. 청사포의 지명은 골매기 할매 전설에서 유래된다.
그 옛날 금슬좋은 부부가 해안가에 살았다. 어느 날 고기잡이를 나간 남편이 파선으로 돌아올 수가 없는데도 김씨 부인 (골매기 할매)은 매일같이 바다를 바라보며 남편을 기다린다. 남편을 기다리는 부인의 절개(節槪)를 어여삐 여긴 용왕이 청사(靑蛇)를 보내 용궁에서 남편을 상봉시켰다는 전설에서 따온 지명이다. 오매불망 남편을 기리며 심어놓은 두 그루 소나무를 망부송(望夫松)이라 한다. 그 세월이 300년을 넘어선다. 지금도 망부송을 수호신으로 모시고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당산제(堂山祭)를 지낸다.
어느 날 갑자기 내 가슴에 회오리바람이 불어 닥쳤다. 설마 하는 미련이 키운 병마를 저주하면서 너무 깊이 와버린 아내의 중환(重患), 생사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혹독한 고통 속에서도 나에게는 애틋한 미소를 날리는 그녀의 모습이 애간장을 태운다. 아픔을 참아내는, 속이야 한량없이 탈지언정 남의 속을 태우고 싶지 않다는 배려심이다. 그럴 때마다 찢어지는 측은지심을 달래기가 힘이 든다. 긴긴 세월을 두고 철딱서니 없고 몽매한 나를 일편단심으로 지켜준 그녀의 일생을 어찌 보답해야 할지. 밀려드는 자괴감에 가슴으로 울어버린 날이 한두 번인가.
아픔 뒤에 오는 극한 외로움을 참아내기가 힘이 들어서일까. 망부송의 사랑이 그리워서일까, 아내는 유달리 청사포를 좋아한다. 망부송 앞에 다가서면 두 손 모아 기도를 한다. 300년을 해로(偕老)하고 있는 망부송처럼 나와 함께 오래오래 살게 해 달라는 주문이 아니다. 70고개를 넘겼으니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으니 조용히 눈을 감게 해 달라고 비손한다. 병중의 아픔을 참아내기가 얼마나 힘들기에 이 세상을 떠나가고 싶어 할까. 하루빨리 악귀(惡鬼)의 수령에서, 벗어나고픈 간절한 소망이 아닐까 싶다. 난 어떡하라고.
언젠가 그녀가 내게 한 말, “나 죽거들랑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던지, 아니면 팔푼이 여자를 만나 삶을 살아가라.”는 그 말이 생각난다.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인데 세상에 어떤 바보가 날 받아주겠는가. 턱도 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질타를 했지만 그래도 나를 걱정해 주는 마음 씀에 가슴이 미어진다. 병중에 하는 말은 그 공명이 배가 되어 심금을 울린다.
300년이 넘도록 하루같이, 남편을 기다리는 망부송의 순정을 알 것만 같다. 둘이서 걸으면 가파른 인생길도 거뜬하게 오를 수 있지만 혼자가 되면 기가 죽고 맥이 풀린다. 한번 왔다가는 인생길, 어차피 홀로 걷는 나그넷길이라고 하지만 한 평생을 바친 그대를 머나먼 길로 떠나보내는 마음을 그 누가 헤아려 줄까. 마음의 준비를, 한다지만 홀로 되는 그날이 두렵고 서글퍼진다.
운명은 시간이 해결한다. 시공이 흐를수록 아픔은 크겠지만 시공이 멈추는, 그날에 내가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날 걱정 말고 편안히 잘 가시게.” 그 말 한마디 눈물로 적셔주면 그녀의 영혼이 훨훨 날아 하는 높이 승천할까. 당신과 함께한 오십 년 세월, 길목마다 사무치는 그리움이 너무 많아 그렇게 쉽게 보낼 수는 없을 것, 같다. 오륙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장자산 산마루에 님을 향한 망부송을 심으련다. 비록 육체는 썩어 없을지언정 영혼만은 망부송의 넋이 되어 영원토록 그대와 함께하리라.
청사포에 가면 빨간 등대와 하얀 등대가 서로 마주 보며 바다를 지키고 있다. 망부송 두 그루가 수평선을 바라보며 300년 사랑을 이어오고 있다. 당산(堂山)에는 산신(山神)이 내려와 부부간의 사랑을 일깨워 주고 아픔을 달래어 주기도 하겠지만 이별의 슬픔을 참지 못해 눈물짓는 홀아비의 환영(幻影)이 투영되기도 한다. 그대 떠난 후에 나의 모습이.
오늘도 나의 야윈 가슴에 영혼의 망부송을 심는다. 운명이 다 하는 그날에 쏟아지는 눈물을 숨기려고, 소리 없이 실컷 우고 나면 못다 한 사랑도, 사무치는 그리움도 가슴속으로 숨어들겠지. 울다가 웃다가 숨이 차오르면 그대 따라가리다. 망 · 부 · 송 넋이 되어…….
첫댓글 곽작가님의 아내를 생각하는 그 마음 눈물겹습니다.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글을 쓰 주셔셔 감사합니다. 이제 여름도 막바지에 접어드나 봅니다. 다람쥐 꼬리 만큼 남은 이 여름을 무탈하게 보네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