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로 흡수한 경술병합늑약(庚戌倂合勒約)이 체결되자 애국지사들은 만주 땅과 간도, 시베리아 지역에 민족해방운동(民族解放運動)의 국외 기지화(基地化) 사업을 펼치기로 하고 민간인들의 집단이주(集團移住) 계획을 활발히 추진하였다. 이러한 사업의 일환으로 민족정신이 투철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국 민간인들을 집단이주시킨 곳에 군사교육기관을 세워 독립군을 양성한다는 목표를 세워두었다.그 중에서 가장 먼저 북간도(北間島) 용정촌(龍井村)이 민족해방운동의 적임지로 지목되었다. 신민회(新民會)의 구성원이었던 이상룡(李相龍)·이동녕(李東寧)·이회영(李會榮)·여준(呂準)·김동삼(金東三) 등은 1906년 4월부터 북간도의 중심지 연변의 용정촌을 독립운동 전개의 예정지로 삼고 경영에 착수하였다. 이상설(李相卨)·정순만(鄭淳萬)·박정서(朴禎瑞) 등은 시베리아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 그 해 8월경에 용정촌에 자리잡고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세워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서전서숙은 재정난과 일제의 간섭으로 1년여만에 폐교되었으며, 이 교육원의 설립에 참여했던 박정서(朴禎瑞)는 김약연(金躍淵)을 도와 명동촌(明東村)에서 명동서숙(明東書塾)을 세워 서전서숙의 교육방식을 계승하였다.다음으로 독립운동의 적절한 근거지로 주목받은 곳이 북만주(北滿州)의 밀산(密山)일대였다. 한민회(韓民會)의 지도자인 김학만(金學萬)과 성리학자인 이승희(李承熙)는 1909년 여름에 밀산 지역의 황무지를 매입하여 개간사업을 벌이고 한국인 1백여가구를 정착시켜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하였다. 여기에는 미국의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에서 정재관(鄭在寬)의 명의로 자금을 지원하여 개간사업에 도움을 준 면이 적지 않았다. 또한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원동임야주식회사(遠東林野株式會社)란 공동 출자의 기업이 설립되어 밀산부의 한흥동 경영을 후원하기 위한 노력이 전개되고 있었다.그러나 무엇보다 반일독립운동사(反日獨立運動史)에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유하현(柳河縣) 삼원보(柳河縣) 고산자(孤山子)에서 구성된 경학사(耕學社)란 조직의 교육계몽운동(敎育啓蒙運動)과 식산흥업운동(殖産興業運動)이었다. 경학사는 1911년 5월경에 삼원보의 추가가(鄒家街)에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했는데, 이는 대규모 군사교육기관인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발전하였다. 이것은 만주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들이 군사훈련과 교육에 참가한 효시(嚆矢)로서 중대한 의미가 있다.신흥무관학교 설립에는 이회영(李會榮)과 그의 둘째 형인 이석영(李石榮)의 역할이 매우 컸다. 이회영은 이조판서(吏曹判書) 이유승(李裕承)의 넷째 아들로 신민회(新民會)의 핵심 멤버였으며 그의 집안은 조선 말기 최고급 갑부로 불릴 만큼 상당한 재력가였다. 1910년 겨울에 가산을 모두 정리하고 당시 금액으로 40만원의 거금을 마련해 형제와 일가족을 거느리고 만주로 망명한 이회영은 중국 최고의 실권자 원세개(袁世凱)를 만나 만주 지역에서의 한국인들에 대한 토지나 가옥 매매를 허가해달라는 요청을 하여 동삼성(東三省) 총독 조이손(趙爾巽)으로부터 서간도 일대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의 생활과 각종 사업에 협력하고 편의를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기까지 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이동녕과 김창환(金昌煥)·이세영(李世永) 등 애국지사들이 운영과 교육을 담당하였고, 국내와 만주 각지에서 몰려든 애국 청장년들을 학생으로 받아들여 일절 교육비를 받지 않은 채 장비나 교재, 학생들의 숙식 등을 전부 무료로 제공하였다. 이것은 이회영의 형제들 가운데 숙부인 영의정(領議政) 이유원(李裕元)의 재산을 물려받아 가장 재력이 풍부했던 이석영이 소유전답 6천석의 토지를 매각한 돈으로 신흥무관학교의 교육과정에 투자를 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1919년에 고산자가(孤山子街)로 이전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는 1920년 가을에 폐교될 때까지 2천 1백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항일투사들은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의열단(義烈團)·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 주만 참의부(大韓民國臨時政府陸軍駐滿參議府)·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등 각종 독립운동 조직에서 활동하면서 일제(日帝)의 한국 식민지 지배와 만주 침략에 항거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한국 민족해방운동의 요람이었던 셈이다. 한편, 서일(徐一)·계화(桂和)·채오(蔡五) 등이 이끄는 대종교도(大倧敎徒) 조직인 중광단(重光團)은 1919년 그 명칭을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으로 바꾸고 대대적으로 단원을 모집하여 단세(團勢)를 넓히는 한편 신문을 발간하여 현지 교민들의 독립정신 고취에 나섰다. 단장인 서일은 대한정의단을 무장조직으로 발전시켜 본격적인 항일전(抗日戰)에 나서기로 결정하고 계화를 김좌진(金佐鎭)에게 보내 정의단 합류를 정식으로 제의하도록 하였다.
당시 김좌진은 만주에 있는 독립운동 단체들의 활동 상황을 수시로 점검하며 앞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할 계획을 구상하면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을 때였다. 그는 항상 만주의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과 협동하고 또한 상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와 제휴할 것을 구상중이었으나 임시정부와 유사한 기관들이 각지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독립운동 노선이 산만해지고 독립운동 진영 내부의 주도권 다툼이 표면화되는 양상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을 매우 우려해왔다. “나는 공(功)을 가장 우선시하여 서로 다투는 꼴은 보기 싫고 또한 한민족이면 어느 누구나 나라를 찾는 것이 우선 목표인데 그것이 흐려져 가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김좌진이 말문을 열자 계화는 이에 응수한다.“만주의 사정은 그러하지만 국내에서 저렇듯 전 국민이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고 나선 이 마당에 그대와 같은 인재가 농토에 파묻혀 개간사업만 하고 있다면 되겠소이까? 지금은 생각할 때가 아니고 행동으로 옮겨야 할 때입니다.”계화는 대한정의단의 양병(養兵) 계획을 정리한 문서를 김좌진에게 보여주며 말을 이었다. “지금 조국과 민족은 백야(白冶) 같은 인재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재만(在滿) 동지들의 단결이 백야의 노력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사람이 없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백야와 같은 빼어난 인격자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달리 군사부를 담당할 분을 모시기가 어렵습니다.”“원 별말씀을... 나 같은 것이 무슨 능력이 있다고 그처럼 과분한 말씀을 하시오? 나는 처음에 대한제국의 재기와 조선 황실의 부활이라는 일념으로 투쟁했었소. 그러나 지금은 세상 형편이 많이 달라졌어요. 국민들의 생각도 반드시 왕조의 부흥이 독립의 길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하지만 우리 한민족이 여러 개의 정부로 나누어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나는 아직 의아스럽게 생각하고 있소.”김좌진은 답답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눈썹을 찌푸렸다.
“물론 여러 망명정부처럼 어느 단체가 가장 힘이 있고 또한 조직력이 잘 편성되었으며 유능한 인물들이 많이 모여 있는지는 과문(寡聞)한 저로서는 잘 알 수가 없지만 내 나름의 판단은 있습니다. 해외와 국내의 모든 동포가 한데 뭉치고 일본에 대적하여 이기기에도 어려운 형편인데 더구나 사분오열(四分五裂)되어 있다는 것은 한심하기 짝이 없어요. 지금은 공을 다툴 때가 아니고 서로가 양보하면서 단결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오. 그러므로 적어도 내가 일하는 단체에서는 이러한 근본적인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소. 욕심 같아서는 상해의 임시정부에 무조건 합류하여 그 쪽의 지시를 받아 행동하고 싶지만 이것은 나 개인의 욕심인 것 같아서 지금 당장 발설을 삼가하겠으나 정의단에서 독자적인 새로운 임시정부를 세우지 않아야겠다는 보장이 되지 않는다면 나 개인으로서는 정의단에 합류하는 것은 보류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무력(武力)으로 일본인들을 조국 땅에서 몰아내기 위한 것으로 알고 있소. 백연(白淵ː계화의 호) 동지도 아시다시피 유감스럽게도 우리에게는 왜놈들과 싸울 병사와 무기가 부족하오. 우수한 무기와 많은 병력이 없이는 결코 나라를 되찾은 일은 요원해질 것이오. 기왕에 중책을 맡겨주신다니 무엇보다도 책임감이 앞서고 책임을 완수하려면 여건이 갖추어져야 하겠다는 생각이오. 잘은 모르지만 정의단이라 할지라도 병사와 무기가 풍부하지는 않을 것이오. 앞으로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 알고 싶소.”김좌진은 만주 땅을 밟을 때부터 남다른 야망과 조국 광복의 꿈을 실현하려는 의지가 컸다. 소규모 부대를 파견해 국경 초소를 습격하고 경찰서를 파괴하는 식의 항일투쟁이 아니고 한반도를 점령하고 있는 일본 군대와 전면전(全面戰)을 벌여 조국과 민족을 해방시키고 싶었다. 그는 공식적으로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여 대규모의 전쟁을 통해 일본인들을 바다 건너 섬으로 몰아내는 것이 당연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계화는 김좌진의 두가지 조건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백야의 생각에는 저 역시 개인적으로는 동감입니다. 말씀은 충분히 알아듣겠습니다만 저는 단지 심부름 온 사람에 지나지 않으니 이러한 점을 감안하시고 양해해 주시기 바라며 곧 돌아가는 대로 단장님께 품의(稟議)하여 백야의 뜻을 받들도록 힘쓰겠습니다. 곧 다시 뵙게 될 날을 기대합니다.”이와 같이 김좌진과 작별한 계화는 그와 접촉한 내용을 즉시 서일 단장에게 보고하고 대한정의단의 세력 확장에 대한 세부 계획과 군자금 조달에서 무기를 구입하는 일 등에 대한 전망을 검토했다. 정의단의 상당수 인사들은 계화의 보고를 듣고 김좌진을 군사부위원장에 등용하는 문제에 대하여 반발하고 나섰다. 단장인 서일 자신도 최단 시일내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충분한 검토를 끝마친 직후였으므로 김좌진의 요구에 대하여 난색을 표명했다.상해의 임시정부는 국내 애국지사들과의 긴밀한 연락 체계가 거리 관계로 부적당했다. 그리고 국경을 접하고 있는 만주의 항일투사들보다 매사에 적극성이 부족했다. 더욱이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들이 희생을 무릅쓰고 항일투쟁을 벌이면서 온갖 고초를 당하고 있는 동안에도 상해의 임시정부는 별다른 위협을 느끼지 않고 마치 다른 집 화재 구경하듯 방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이유에서 항일투사들의 불평과 불만이 심한 상태였다. 그러한 상해의 임시정부에 예속된다면 공연히 지휘계통에 혼잡만 있을 뿐 작전 수행에 오히려 방해만 있을 뿐이라고 이들은 믿고 있었다.무기 구입에 대해서도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어느 독립운동 단체에도 마찬가지로 무기와 장비는 절대량이 부족했고 군자금 마련도 역시 어려운 일이었다. 더욱이 군자금 모금 방법인 역시 재만 교포들을 움켜쥐고 조달하는 방법이 가장 확실한 것이었다. 또한 이 방법으로는 빠른 시일에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통치권을 확립함으로써 교포들에게 세금을 부과하여 군자금을 확보하고 독립군의 정규군화와 전투체제 확립에 도움을 주는 길이었다. 이와 같은 체계가 확립되려면 만주에 별도의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통치권을 확보하는 것이 우선적인 일인데도 김좌진은 쉬운 일을 제쳐놓고 먼 길을 택해서 상해 임시정부에 예속하자는 의견을 내놓았으니 정의단 임원진은 불평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김좌진에게도 뚜렷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보면 이들의 눈에는 김좌진이 원리원칙을 앞세워 정의단의 앞날을 방해하는 자로 비춰진 것이다. 이리하여 김좌진의 정의단 합류가 와해되는 듯한 분위기였으니 주변은 어수선하고 공기가 탁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