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제하[諸夏] - 옮긴이 아사달. 아래 ‘옮긴이’)의 역사(갈마 – 옮긴이)를 이끌어 온 대표적인 사상은 역시 유교와 도교다. 그리고 이 두 사상의 시조는 다 알다시피 공자와 노자다. 그러나 이 두 거인이 실제로 만나서 세상사에 관해서 의견을 교환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 사실은 의견을 교환했다기보다는 노자가 예(禮)를 물으러 온 공자에게 한 수 가르쳐 주었다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이 두 사람이 살던 춘추 말기는 고금에 다시 없던 격동기였다(사실은, 전국시대도 이에 못지않은 격동기였고 어찌 보면 춘추 말기보다도 더 변화가 심했다 – 옮긴이). 사회를 떠받치던 씨족제도가 흔들리자 사람들은 의지할 곳이 없어졌을 뿐 아니라 격심한 가치관의 혼란에 시달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하늘이 내린 지배자’로 알았던 주(周)나라의 왕은 허수아비로 전락했고, (주나라의 – 옮긴이) 각 제후국에서도 하극상이 만연해 세력 있는 집안들이 기존의 신분질서를 무시하고 권세를 잡았다. 이 와중에 평민들 중에서도(가운데서도 – 옮긴이) 재능 있는 자들은 고위직에 올랐다. 이 같은 사태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 혼돈의 세상을 바로잡고자 제각각 자기주장을 편 사람들이 제자백가였다. 노자나 공자도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공자는 이 같은 세태를 누구보다도 안타깝게 생각해서 새로운 이념을 창출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는 귀족들을 찾아다니며 옛 서적들을 뒤지기도 하고, 각지를 여행하면서 여러 사람의 생각을 열심히 듣고 다녔다. 그 결과 마침내 당시 사람들에게는 매우 낯선 용어인 ‘인(仁 : 어짊/사랑 – 옮긴이)’이라는 개념을 만들고, 이를 주나라 때 성립된 예와 결부시켜 새로운 정치이념을 창출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는 주왕조를 중심으로 한 봉건제도를 부활시키고(되살리고 – 옮긴이), 사회적으로는 씨족제도를 소생시키려(거의 죽어 가는 것을 다시 살려내려 - 옮긴이)고 하는 노선이었다.
천성이 성실해 배우기를 좋아했던 공자는 자신의 생각에 대해 마침내 노자의 의견을 구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노자는 몰락해 가는 주(周) 왕실 서고를 지키는 기록관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 남아있는 주대의 귀중한 책들을 밤낮으로 접할 수 있었다. 주대의 제도를 부활시키고자 했던 공자는 아마도 이에 대해 노자가 알고 있을 정보에 더 관심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공자는 노자에게 정중한 태도로 예에 관해서 가르침을 청했다. 그러자 노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대가 옛 성현이라고 우러러보던 이들은 이미 육체와 뼈마저 썩어 버리고 남은 것이라고는 그들이 남긴 헛소리뿐이외다. 게다가 군자라는 작자도 때를 잘 만나면 마차를 타고 건들거리는 몸이 되지만, 때를 만나지 못하면 바람에 어지러이 흩날리는 풀잎같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될 뿐이오. 내가 들으니, ‘훌륭한 장사꾼은 물건을 깊숙이 감추어 언뜻 봐선 점포가 빈 것 같고, 군자는 많은 덕을 지니고 있으나 외모는 마치 바보처럼 보인다.’고 했소. 그대도 제발 그 교만과 욕심 그리고 잘난 체하는 병과 잡념을 내버리는 게 좋을 것이오. 이런 것들은 그대에게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이오. 내가 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것뿐이외다.”
아마도 노자의 눈에는 새 세상을 건설할 꿈에 잔뜩 부풀어 있는 공자라는 젊은이가 영 못마땅했던 것 같다. 노자가 보기에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인간 생활에 어떠한 인위적인 굴레를 씌워서는 안 되었다. 제도는 물론이고(말할 것도 없고 – 옮긴이) 도덕/윤리/사상 등도 그것이 탄생하는 순간 인간의 삶은 자연무위(自然無爲)의 상태를 벗어나 타락의 길로 접어든다고 노자는 생각했다. 인간은 옆 마을과 교류할 필요도 없고, 아랫마을에 누가 사는지 알 필요도 없이 그저 자기가 처한 상태에서 자연 그대로 살면 그만인 것이다. 정치와 군주는 인민이 이런 상태로 지내도록 도와 주는 선에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노자가 볼 때, 공자가 시대를 구할 해결책이라고 제시한 ‘예’라든가 ‘군자’라든가 하는 것도 아예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이었다. 유가가 말하는 인과 예, 법가가 말하는 법(法)들은 모두 인간성의 자유로운 표현을 억압한다는 면에서 노자가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노자는 예를 묻는 공자에게 그 자리에서 면박을 주었던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유가는 도가사상을 싫어했고, ‘이단’이라고 부르며 탄압/부정/비난했다. 근세조선의 성리학자들 – 그리고 성리학을 따랐던 근세조선의 조정 – 이 사람들이 도가 서적을 읽지 못하게 막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 옮긴이)
어쨌든 이 역사적인 만남에서 공자는 보기 좋게 당했지만, 그러나 역시 큰 인물이었다. 그는 돌아와서 제자들에게 노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새가 잘 날고, 물고기가 헤엄을 잘 치며, 짐승이 잘 달린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달리는 놈이라면 그물을 쳐서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놈이라면 낚싯줄로 낚을 수 있으며, 나는 놈은 주살(화살 – 옮긴이)로 쏘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용(미르 – 옮긴이)이라면 구름과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나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다. 내가 오늘 만나 본 노자는 마치 용과 같은 인물이다.”
노자는 주나라(동주[東周] - 옮긴이)가 더 이상 가망이 없음을 알고, 드디어 주(周)를 떠나 은둔의 길에 나섰다. 이는 공자가 노나라에 가망이 없음을 깨닫고는 곧 자신을 알아줄 권력자를 찾아 천하를 주유(周遊. 두루 돌아다님 – 옮긴이)했던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노자가 함곡관에 이르렀을 때, 관지기인 ‘윤희’라는 자가 그를 알아보고 “선생께서는 지금 은둔하려 하시니, 무리가 되시겠지만 저를 위하여 저서를 남겨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청했다. 평소 언어를 통해서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고 주장하던 노자는 그의 청을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5000자 정도로 간략하게 상/하 두 편의 책을 남기고는 떠나 버렸다. 이것이 그 유명한『 도덕경 』이다.
그 후(그 뒤 – 옮긴이) 노자의 최후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다만 설만이 무성했다. 혹자(어떤 이/어떤 사람 – 옮긴이)는 그가 160여 세까지 살았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200세까지 살았다고도 했다. 아마도 그는 무위의 도를 터득했기 때문에 꽤나 장수했던 것 같다(그러나 나는 노자가 160세 ~ 200세까지 살았다는 설은 믿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 옮긴이).
한편 노자에게 일침을 당했던 공자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노자의 생각과는 동떨어진 유교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 두 현인의 생각은 이처럼 판이했지만, 그 가르침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동양인(동아시아인 – 옮긴이)들의 심성 속에 나란히 자리 잡게 된다.
― 『 상식 밖의 동양사 』 (‘박윤명’ 지음, ‘도서출판 새길’ 펴냄, 1994년)에서
― 음력 8월 14일에, 아사달이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