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문둥이올시다 어머니가 문둥이올시다 나는 문둥이 새끼올시다 그러나 정말은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 사이에 꽃과 나비가 해와 별을 속인 사랑이 목숨이 된 것이올시다.
세상은 이 목숨이 서러워서 사람인 나를 문둥이라 부릅니다.
호적도 없이 되씹고 되씹어도 알 수는 없어 성한 사람이 되려고 애써도 될 수는 없어 어처구니없는 사람이올시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나는 정말로 문둥이가 아닌 성한 사람이올시다.
한하운 시인의 이 시는 나병환자라는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인 처우의 시대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시다. 편견이 가져다주는 잔학하고 몰인정한 사회의 현상은 언제나 인권유린으로 나타났다. 환자 당사자의 내적 고통과 아픔은 아랑곳하지 않고 보이는 대로 그의 아픔과 약점을 불러버렸다. 나병을 “문둥이”라고 하는 것은, 그 환부가 썩거나 문드러진 것을 표현한 것이다. 다리 저는 사람을 절름발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러한 비인격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사회가 선진화되고 문명화되면서 이런 행동들이 얼마나 무식하고 저열한 표현인가 깨달으면서 장애와 고통에 대한 올바른 표현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의술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는 나병에 대한 유일한 조치가 격리였다. 특히 구약 시대나 예수님 당시에도 나병환자로 판명되면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사랑하는 가족들로부터 떠나야 하는 큰 슬픔이 있었다. 신정 시대처럼 제사장이 의료를 맡았던 시대에는 나병을 진단하는 일을 제사장들이 맡아서 했다. 그런 배경에서 예수님도 나병을 치료해준 환자에게 “빨리 가서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말씀하셨다. 레위기 13장의 기록은 그런 배경에서 기록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오늘날 목사나 사제들이 의료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지지하지 않는다.
종종 나병은 죄의 상징으로 묘사된다. 나병이 가지는 전염성과 당대의 불치라는 선고는 마치 죄의 성질을 잘 나타낸다고 생각했다. 구약성경에서 이 병에 대한 기록은 34회 등장한다. 그리고 네 사람이 나병에 걸린 자로서 이름이 거론되는데 모세를 포함하지 않아도(출 4:6, 참조: 왕하 7:3), 미리암(민 12:10), 웃시야(왕하 15:5), 게하시(왕하 5:27) 그리고 아람 사람 나아만(왕하 5:1)이 있다.
하나님은 투기(참조: 미리암), 분노,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완전한 순종의 결여에서 오는 교만(참조: 웃시야) 그리고 탐욕(참조: 게하시) 등과 같은 죄악에 대한 형벌로서 이 나병을 허락함으로 그들에게 그것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싫어하시는 죄인 줄 알게 하셨다. 그러나 모든 나병이 그 개인의 죄의 결과라고 결론을 내려서는 절대 안 된다. 결국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그 나병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고치셨다. 그것이 복음이다. 구약의 모세 오경이 율법서라면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복음서는 그 율법을 이야기로 풀어쓴 하나님 나라의 원칙인 셈이다.
하나님 아버지! 죄로 병든 우리를 구원하시려 이 세상에 오시고 세상 나라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방법으로 우리를 고쳐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교만과 탐욕 그리고 불순종의 죄를 주님의 보혈로 씻어 주시고 주의 의로운 사자들이 되어 살아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