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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역과 그 부근 땅이름
-옛 토박이 땅이름을 중심으로-
전) 연세대학교 사회교육원 교수 배우리
지하철 역이름을 한자로 바꾸는 바람에 '벌말역'이 '평촌역'으로 바뀌어 버렸다. 약 스무남은 해 전의 일이다. 98.1.7 학회에서 공문을 띄워 역이름(평촌역)을 원래 붙였던 '벌말역'으로 되돌려 달라고 안양시청(시장)에 공문으로 요청했으나, 역이름은 한자식 이름이 대세이고 새 주민들이 '평촌'으로 많이 부른다면서 요구를 들어 줄 수 없다고 했디. 지하철 역이름은 땅이름을 굳혀 놓으니 정말 잘 정해야 한다. 수도권 지하철에서는 우리 토박이 땅이름으로 붙여 놓은 역이름들이 많다. 이들 이름은 우리 토박이 따이름을 잘 살려 주고 있다. 애오개역 선바위역 독바위역 버티고개역 연신내역 학여울역 당고개역 새절역 마들역 ... |
1호선에서
·부천(富川) : 부평과 인천에서 한 글자씩 따서 지은 이름
·중동(中洞) : 간뎃말(가운뎃말)
·역곡(驛谷) : 역말. 옛날의 역은 여러 마리의 말을 마련해 두고 공문을 전달할 목적으로 다니는 사람에게 말을 제공해 주거나 바꾸어 주던 일을 했던 곳이다. 지금도 전국에는 '역말', '역촌', '역곡' 등 '역(驛)'자가 들어간 땅이름이 무척 많다. 그러한 곳은 대개 옛날에 역이 있던 곳이었다. 서울의 '역촌동'이나 경기도 부천의 '역곡동' 같은 이름도 옛날에 역이 있어서 나온 이름이다. 교통에 큰 구실을 했던 옛날의 역은 이미 오래 전에 없어졌어도 '역'자가 들어간 땅이름은 지금까지도 남아 그 곳이 옛날에 역이 있었던 곳임을 말해 주고 있다. 차가 없었던 옛날에는 말은 중요하게 이용되었던 교통 수단이었다. 옛날 관리들은 나라의 일로 먼 길을 갈 때 말을 주로 이용하게 마련이었는데, 말이 먼 길에 지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길 중간중간에 말을 바꾸어 주는 역을 마련했다. 역에는 역마(驛馬)가 상비되어 있었고, 역졸들이 있어서 말을 교환해 주고 먹여서 보호해 주는 일을 했다.
·노량진(露梁津) : '노량진'이란 이름은 당시 한낱 나루에 불과했던 '노들나루'를 한자로 따서 붙인 이름이다.
'노들나루'의 '노들'은 넓은 들'의 뜻인 '너들(널들)'에서 나왔다고 보는 이도 있고, '물 가장자리'란 뜻의 '노돌'이 변한 이름이라고 보는 이도 있다.
노+돌→노(鷺)+돌(량.梁)→노량(鷺梁)
·종로(鐘路) : 종루가(鐘樓街)
·석계(石溪) : 석관동+월계동
·창동(倉洞) : 창골. 창고가 있었던 마을
·방학동(方鶴洞) : 방하골(방앗골)
2호선에서
·방배(方背) : 우면산(牛眠山)을 등지고 있는 동네라는 뜻에서 나온 이름
·서초(瑞草) : 서리풀(서리풀이). 풀이 서렸다는 뜻에서 나온 이름
·삼성(三成) : 본래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언주면(彦州面)의 일부로, 일제 때인 1914년 경기도 구역 획정에 따라서 이 곳에 있는 세 마을을 합해서 '삼성동(三成洞)'이라는 이름으로 지었다. 그 세 마을이란 '봉은사마을'과 '무동도마을', '닥점마을'이다.
·신천(新川) : 새내. 샛강이 지나갔던 마을이다. 일제 때는 이 지역까지가 공양군에 속했었다.
·잠실(蠶室) : 조선시대에 동잠실, 서잠실, 남잠실이 있었는데, 그 중 동잠실(東蠶室)이 있었던 곳.
·성내(城內) : 성안말. 풍납토성 안쪽에 있는 마을이어서 나온 이름이다.
·신당(新堂) : 무당말. 본래는 신당(神堂)'
·아현(阿峴) : 애오개(애고개). 그 옆의 '큰고개'의 대비 개념에서 나온 이름
·신촌(新村) : 새말(새마을). 원래 이 마을은 연세대학교 동문 근처에 있었던 마을로, 지금도 '신촌동('新村洞)'이란 법정동이 있다.
·합정(蛤井) : 조개우물이라 불러 왔던 곳이다.
·당산(堂山) : 당뫼. 지금도 그 곳에 큰 느티나무와 함께 당집이 있다.
3호선에서
·지축 : 싸릿골(싸리말)
·구파발(舊擺撥) : 조선시대엔 역참의 하나로 중요한 도로에 파발을 두어서 선전관의 통행을 편하게 했는데, 이 때 이용된 말이 파발마이다. 이 파발은 원래 선조 38년(1605)에 국토 북쪽이 소란해져 중앙으로의 신속한 연락이 필요해짐에 따라 설치한 것이었다.
·연신내 : 역말(역촌) 앞으로 흐르는 내는 지금의 '불광천(佛光川)'이다. 이 내는 연서역 근처를 흐른다 해서 '연서내' 또는 '연서천(延曙川)'이라 불러 왔다. 그 '연서내'라는 말이 나중에 달리 불려져 오면서 '연선내'가 되고, 이것이 또 변하여 '연신내'라는 이름에까지 오게 되었다. 불광천 근처의 마을을 '연신내'라 부르고, 지하철 역이름까지 그 이름으로 되었다. 근처에 '연신내시장', '연신내우체국', '연신중학교', '연신내역' 등 '연신' 또는 '연신내'라는 이름을 딴 기관이나 시설물이 많다. 다만, 이 곳을 지나는 큰길의 이름만이 '연서로(延曙路)'라는 이름을 달고 있을 뿐이다. 연신내는 증산동(繒山洞)에 이르러서는 '까치내'가 되어 성산동을 거쳐 한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그러나, 지금은 보통 '불광천(佛光川)'이라 부른다.
·불광(佛光) : 불광사(佛光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해 온다.
·금호(金湖) : 조선시대에 지금의 한강변 일대에는 선철(무쇠)을 녹여서 무쇠솥과 농기구 등을 만들어 나라에 바치거나 시장에 내다파는 장인들과 솥장수들이 유난히 많았는데, 그 때문에 '무쇠막'이라고 불렀다는 것이고, '무시막', '무수막'이라고도 했다는 것이다. 옛 지도에서 이 곳을 나타내는 땅이름을 보면, 한자로 '수철리(水鐵里)' 또는 '무수막(無愁幕)'이라고 표기돼 있다. 이 이름은 바로 '무수막' 또는 '무쇠막'의 한자식 표기인데, 이것에 따르면 '무쇠막'이라는 것은 무쇠솥을 만들었던 곳이라 나왔던 이름이기보다는 한강 물가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나왔을 가능성이 더 높다. '뭇'이나 '무수'는 땅이름에서 곧잘 '물'의 뜻으로 나오는 예가 많기 때문이다.
·압구정(狎鷗亭) : '압구정('狎鷗亭)'이라는 한명회의 정자가 있었다.
·신사(新沙) : 새말(신촌.新村)+사평(沙坪)
·양재(良才) : 조선시대에 '양재역('良才驛)'이라는 큰 역이 있었다.
·도곡(道谷) : 독구리(독굴. 독굴)
·대치(大峙) : 한티. 그리 높지 않은 긴 고개가 있었다.
·학여울 : 원래는 '한여울'. 뒤에 '학여울'이라는 이름으로 변하면서 '학탄('鶴灘)'이라는 한자식 이름까지 나왔다. 약 40여 년 전만 해도 이 지역으로 한강의 본줄기가 지나갔다.
4호선에서
·창동(倉洞) : 창고가 있었던 창골
·상계(上溪) : 언래 '웃한내'로 불리던 곳. 이것이 한자로 '상한계('上漢溪)'가 되었다가 '상계('上溪)'로 줄었다.
·당고개 : 당이 있었던 고개 당현(堂峴)이러고도 한다.
·쌍문(雙門) : 쌍갈문이. 쌍갈래로 갈라진 곳에 이문(里門)이 있었다.
·수유(水踰) : 무넘이(무너미, 무네미)
·회현(檜峴) : 회나뭇골. 큰 회나무가 있었다.
·삼각지(三角地) : 일제 시대에 나온 이름. 일제 때 한강통(漢江通)'이란 길을 내면서 세 갈래가 되어 나왔다.
·신용산(新龍山) : 구용산(舊龍山)의 상대적 이름.
·이촌(二村) : 원래 중촌동(中村洞)이 있었던 곳. 이 마을은 을축 장마 때 폐동이 되었다.
·동작(銅雀) : '동재기'로 불러 왔었다. 비탈을 돌아가는 곳이라 해서 '돈재기'였던 것이 변한이름으로 보인다.
·이수(梨水) : 배나뭇골과 물골(갯말)이 합쳐 이루어진 이름. 이 곳에 원래 '배물다리'라는 다리가 있었는데, 이것을 나중에 고쳐 놓으면서 한자로 '이수교('梨水橋)'라 하였다. 배나뭇골은 한자로 이목동(梨木洞)이었고, 물골은 '수촌('水村)' 또는 포촌(浦村)'이었다. 이목동+수동=이수
5호선에서
·송정(松亭) : '솔쟁이('소쟁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정(亭)'은 땅이름에서 마을을 나타내는 접미사 형태로 많이 쓰인다.
·발산(鉢山) : '발뫼라는 산이름에서 나온 이름. '발뫼'에서 '발'은 '벌'의 의미로 나온 듯하다.
·화곡(禾谷) : 볏골
·목동(木洞) : 못골. 비만 오면 큰 물이 자주 들어 못이 군데군데 생기곤 했다.
·오목교(梧木橋) : 오목내다리. 오목내는 안양천의 다른 이름. 지형이 오목해서 나온 이름이다.
·여의도(汝矣島) :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는 밤섬과 여의도가 붙은 한 섬으로 '잉화도(仍火島)'로 돼 있고, <동국여지비고(東國與地備攷)>에는 '나의도(羅衣島)'로 돼 있으며, <대동지지(大東地誌)>에는 '여의도(汝矣島)'로 돼 있다. 이 이름으로 미루어 보건대, 여의도는 '너른 벌의 섬'의 뜻인 '너벌섬'으로 불러 온 것으로 보인다. '나'는 '너'의 소리빌기이고, '의(衣)'는 '벌'을 취한 한자 표기일 것이다. '옷'의 옛말이 '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의(羅衣)'는 '나벌' 또는 '너벌'의 표기로 보인다. '잉화도'에서 '잉(仍)'도 '너' 또는 '나'의 옮김으로 보인다. 이 '잉(仍)'은 '니'로도 읽어 왔는데, 예부터 땅이름에서 '너', '니' 등의 소리빌기로 많이 써 온 글자이다. '잉화'의 '화(火)'는 '불'로, '벌'과 음이 근사하니, '잉화도'는 결국 '너벌섬' 또는 '니벌섬'의 한자 표기라 여겨진다. 다시 말해서, '여의도', '잉화도', '나의주'는 모두 '너벌섬'의 다른 표기이다. '여의도'를 쓸모없던 땅이라고 해서 '너나 가질 섬'의 뜻에서 나왔다고 하는 얘기는 한낱 얘기 좋아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근거없는 말이다.
·마포(麻浦) : 삼개
·청구(靑丘) : 전에는 없었던 땅이름이다. 1955년 4월 18일 동제 실시에 따라 신당동 가운데 308-2를 기점으로 374-20을 지나 346-78에 이르는 길 동북쪽의 지역과 308-2에서 금호동에 이르는 길 남쪽의 지역을 이 동명으로 정했었다. 대체적으로 지금의 신당4동인데, 당시는 성동구였다. 그러나, 이 곳은 뒤에 신당동에 합해짐으로써 공식 동명에서 사라졌고, 그 동이 중구로 들어감에 지금은 그 구의 일부로 들어갔다. 이 '청구동'이라 이름은 김종필씨의 자택이 있어 언론에서 흔히 '청구동 자택'이라는 말을 씀으로써 일반인들도 정식 동명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 '청구초등학교'가 있어 이 곳이 그 옛날 일시적인 공식 동명이었던 청구동임을 알게 한다. 현재 지하철 청구역이 건설 중이다.
·장한평(長漢坪) : 장한산(長漢山)에서 나온 이름.
·오금(梧琴) : 오금골. 지형이 오목한 곳이라 나온 이름으로 보인다. 인조 임금의 남한산성 피신시에 이 곳에 이르러 오금이 아프다는 말을 해서 나온 이름이라고 하나, 원래 이름에 역사적 의미를 끼워 넣은 것으로 보인다.
·개롱(開籠) : 임경업 장군이 칼을 넣어 둔 장롱을 열었다는 뜻에서 나온 이름이라고 전해 온다.
·방이(方夷) : 방잇골
·거여(巨餘) : 겟골.
·길동(吉洞) : 기리울
·굽은다리 : 곡교리(谷橋里). 굽어진 다리가 있었다고 하나, 이 이름은 '갑은다리'가 변한 이름으로 보이는데, 이 이름은 '가운데의 들'이라는 의미로 씌어 온 듯하다.
·명일(明逸) : '명일원'이라는 원(院)이 있었다.
·고덕(高德) : 고데기
·상일동(上一洞) : '게내'라는 마을에서 위쪽에 있었던 마을
6호선에서
·역촌(驛村) : 역말. 이 곳에 '연서역('延曙驛)'이라는 역이 있었다.
·독바위 : 독처럼 생긴 바위가 있었다.
·응암(鷹岩) : 매바위가 있었다.
·새절 : 이 곳에 '새절'이라는 절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런 이름을 역이름으로 붙인 것은 동이름이 '신사('新寺)'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이름을 뜻으로 풀어 낸 것이다.
·증산(`繒山) : 원래 '시루뫼(시루미)'로 불렸던 곳. 한자가 나중에 달리 되었다
·수색(水色) : 물치. 한강물이 치밀어올라오는 곳이라 하여 붙은 이름.
·성산(城山) : 성미(성뫼)
·망원(望遠) : 망원정(望遠亭)이라는 정자가 있어 나온 이름
·합정(蛤井) : 조개우물
·광흥창(廣興倉) : 광흥창이라는 창고가 있었다.
·이태원(梨泰院) : 조선 성종 때 기록인 <용재총화>에 보면, 목멱산(木覓山.남산) 남쪽 이태원 들에 고산사(高山寺)라는 절의 동쪽에 큰 소나무들이 무성하였고, 남산에서 흘러내린 물을 찾아 성 안의 부녀자들이 빨래하러 많이 모여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예부터 이태원 사람들은 특수 작물인 홍차(紅茶.乾茶)를 많이 심어 생업을 삼았다고도 했다. 홍차는 고려 때 귀화한 거란족이나 조선 초에 역시 귀화한 여진족들의 영원한 생업이었고, 특히 이 귀화인들을 남경(南京-지금의 서울)에 이주시켰던 것으로 미루어 그 귀화인들이 이 곳에 많이 모여 살았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이타인(異他人) 또는 이태인(異胎人)들이 와서 산다 하여 '이태원'이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세상에서 전하기를 임진왜란 뒤에 귀순한 왜인들을 숭례문(崇禮門.남대문) 밖 남산 아래에 살게 하여 자연히 한 마을을 이루어서 '이타인(異他人)'이라 일컬었으므로 동네 이름이 되었는데, 그 뒤에 부르는 음(音)에 따라 '이태원(梨泰院)'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다.
·한강진(漢江津) : 한강나루라는 나루가 있었는데, 이의 표기가 한강진(漢江津)이다. 한강(漢江)은 지금과 달리 옛날에는 지금의 한남동 부근 일대에서만 부르던 이름이었다.
·버티고개 : 부어치, 버터고개, 벌아령이라고도 한다. 서울 중구 약수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전에는 길이 좁고 무인 지경이 되어 도둑이 들끓어 모양이 험악하고 마음씨가 곱지 않은 사람을 보면 "밤중에 버티고개에 가서 앉을 놈이다" 라는 농담이 있다. 순라군들이 야경을 돌면서 "번도"하고 도둑을 쫓았으므로, 번티라 하다가 변하여 버티고개, 버터고개, 또는 한자명으로 부처리가 되었다 한다. 서울의 진산인 삼각산의 인수봉이 어린애를 업고 나가는 형국이므로, 그것을 막기 위하여 서쪽에 무악과 떡고개를 두어서 어머니가 떡을 가지고 그 애를 꾀어 머무르게 하며, 또는 남쪽에 벌아령을 두어서 아이가 나가면 때리겠다고 을러대어, 그 아이가 못 나가도록 막는다는 뜻이라 한다.
·돌곶이 : 물이 돌아드는 곳이어서 나온 이름으로 보인다. 이름이 돌곶이가 되다 보니 '돌'이 연상되었는지, '석('石)'자가 들어간 석관동(石串洞)이 되엇다.
·석계(石溪) : 석관동(石串洞)+ 월계동(月溪洞)
7호선에서
·마들 : 큰 들이 있어서 나온 이름으로 보인다. 이 들판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바로 한내(한천, 한계) 사람들이다.
·중계(中溪) : 한계(한내) 마을 중에 가운데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하계(下溪) : 한계(한내) 마을 중에 아래쪽에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먹골 : 먹골이라 해서 먹과 관련지어 말하기도 하나, 원래 '물 마을'의 뜻인 '먹골'에서 나온 듯하다.
·면목(面牧) : 경기도 양주군 고양주면의 일부로서, 말 목장의 뜻을 따서 면목리(面牧里)라 하였다. 갑오경장 후에 한성부 남부 두모방의 전관중계, 전관하계가 되었다가, 1914년 3월 1일 부군 폐합에 따라 고양군 뚝도면에 편입되고, 1949년 8월 15일 서울 특별시 구역 변경에 따라 뚝도면에서 갈라져 동대문구에 편입되어 면목동이 되었다.
·사가정(四佳亭) : 서거정(徐居正)과 관련된 지역이어서 그의 호인 사가정(四佳亭)을 딴 것이다.
·중곡(中谷) : 간뎃말(가운데말)
·군자(君子) : 본래 경기도 양주군 고양주면의 군자리이었는데, 갑오경장 후 한성부 남부 두모방의 전관계가 되었다가, 1914년 3월 1일, 부군 폐합에 의하여, 고양군 뚝도면에 편입되고, 1949년 8월 15일, 서울 특별시에 편입되어 군자동이 되었다. 큰 산이 있는 곳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 '자'는 땅이름에서 대개 산을 가리킨다.
8호선에서
·석촌(石村) : 돌마리. 돌이 많아서 나온 이름이거나 물이 돌라 흐르는 곳이어서 나온 이름으로 보인다.
·가락시장 : 가락동은 원래 '가락골'이었다. 물이 많은 곳의 땅이름에 '갈'자가 많이 붙는데, 이 곳도 '갈+앗+골'에서 이 이름으로 변한 것 같다. 갈+아+골>갈앗골>가랏골>가락골>가락리(가락동)
·문정동(文井洞) : 문정리, 연화동이러고도 불러 왔던 곳이다. 본래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의 일부로서,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몽진하다가, 이 곳에서 쉬면서 물을 마셨는데, 그 맛이 매우 좋으므로, 이 마을에 많이 사는 문씨의 성을 따서 문정(文井)이라 명명하였다 한다. 지형이 연꽃과 같다 하여 연화동(蓮花洞)이라고도 하였는데, 1914년 3월 1일 경기도 구역 획정에 따라 문정골, 헤경머리를 병합하여 문정리라 하다가, 1963년 1월 1일 서울 특별시에 편입되어 문정동이 되었다.
·장지(長旨) : 잔버드리, 장지리라고도 불러 왔던 곳이다. 본래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의 일부로서, 잔(작은) 버들이 많이 있으므로, 잔버드리라 하였다 하나 원래 '작은 들'의 의미로 부텨진 땅이름이 아닌가 한다. 1914년 3월 1일, 경기도 구역 획정에 따라 주막거리, 새말, 웃구석, 웃말과 매착이의 일부를 병합하여, 장지리라 하다가, 1963년 1월 1일, 서울 특별시에 편입되어 장지동이 되었다.
·복정(福井) : 복정-동(福井洞)은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에 있는 동이다. 본래 광주군 세촌면의 지역으로서 큰 우물이 있어서 복우물 또는 복정(福井)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가마절, 기와골, 안골을 병합하여 복정리(동)라 하여 중부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성남시에 편입되고, 1975년 그 옆의 창곡동을 합하였다.
·단대(丹垈) : 단대동(丹垈洞)에서 나온 이름으로, 단대골, 던데라고도 불렀다.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에 있다. 본래 광주군 세촌면의 지역으로서 붉은 고개 밑이 되어 단대골 또는 던데, 단대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은행정이, 논골, 금광리를 병합하여 단대리라 하여 중부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성남시에 편입되었다.
·모란 : 모란장은 처음엔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간단한 '동네 시장'이었었다. 이 곳에 장이 들어선 것은 재향군인 단지가 들어서고, 거기에다 서울에서 온 철거 주민들이 근처에 자리잡게 됨에 따라 인구가 갑자기 늘어 물건 거래의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성남시의 인구 증가에 따라 장은 계속 커져 갔고, 특산물 판매 등으로 다른 도시에까지 널리 알려지게 됨에 따라 지금과 같은 큰 장을 이루게 된 것이고, 5일장으로 자리를 굳히게 된 것이다. '모란장'에서의 '모란'은 '모란꽃'과는 관계가 없다. 어떤 이는 시장 이름이 꽃이름과 같아 꽃시장이냐고 묻기도 하는데, '모란'은 '몰안'으로 단순히 '산의 안쪽'이란 뜻을 담고 있다. '몰'은 옛말로 '산(山)'이기 때문이다. 장터가 들어선 곳은 남한산의 산자락이 남서쪽으로 뻗어 마지막 산머리를 살짝 솟구다가 탄천 앞에서 그 냇물의 물을 먹듯이 물을 먹는 모습으로 고개를 숙인 곳이다. 그 용머리의 안쪽에 자리한 곳이 지금의 모란장이다. 어떤 이는 '모란장'의 '모란'이 북한의 실향민들이 이 곳에 많이 와 살면서 대동강 가의 모란봉을 생각해 그 이름을 붙였다고도 하지만, '모란'이란 땅이름은 실제 그 이전부터 있었다. 물론 '모란'이란 마을은 없었고 산 옆으로 빗긴 작은 들이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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헷갈리기 쉬운 서울의 법정동들
서울에는 발음상 똑같거나 비슷한 동이름이 많아 통용에 어려움이 따르기도 합니다. 다음의 예를 보아 주십시오.
혼동하기 쉬운 행선지 땅이름 | |
둔촌동 (강동구) | 등촌동 (강서구) |
창전동 (마포구) | 창천동 (서대문구) |
남현동 (관악구) | 남영동 (용산구) |
신천동 (송파구) | 신촌동 (서대문구) |
번동 (강북구) | 본동 (동작구) |
동자동 (용산구) | 동작동 (동작구) |
효자동 (종로구) | 효제동 (종로구) |
목동 (양천구) | 묵동 (중랑구) |
홍지동 (종로구) | 홍제동 (서대문구) |
삼선동 (성북구) | 삼성동 (강남구) |
학동 (강남구) | 합동 (서대문구) |
방학동 (도봉구) | 방화동 (강서구) |
정릉동 (성북구) | 전농동 (동대문구) |
산천동 (용산구) | 삼청동 (종로구) |
자양동 (광진구) | 가양동 (강서구) |
그리고, 실제로 있지도 않거나 옛날부터 있어 온 이름이 아님에도 버젓이 통하고 있는 일이 많다.
일례로, '신창동(新倉洞)'은 용산에만 있음에도 도봉구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고, '청구동(靑丘洞)' 같은 것은 일시적인 동명이었음에도 계속 쓰고도 있다.
모든 이들은 자기 고장의 땅이름을 정확하게 알아 제대로 된 이름을 쓰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이들이 우리 땅이름에 관하여 관심을 갖고, 이런 면에 꾸준히 지식을 쌓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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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 지명-여의도】 |
여 의 도
이 글은 교통연수원의 강의 시간에 한 수강자가 '여의도라는 지명에 관해서' 설명을 부탁한 것을 시간이 없어 그 시간에 답변을 드리지 못하고 본인이 얼마 전에 한 잡지에 기고했던 것을 인용하여 그 답변을 대신하겠습니다.. (배우리 교수) --------------------------------------------------------------------------------------------------------------------- 여의도의 원래 이름은 너벌섬 한강물의 퇴적 작용에 의해 모래가 오랜 세월 동안 쌓이고 쌓여 이루어진 섬인 여의도는 조선시대엔 말 목장이었다. 그래서, 그 말 목장의 중심인 작은 산을 '양마산(養馬山)' 또는 '양말산'이라 했다. 지금의 국회의사당 자리에 있었던 산으로, 높이가 한 50m 되었다. 또, 방목장(放牧場)인 여의도의 이 모랫벌은 '양말벌'이라고도 했고, 그 앞을 섬 안쪽에 있다고 해서 '안양말벌'이라고 했다. 양마산은 국회의사당을 지을 때 흙을 깎아서 둑을 쌓는 데 이용했기 때문에 지금은 산의 형체가 없어졌다.. 양말벌에선 양이나 염소도 많이 길렀다. 내용이 <대동지지>, <동국여지비고>에 나온다. "여의도는 밤섬 서쪽에 있는데, 맑은 모랫벌이 육지에 닿아 있다. 여기에 전성서(典性暑)의 외고 (外庫)가 있어서 양을 놓아 기른다."<대동지지> "나의주(여의도)는 예전에 목장이 있어서 사축서(司畜暑)와 전성서의 관원을 보냈으나, 이를 페지하였다. 지금(고종 때)은 사축서의 양 50마리, 염소 60마리만을 놓아 기른다. < 동국여지비고> 이 기록을 보아서도 여의도는 나라의 중요한 목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던 곳이기는 하나, 조선 말까지도 주민이 없어 근처의 밤섬 사람이나 강 건너쪽 마포 사람들이 건너와 땅콩 등을 심어 거둬 먹었다. 여의도는 조선시대엔 경기도 고양군으로, 일제 때 와서 '여율리(如栗里)'라 했는데. 이 이름은 '여의도'의 '여(汝)'자와 '율도(밤섬)'의 '율(栗)'자를 취한 것이다. 1933년 말 조사 자료에 의하면 여율리에는 일본인이 1집, 한국인이 101집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들은 모두 밤섬에 거주해 있었다. 여의도는 여러 이름으로 나온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는 밤섬과 여의도가 붙은 한 섬으로 '잉화도(仍火島)'로 돼 있고, <동국여지비고(東國與地備攷)>에는 '나의도(羅衣島)'로 돼 있으며, < 대동지지(大東地誌)>에는 '여의도(汝矣島)'로 돼 있다. 이 이름으로 미루어 보건대, 여의도는 '너른 벌의 섬'의 뜻인 '너벌섬'으로 불러 온 것으로 보인다. '나'는 '너'의 소리빌기이고, '의(衣)'는 '벌'을 취한 한자 표기일 것이다. '옷'의 옛말이 '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의(羅衣)'는 '나벌' 또는 '너벌'의 표기로 보인다. '잉화도'에서 '잉(仍)'도 '너' 또는 '나'의 옮김으로 보인다. 이 '잉(仍)'은 '니'로도 읽어 왔는데, 예부터 땅이름에서 '너', '니' 등의 소리빌기로 많이 써 온 글자이다. '잉화'의 '화(火)'는 '불'로, '벌'과 음이 근사하니, '잉화도'는 결국 '너벌섬' 또는 '니벌섬'의 한자 표기라 여겨진다. '여의도', '잉화도', '나의주'는 모두 '너벌섬'의 다른 표기이다. 항간에서 '여의도'를 쓸모없던 땅이라고 해서 '너나 가질 섬'의 뜻에서 나왔다고 하는 얘기는 한낱 얘기 좋아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근거없는 말임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 --------------------------------------------------- □ 여의도 광장 "고국 방문 비행을 손꼽아 고대하던 30만의 경성부(京城府) 인민은……여의도 넓은 벌판을 향하였는데……구름같이 모여드는 그 수효가 무려 5만에 달하여 광막한 여의도 벌판에는 사람으로 바다를 이루게 되었다" 우리 나라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安昌男)씨가 1922년 12월 10일 여의도에서 첫 비행 시범을 보였던 날의 같은 날짜 동아일보 기사의 일부다. 여의도가 비행장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지 않다. 그러나 실은 김포공항이 개항한 60년 2월까지 여의도는 서울의 관문이었다. 광복 사흘 후인 45년 8월 18일 상해 임시 정부의 이범석(李範奭), 장준하(張俊河), 김준엽(金俊燁) 등 광복군을 태운 C47 수송기가 내린 곳도 여의도였고,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이 미군 특별기(特別機) 편으로 첫 환국한 곳도 여의도였다. 비만 오면 물에 잠기던 여의도가 본격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 68년. 소양강댐이 들어서면서 한강의 수위가 낮아지게 되고, 여의도가 그 옛날처럼 물 속에 잠기는 일이 없게 되자, 이 너른 터를 유용하게 쓸 수 있다는 서울시의 판단에 따라 개발에 착수하게 되었다. 옛 활주로 자리에 '5 16광장'이 들어선 것은 1971년의 일이다. 유신 시대의 종막과 함께 이름이 '여의도광장'으로 바뀌었지만 북경의 '천안문광장', 모스크바의 '붉은광장'보다 넓은 이 광장은 한동안 한국민의 자부심이기도 했다. 11만 4천여평에 이르는 광대한 이 광장에서는 국군의 날 행사를 비롯해 대규모 행사가 모두 열렸고, 공휴일이면 평균 5만여 시민이 나와 자전거와 롤러스케이트를 즐기는 휴식 공간이 됐다. 그런데, 96년 8월 말, 이 광장을 녹지 공간으로 바꿔 보려는 계획을 서울시가 내놓았다. 여의도광장이 그저 '너른 빈터'로 그 크기에 비해 효용성이 떨어진다는 일부의 비판에 따른 대안이다. 시는 94년 이 곳에 1백층짜리 쌍둥이빌딩을 세우고 지하에 대규모 문화 스포츠.레저 공간을 만든다는 '꿈의 여의도'를 계획했다가 반대 여론에 부딪친 일이 있다. 지나친 개발은 여의도를 오히려 망칠 수도 있다는 것이 반대의 골자. 그대로 두자는 쪽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대체적인 여론은 바꿔보자는 쪽으로 흘러갔다. ^^^^^^^^^^^^^^^^^^^^^^^^^^^^^^^^^^^^^^^^^^^^ □ 여의도 샛강이 한강의 본줄기인 때도 여의도 샛강은 옛날엔 꽤 물이 많이 흘렀던 곳이다. 본시 지금의 마포 앞의 한강 줄기보다 이 곳에 물이 더 많았을 때도 있었다. 그 증거가 있다. 이 곳에 옛날의 행정지명이 그것이다. 지금의 여의도는 옛날의 여율리(汝栗里). 본시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연희면(延禧面)에 속했던 곳이다. 고양군이라면, 옛날엔 한강 이북의 땅에 해당되었던 지역이니, 이 곳이 고양군이었다는 점으로 보아 한강 이북이었음을 알게 한다. 그런데, 지금의 지리 상황으로 보면 엄연히 이 여의도 일대가 강의 남쪽 아닌가? 그래서, 여의도가 옛날엔 과천군(果川郡) 아니면 시흥군(始興郡)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실제는 경기도 고양군이었다. 이 곳이 한강 이북이었음이 확실하고 보면 지금의 샛강이 옛날의 한강의 본줄기였다고 생각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여율리'라는 이름은 '여의도'의 '여(汝)'자와 '율도(栗島.밤섬)'의 '율(栗)'자의 합해져서 나온 이름이다. /// --------------------------------------------------------------------------` □ 여의도 공원 "서울시는 지난 1997년 1월 22일 '여의도 광장 공원화 기본 구상안'을 발표하고, 이 곳의 검은 아스팔트로 뒤덮인 광장을 나무가 우거지고 잔디와 연못이 있는 아름다운 공원으로 꾸미기로 했다." -1997년 1월 말 국내 주요 일간지 보도문 이렇게 되어, 짧지만 그래도 많은 역사를 담아 왔던 여의도광장은 하나의 인공 동산이 되어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이 곳에서는 여의도 개발 이후 많은 집회가 있었다. 특히, 1만 명 이상의 군중이 모일 만한 집회면 어김없이 이 곳에서 행해졌다. 종교 행사도 적지 않았다. 개신교 교단에서는 해마다 봄철 부활절이면 이 곳에서 기도회를 가졌고, 천주교회에서도 '한국 천주교 창립 2백 주년 행사'를 이 곳에서 여는 등 큰 행사를 이 곳에서 열었다. 교황이 방한했을 때, 우리 한국 땅이 순교의 피로 얼룩진 거룩한 땅이라 해서 이 광장의 아스팔트 땅에 입을 맞춘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 주일이나 휴일이면 여의도 주민뿐 아니라 시내에서도 이 곳으로 나와 자전거타기를 즐기는 청소년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이 때문에 광장 구석마다 자전거 대여를 해 주는 상인들이 크고작은 자전거들을 가지런히 세워 놓고 영업을 하며 짭잘한 재미를 보아 왔다. /// (배우리. 한극땅이름학회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