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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의 마지막 국왕인 제56대 경순왕 김부와 죽방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왕자이다. 이름은 사서에서 전하지 않으며 후대 사람들이 마로 된 옷을 입고 살았다 하여 '마의태자(麻衣太子)'라 불렀다. 이와 같이 마의태자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에 신라가 멸망하자 개골산(금강산의 겨울 이름)에 들어가 삼베 옷을 입고 풀을 먹다가 일생을 마쳤다는 기록 이외에는 어떠한 기록도 없다.
마의태자라는 이름이 대중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26년 5월부터 1927년 1월까지 이광수가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신문 소설을 통해서였다. 이후 극작가 유치진이 마의태자를 주제로 한 동명의 희곡을 발표하면서 마의태자의 비극적인 이미지가 대중들 머리 속에 자리잡게 되었다.
족보상 경순왕은 897년에 출생한 것으로 되어 있고, 마의태자는 경순왕이 20살이었던 917년에 출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신라가 멸망한 936년 1월 경순왕은 39세였고 마의태자는 19세였다는 것이 된다.
2. 생애
후삼국시대 후기 신라는 제55대 경애왕이 견훤의 압박으로 자결한 후 힘을 잃고 고려와 후백제의 대결을 관망하는 정세가 수 년간 이어졌다. 한동안은 두 나라가 서로 이기고 지는 균형이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935년(경순왕 9) 후백제에 정변이 일어나 견신검이 즉위하고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이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곧 탈출해 고려에 귀의하는 사태가 발생하였고 후백제가 혼란스러워지자 고려의 왕건이 사실상 후삼국시대를 통일할 가능성이 확실해졌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당시 신라의 임금이었던 경순왕은 대세에 따라 스스로 고려에 항복하기로 결심했는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935년 10월 경순왕이 나라 존망이 위태롭게 되자 군신 회의를 소집하여 신라의 천년 사직을 고려에 바치는 항복을 논하는 자리에서 마의태자는 동생 덕지(德摯) 왕자 및 이순유(李純由) 등과 함께 불가함을 극력 간(諫)하였으나 결국은 경순왕의 뜻을 막지 못했다고 한다.
935년 11월 이미 고려에 입조할 뜻을 전한 경순왕이 개경으로 옮겨가자 그는 동생 덕지(德摯) 왕자와 함께 개골산에 들어가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마로 된 옷을 입고 풀잎을 먹으며 초근목피하였고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때문에 금강산에는 마의태자와 관련된 전설이 담긴 장소가 많은데 태자성(太子城), 용마석(龍馬石), 삼억동(三億洞)이 그러한 장소이며 비로봉 정상에서 외금강으로 내려가는 서남쪽 비탈길에 무덤이 있는데 이 무덤을 마의태자릉이라고 부른다. 이 때 그의 남동생도 처자(妻子)를 버리고 마의태자와 함께 개골산에 들어갔다가 이후 화엄종에 귀의(歸依)하여 승려가 되어 법수사와 해인사에 거처하였는데 승명이 '범공(梵空)'이라 한다.
혹은 다른 전설에 의하면 그는 동생 덕지(德摯. 또는 덕주공주)와 함께 월악산에 덕주사를 지어 머물다가 혼자 개골산으로 갔다고 한다. 또다른 이야기에서는 강원도 인제로 가서 신라의 남은 충신들과 지사들을 규합해 고려에 저항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확실치는 않지만 일부에서는 개골산으로 들어가기 위해 인제를 거쳐간 것이 아닌가라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3. 신라부흥운동설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하고자 하자 이에 필사적으로 반대하며 결사항전을 부르짖었던 것으로 볼 때 꽤나 강경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마의태자가 결사항전을 부르짖은 이유에 대해 삼국유사는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마의태자는 효종랑의 손자였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효종랑이 화랑을 이끌던 낭주였기 때문에 마의태자는 화랑도의 영향을 깊게 받았고 그 때문에 신라의 사직을 넘겨주자는 주장에 강하게 반발했던 게 아닐까 하는 가설이다.
사실 결사 항전을 부르짖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마의태자가 혼자 금강산에 들어가서 생을 마쳤다기보단 고려에 맞서서 신라부흥을 도모했을 가능성이 더 높아보이긴 한다. 실제로도 마의태자와 같이 결사 항전을 주장하다가 신라, 후백제 멸망 이후 한반도의 정세가 통일 고려의 시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에 저항하다가 노비나 천민으로 전락한 호족 세력들도 꽤나 있었고, 당장에 고구려와 백제, 발해도 멸망 후 각각 부흥 운동을 주도했던 고안승과 고연무, 부여풍, 대연림 등이 과거 고구려와 백제, 발해의 왕족들이었음을 감안하면 마의태자도 이들과 비슷하게 고려에 맞서 신라부흥운동을 주도했을 가능성도 없진 않다.
참고로 마의태자가 최후까지 저항했다는 강원도 인제 지역은 바로 육군과학화훈련장이 있는 곳이다. 훈련장이 생기면서 마을은 없어졌으나 이름은 남아있는데, 김부리, 갑둔리가 있고, 김부대왕각이 존재했다. 여기서 말하는 김부대왕이 과연 누구이냐? 라는 것인데 경순왕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마의태자를 이야기하는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현재는 과학화훈련장이 되어 김부대왕각도 사라지고 주민들이 올리던 굿잔치도 소멸한 상태이다. 또한 접근이 쉽지 않은 상태이나 전방지역 군복무를 하게되면 한번 쯤 가볼 수 있다. 실제로 가보면 성벽터 같은 것도 있고 위치나 지형이 중소규모의 군대를 모아 훈련시키고 자급자족할 수 있으며 방어도 가능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현재도 여단급 훈련장이 될 정도로 꽤나 군사주둔지로서 가치가 있다. 전설이 사실이라면 마의태자가 열심히 신라부흥을 위해 군사훈련을 했던 곳에 천년 뒤 대규모 군사훈련장이 생겼다는 것이 꽤나 흥미있는 점이다.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는 호국영령이 되셨다.
4. 마의태자가 신라 왕이 되었다면?
'마의태자가 왕이 되었으면 신라가 조금 나아지지 않았을까'라는 의견도 있다. 나라를 바치려는 아버지 경순왕에 맞서 대체적으로 무너져가는 신라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결사항전을 부르짖으며 신라를 유지하자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음을 감안할 때, 이미 고려와의 국력 차가 벌어진 이상 군사력으로는 고려와 직접적으로 싸우지는 못 해도 고려에 나라를 바치는 대신 고려에게 사대주의로 굴종하여 신라를 고려 초기때 고려로부터 속국의 지위를 얻어냈던 탐라국처럼 고려로부터 속국의 지위를 얻어 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더러 있다.
그러나 삼국통일 이후 사실상 한반도의 정통 왕조의 지위를 가진 신라를 과연 고려가 흡수 합병 안하고 탐라국처럼 속국으로 두었을지는 의문이다. 후삼국시대 당시 고려나 후백제는 건국된 지 아직 반세기도 안 되어 정통성 측면에서 상당히 취약하고 불안정한 나라들이었기에 한반도의 정통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신라는 반드시 흡수해야 했다. 특히 고려 태조 왕건 입장에선 신라는 후삼국시대를 종식시키고 한반도의 패자가 되려는 이상, 병합시켜서라도 반드시 없애야 할 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설혹 태조 왕건이 여러가지 이해관계를 고려해 신라를 없애지 않고 탐라처럼 고려의 속국으로 남겨두었다고 해도속국이라 쓰고 조공 셔틀. 왕건 사후 왕건의 아들인 혜종이나 정종, 광종 시기에 고려가 신라를 침공, 병합했을 가능성도 높다. 그리고 바다를 낀 섬나라였던 탐라와 달리 신라는 육지로도 고려와 인접해있어 탐라국과 같이 속국으로 장기간 지속되기 어려웠다.
하지만 실제로 마의태자가 신라의 왕이 됐다 하더라도 고려에게 친 고려 사대주의 외교로 굴종하여 신라를 보존하려고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만은 없다. 군사력으로 결사항전을 하기에는 당시 고려와 신라의 국력 차가 너무 컸기 때문. 멀리 갈 것도 없이 이상주의 정치에서 현실주의로 방향을 바꾼 일부 정치가들의 사례를 보자.
5. 이름에 대해
마의태자가 살았던 당대와 가까운 968년(고려 광종 19년) 제작으로 추정되는 김은열 묘지명에 의하면 경순왕의 장남의 이름은 김일(金鎰)이다. 이에 따라 후대의 족보나 금석문, 창작물에서도 이에 따라 마의태자의 이름을 김일로 쓴 곳이 많다.
하지만 이 묘지명 실물이 현존하지 않고 내용만 전할 뿐인데다, 여러 가지 의문점이 있어 마의태자의 이름이 김일이란 것이 양만춘처럼 후대에 붙인 이름이라 간주하고 부정하는 경우도 많다. 먼저, 묘지명에 나타난 위의 기록 외에 『고려사』 등에서 그의 이름에 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묘지명도 완전한 형태가 아니다. 우선 명문(銘文)이 없다. 또한 가계, 죽은 해, 장례일과 장지, 형제와 아들만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어 묘지명의 일반적인 형식에서 벗어나 있다. 실물이나 탁본이 현재 전해지지 않으며, 족보에만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족보에 옮기는 과정에서 축약되었거나, 발견된 실물이 파손되어 온전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6. 여담
마의태자는 또 다른 떡밥을 남겼으니, 바로 금태조 완안아골타와 관련된 떡밥이다. 이른바 여진족 신라인설이다. 썩은 떡밥인 애신각라 신라사랑 떡밥과 달리 옛 기록이 근거로 뒷받침되는데 고려사나 여러 기록들에 따르면 마의태자의 아들인 김행, 혹은 김준이 만주 땅으로 들어가서 대를 이은 결과 나온 게 금태조 아골타라는 것이 떡밥의 핵심. 하지만 고려사를 엄밀하게 살펴볼 때 김행이나 김준이 마의태자의 아들이라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다만 순암 안정복은 마의태자의 세 아들 중 김준이 여진족에게 망명했고, 나머지 두 아들은 고려에 남았다고 말하고 있긴 하다. 그런데 역사에 남은 것만 세 명이니 결론적으로는 네 명이 된다.
마의태자의 묘는 금강산 비로봉 바로 아래에 있다고 한다. 금강산 관광에서 비로봉까지 공개될 예정이어서 마의태자의 묘도 실물이 공개되나 했지만, 남북 관계 경색과 금강산 관광 중단으로 보류된 상황.
석굴암의 보석과 관련된 이야기의 주 스토리로 한 원스 어폰 어 타임에서는 마의 태자가 2명이었으며,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2명의 왕자중 1명은 정설대로 금강산에, 나머지 1명은 양평 용문사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때 용문사로 들어간 왕자가 보석을 가지고 있으며 세상을 떠날 때 같이 매장했다고 한다.
7. 족보 관련 논란
7.1. 「김은열 묘지명」
조선 후기 들어 1784년(정조 8)에 경순왕 제4자(四子)라는 『김은열 묘지석』을 개성 어느 산 기슭에서 우연히 발견되어, 이를 보고 김노규가 「김은열 묘지명」을 근기하였는데, 경순왕은 고려에 항복 후 고려 태조의 딸들인 낙랑공주 왕씨 등을 배필로 맞이하여 슬하에 8남을 더 두었다고 한다. 그 이름은 「일(鎰), 굉(鍠), 명(鳴), 은열(殷說), 중석(重錫), 건(鍵), 선(鐥), 종(鐘) 」이라 한다. 특히 2자 굉(鍠)과 4자 은열(殷說)은 고려 태조의 외손인 낙랑공주 소생으로 고려 평장사를 지내고 공이 있는 신하여서 특별히 장지까지 하사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상기 「묘지명」에 나오는 경순왕 8자들은 《고려사》 등의 문헌은 물론이고, 그 어떤 금석문 자료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 생애 및 배위 등도 누락되어 있고, 단지 형제 서차만 기술되어 있을 뿐, 묘지명 형태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묘지명》은 나라의 역사 기록들과 다르기 때문에 당연히 의문을 갖게 된다.
7.2. 「신라경순왕전비」
1814년 경주 김씨 후손들이 세운 「신라경순왕전비」에 경순왕은 전비 박씨와의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태자(太子), 차자(次子), 영분공(永芬公)이며, 1녀는 고려 경종에게 출가하였다고 한다. 또 후비 왕씨와의 사이에 5남 2녀를 두었는데 은열(殷說), 석(錫), 건(鍵), 선(鐥), 추(錘)이며, 2녀는 경주이씨 이금서(李金書), 3녀는 장수황씨 황경(黃瓊)에게 출가하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전비(前妃) 박씨 소생의 3자로 영분공(永芬公)을 추가하고, 《김은열 묘지명》에 나오는 1자 '일'(鎰), 2자 '황'(湟), 3자 '명종'(鳴鍾)은 배척하였다. 또 5자 '중석'(重錫)을 '석'(錫)으로, 제8자 '종'(鐘)을 '추'(錘)로 개명하고, 2녀를 추가하였다.
이후부터 경주 김씨 일문에서 마의 태자 이름을 '김일'(金鎰)이라 한며, 둘째 왕자의 이름도 '김황'(金湟) 또는 '김굉'(金鍠)이라 한다. 또 셋째왕자를 '김명종'(金鳴鍾)이라 하며 영분공(永芬公)의 시호를 받았다고 한다.
8. 대중매체에서
게임 <바람의 나라>의 보스 중 하나인 청의태자의 이름의 모티브가 마의태자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배우 이병욱이 연기했다. 경순왕이 즉위한 뒤에 등장하며 아버지 경순왕이 후백제의 앞잡이인 신하들을 죽이는데 동조한다. 작중에서 나라를 고려에게 바치려는 경순왕 및 신하들과 대립을 하고 고려와 후백제를 적대하며 쇠퇴해가는 신라를 존속하자는 입장을 굽히지 않지만 일국의 태자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장은 완전히 무시당한다. 경순왕의 초청을 받고 신라를 방문한 왕건이 고려로 돌아갈 때 경순왕은 물론 신라의 모든 관료들이 보는 앞에서 검을 빼들고 "고려의 왕은 도적이다! 신료들이여, 속지 말지어다! 저기 가는 고려 왕은 도적이다!"라고 고래고래 소리지르기도 하고 경순왕이 고창 전투, 운주성 전투에서 대세가 고려에 기울자 고려와의 병합을 논의하는 회의를 할 때도 "적어도 우리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삼한통일을 이룬 국가였소이다! 누가 승자란 말이오, 폐하 아직 신라는 일어설 수 있사옵니다. 고려와 백제가 싸우는 틈을 노려 다시 일어설 수 있사옵니다! 저들이 어찌 도적이 아니고서야 어찌 천년사직의 우리 신라국을 내놓으라고 한단 말입니까! 있을 수 없사옵니다!"라고 크게 반발하기도 하고 199화 경순왕이 마지막에 고려에 항복할 뜻을 비치자 "차라리 전 신료들에게 자결을 명해 주시오소서!"라고 부르짖지만 결국 실패하고 항복이 결정되자 마의를 입고 개경으로 떠나는 경순왕과 전 신료들의 모습을 보며 통곡하며 산 속으로 들어간다.
2009년 KBS 드라마 <천추태후>에서는 등장하지 않지만 주요 인물인 김치양이 마의태자의 손자라는 설정을 덧붙였다. 김치양은 김씨로 신라계 성씨임이 확인되는데 후반부 천추태후 사이의 김씨인 아들을 목종 다음 고려의 왕으로 세우려고 음모를 꾸몄으므로 부흥운동설이 있는 마의태자와 신라 유민들이 흘러 갔다며 여진족으로 간 설정인 김치양을 연결지어 각색한 것이다.
애니메이션 아이삼국유사 마지막 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당시 배경이 배경이라 그런지 분위기는 꽤 슬프다.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신라가 고려에 흡수되며 멸망하자 이에 탄식을 느끼고 금강산에서 홀로 살던 도중, 단군이 마의태자의 앞에 나타나자 마의태자는 그를 알아보고 통곡하며 단군의 위로를 받는다. 이후 단군을 따라 구름으로 올라타면서 같이 하늘로 가게 되는 것으로 애니메이션은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