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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에서 쫓겨난 광해군
후계가 불투명할수록 政爭 깊어진다. / 험난한 세자 책봉.
정치 일정의 투명성과 예측 가능성은 사회 안정의 중요한 요소다.
왕조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 일정은 세자 책봉이다. 세자를 조기에 책봉해야 차기를 노린 권력 다툼이 방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렬한 리더들은 권력 기반이 약화될 것을 우려해 후계자 결정을 미룬다. 그러면 차기를 둘러싼 정쟁이 발생해 리더의 권력은 강화되지만 사회는 안으로 곪아 든다.
조선 중기의 유명한 예언가 남사고(南師古)가 “원주 동남쪽에 왕기(王氣)가 있다”고 말했을 때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아무리 남사고라도 왕실과 전혀 무관한 강원도 한 구석에 왕기가 서려 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선조 때의 문신 이기(李旣:1522~1604)는『송와잡설(松窩雜說)』에서 “임진년 여름 광해군이 왕세자가 된 다음에야 그 말의 효험이 입증되었다.”고 쓰고 있다. 광해군의 모친 공빈(恭嬪) 김씨의 부모와 선조들이 살던 손이곡(孫伊谷)이 원주에서 동남쪽으로 1사(舍:30리)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 왕기가 광해군을 위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선조수정실록』은 “공빈이 한창 선조의 사랑을 받을 때는 다른 후궁들이 감히 끼어들지 못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공빈은 광해군이 세 살 때인 선조 10년(1577) 세상을 떠난 데다 동복 형인 선조의 장남 임해군(臨海君)이 있었다.
공빈의 죽음에 대해『선조수정실록』은 산후병이라고 적고 있지만 공빈은 선조에게 “궁중에 나를 원수로 여기는 자가 있어 내 신발을 가져다 내가 병들기를 저주했는데 전하께서 조사하여 밝히지 않았으니 오늘 내가 죽어도 이는 전하께서 그렇게 시킨 것입니다. 죽어도 감히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따졌다. 공빈의 죽음에 크게 상심한 선조는 다른 궁인들에게 난폭하게 대했으나 후에 소용 김씨(인빈)가 선조를 극진히 모셔 신임을 산 후 공빈의 과거 잘못을 들추어내자 선조가 “공빈이 나를 저버린 것이 많았다.”며 다시는 애도하지 않았다.
공빈의 연적(戀敵) 인빈(仁嬪)이 광해군의 정적 인조(정원군)의 모친이었다.
이 일화는 상황 논리에 따라 중심이 흔들리는 선조의 성격을 잘 말해 준다. 정비(正妃) 의인왕후 박씨가 비록 아이를 낳지 못한다 해도 선조의 총애가 인빈 김씨에게 넘어간 상황에서 차자(次子)인 광해군이 국왕이 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임해군은 성격이 포악했고 인빈의 아들 신성군(信城君)은 어렸기 때문에 광해군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조선 후기 이건창(李建昌)이 쓴 『당의통략(黨議通略)』은 조정 신하들은 광해군에게 뜻을 둔 반면 선조는 인빈 김씨 소생인 4남 신성군에게 뜻을 두고 있었다고 말한다. 서인인 좌의정 정철은 북인인 영의정 이산해와 함께 선조를 만나 광해군의 건저(建儲:왕세자를 세우는 것)를 요청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 날 하루 전에 이산해는 인빈의 동생 김공량(金公諒)을 몰래 만나 “정철이 광해군을 세우고 신성군 모자(母子)와 너를 죽이려 한다.”고 말했다. 김공량의 말을 들은 인빈은 울면서 선조에게 하소연했는데 선조는 “뜬소문이다.”라며 믿지 않았다. 다음날 이산해는 병을 칭탁하고 나오지 않았으나 성격 급한 정철은 남인 우의정 유성룡과 선조를 만나 세자 건저를 요청했다. 선조는 크게 화를 내면서 “내가 지금 국사를 주관하는데(尙任) 경은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라고 꾸짖으며 정철을 강계(江界)로 유배 보내고 서인을 대부분 조정에서 내쫓았다.
이로써 동인이 정권을 잡는데 이때가 선조 24년(1591)으로, 서인인 계곡(谿谷) 장유(張維)는 이를 ‘신묘년의 화란(禍亂)’이라고 불렀다. 자신을 세자로 세우려다 서인 정권이 붕괴된 상황은 광해군의 꿈을 산산조각 내고 말았다. 그러나 1년 후 발생한 임진왜란이 상황을 극적으로 전환시킨다.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하자 조정은 삼도순변사 신립(申砬)에게 저지하게 했다. 신립은 그달 28일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가 패전했는데 20대 때 임진왜란을 겪은 박동량(朴東亮:1569~1635)은『임진일록(壬辰日錄)』에서 “이날 보고가 올라오자 여항(閭巷:거리)이 한순간에 텅 비어 도성을 지키려 해도 이미 사람이 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신립의 패전 소식에 놀란 선조가 먼저 파천(播遷) 이야기를 꺼내 서울이 온통 소란스러운 상황에서 신하들이 세자 건저 문제를 다시 들먹였다. 선조는 대신들에게 “누구를 세자로 세울 만하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으나 대신들은 “이것은 신하들이 감히 알 수 없는 일로서 성상께서 스스로 결단하실 일입니다.”라고 사양했다. 『선조실록』은 ‘이렇게 서너 차례 반복하자 밤이 이미 깊었는데 상은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세자를 세우지 않으려는 선조의 속마음을 읽은 이산해가 자리를 뜨려고 하자 승지 신잡(申잡)이 “오늘은 반드시 청에 대한 답을 얻은 뒤에야 물러갈 수 있습니다.”라고 붙잡았다. 그제야 선조는 “광해군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니 국본(國本:세자)으로 삼으려고 하는데 경 등의 생각은 어떠한가?”라고 물었고 대신 이하가 모두 일어서서 “종사와 생민의 복입니다.”라고 절했다. 이렇게 광해군은 극적으로 세자로 결정되었다.
이때의 세자 책봉 장면에 대해『임진일록』은 “백관이 조하(朝賀)하는데 허둥지둥하여 동서반(東西班)도 구분하지 못했으며 인장(印章)도 교서(敎書)도 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해 6월 평안도 영변까지 도주한 선조는 세자 광해군에게 분조(分朝:조정을 둘로 나누는 것)를 이끌라고 명한 후 자신은 다시 북으로 도주했다.
광해군은 평안도·함경도·황해도·강원도 등을 누비며 의병을 모집하고 전투를 독려하며 민심을 수습했다.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러 갔던 임해군과 순화군(順和君)이 회령(會寧)에서 조선 백성 국경인(鞠景仁) 등에게 체포되어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진영에 넘겨진 것과 대조적이었다.
광해군이 적진을 헤매고 다닐 때 선조는 “나는 살아서 망국의 임금이니 죽어서 이역의 귀신이 되려 한다. 부자(父子)가 서로 떨어져 만날 기약조차 없구나.”라는 편지를 보내 광해군을 위로하면서 명나라에 세자 책봉을 주청했다. 이제 광해군이 선조의 뒤를 잇는 것은 기정사실처럼 보였다. 그러나 명나라는 책봉 승인을 거부했다.
『선조수정실록』에는 명 신종(神宗)이 요동순안어사(遼東巡按御史) 이시얼( 李時얼)을 통해 “적장자(嫡長子)를 후계로 세우는 것은 공통의 의리인데, 귀국의 장자는 어디 갔기에 둘째 아들로 세자를 삼았는가?”라고 비난하는 국서를 보냈다고 전해 준다.
그간 세종·세조·성종 등 적장자가 아닌 왕자의 왕위 승습을 명나라가 거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는 원군(援軍) 파견을 계기로 과거의 형식적 조공(朝貢) 관계를 실질적 지배로 바꾸려는 음모에 불과했다. 명의 이중성은 선조 28년(1595) 명 신종이 사신 윤근수(尹根壽)를 통해 “황제가 조선국 광해군에게 칙유(勅諭)한다”는 국서를 전한 데서도 드러난다.
명 신종은 이 국서에서 광해군을 ‘영발(英發)한 청년이어서 신민이 복종한다.’면서 전라도와 경상도를 맡아 주관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세자 책봉은 거부한 것은 선조와 광해군 사이의 이간(離間) 책동이었다. 선조는 자주 선위(禪位) 소동을 벌여 신하들의 충성심을 확인했고 그때마다 광해군은 왕위를 극력 사양하는 거조(擧措)를 취해 부왕을 밀어낼 의사가 없음을 천명해야 했다. 그나마 전쟁이 끝나자 선조의 마음은 더욱 흔들렸다.
서른세 살 ‘준비된 임금’ 두 살 적자와 후계를 겨루다. / 嫡子 옹립 세력들.
광해군의 왕위 즉위 길은 험난했다.
안으로는 적자 계승의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선조와 권력의 독점을 원하는 소북(小北)이 흔들었다. 밖으로는 원군(援軍) 파견을 계기로 그간의 형식적 조공관계를 실질적 지배관계로 전환시키려는 명나라가 흔들었다. 광해군은 피를 토하며 이런 상황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혔다. 그것은 새로운 군주상의 탄생 과정이었다.
재위 33년(1600) 의인왕후 박씨가 세상을 떠나자 선조는 2년 후 김제남의 딸을 계비(繼妃)로 맞아들였으니 인목왕후였다. 『당의통략(黨議通略)』은 의인왕후가 승하했을 때 예관(禮官)이 명나라에 다시 세자 책봉을 주청하자고 건의하자 “왕비 책봉은 청하지 않고 세자 책봉만 청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고 꾸짖었다고 전한다. 이런 상황에서 인목왕후는 선조 39년(1606년) 3월 영창대군을 낳았다. 방계 승통의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선조는 서른두 살의 광해군 대신 강보에 싸인 어린 적자(嫡子)에게 자꾸 눈길을 주었다. 영창대군이 탄생하자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은 세종 때 소헌왕후 심씨가 임영대군 등을 낳았을 때 백관들이 하례한 전례를 들어 백관을 거느리고 진하(進賀)하겠다고 요청했다.『선조실록』은 선조가 처음에는 반대하다가 유영경의 사주를 받은 예조에서 거듭 권하자 허락했다고 전하지만『당의통략』은 좌의정 허욱(許頊)과 우의정 한응인(韓應寅)이 ‘대군 한 명 낳았다고 백관이 진하할 것까지야 있느냐’고 반대해 중지되었다고 전한다.
이런 상황에서 명나라 예부(禮部)는 선조 37년(1604) 11월 “조선의 세자를 세우는 의논을 단연코 따를 수 없다.”는 자문(咨文)을 보내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다시 거부했다.
장남 임해군이 있다는 명분이었지만 원군 파견을 계기로 조선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려는 속셈이었다. 원임 영의정 이항복(李恒福) 등이 선조 39년(1606) 4월 명 사신에게 “적장자(嫡長子)를 세우는 것이 상경(常經)이긴 하지만 공을 우선하고 현인을 택하는 것도 예법의 권도(權道)”라고 말한 것처럼 광해군은 현명했으며 임란 극복에 공이 있었다.
또한 책봉 주청사 이호민(李好閔)이 훗날 북경에 가서 광해군은 “성지(聖旨:명 임금의 지시)를 받고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적을 막은 공로가 있었다.”고 말한 것처럼 명 신종(神宗)의 직접 지시를 받은 적도 있었다. 임란 때 백성들에게 체포돼 일본군에게 넘겨졌던 임해군은 선조 35년(1602) 전 주부(主簿) 소충한(蘇忠漢)을 궁궐 담장 밖에서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그 노복들이 백성들의 재산을 수없이 빼앗아 원성이 하늘에 닿아 있었다. 그러나 명에서 세자 책봉을 거부하고 선조도 적자(嫡子)에게 관심을 갖자 갓난아이에게 줄을 서는 인물들이 생겨났다.
차기 임금을 두고 집권 북인은 둘로 갈라졌다.
정인홍을 중심으로 한 대북(大北)은 광해군을 지지했고, 유영경을 중심으로 한 소북은 영창대군을 지지했다. 14년 동안 세자였던 광해군 대신 영창대군을 바라보는 정치세력이 있다는 것 자체가 광해군에게 타격이었다.『선조실록』은 유영경의 대군 탄생 진하 소동이 일어난 선조 39년 3월 이후 광해군의 심적 불안을 보여주는 기사를 싣고 있다. 그 전까지 광해군은 대략 2~3일에 한 번 정도 선조에게 문안했다. 그러나 진하 소동 이후 거의 매일 아침저녁으로 문안했던 것이다. 갓난아이와 다투는 형국이 된 것이다.『당의통략』은 선조가 영창대군이 태어난 후 광해군이 문안하면 “명나라의 책봉도 받지 못했는데 어찌 세자 행세를 하는가? 다음부터는 문안하지 말라.”고 꾸짖어 광해군이 땅에 엎드려 피를 토했다고 전한다.
선조는 말할 것도 없고 소북도 문제였다.
서인·남인보다 소수당이었던 북인의 처지에서 내부가 갈라져 싸울 상황이 아니었다. 근왕병 모집에 단 한 명도 응모하지 않는 민심의 이반을 겪었던 나라 집권당의 처신이 아니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왕위계승정쟁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뼈아픈 자기반성이었다. 사대부 중심의 정치체제 자체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할 때였다.
선조가 조금 더 살았다면 광해군의 운명은 예측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선조는 영창대군이 탄생한 이듬해(1607) 3월부터 병석에 누웠다. 그해 10월 9일 미명(未明)에 선조는 기침하며 밖으로 나가다가 기가 막혀 넘어졌고 자리에 누워 “이게 무슨 일인가?”라고 반복해 소리 질렀다. 회복될 가망이 없자 만 두 살짜리 아이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는 없다고 판단한 선조는 이틀 후 원·시임(原時任:전·현직 관리) 대신들을 불러 “세자가 장성했으니 고사에 따라 전위(傳位)하는 것이 좋다. 만일 전위가 어렵다면 섭정(攝政)도 가하다.”라고 광해군에게 왕위 계승을 명했다.
그러나 영의정 유영경, 좌의정 허욱, 우의정 한응인은 전교를 거두어 달라고 요청했다.
물론 유영경이 주도한 것이었다. 그러자 인목왕후가 삼공(三公:삼정승)을 빈청으로 불러 선조의 병세를 설명하면서 “지금 이 전교를 따르지 않는다면 심기가 더욱 손상돼 더욱 심해지실까 우려된다. 대신은 상의 명을 순순히 따르기를 바랄 뿐이다.”라는 내지(內旨)를 내렸다. 전위까지는 몰라도 섭정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유영경은 영창대군에 대한 미련을 접지 않았다. 이때 일을 기록한 박정현(朴鼎賢)의『응천일록(凝川日錄)』은 유영경이 선조의 비망기를 감추어두고 조보(朝報)에도 게재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같은 소북인 병조판서 박승종(朴承宗)과 공모해 군사를 동원, 대궐을 에워쌌다.
일촉즉발의 위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선조 41년(1603) 정월 전 참판 정인홍(鄭仁弘)이 상소를 올려 유영경을 공격해 전세 반전을 꾀했다. 정인홍은 “신이 보기에 전하의 부자(父子)를 해칠 자도 유영경이고, 전하의 종사(宗社)를 망칠 자도 유영경이고, 전하의 국가와 신민에게 화를 끼칠 자도 유영경입니다.”라고 거친 공세를 펼쳤다. 유영경이 그해 정월 24일 사직 상소를 올리자 선조는 정인홍을 ‘무군반역(無君叛逆)의 무리’라고 강하게 비판하며 ‘안심하고 출사하라.’고 유영경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선조는 열흘 후인 재위 41년 2월 1일 57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선조가 사망하자 유영경은 인목왕후를 찾아가 영창대군을 즉위시키고 수렴 청정할 것을 종용했으나 인목대비는 16년 동안이나 세자 자리에 있었던 33세의 광해군 대신 두 살짜리 아기를 임금으로 삼는 것이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광해군의 즉위를 결정하면서 선조의 유서를 공개했다. “동기(同氣) 사랑하기를 내가 있을 때처럼 하고 참소하는 자가 있어도 삼가 듣지 말라. 이를 너에게 부탁하니 모름지기 내 뜻을 몸으로 따르라.”라는 내용으로서 영창대군을 부탁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어린 영창대군을 위험에 빠뜨린 인물은 선조 자신이었다.
이렇게 광해군은 험난한 길을 걸어 즉위에 성공했다.
준비된 임금인 광해군은 즉위 석 달 후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건의를 받아 경기도에 대동법을 시범 실시했다.『광해군일기』는 이에 대해 “기전(畿甸:경기) 백성들의 전결(田結)의 역이 이후부터 조금 나아졌다.”고 박하게 평가했지만 대동법은 백성들의 삶을 크게 향상시키는 선정으로서 민생을 위한 새로운 개혁 정치가 시작될 것임을 선포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난관이 남아 있었다. 명나라에서 광해군의 왕위 계승 승인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광해군은 즉위 직후 이호민을 사신으로 보내 왕위 승인을 요구했으나 명나라는 다시 거부하고 그해 6월 차관(差官) 엄일괴(嚴一魁) ? 만애민(萬愛民)을 파견해 왕위 계승이 정당한지 조사하게 했다. 당시 생존했던 윤국형(尹國馨:1543~1611)은『갑진만록(甲辰漫錄)』에서 명 사신이 입국할 때 “의주에서 벽제까지 인민이 길을 막고 전하(殿下:광해군)의 현명함을 노래하며 이진(李진:임해군)의 무상한 역절(逆節)을 말했다.”고 전하고 있다. 두 사신이 서울에 들어오는 날에는 “근기(近畿:경기도)의 사대부부터 아래로는 선비, 노소 백성이 무려 수만 명이나 몰려 서교(西郊)를 메웠다”고 전하고 있다. 광해군에 대한 지지는 절대적이었다.
명 사신은 그해 6월 20일 서강(西江)에서 임해군을 만나고 귀국했다. 명의 두 사신은 수만 냥에 달하는 은화(銀貨)를 이미 챙긴 후였다. 이 사건은 광해군의 명에 대한 신뢰를 근본에서부터 흔들었다. 이런 자각은 동아시아 격변기 조선의 국왕으로서 바람직한 것이기도 했다.
시대를 앞서갔지만 신하를 설득 못 한 군주의 비극 / 동북아 정세 급변.
아무리 좋은 정책도 주위의 뒷받침이 없으면 성공할 수 없다.
광해군은 당시 명나라를 성리학적 관점이 아니라 현실적 관점으로 바라본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이런 외교관을 야당인 서인·남인은 물론 여당인 대북의 당론으로도 삼지 못했다. 서인은 ‘강홍립의 투항이 광해군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며 쿠데타 명분으로 삼았다. 시대를 앞서간 군주의 비극이 여기에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명 사신들의 태도는 이전과 달라졌다.
임란 전에는 최소한 대국의 체통을 지키느라 국왕이 주는 선물도 사양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으나 임란 후에는 노골적으로 뇌물을 요구했다. 그런 최초의 사신이 선조 35년(1602) 명의 황태자 책봉을 알리러 온 고천준(顧天埈)이었다. 『선조실록』의 사관은 고천준에 대해 “의주에서 서울까지 수천리 동안 이리같이 탐욕스럽고 계곡처럼 무한한 욕심으로 마음껏 약탈해 인삼 ? 은 ? 보물을 남김없이 가져가 조선 전역이 병화(兵火)를 겪은 것 같았다.”고 비난하고 있다.
윤국형(尹國馨)이 『갑진만록(甲辰漫錄)』에서 그의 행위에 대해 “말하면 입만 더러워진다.(言之wl口)”고 할 정도였다. 고천준은 문관인 한림(翰林)이었다. 환관인 태감(太監)들이 올 때는 말할 나위 없었다. 광해군 1년(1609) 조선 국왕의 책봉례(冊封禮)를 주관하기 위해 왔던 태감 유용(劉用)에 대해『갑진만록』은 “처음 국경에 들어올 때 반드시 은자 10만 냥을 얻겠다고 말하더니 서울까지 오는 동안 얻은 은자가 거의 5만~6만 냥에 이르렀다.”면서 “은으로 바치면 차나 식사 대접이 없어도 좋다.”고까지 말했다고 전한다.
광해군 2년(1610) 사신으로 온 태감 염등(염登)에 대해 윤국형은 “은을 탐내는 것이 유용보다 배나 더했다. 나라가 장차 어떻게 지속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이는 비단 환관들만의 문제가 아니라,『선조실록』에 “이때 중국 조정에는 탐욕스러운 풍조가 크게 일어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졌다”(1935년 6월 14일)는 사관의 평처럼 명나라 전반의 문제였다. 명나라는 말기적 증상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때는 만주에서 여진족 통일의 기운이 높아지고 있을 때여서 뇌물이나 챙길 때가 아니었다.
중원의 한족(漢族)은 평소 여진족을 비롯한 주위 민족들을 기미책아니었다. 중원의 한족(漢族)은 평소 여진족을 비롯한 주위 민족들을 기미책(羈미策)으로 다스렸다. 기(羈)는 말의 굴레를, 미(미)는 소의 고삐를 뜻하는데, 겉으로는 자치권을 주는 듯하지만 속으로는 한족이 고삐를 쥐고 지배한다는 뜻으로 현재도 중국 공산정권이 소수민족을 통치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기미정책의 핵심은 해당 민족들을 서로 싸우게 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인데, 이 무렵 여진족은 셋으로 나뉘어 있었다.
흑룡강과 연해주 지역에 거주하던 야인(野人) 여진, 송화강 유역의 해서(海西) 여진, 그리고 목단강 유역에서 백두산 일대에 거주하는 건주(建州) 여진이었다. 명나라는 이 셋을 서로 반목시켜 다스려 왔는데, 임란 직전 명나라 요동총병관(遼東總兵官) 이성량(李成梁)은 이여송(李如松)의 부친이기도 했다.
『명사(明史)』 이성량 열전은 “그의 고조할아버지 이영(李英)이 조선에서 귀화(內附)했다.”고 적고 있으니 원 뿌리는 조선 사람이었다. 이성량은 1583년 해서 여진의 아타이(阿台)가 명나라에 반기를 들자 건주 여진을 거느리고 토벌에 나섰다. 이때 이성량의 향도(嚮導)로 나섰던 타쿠시(塔克世)와 교창가(覺昌安)가 명군의 오인 사격으로 사망하는데, 이들은 각각 누르하치(努爾哈齊:1559~1626)의 부친과 조부였다.
누르하치는 이때부터 여진족 통일에 나서 5년 후인 1588년께에는 건주 여진을 대부분 통일했다. 4년 후 발생한 임진왜란은 누르하치에게 날개를 달아줘 누르하치는 선조 25년(1592) 9월과 선조 31년(1598) 1월 조선에 구원군을 보내 주겠다고 자청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조선은 파병을 거절했지만 그간 조선의 벼슬을 받기 위해 서로 싸우던 여진족이 새롭게 대륙의 강자로 등장했음을 말해 주는 사례였다.
드디어 광해군 8년(1616) 누르하치는 스스로를 영명칸(英明汗)이라 칭하면서 금(金)나라를 재건하고 천명(天命)을 연호로 사용했다. 2년 후인 광해군 10년(1618) 4월에는 “명나라가 내 조부와 부친을 죽였다.” “명나라가 우리 민족을 탄압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7대한(七大恨)’을 발표하고 현재의 요령성 무순(撫順)시를 공격해 함락시켰다. 충격에 휩싸인 명나라 경략(經略) 왕가수(汪可受)는 그해 윤4월 27일 광해군에게 글을 보내 군사 파견을 요청했다. 수만 군사를 보내 여진족을 협공하면 반드시 승리할 것인데, 이것이 명나라에 보답하는 길이자 조선에도 무궁한 복을 안겨 주는 일이 될 것이란 논리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조명군(助明軍)을 보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명이 임란 때 파병한 것은 명나라가 아닌 조선을 싸움터로 결정한 고육지책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광해군은 고민 끝에 그해 5월 1일 전교를 내렸는데 국경 너머로 군사를 보내는 대신 “급히 수천 군병을 뽑아 의주(義州) 등지에 대기시켜 놓고 기각(기角:협격)처럼 성원하는 것이 지금의 상황에 적합할 듯하다”는 내용이었다. 군사를 파견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광해군의 이 결정에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집권 대북의 실세 이이첨(李爾瞻)과 광해군의 처남 유희분(柳希奮)까지 군사 파견을 강력히 주장했다. 대북은 다섯 달 전 서인·남인의 격렬한 반발을 무릅쓰고 인목대비를 폐위시켰다. 폐모(廢母)라는 소모적 정쟁에는 목숨 걸고 싸우던 당파들이었지만 국익에 반하는 조명군 파견에는 당론이 일치했다. 대제학 이이첨은 승문원 관원을 통해 “신은 성상께서 염려하시는 뜻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중국에 난리가 났을 때 제후가 들어가 구원하는 것이『춘추(春秋)』의 대의이자 변방을 지키는 자의 직분입니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재조(再造:조선을 구해 줌)의 은혜로 오늘에 이른 것이니 추호라도 황제의 힘을 보답할 길을 모를 수 있겠습니까?(『광해군일기』 10년 5월 5일)”라고 항의했다.
여야 모두에게 고립된 광해군으로선 파병을 피할 방법은 없었다.
할 수 없이 광해군은 강홍립(姜弘立)을 도원수로 삼았다. 강홍립은 문과 급제자였지만 어전통사(御前通事)까지 겸할 정도로 중국어에 능했다. 강홍립은 광해군 11년(1619) 2월 1만3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창성(昌城)에서 압록강을 건넜다. 강홍립이 접해 본 명군은 이미 후금의 상대가 아니었다. 명군 도독 유정(劉綎)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왜 군대를 요청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양 대인(大人:양호)과 나는 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반드시 내가 죽기를 바랄 것이다.”고 답할 정도로 명군은 분열돼 있었다. 열흘 치 식량만 갖고 국경을 넘은 조선군은 식량 공급도 원활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때 종군했던 조선 장수 이민환(李民환)은『책중일록(柵中日錄)』에서 3월 2일 심하(深河)에서 처음으로 후금군 600여 명을 격퇴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조선군은 승전의 기쁨 대신 양식을 찾아 헤매야 하는 형편이었다. 조선군은 후금의 주력부대와 3월 4일 심하에서 다시 맞붙는데 공명심에 눈이 먼 명의 총병(摠兵) 두송(杜松)이 계획보다 하루 일찍 출발했다가 복병을 만나 전멸했고, 도독 유정의 선봉부대까지 전멸당한 상태로 후금의 정예와 맞붙었다.
선천부사 김응하(金應河)가 이끄는 좌영은 화포로 후금의 기병을 격퇴시켰으나 갑자기 서북풍이 거세게 불면서 화약을 잴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후금의 막강한 철기군이 공격하자 패할 수밖에 없었다. 강홍립은 전원 전사의 길을 택할 것인지 항복할 것인지 갈림길에서 항복을 선택했다.
『광해군일기』 11년 4월 8일조의 사관은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비밀리에 하유하여 노혈(虜穴)과 몰래 통하게 했기 때문에 심하의 싸움에서 오랑캐 진중에서 먼저 통사를 부르자 강홍립이 때를 맞추어 투항한 것이다”고 비난하고 있다. 이것이 광해군 축출의 명분이 된 사전 각본에 의한 항복론 이었다.
그러나 여러 사료를 종합해 보면 후금에서 먼저 여러 차례 투항을 권유했고 강홍립은 막다른 궁지에서 자신과 부하들의 생존을 택했을 뿐이다. 광해군은 동아시아의 운명을 가를 이 싸움이 청(후금)의 승리로 끝날 것을 예견한 조선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는 재위 13년(1621) 명나라가 크게 승전했다는 보고를 듣고 “중국인(唐人)의 허풍은 전부터 한두 번이 아니니 어찌 경솔히 믿을 수 있겠는가(『광해군일기』 13년 12월 6일)”라고 일축했다.
그러나 허풍 센 중국인을 부모의 나라로 섬기던 서인은 광해군의 현실적 외교관을 ‘황제의 은혜에 대한 불충’이란 명분으로 몰아세우면서 쿠데타를 준비했다.
민생 위해 손잡은 연립정권, 스승의 명예 위해 갈라서다. / 문묘종사 논란.
광해군의 출발은 좋았다.
자신을 지지했던 대북만이 아니라 각 당파를 아우르는 연립정권을 구성해 전후 복구에 나섰던 것이다. 각 당파는 전후 복구에 전념한다는 데 암묵적으로 합의했다. 그러나 문묘종사라는 사변적 현안이 등장했을 때 광해군은 각 당파의 이해를 조절하는 데 실패했다. 그런 사변적 문제로 연립정권은 무너지고 있었다.
1608년 2월 2일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그달 14일 남인 이원익(李元翼)을 영의정으로 삼았다.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삼은 것은 의외였다. 북인은 임진왜란 말엽 남인 정승 유성룡을 쫓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터였기 때문이다. 북인은 굳이 유성룡을 희생양으로 삼지 않아도 집권 명분이 충분했으니 당시 무리한 정치 공세를 펼쳤던 셈이다.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의 제자들인 북인은 임란이 발생하자 수제자 정인홍(鄭仁弘)을 필두로 곽재우(郭再祐) ? 김면(金沔) ? 조종도(趙宗道) ? 이노(李魯) 등이 대거 의병을 일으켰기 때문에 집권 명분이 충분했다.
남인 이원익의 영상 제수는 연립정권으로 전후 복구에 임하겠다는 광해군의 정국 구상을 표출한 것이었다. 세자 시절 도움을 받은 대북만으로 정국을 운영하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광해군은 즉위년 2월 25일 내린 ‘비망기(備忘記)’에서 “근래 국가가 불행히도 사론(士論)이 갈라져 각기 명목(名目:당파)을 만들어 서로 배척하고 싸우니 국가의 복이 아니다.”며 “지금은 이 당과 저 당(彼此)을 막론하고 오직 인재를 천거하고 현자를 등용해 다 함께 어려움을 구제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견지에서 광해군은 즉위년 5월 서인 이항복(李恒福)을 좌의정으로 발탁했다.
남인·북인·서인을 아우르는 연립정국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속마음이 대북에 있다는 사실은 다 알고 있었다. 대북의 핵심은 정인홍이었다. 그는 선조 41년(1608) 1월 영창대군을 추대하려던 소북 영수 유영경을 비판하다 선조로부터 ‘무군반역(無君叛逆)의 무리’라는 꾸짖음과 함께 평안도 영변으로 유배돼 있었다. 율곡 이이가『석담일기(石潭日記)』 선조 14년(1581)조에서 “정인홍은 청명(淸名)이 있어서 세상에서 중히 여겼는데 장령(掌令)에 제수되니 사람들이 다 그 풍채를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말한 것처럼 산림(山林)의 존경을 받았다.
임진년 4월 왜란이 발생하자 57세 고령으로 곧바로 의병을 일으켰는데『선조실록』 26년 1월자는 그 숫자를 3000명이라 적고 있다. 정인홍은 광해군 즉위 이전부터 영남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선조 35년(1602) 윤2월 서인 강경파 부사과(副司果) 이귀(李貴)가 호남의 폐단으로 토호(土豪)들의 탈세를, 영남의 폐단으로 선비들의 수령(守令) 핍박을 지목하면서 정인홍을 장본인으로 지목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 이를 말해 준다. 그러자 경상도의 유생 오여은(吳汝穩)이 ‘정인홍은 봉황 같은 사람인데 이귀가 없는 사실을 날조했다.’는 반박 상소를 올렸고, 그때의 사관은 “정인홍은 조식의 고제(高弟)로서 기절(氣節)로 자부했는데 많은 선비가 내암(萊庵) 선생이라 높였다.”고 말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마자 정인홍을 석방하라는 상소가 잇따르는 가운데 과거 그를 비판했던 함흥 판관 이귀(李貴)까지 “신과 정인홍이 원래 서로 용납하지 않는 것은 국인(國人)이 다 알고 있다.”며 “정인홍은 선비(儒)라는 이름이 있고 나이도 70세인데 만리나 먼 유배지로 가다가 길에서 죽는다면 성세(聖世)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라고 석방을 주청한 것처럼 광해군이 복귀한 이상 그의 복귀는 시대의 당위였다. 광해군은 선조의 시신이 채 식기도 전에 부친의 결정을 뒤엎는 것에 부담을 느꼈으나 2월 23일 ‘정인홍이 길에서 죽는다면 선왕의 뜻이 아닐 것’이라며 석방했다. 3월에는 그를 한성부 판윤으로 임명하고 5월에는 대사헌으로 임명해 그에 대한 속마음을 드러냈다.
이런 상황에서 광해군 정권에 참여한 다른 당파들도 전란 극복에 힘을 보탰다.
전후 복구에 초당적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광해군 즉위년 이원익의 건의로 경기도에 대동법이 실시되고 재위 2년 허준(許浚)의『동의보감(東醫寶鑑)』이 편찬되고 문란해진 토지제도를 바로잡기 위한 양전(量田)사업도 추진되는 등 광해군의 주요 업적이 이 시기에 집중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었다.
물론 이때도 당파 간 충돌은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임해군 문제인데, 남인 이원익이 임해군을 살려주어야 한다는 전은론(全恩論)을 주창한 반면 정인홍은 대의를 위해 사연(私緣)을 끊어야 한다는 할은론(割恩論)을 주창했다. 임해군은 광해군 1년(1609) 4월 유배지에서 사형당해 할은론이 승리하지만 그는 당파를 막론하고 인심을 너무 잃었기에 문제가 확대되지는 않았다.
각 당파가 정면충돌한 사건은 문묘종사(文廟從祀) 문제였다.
성균관 문묘에 공자와 함께 제사 지내는 것이 문묘종사인데 종사되는 인물들의 사상이 국가의 지도 이념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광해군 즉위년 7월 경상도 유생 이전(李琠) 등이 오현(五賢)의 문묘종사를 청한 것을 시작으로 성균관 유생과 홍문관에서 거듭 오현종사를 요청했다.
오현은 김굉필(金宏弼) ? 정여창(鄭汝昌) ? 조광조(趙光祖) ? 이언적(李彦迪) ? 이황(李滉)을 뜻한다.
당초 이 문제가 나왔을 때 광해군은 “어진 이를 좋아하는 정성을 알았다.”고 칭찬했으나 막상 그 시행은 ‘선왕도 어렵게 여겼다.’며 유보하고 재위 2년(1610) 3월에는 이 문제의 제기를 금지시켰다. 그러나 요구가 거세지자 재위 2년(1610) 9월 문묘종사를 허락했다. 이것이 연립정권 운영자였던 광해군의 한계였다. 광해군은 오현 그대로를 문묘에 종사해서는 안 되었다. 오현 선정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굉필 ? 정여창 ? 조광조는 모든 당파에서 동의하는 인물이지만 이언적과 이황은 아니었다. 남인의 지주인 이언적·이황은 포함된 반면 집권 북인의 종주인 남명 조식은 누락된 것이다.
과연 조식의 수제자 정인홍은 광해군 3년(1611) 3월 상소를 올려 “이언적과 이황이 지난 을사년(1545)과 정미년(1547) 사이에 벼슬이 극도로 높거나 청요직(淸要職:승지 또는 대간 등)을 역임했는데 그 뜻이 과연 벼슬할 만한 때라고 여겨서입니까?”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명종 때 문정왕후의 동생이었던 척신 윤원형이 주도한 을사사화와 정미사화(양재역 벽서사건) 때 이언적과 이황의 행적에 문제가 있다는 비난이었다. 이언적은 명종 2년(1547) 윤원형 등이 주도한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돼 귀양 가지만 율곡 이이가 『석담일기』에서 “을사사화(1545) 때 직언으로 항거해 절개를 지키지 못했다.”고 비판했듯이 을사사화 때 종1품 의정부 좌찬성으로 있었다.
이황도 명종 7년(1552) 6월 윤원형의 심복인 정준(鄭浚)이 사헌부 집의로 임명된 날 홍문관 부응교로 임명됐다. 같은 날 사관(史官)이 “이황은 학행이 참으로 뛰어난 선비인데, 윤원형의 조아(爪牙)인 정준과 같은 날 관직을 제수했으니 향기 나는 풀과 악취 나는 풀(훈유)을 어찌 한 그릇에 담을 수 있겠는가?”라고 비판한 것처럼 이황도 명종 때 관직에 있었다. 반면 조식은 명종 10년(1555) 단성현감에 제수되자 사직 상소에서 “전하의 국사(國事)가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해 천의(天意)가 떠나갔고 인심도 떠났다”고 비판하면서 윤원형의 누이 문정왕후를 “궁중의 한 과부(寡婦)에 지나지 않는다”고 시대의 금기까지 거론했다.
이때 사림은 조식에 환호하고 열광했으므로 광해군은 조식까지 포함한 육현(六賢) 종사로 유도해야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언적과 이황을 비판한 정인홍에 대해 서인과 남인은 선현을 헐뜯었다고 일제히 공격했고 태학생들은 유생들의 명부인 『청금록(靑衿錄)』에서 정인홍의 이름을 삭제했다. 그러자 광해군은 “이 사람은 임하(林下)에서 독서하면서 시종 바른 선비의 길을 고수한 사람.”이라며『청금록』삭제 주동자를 조사해 아뢰라고 명했으나 오현 문묘종사를 허락할 때부터 이 문제는 예견돼 있었다. 연립정권은 이렇게 문묘종사라는 민생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변적 현안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소통과 통합에 실패한 군주, 외롭게 몰락하다. / 소수파의 임금.
모든 권력에는 독점 추구의 속성이 있다.
그러나 국왕은 각 당파의 당론을 조절하는 방향으로 왕권을 행사해야지 한쪽의 권력 독점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즉위 초 광해군은 연립정권을 구성해 전란의 상처 극복에 나섰으나 곧 소수 강경파에게 경도되어 조정자의 지위를 포기했다. 그 결과 그는 대북을 제외한 모든 당파의 공적이 돼 몰락하고 말았다.
집권 북인은 현실적으로 소수당이었다.
서인이 제1당, 남인이 제2당, 북인이 제3당이었다. 그러나 절의(節義)를 숭상했기 때문인지 북인은 다른 당파와 충돌이 잦은 것은 물론 당내에서도 분란이 잦았다. 선조 32년(1599) 11월 남인 영상 이원익(李元翼)이 선조에게 “동론(東論: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렸는데 북인은 또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갈렸습니다.”고 개탄한 것처럼 북인은 뿌리가 같은 남인과 합당하는 대신 대북·소북으로 나뉘었다.
북인 분당의 계기는 선조 32년 3월 북인 홍여순(洪汝諄)의 대사헌 임명 때문이었다.
홍이 대사헌에 임명되자 석 달 후 다른 부서도 아닌 사헌부에서 “‘홍여순은 평생 경영한 일이 모두 재산을 불리고 사치를 일삼는 것.’이고 북도순찰사(北道巡察使) 시절에는 사람을 풀처럼 여겨 함부로 죽였으므로 온 도(道)의 사람들이 그 살점을 먹으려 했다.”고 탄핵할 정도였다. 훗날 백호(白湖) 윤휴가 좌참찬 윤승길(尹承吉)의 ‘영의정 추증 시장(諡狀)’에서 ‘윤승길이 병조참판일 때 병조판서 홍여순이 뇌물을 멋대로 받아 챙기자 병조의 인사가 있는 날(政日)이면 그와 한자리에 앉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병을 칭탁하고 나가지 않았다.’고 기록할 정도다. 조광조로 대표되는 대사헌의 이미지로는 맞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당론이 앞서면 진실을 외면하듯 홍여순을 지지하는 이산해·이이첨 등의 대북과 홍여순을 비판하는 남이공(南以恭)·김신국(金藎國) 등의 소북으로 분당됐다. 그나마 대북은 선조 33년(1600) 홍여순과 이산해 사이에 다툼이 발생해 이산해가 육북(肉北), 홍여순이 골북(骨北)으로 다시 나뉘었다. 소북도 세자 광해군을 지지하는 남이공 중심의 청북(淸北: 또는 남당)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유영경(柳永慶) 중심의 탁북(濁北: 또는 유당)으로 나뉘었다.
광해군 즉위에 결정적 공을 세운 대북은 권력을 독차지하려 했으나 즉위 초 광해군은 이조판서와 이조전랑, 승지와 대간 등의 실직(實職)은 대북에게 주었으나 최고위직인 정승은 서인(이항복)과 남인(이원익·이덕형)에게 주어 연립정권을 구성했다. 대북은 광해군의 통합적 정국 운영에 불만을 가졌으나 전란 극복에 전 당파의 합심이 필요하다는 논리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연립정권은 문묘종사(文廟從祀) 문제로 공존의 기반이 크게 흔들렸다.
집권당이면서도 종주(宗主) 남명 조식을 종사하지 못한 상황에 큰 불만을 가진 대북은 연립정권 내 다른 당파들의 축출을 구상했다. 광해군 4년(1612) 김직재(金直哉)의 옥사가 대북의 이런 정국 구상에 이용되었다. 봉산(鳳山) 군수 신율(申慄)에게 ‘김경립(金景立: 일명 김제세)의 군역(軍役)을 면제하라.’는 관문(關文: 상급 관청의 공문서)이 내려왔는데 예조에는 없는 예조참지(禮曹參知)란 직명이 쓰여 있었다. 조사 결과 관문에 사용된 어보(御寶)와 병조인(兵曹印) 등이 모두 위조된 것이었다.
승려였던 김경립은 환속 후 군역의 과중함을 견디다 못해 관문서를 위조한 것인데, 이 단순한 사건은 순화군(順和君: 선조의 6남)의 장인 황혁(黃赫)이 순화군의 양자 진릉군(晋陵君) 이태경(李泰慶)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이 사건의 추관(推官)이던 판의금 박동량(朴東亮)은 무리한 옥사라고 주장했고 김시양(金時讓)도『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에서 “도적이 죽음을 늦추고자 모반했다고 고변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이첨 등의 대북은 이 사건을 이용해 서인·남인·소북 계열의 반대파들을 쫓아냈다.
광해군 5년(1613) 4월에는 ‘칠서(七庶)의 옥(獄)’이 발생한다.
조령(鳥嶺)에서 한 상인이 살해당하고 은자 수백 냥을 탈취당한 사건인데 수사 결과 범인은 고(故) 정승 박순(朴淳)의 서자 박응서(朴應犀), 고 목사 서익(徐益)의 서자 서양갑(徐羊甲) 등 명가의 서자 7명이었다. 현실에 불만을 품은 서자들이 여주(驪州) 강가에 거처를 마련하고 공동생활을 하는 도중 일어난 사건이었으나 이 역시 대북에 의해 역모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작자 미상의『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는 포도대장 한희길(韓希吉)·정항(鄭沆)이 ‘역모로 고변하면 죽지 않을뿐더러 큰 공도 세울 수 있다. 김제남(金悌男: 인목대비의 부친)과 영창대군을 끌어들이라.’고 박응서를 유혹했다고 전한다. 반면 안방준(安邦俊)이 묵재 이귀(李貴)에 대한 이야기를 적은 『묵재일기(默齋日記)』는 “이이첨이 ‘살길이 있다.’면서 박응서에게 ‘김제남과 짜고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고 말하게 꾀었다”고 전한다. 김제남은 이에 대해 “얼굴도 이름도 모른다.”고 부인했고 아들 김규(金珪)와 여종 업이(業伊)도 마찬가지였으나 아무 소용없었다.
김제남은 광해군 5년(1613) 5월 사약을 받기 직전 “원컨대 한마디 할 것이 있다.”고 청했으나 이마저 거부되고 사형 당했다. 영창대군도 이 사건으로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다 1614년 2월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광해군은 이 사건의 진실을 추구하기보다 정적 제거라는 시각에서 사태를 바라봄으로써 대북 이외 다른 당파들의 불만을 샀다. 게다가 내친김에 인목대비까지 폐모하려는 대북을 제어하지 못했다.
『묵재일기』는 서인 이귀가 남인 영상 이덕형에게 “(김제남의) 옥사 이후에는 반드시 대비를 폐할 것이니 이 옥사를 구제하지 못하면 폐모할 때 목숨을 바친다 해도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전하는 것처럼 서인들은 김제남의 사형을 폐모로 가는 중간 절차로 보았다.
폐모는 유교국가 조선에서 왕권의 범위를 넘는 문제였다.
『광해군일기』는 남인 이덕형은 물론 영의정을 지낸 대북 기자헌(奇自獻)까지 광해군에게 “『춘추(春秋)』에서 아들이 어머니를 원수로 대할 의리가 없다고 한 것은 선유(先儒)가 정한 의논이고, 아들이 어머니를 끊는 도리가 없습니다.”라고 반대한 것처럼 대북도 폐모에 모두 찬성하지 않았다. 서인과 남인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남인 이원익·이덕형, 서인 이항복은 폐모론에 반대하다 귀양 가거나 쫓겨났으며, 소북 남이공도 반대했고 심지어 정인홍의 제자 정온(鄭蘊)은 사제 관계를 끊으면서까지 폐모론에 반대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대북 강경파 이이첨 등에게 휘둘려 당론 조절의 역할을 포기하고 내심 폐모론을 지지했다. 드디어 다른 당파를 모두 내쫓은 대북은 광해군 10년(1618년) 인목대비의 호를 삭거(削去)하고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이복형제와 선왕의 장인을 죽인 것도 모자라 계모를 폐서인하는 광해군과 대북의 과잉조처는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광해군을 유교정치 체제의 공적(公敵)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대북은 폐모론을 주도해 권력을 독점했으나 소수 정당의 한 파벌에 불과한 당세로서 무리한 권력 독점이었다. 광해군 말기 사방에서 고변이 잇따랐으나 정작 가장 중요한 광해군의 이복동생 능양군(綾陽君: 인조)과 서인 핵심부의 쿠데타 기도를 알아채지 못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기초 정보망조차 붕괴된 것인데 이런 대북에게도 쿠데타 당일 마지막 기회가 있었다.
광해군 15년(1623) 3월 12일 광평대군의 후손 이이반(李而頒)은 길에서 만난 친족 이후원(李厚源)으로부터 “오늘 반정에 함께 참가하자”는 요청을 받았다. 이이반의 부친 이유홍(李惟弘)이 대북에 의해 귀양 갔기 때문에 권한 것이지만 이이반은 급히 광해군에게 고변했다.
하지만 『광해군일기』는 어수당(魚水堂)에서 술에 취한 광해군이 이이반의 상소를 보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 유희분·박승종이 두세 번 비밀리에 아뢰자 조사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전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쿠데타 군이 들이닥치자 광해군은 북쪽 후원으로 도망가 사복시 개천가에 있는 의관 안국신(安國信)의 집에 숨었으나 곧 체포되고 말았다.
대외 문제에서는 탁월한 현실 인식을 갖고 있었으나 대내 문제에서는 소수 강경파에 휘둘려 당론 조절과 사회 통합을 포기했던 대북 군주의 허무한 종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