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 일곱 교회를 통한 신앙의 교훈.
( 계 2 장 )
열 가지, 진리를 듣는 것보다 들은 한 가지
진리를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실천한 진리가 바로 자신의 삶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 * --
예수님 믿는
사람 치고 예수님이
자신과 함께 해주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기도할 때 마다 입만 열었다 하면
'주님 내 가정에 함께 해주시고, 내 사업에 함께 해주시고,
내 직장에 함께 해주시고, 내 교회에 함께 해주시고'를 남발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고 싶어하는
그 간절함이 눈물겨울 정도인데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함께 해주시기를 바라는지 묻고 싶습니다.
혹시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해주시면 예수님으로 인해서
나에게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가정에 예수님이 함께 하시면
가정이 평안하고 좋지 않은 일들은 근접하지 못하고
항상 좋은 가정이 유지될 것 같은 기대감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만약 이런 속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이 함께 해달라는
기도를 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예수님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예수님 덕분에 주어질 혜택이 더 좋아서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효능이
있다고 하는
부적을 하나 붙여 놓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께 함께 해달라고 간청하는
사람들은, 결국 예수님이 자신에게 좋은 일을 몰고 오는
분이 아니라면 함께 하고 싶을 이유가 사라져 버리게 될 것입니다.
마치 자식들이 돈많은 부모를 서로 모시겠다고 아우성치는
것과 같습니다. 돈많은 부모를 서로 모시겠다는 것은 부모가
좋아서라기보다는 부모가 가지고 있는 돈이 좋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모에게
잘 보이면 부모가 가지고
있는 돈을 더 많이 차지할 수 있는 유리한 입장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예수님 때문에 주어지는 혜택에 더 눈독을 들이고 예수님과
함께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확인해 봐야 할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좋은 사람은
다른 것에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단지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만으로 감사하고 기뻐할 사람들입니다.
설령 내가 죽는다고 해도 그 죽음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흔들림이
없어야 하는 것이 진심으로 예수님만 사랑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이상적인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단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여서
그리스도의 일을 한다면 과연 무슨 일을 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자기 백성'을 찾는 일에 참여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만을 고집스럽게
전함으로서 예수님의 음성을 목자의
음성으로 알아듣고 따라오는 자를 찾는 것이 교회의 일입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로 취급하면 안됩니다.
하늘 나라에 계신다고 하니까 나하고는 멀리 떨어져
계셔서 나에게 간섭도 할 수 없는 분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내 안에
살아 계십니다. 주님의 마음이 곧 내
마음이 되어야 하고 내 마음이 곧 주님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신념이나 이상이나 꿈을 앞세워서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항상 주님이 원하시고 이루시고자
하시는 것이 뭔가에 초점을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그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오직 주님의 마음일 것입니다.
1.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요한계시록 2 :1)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에
보내진 모든 편지는 그 교회의
사자, 즉 감독자, 오늘날로 말하면 목사에게 보내졌습니다.
마치 목자가 양무리를
인도하듯이, 목사는 하나님의 양무리인
교회를 인도합니다. 장로들은 이 일에 목사와 함께합니다.
그러므로 목사가
바로 서면 교회는 바로
설 것이고, 목사가 잘못되면 교회에는 문제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주 예수께서는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십니다. 그는
모든 것을 아시며 세우실 능력도, 폐하실 능력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므로 자신의
원하시는 바를 다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하나님 앞에 잠잠해야 하며. 우리는 고요히 그를 의지해야 합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요한계시록 2 : 2-3)
예수님이 세우시는
참된 교회의 모습은 악한 자를
용납하지 않고 사도 아닌 사도들의 거짓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주님의 마음과
같이 악한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칭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관심을
그들이 잘했다 못했다가 아니라 주님이
말씀하시는 참된 교회가 어떤 것인가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용납하지
않는 것을 우리도 용납하지 않고 있는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일곱 교회 이야기를 하시는
것은 일곱 교회가 잘했다 못했다가 아니라,
예수님이 원래 생각하시는 교회의 기준에 맞은 모습은
칭찬을 하신 것이고 맞지 않은 모습은 책망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요한계시록2 : 4)
그러나 주께서는
에베소 교회 목사의 현재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을 책망하고 계십니다.
그가 처음 사명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는
주를 뜨겁게 사랑하고 그의 복음 진리를 전하고 지키는
일을 위하여 수고하고 참고 성실하였으나, 지금은 처음에
가졌던 그 사랑과 그 열심과 그 성실함을 버렸다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지금 주님을 진실하게
사랑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의 일을 바르게 수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요한계시록 2 : 5)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지만, 그 은혜는 죄인 속에
반드시 회개와 믿음을 일으킴으로써 구원하는 은혜인 것입니다.
촛대를 옮겨 버린다는 것은 교회가 아니다는
뜻입니다. 판단 기준은 주님이 세우신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일곱 교회가 칭찬들은 모습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요한계시록 2 : 6)
그러나 에베소 교회의 목사에게 선한 점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한
것이었습니다. 니골라당은 우상숭배와 음행을 허용하였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자유를 왜곡하고
남용하였습니다. 주님의 참된 종들은 이단들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요한계시록 2 : 7)
신자는 완성된 자로 생명나무의
과실을 따먹는 배부른 상태에서 세상을 살아갑니다.
완성된 상태이기 때문에 주님이 용납하지 않는 것은 나도 용납
하지 않게 되고 주님이 미워하는 것은 나도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나무의 과실을
따먹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는 것, 이것이 주님의 몸된 교회입니다.
주 예수님의 말씀은 곧 성령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하신 말씀은
다른 교회들에게, 즉 지상의 모든 교회들의 사자들과
성도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 모두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이긴다는 말씀은 죄와
사탄과 세상을 이긴다는 말씀입니다.
이기는 자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됩니다.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과실을 먹는 것은 영생을 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실히 믿는 자는 이깁니다.우리는 다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서머나 교회에 보낸 편지.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요한계시록 2 : 8)
서머나 교회의 목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에 대한 묘사는 그 목사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됩니다. 처음이요 나중이신'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영원하신 하나님만이 온 세상과 인간을
주관하십니다.그는 살아계시고 참되신 유일하신 하나님
이십니다. 또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인 그는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그는 죽음을 주관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그를 위하여 죽는다 할지라도 그는 우리를
영광의 부활체로 다시 살리실 수 있고 참으로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세상과 죽음도
두렵지 않게 됩니다. 그는 참된 성도들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십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요한계시록 2 : 9)
주께서는 서머나 교회의
환난과 궁핍을 아셨습니다. 주 안에서 경건
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 환난과 궁핍을 경험할 것입니다.
비록 서머나 교회의 목사가 환난과 궁핍 가운데
있었지만,예수께서는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라고 평가
하셨습니다. 인생의 참된 부요는 물질에 있지 않고 영적인 데 있습니다.
물질적인 가치는 일시적이지만, 영적인 가치는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만 소망하며 유일한 위로로 삼고
하나님의 뜻만 행하며 사는 자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부요한 자입니다.
서머나 교회의 목사는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받았습니다.
구약교회는 매우 타락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고 주의 제자들과 성도들을 핍박했습니다.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데살로니가전서 2 :15)
그러나 실상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고 사탄의 회에 속한 자들로
하나님의 아들을 핍박하고 하나님의 종들과 성도들을 핍박하였습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요한계시록 2 : 10)
장차 환난이 있을 것인데
그 고난을 두려워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죽도록 충성하는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기는 자는 둘 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약속이 위로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죽어라'는 것입니다. 죽는 것이 충성입니다.
예수님이 하실
위로의 말씀은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을 믿고 안심하고 두려워 말고 죽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셨고
너도 살아날 것인데 죽는 것이 두려울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고린도후서 5 :1)
서머나 교회에는
장차 10일 동안의 환난이 있을 것이며
마귀가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할 것입니다.
10일 동안의 환난은 서머나
교회에게 닥칠 문자적으로 10일 간의
박해이든지 혹은 상징적으로 어떤 제한된 기간을 가리킬 것입니다.
성도들이 당하는 핍박과 고난은
영속적이지 않고 지나가는 한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핍박과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과 인내와 충성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서머나 교회의 목사에게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충성은 끝까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참된 충성은 죽음을 통해 증명될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요한계시록 2 : 11)
둘째 사망 즉
멸망의 해를 받지
않는 것이라는 이 말씀이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게 만드는 것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분명 이 말씀이 힘이 되고 위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3. 버가모 교회에 보낸 편지.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요한계시록 2 : 12)
예수님께서 자신을 좌우에
날선 예리한 칼을 갖고 계신 자로
묘사하신 것은 버가모 교회에게 영적 전쟁이 필요함을 암시합니다.
개인의 신앙 생활과 교회의 진리 운동은
영적 전쟁과 같습니다. 마귀와 불신앙과 비진리를 대항
하여 싸울 이 전쟁에서 우리의 무기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요한계시록 2 : 13)
버가모 교회를
통해서 드러난 참된
교회의 모습은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옆에서 주님 때문에
누군가가 죽는다면 그것은 충분히 두려움의 조건이 될 것입니다.
보지 않았으면 모를까
믿음 때문에 죽는 자를 친히 목격을
한다면 보지 않았을 때보다 훨씬 큰 두려움으로 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은, 결국 보이는 것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참된 교회의 모습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그 마음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보이는 것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흔들림이 없이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요한계시록 2 : 14-15)
모압 왕 발락은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는
부탁을 하게 됩니다. 그러자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해도
되는지 하나님께 묻겠다고 했고, 하나님은 '저주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발락은 많은 금은 보화와 사신을
보내서 다시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그럴 때 발람은 다시 한번 더 하나님께 물어 보겠다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이스라엘을 저주하지도 말라는 말씀을
들었음에도 하나님께 다시 묻겠다는 것은, 발람의 마음이 이미 돈에
기울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발람의 교훈이라고 합니다.
발람의 교훈이란 세상의 좋은 것
때문에 말씀을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행음하고 우상 제물을 먹는 것은, 말씀에
굳게 서지 못한 증거이고 그것을 발람의 교훈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같은 것으로 말씀하는 것을 보면, 니골라 당은 발람과 같이
겉으로는 말씀을 중요시하고 말씀대로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마음에는 세상을 향한 관심으로 가득차 있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요한계시록 2 :16)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적으로 드러난
자들이 바로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검이란 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싸우시고 심판하시는 원수는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라는 것이 확실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원수된 교회는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 삼아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교회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늘의 것보다는 보이는
세상의 것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에, 그 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리하고 있지 않고 보이는 것을 제일로 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인들에게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나,
봉사 많이 하고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보는 것을
믿음이 좋은 것으로 가르치는 모든 것들이 바로 보이는 것으로
주님의 사랑을 대신하려는 니골라 당의 교훈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요한계시록 2 : 17)
이기는 자들에게는
만나, 즉 하늘의 말씀을
주시고, 흰 돌을 주신다고 합니다. 흰 돌은 깨끗한 돌을 의미합니다.
그 돌에는 새 이름이 쓰여
있는데 그 이름은 흰 돌을 받은
자만 안다고 말씀합니다. 흰 돌에 쓰여진 이름은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은 아무나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돌을 받은 자만 알 수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는 예수님께서 알게 한 자만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4. 두아디라 교회에 보낸 편지.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요한계시록 2 : 18)
주님의 눈이 불꽃 같다고 한 것은
그의 통찰력의 날카로움을 나타내며 그의
발이 빛난 주석과 같다고 한 것은 그의 심판의 엄위함을 나타냅니다.
오늘날도
주님께서는
불꽃 같은 눈으로 우리도 보시며 우리의 행위도 판단하실 것입니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요한계시록 2 : 19)
예수님은 두아디라 교회의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안다고 말씀합니다.예수님이
교회에 원하시는 것은 사랑이고 믿음이고 섬김과 인내라는 것입니다.
흔히 교회의 사업이란 말을 하면서,
선교를 하고 구제를 하고 교육관을 짓고 예배당을 짓는
것들을 말하지만 그것들은 인간의 사업이지 예수님의 사업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오셔서 교회를 세우고 자기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모으기에 열중하지 않으셨습니다.예수님은 단지
사랑을 보이셨고, 믿음을 보이셨고, 섬김과 인내를 보이셨을 뿐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교회는 예수님이
공생애 때 하셨던 것과 일치된 길을 가는 교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요한계시록 2 : 20)
그러나 진실히 주를 믿고 섬기는
자에게도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그의 문제점은
버가모 교회 목사의 문제점과 같이 잘못된 자를 포용하는 데 있습니다.
그는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용납했습니다.
다수의 사본들에는 여자라는 말이 '네 아내'라고 되어 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 아내는 자칭 선지자로 자처하였을 뿐 아니라,
마치 옛날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처럼 우상숭배의 사람이었습니다.
여자는 주의 종들을 가르쳐 꾀어 음행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함으로써 우상 숭배에 떨어지게
했습니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는 이 죄악을 용납하였습니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요한계시록 2 : 21)
주께서는 그 여자에게 그 죄를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그 음행과 부도덕을 회개
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마도 구원받지 못한 자였을 것입니다.
교회 속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도 회개치 않은 죄인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자들을 보면
낙심할 것이 아니고, 힘써 권면해야 하고
또 우리 자신을 성찰하여 그런 죄 가운데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요한계시록 2 : 22-23)
주께서는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
사모에게 징벌을 선언하셨습니다. 첫번째 징계는 그를
침상에 던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병상에 눕게 하심을 가리킬 것입니다.
두 번째 징계는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회개치
않으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징계는
그 여자의 자녀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공의의 징벌입니다.
이로써 모든 교회는 주께서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시는 분인줄 알게 될 것입니다.
죄는 마음의 은밀한 곳에서 시작된됩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인간의 그 은밀한 마음과 뜻을 살피시고 판단하시고 징벌하십니다.
"두아디라에 남아 잇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요한계시록 2 : 24-25)
감사하게도
두아디라 교회에는 그 여자의 교훈을
받지 않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주께서는 그들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단지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그의 재림의 때까지 굳게 잡으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한국교회와
세계교회 안에 사탄의 은밀한
활동들이 많은 줄 압니다. 현 시대는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이때에도 주께서 남겨두신 신실한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자들에 속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끝까지 속죄 신앙과 의와 선과 진실을 보존하고 실천하기를 원합니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내가 또 그에게 새벽별을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요한계시록 2 : 26-29)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는
심판의 권세입니다. 세상의
군왕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고자하는 것을 깨뜨리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를
위해서 살고, 자기 힘으로
살아보려고 하는 세상은 마지막 때 주님에 의해서 깨뜨려질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를 위해서 산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주님을 아는 신자는
하나님에 의해서 생명이 유지되고 주님의 피 때문에 산 자가
되었음을 알기에 지금의 인생을 덤으로 사는 인생으로 보게 됩니다.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인생이 되라고 하나님이 덤으로 주신 인생을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로 살아갈 수
있는 자는 철장으로 세상을 깨뜨리는 입장에서 사는 자입니다.
깨어질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를 안다면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삶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게 될 것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따먹는 배부른 자로
세상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이 용납하지 않으시는 것은 우리도
용납하지 않게 하시고 주님이 미워하시는 것은
우리들도 미워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이라도 주님 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면 자신있게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고
외칠 수 있는 우리 모두 되도록 우리를 진리안에
굳게 세워주시고 눈에 보이는 것들 때문에
믿음이 흔들리거나 믿음을 저버리는 어리석은 자
되지 않도록 우리를 붙드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1. 4. 22. -샬롬- 예수님 사랑합니다.
카나다 캘거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