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계절은 가을의 끝자락에 와있다. 산과 들은 붉고 노랗게 물들였던 단풍도 하나둘 자취를 감추고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여민다. 한 해 동안 쉼 없이 이어왔던 라이딩의 향연도 이제 막을 내려야할 때가 되었다. 겨울 석 달 동안은 무리한 운동을 삼가고 잠시 휴식기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올해 마지막 가을 라이딩의 무대는 서울 북부의 양주시와 의정부시 일원으로 정했다. 이번 여정은 스머프차에게는 대부분 처음 가보는 길이다. 낯선 길은 언제나 호기심을 자극하고 새로운 풍경에 대한 기대감을 안겨준다.
가슴이 설레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아침 9시 30분, 양주역에 바이콜 전사 5명이 모였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하고 푸르렀지만 날씨는 제법 쌀쌀했다.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나눈 뒤 일사불란하게 대오를 갖추고 평화로를 따라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유양천 유양교에서 부흥로로 접어들자 양주관아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양주관아지는 중종 원년인 1506년 이곳에 설치되어 1922년 시둔면, 현재의 의정부시 의정부1동으로 이전할 때까지 무려 417년 동안 양주목을 다스렸던 관청이다. 오랜 세월 동안 이곳에서는 수많은 목민관들이 백성을 살피고 나라의 일을 돌보았다.
관아지 주변에는 금화정과 유양폭포, 그리고 정조대왕의 행적을 기리는 어사대비가 남아 있다. 특히 정조대왕은 1792년 양주에 머물며 백성들의 삶을 살피고 활쏘기를 했다고 한다. 오래된 유적 하나하나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이곳이 단순한 옛 관청터가 아니라 수백 년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양주 관아지에서 불과 1km 남짓 떨어진 곳에는 뜻밖에도 임꺽정 생가터가 있다. 임꺽정은 백정 출신으로, 조선시대 대표적인 도적의 우두머리로 알려진 인물이다. 홍길동, 장길산과 함께 조선시대 3대 도적으로 꼽히는 그는
경기도와, 황해도, 강원도 일대를 누비며 관아와 부호들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전해진다. 3년 이상 지속된 임꺽정의 난은 조선 전기 민란 가운데서도 규모가 크고 장기간 이어진 사건이었다. 지배층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민중에게는 억압에 맞선 의로운 인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옛 양주관아가 있던 곳 가까이에 조선시대 대도의 생가터가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역사는 이렇게 서로 다른 인물과 사건을 한 공간에 포개어 놓고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이야기를 건네고 있었다.
다시 부흥로를 따라 오산삼거리를 지나 방성3리마을회관을 통과했다. 한적한 들녘을 가로질러 달리자 신천이 나타났다. 신천은 동두천을 가로질러 한탄강으로 흘러드는 하천으로, 약 37,5km에 이르는 물길이다. 신천을 따라 달리다가 홍죽천과 연곡천을 만났다. 연곡천 둑길로 들어서자 탁 트인 들판이 펼쳐졌다. 추수가 끝난 논에는 하얀 원통형 곤포사일리지가 군데군데 놓여 있었다. 볏짚을 압축해 비닐로 밀봉한 곤포사일리지는 겨울철 가축의 사료로 사용된다. 농촌의 들녘에 놓인 하얀 곤포들은 늦가을 풍경에 또 하나의 이색적인 풍경을 더해주었다.
연곡천을 따라가니 들판 한가운데 연곡저수지가 나타났다.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유로 낚시터로 제법 이름난 곳이라고 한다. 저수지 가장자리에는 수상좌대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어 마치 작은 수상마을을 보는 듯했다. 다만 늦가을이라 그런지 강태공들의 모습은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연곡로를 따라 연곡1교차로에서 좌회전하자 오늘 라이딩의 핵심 목적지인 해유령전첩지가 나타났다. 잠시 자전거를 세우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때 람보림이 역사해설가로 나섰다. 람보림은 국방대학원에서 오랫동안 교수로 재직한 뒤 전역 후에는
경복궁역사문화대학교에서 역사문화를 전공한 학구파 답게 설명 하나하나에 깊이가 있었다. 바이콜에게는 참으로 자랑스러운 역사해설가이자 소중한 보배가 아닐 수 없다. 해유령은 일명 게네미고개 불리는 곳으로, 예로부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길목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선군은 한강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큰 위기에 빠졌다. 이때 부원수 신각은 유도대장 이양원과 함께 양주 산중으로 들어가 흩어진 병사들을 다시 모았다. 여기에 함경도 병마절도사 이혼의 지원병까지 합류하면서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북상하던 왜군 선본부대를 해유령 입구에서 매복 공격했다. 그 결과 조선군은 왜군 약 70명의 목을 베는 승리를 거두었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조선군이 최초의 승전 가운데 하나였다. 패전이 계속되던 암울한 상황에서 거둔 값진 승리였으니 그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 하지만 역사는 때때로 승리의 기쁨 뒤에 비극을 숨겨놓는다. 임진강으로 물러났던 도원수 김명원은 한강 전투의 패전 책임을 신각에게 돌렸고, 신각이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내용으로 장계를 올렸다. 조정에서는 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여 신각에게 참형을 명했다.
뒤늦게 해유령에서의 승전보가 조정에 전해지자 급히 형 집행을 중지시키기 위해 선전관을 파견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신각 장군은 억울하게 처형된 뒤였다. 승리를 거두고도 죄인이 되었고, 진실이 밝혀졌을 때는 이미 목숨을 잃은 뒤였다. 역사의 비극 앞에서 한동안 마음이 숙연해졌다. 1977년에는 해유령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고 억울하게 희생된 신각 장군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높이 10.6m의 해유령전첩비가 세워졌다. 오늘 우리가 자전거를 타고 이곳까지 찾아온 것은 단순히 한 곳의 유적지를 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수백 년 전 이 땅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선조들의 흔적을 직접 찾아보고 그들의 정신을 되새기기 위해서다. 다시 자전거에 올라 연곡로에서 월암로로 접어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기도 양주 제16호 보호수인 천년 느티나무가 나타났다. 긴 세월의 풍파를 묵묵히 견뎌온 거대한 느티나무는 마치 역사의 산증인처럼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전주 이씨 선조가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이 나무는 양주시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천년의 나무 앞에 서니 인간의 삶이 참으로 짦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한 생을 살며 수많은 길을 달리지만, 이 나무는 천 년이라는 세월 동안 같은 자리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묵묵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홍죽2리마을회관을 지나 권율로(39번 도로)로 들어서면서부터 본격적인 고갯길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관문은 소사고개였다. 고개 정상까지 약 1.8km. 히든파워의 도움을 받으니 한결 수월하게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쉐도우수는 히든파워가 작동이 안돼 애를 먹었다. 할수없이 힘들게 밀바하면서 올라왔다. 소사고개를 넘고 내리막길에서 잠시 숨을 돌리는가 싶더니 곧바로 말머리고개(마두령)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노루 피하다 범 만난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말머리고개는 생각보다 훨씬 가팔랐다, 한참을 오르다가 히든파워마저 힘에 부치는지 잠시 쉬었다 가자고 한다. 결국 정상 몇 m를 남겨놓고는 자전거에서 내려 밀바를 하며 올라갔다. 쉐도우수는 다시는 이 고개를 넘지 않겠다고 다짐할 정도로 힘겨워했다. 말머리고개는 포장도로가 놓이기 전에는 더욱 험준해 지나가는 차량들도 애를 먹었던 곳이라고 한다. 원래 이름은 말굽이고개였다고 한다. 중국 사신이 타고 오던 말이 이곳에서 굴렀다는데서 비롯된 이름인데,세월이 흐르면서 말굽이에서 말구리, 말두리, 말머리로 변해 지금의 이름으로 굳어졌다고 한다.
힘겹게 정상에 올라선 뒤 맞이한 내리막길은 그야말로 보상이었다.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시원하게 내려가니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다. 오르막에서 흘린 땀과 고통이 한순간에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고비골고개가 버티고 있었다. 연속되는 고갯길에 다리가 점점 무거워졌다. 고비골고개 정상 부근에 자리한 보테가카페 넓은 마당에서 잠시 숨을 고르기로 했다. 이곳에서 바라보니 우리가 힘겹게 넘어왔던 말머리고개가 정면으로 선명하게 보였다. 저 산을 우리가 자전거로 넘어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 다시 송추를 향해 페달을 밟았다. 송추로 가는 길에는 황사영 묘가 있다. 황사영(1775-1801)은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사위로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청도 제천 배론으로 피신했다. 그는 토기를 굽던 마을의 한 토굴에 숨어 약 8개월 동안 지내면서 중국 베이징 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조선 천주교의 박해 상황을 알리는 편지를 썼다. 이것이 훗날 황사영 백서로 알려진 문서다. 그 내용에는 당시 조선 천주교도들이 겪고 있던 탄압의 실상이 담겨 있었으며,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외세의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백서는 중국에 전달되지 못했다. 황사영은 1801년 9월 체포되었고, 같은 해 11월 대역죄로 처형되었다. 이 사건으로 그의 가족들도 뿔뿔이 흩어져 유배되거나 노비로 끌려가는 비극을 겪었다. 정약용은 강진으로, 정약진은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오늘날 황사영 백서의 원본은 바티칸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역사의 현장을 찾아가는 라이딩은 이렇게 뜻밖의 만남을 선물한다. 한적한 산길을 달리다가 조선시대의 역사와 천주교 박해의 아픈 흔적을 만나는 것이다. 자전거는 단순한 이동수단이 아니라 우리를 역사와 자연 속으로 데려가는 작은 여행선이 되어 주었다.
송추역을 지나 호국로에 이르자 어느덧 허기가 몰려왔다. 참나무가마솥진곰탕집에 들러 뜨끈한 진곰탕으로 점심을 호식했다. 차가운 날씨에 장시간 자전거를 탄 뒤 먹는 뜨끈한 곰탕 한 그릇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배추김치와 깍두기를 곁들이니 더할 나위 없었다. 식사 후 커피 한 잔도 빠질 수 없다. 따뜻한 커피로 몸과 마음을 녹이고 다시 길을 나섰다. 하지만 또 하나의 고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완만하게 길게 이어진 울대고개다. 울대고개를 넘어 의정부 시내로 들어선 뒤 백석천 자전거길에 진입했다. 백석천을 따라 달리면 동막교에서 중랑천을 만난다.
동막교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이제 도봉산역까지 남은 거리는 약 5km, 마지막 힘을 내어 페달을 밟았다. 도심을 가로질러 달리는 동안 오늘 하루의 여정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오후 3시경 마침내 도봉산역에 도착했다. 오늘 라아딩은 결코 만만한 여정이 아니었다. 특히 소사고개에서 말머리고개, 고비골고개로 이어지는 연속된 오르막은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않았던 고난의 길이었다. 히든파워가 없었다면 아마 모두가 기진맥진했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수록 전기자전거는 참으로 고마운 존재다. 자전거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단순한 운동이나 여행이 아니다.
좋은 친구들과 함께 길을 나서고,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고, 역사의 현장을 찾아가며,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삶의 작은 행복이다. 오늘도 멋진 벗들과 함께 진한 우정을 나누며 하루를 보냈다. 힘들었지만 행복했고, 고단했지만 마음은 더없이 풍요로웠다. 만추의 끝자락에서 떠난 마지막 라이딩은 그렇게 역사와 자연, 우정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여정으로 기억될 것이다. 친구가 있어 길이 즐겁고, 길이 있어 인생이 아름답다. 올 한 해 쉼 없이 달려온 바이콜 전사들에게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