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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인문학
1. 한 페이지 요약 및 견해
《치유의 인문학》은 광주 트라우마센터에서 한 달에 한 번 진행하는 ‘치유의 인문학’ 강연을 모아 정리한 책이다.
진중권, 서경식, 박노자, 박상훈, 조국, 고혜경, 정희진, 이강서, 황대권, 문요한 등 10여명의 인문학자들이 ‘트라우마’와 ‘치유’를 바라보고 정의하는 시선을 배울 수 있다.
사건은 역사가 되고 과거가 되었지만, 그에 따른 고통과 상처는 시간이 지난다고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게 개인이나, 공동체의 가슴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 상처, 즉 트라우마는 현재에도 남겨진 사람들의 살아있는 현재진행형 상처이다.
국가적인 큰 재난이나 사건 혹은 개인적으로 겪게 된 사건 후, 그 순간으로부터 영원히 멀어질 수 없는 사람들,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삶이 풀 수 없는 딜레마로 엉켜버린 사람들, 당사자가 아니면 가히 상상조차 쉽지 않은 고난은 지금의 시대를 이끌고 있는 민주주의란 과연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주기에 충분한 소재가 되었다.
진정한 힐링은 무엇인가?
인간에 의해 발생되는 폭력과 불평등의 연유는 무엇인가?
과연 정치란 무엇인가? 정치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가?
이분법에 익숙한 세상에서 양극화 문제는 어떻게 접근하고 다룰 수 있는가?
바람직한 분노는 무엇인가?
생태적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미래 사회의 주인이 될 지금의 아이들을 어떻게 길러야 하는가?
위와 같이 책은 이 시대의 살아 있는 사건을 예시로 수많은 질문들을 던지는 듯하다.
이렇게 현실과 사건에 대한 깊이 있는 강연자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공동체 속의 나’, ‘개인으로서의 나’의 포지션에 대해 고찰해 볼 수 있었다.
치유의 힘은 우리 각자의 내면에, 그리고 우리를 연결하는 공동체 안에 존재한다. 인문학은 나와 공동체를 성찰하게 한다는 점에서 ‘인문학 공부는 곧 세상과 사람들을 치유하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2. 나를 확장 시킨 책 속의 내용
아무래도 치유의 힘은 우리 각자의 내면에, 그리고 우리를 연결하는 공동체에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인문학은 나와 공동체를 성찰하게 한다는 점에서 ‘인문학 공부는 곧 치유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광주트라우마센터는 ‘치유의 인문학’을 통해 앞으로도 우리 사회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 관계의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부디 수많은 나무의 죽음을 통해 나오는 이 책이 삶의 가치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우리 시대의 고통과 상흔을 들여다보며 치유의 의미를 찾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p 17
‘치유로서의 철학’은 당연히 미학적인 부분을 포함합니다. 미학도 철학의 일부이니, ‘치유로서의 미학’도 결국 철학에 속하는 것이지요. 최근 미학에서도 ‘힐링’이라는 말이 새로운 화제로 떠올랐습니다. 스위스 소설가 알랭 드 보통이 <영혼의 미술관 - 예술은 우리를 어떻게 치유하는가>라는 책을 냈습니다. 우리는 왜 예술을 하느냐? 여기에 대해 그동안 많은 이론들이 있었습니다. 불상, 성당 등에 예술이 녹아 있듯 예술에는 종교적인 숭배의 기능이 있습니다. 또한 예술은 정치적인 비판, 사회적인 비판 등의 기능을 하기도 했지요. 가령 황석영 씨의 리얼리즘 소설에는 강한 사회적 비판의식이ㅣ 담겨 있지요. 그런데 최근에 예술이 ‘힐링’의 기능도 한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알랭 드 보통은 우리 인간은 어딘가 불완전하다고 말합니다. 사실 인간은 모두가 불완전한 존재이지요. 반면 예술 작품은 항상 조화로운 모습입니다. 인성은 어딘가 치우쳐 있거나 비뚤어졌거나 어딘가 조화롭지 못합니다. 그때 예술작품을 통해 조화라는 것을 배우고, 예술작품을 통해 자기 자신의 상처를 인정하고 그 부분을 치유한다는 겁니다.
p 21
‘치유로서의 철학’, ‘철학으로서 치유’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명제로 돌아가 보죠. 정신에 걸린 병을 치유하는 것은 그동안 프로이트가 창시한 정신분석학이 해 왔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 서양철학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바로 무의식이라는 새로운 세계의 발견이었습니다. 데카르트가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이성이에요. 그러나 프로이트의 후예인 라깡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곳에 나는 없다.” 즉 인간은 데카르트가 생각하듯이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을 움직이는 건 이성이나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적 욕망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말이 있죠? “인간은 합리적인 동물이 아니라 합리화 하는 동물이다.” 무의식적 욕망에 따라 할 짓 못 할 짓 다 해 놓고, 변명을 해야 할 때가 되면 그때 동원하는 게 이성이라는 겁니다.
아무튼 프로이트는 인간의 의빗ㄱ보다 무한히 넓은 무의식의 세계를 발견하고, 정신분석을 통해 의식하지 못하는 이유에서 정신에 고통을 받는 환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20세기에 들어와 정신병 환자가 급증합니다. 정신병은 고대부터 죽 있어 왔습니다만, 20세기 초반 엄청나게 증가세를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생산 성격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생산 자체가 자연적이었습니다. 봄에 씨 뿌리고 여름에 김매고 가을에 수확하고, 겨울에는 마실 다니면서 가마니 꼬고. 고러나 산업 생산은 기계화된 생산입니다. 공장에서 기계가 돌아가고 인간이 기계에 맞추어서 살아야 합니다.
p 42
이른바 잘나가는 사람들이 떠드는 ‘처세술’은 그냥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대개 결과론적인 논리거든요. 가령 열 명 중 한 명이 성공하고 나머지 아홉 명은 실패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경우 성공한 한 사람과 실패한 아홉 사람 사이에 차이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솔직히 말하면 차이가 없습니다. 다들 고마고만한데 운이 따라줘서 그중 한 사람이 성공했을 뿐입니다. 동일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성공한 사람은 자기가 운이 좋아 성공했다고 믿고 싶지는 않아 합니다. ‘내가 성공한 것이 단지 운 때문이라니’ 하며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죠. 자기가 성공한 데에는 남들이 갖지 못한 뭔가 자기만의 특별한 비결이 있다고 믿고 계속 그렇게 착각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한테 자랑스레 이야기해 주고 싶어 합니다. 결국 그 이야기는 자화자찬이 되고말고요.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p 48
힐링이 정말 필요한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멘토가 필요한 사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꼭 필요한 사람과 범위를 넘어선 이 보편적 힐링과 멘토의 문화가 제게 뭔가 불편함을 줍니다. 왜 멘토가 필요합니까? 자기 인생은 누가 결정합니까? 자기 인생을 결정하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입니다. 거기에 멘토란 있을 수가 없지요. 멘토 없이도 사람들 누구나 자기 인생 주체를 세우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p 52
한국에서도 20여 기의 원전이 가동 중이고, 노후화한 고리원전 등 각지에서 사고나 트러블, 혹은 불량 부품 묵인 등의 사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언제 후쿠시마 같은 대 참사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고, 일단 사고나 일어나면 피해는 한국 내 뿐 아니고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전역에 미칠 것이 명백합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일본 원전 사고의 교훈에서 배우기보다 오히려 이것을 좋은 기회로 삼아 원전 수출에 힘쓰고 있습니다. 요컨대 이윤을 위해서는 안전도 인명도 경시하는 기업과 이것과 유착한 국가의 체질은 한국도 일본도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p 71
물론 트라우마로 고통 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경감하기 위한 대응이나 치료가 불필요하다든지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꼭 필요합니다. 지금 상처로 고통 받는 사람에게는 상처를 가볍게 하는 처방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개인 간의 범죄나 사고가 아니고 가해책임자가 기업이나 국가인 경우 ‘트라우마의 치료’라는 사고방식이 책임 회피나 은폐로 악용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p 81
광의의 폭력의 정의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이 굉장히 많습니다. 심층적인 차별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똑같이 일하는데 돈을 다르게 받고, 대우를 다르게 받는 것 또한 폭력입니다. 같은 라인에서 일하는데 작업복이 다르고, 호칭도 다르고, 명찰도 다르고, 점심도 다른 데서 먹으면 그것 또한 일종의 폭력입니다. 바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관계이지요.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을 하는데 모든 대우가 다르면 차별을 받는 입장에서는 소속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노동조합에조차 가입할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 노동조합의 약 70퍼센트 정도가 비정규직을 같은 노동조합에 가입시켜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비정규직은 궁여지책으로 비정규직 노동조합을 만듭니다.
p 83
그다음으로 사회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간접 폭력 중에서는 애정을 줘야 할 사람한테 애정을 주지 못하는 것도 폭력입니다. 아이들을 키우는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애정을 주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성장할 때 같이 놀아 주고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애정의 에너지를 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도 폭력입니다.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애정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것도 폭력입니다.
p 89
자본주의 사회를 옹호하는 사람들과 논쟁할 때 늘 듣는 이야기는, 공산사회는 말 그대로 공상사회다, 망상사회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원래 욕심이 많기 때문에 그런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욕심이 많은 만큼 자본주의는 필연적인 것이다, 라고 합니다. 인간은 남을 위해서 살지 않고 자신을 위해 살기 때문이다, 라고 하는데 인간의 욕심은 곧 폭력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정말 그런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p 90
동물이나 인간한테 있는 본능 가운데 하나가 자기방어 본능입니다. 자기가 자기와 관련된 사람들을 보호하는 차원의 공격성이 필요하지 그 이상의 공격성은 필연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원시 공동체 사회나 무계급 사회에서는 방어 정도는 했지, 작은 갈등이 있었을지는 몰라도 사상이 다르면 전쟁하고 이런게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폭력성이 계급 사회에 의해서 점차적으로 키워진 것이지 인간이 원래 폭력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한 여러 논쟁들이 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에리히 프롬의 의견을 신뢰합니다.
계급 사회가 인간의 폭력성을 만든 것이지 근본적으로 인간의 폭력성은 방어 정도의 폭력뿐이다, 라는 것이 필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믿으면 살고 싶은 마음이 훨씬 더 강력해집니다.
p 92
어떻게 보면 종교는 아주 오래전부터 폭력을 합리화해 왔으므로 사실 놀랄 것도 없습니다. 타자나 소수자를 죽임으로써 우리 집단의 단결을 높인다. 과연 이 같은 논리가 고대 사회에만 있는 것일까요? 박정희 정권의 반공주의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다만 과거에는 타자가 외부에 있었지만 이제는 외부의 타자가 우리 내부의 타자로 바뀌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p 100
정치와 정치학은 인간이 선하게만 살 수 없다는 전제 위에서 시작합니다. 악에 맞서 그 악이 사회로 더 번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정치일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악마의 무기를 부여잡아야 하는 것, 비록 그것이 자신의 영혼을 위태롭게 하더라도 나아가 자기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진다 하더라도 공동체를 위해 기꺼이 그렇게 하는 것이 정치일 때도 많습니다. 정치를 통해 구원받을 수는 없지만 구원받을 만한 삶을 살고자 하는 사회구성원이 많아지게 하는 것, 어쩌면 이를 고민 하는 것이 정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p 105
정치는 중요합니다. 사적 삶을 위해서도 정치가 중요합니다. 사적 삶을 즐기되, 그 때문에 부끄러워지지 않으면 좋은 정치가 실현되고 있다는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들꽃을 찍어 자신의 블로그나 페이스북에 올려 두고 주변사람들이 그 소소한 아름다움에 공감할 수 있게 해주고 싶다면, 그렇게 살면 됩니다. 다만 그렇게 하더라도, 공적 문제에 관심 갖지 않는 자신이 부끄럽지 않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개인 삶을 아름답게 하는 일이 공적 삶과 잘 어우러진다면, 아마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정치가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개개인의 풍요로운 삶을 위해서라도 모두에게 공통된 공동체의 조건을 개선하고 이끄는 것, 정치의 본질은 거기에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개인 삶을 추구해도 부끄럽지 않은 사회를 만드는 것, 그게 좋은 정치의 본질입니다.
p 126
이익이 있는 곳, 열정이 있는 곳이라면 결사가 있어야 됩니다. 결사가 없ㅇ면 통치자들이나 어떤 조직 운영자들의 선의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사체는 민주주의의 꽃이고 그 결사 중에서 최고의 결사체는 정당입니다. 정당이 제 역할을 해야 노사관계도 공정하고 책임 있는 기능을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p 131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함께 땀 흘려 일하며 협력해 본 경험입니다. 북유럽에서는 성인이 되어 취직할 때 청소년기에 했던 노동의 경험을 중시합니다. 청소년기에 다른 사람과 땀 흘려 노동하고 협력해 본 경험을 못했는데, 회사에 들어와서 어떻게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겠냐는 것이지요. 학교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책상에 오래 앉아 있기를 서로서로 경쟁시키는 교육보다 함께 협력하는 즐거움을 가르치고 경험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함께 일하고 협력하는 것만큼 좋은 교육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땀 흘려 함께 일하는 성취감을 느껴 본 사람은 절대 다른 사람을 위해하는 시민이 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몸이 크는 만큼 열정도 커집니다. 중학생 정도가 되면 이미 몸도 거의 컸고 열정 또한 성인의 열정과 닮아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공익을 위해 무엇을 할지를 가르치지 못하는 교육은 곤란합니다. 정치를 통해 사회를 졸게 만들고, 스스로 리더도 되고 정치가가 될 수도 있음을 가르쳐야 민주주의입니다. 문제가 있다고 느끼면 화만 내지 말고 정당을 만들고 통치 엘리트가 되어 보라고 교육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왜 동료나 친구들이 왕따 시키고 괴롭히는 것으로 열정을 허비하겠습니까? 자기 안의 열정을 다른 친구들과 협력하고 변화와 개선을 이끄는 노력으로 나타나게 하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누구나 설득력 있는 말과 행동으로 현실을 변화시키는 시민적 덕목을 함양할 수 있지 않을까요?
p 144
다들 양극화, 양극화 얘기를 합니다. 20퍼센트가 80퍼센트의 부를 차지하고 있다는 얘기도 합니다. ‘정치적 민주화’가 된 지금, 투표가 자유롭습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기간 동안 ‘자유권’이 퇴행하고 있지만, 박정희, 전두환 정부 시절과 비교하면 우리의 입은 매우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교육, 일자리, 주거 문제는 어려워졌습니다. 부모가 재벌이 아닌 이상 자신이 아무리 좋은 대학을 나와도 일자리와 주거 걱정이 큽니다. 부모의 경우 자신이 집이 있고 직장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식의 앞날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픕니다. 투표가 자유롭고 입이 자유로워졌다 하더라도 사회경제적 삶이 지극히 불안해졌습니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항쟁 등을 통해 정치적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자유권’은 상당 수준 확보되었지만,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사회권’은 추락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987년 헌법이 보장하는 민주주의가 영양실조에 걸린 것입니다.
물론 재벌의 경우는 다릅니다. 얼마 전 물의를 일으킨 ‘땅콩 부사장’ 같은 경우는 태어날 때부터 아무 걱정이 없지요. 아무 걱정 없이 살다가 나이 마흔에 부사장이 될 수 있고, 대한항공 모든 비행기가 사실상 자가용 비행기지요. 비행기를 세워라 말아라 등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너트 봉지를 깠느냐 안 깠느냐를 따지며 직원들을 무릎 꿇게 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이런 경우는 극소수입니다. 대한민국에 사는 압도적 다수는 ‘사회권’의 위기 때문에 고통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서 자리를 잡으신 분, 집이 있으신 분 계실 겁니다. 그러나 그런 분이라고 하더라도 자식 걱정은 많으실 겁니다.
p 162
대중이 ‘경제 민주화’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은 지난 2012년 대선 시기입니다. 경제 민주화를 위한 여정은 이제 시작입니다. 정치적 민주화가 그러했듯이, 경제 민주화도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 비해 우리는 경제 성장도 정치적 민주화도 단기간 내에 이루었습니다. 이제 경제 민주화 차례입니다. 내 자신과 가족의 현재 삶, 나의 노후 내 자식의 미래 등을 위하여 현재 여기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합시다. 그것이 변화의 출발입니다.
p 168
꿈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악몽의 의미는 지금 본성에 어긋나는 중차대한 상황이니 ‘잠만 자지 말고 제발 깨어나라’고 무의식이 보내는 119 메시지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당장 깨어나기를 촉구하는 긴급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의식으로는 도저히 소화되지 않는 이 사건을 무의식의 표현인 꿈은 과연 어떻게 묘사하고 있을까요? 결코 잊을 수도, 잊어서도 안 될 이 사건을 이 시기 사람들이 꾸는 꿈으로 증언하는 것이 꿈 공부를 하는 사람이 해야 할 몫이라 생각합니다.
p 183
신화를 보면 진정한 영웅은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자리가 있는데 그곳이 지하세계, 즉 죽음의 세계입니다. 다이버들이 보여주듯, 무의식의 세계로 자발적으로 들어간다면, 깊이로의 여정은 가능할 것입니다. 이는 기존의 ‘나’가 죽어야만 하는 여정입니다. 이 지점이 바로 현대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부분입니다. 그렇지만 삶은 죽음의 깊이를 요한다는 것이 불변의 진리입니다. 진정으로 산다는 느낌은 죽음이 가장 가까이 있을 때 생생해집니다. 온전히 사는 삶과 죽음의 향취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기꺼이 죽음의 세계로 걸어 들어가는 다이버들이 이 순간 가장 치열하게 살아 있고 또 삶의 의미에 대한 향취를 제일 강하게 풍기는 것처럼 말입니다.
p 187
더 큰 문제는 아이들 야성을 죽여간다는 사실입니다. 뭇 생명체는 예외 없이 가장 강력한 본능이 생사의 본능일진데, 가자 몸이 말하는 이 본능의 소리보다 부모님 말씀, 선생님 말씀을 더 잘 들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우리 교육은 한참 잘못되어 보입니다.
p 200
대개 사람들은 평소 목소리가 없던 사람들, 비가시화된 공간에서 성원권을 박탈당해 온 이들이 공적 영역에 등장하기만 해도 갈등과 혼란의 주범으로 인식합니다. 특히 분노만큼 당사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사회적, 심리적 허용도에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문제도 드물지요, 성별이 대표적인데 이는 가정폭력 상황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남성은 여성을 열 대 때려도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이해받지만, 여성의 정당방위는 한 대 혹은 비명만으로도 폭력으로 인지됩니다. 여성은 남성보다 덜 폭력적이고 덜 분노하며 고통에 대한 인내심이 강하다는 통념 때문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구타하다가 여성이 사망할 경우 남성은 여성을 때릴 권리가 원래 있으므로 살인이 아니라 ‘과실치사’이지만, 그 반대의 경우 여성이 남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비정상이므로 ‘계획된 살인’으로 보는 사례가 많습니다.
분노는 인간의 보편적 경험이지만 이처럼 누구의 행위인가에 따라 사회적 해석이 다른, 대단히 중요한 정의의 문제입니다. 분노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태도를 보면 한 사회의 정치와 권력관계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분노는 위치성과 당파성을 뜁니다. 분노에 대해 우리 대부분은 부정적입니다. 하지만 개인의 분노를 똑같이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의 분노가 참아야 하고 조절해야 할 감정은 아니며, 분노, 혐오, 증오 등은 각기 누가 누구를 향해 갖는 것인가에 따라 의미가 다르다는 뜻입니다.
분노, 상처, 고통은 ‘감정’이 아니라 ‘인지’ 작용입니다. 감정적으로써 분노를 언설하는 것은 감정과 이성을 나누는 이분법의 산물입니다. ‘분노는 감정이고 대화는 이성이다’ 식의 사고방식은 아마도 분노에 대한 가장 일반적이면서도 잘못된 인식일 것입니다. ‘분노=폭력’이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 누구의 분노’인가가 가장 본질적인 논쟁의 주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정하는 과정 자체가 이미 정치적인 행위입니다. 분노를 이성적 판단을 상실하고 생각을 잃은 상태로 본다면, 분노는 ‘문제적인 개인의 문제 행동'일 뿐이게 됩니다. 분노의 원인에서 사회적 맥락을 제거하고 탈정치화 시키는 것이지요. 이때 억울한 사람들은 더욱 분노하게 되고 이른바 ’한‘이라는 ’사유‘가 몸에 새겨지게 됩니다. 다시 강조하면, 분노는 인식 과정이고 그 ’해결‘은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다르게 해석하기의 과정, 인식의 교정, 새로운 앎의 과정입니다. 치유는 ’어루만짐‘을 넘는, 새로운 인식입니다.
p201
분노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분노의 맥락이 중요하지요. 그리고 그 맥락은 말할 것도 없이 사회문화적입니다. 분노할 만한 사건의 기준은 삶의 기준이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비슷합니다. 삶에 대한 기대, 자신에 대한 기대, 윤리, 정치적 의식은 사회에 대한 대응, 적응, 살아가는 방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우울과 폭력이 만연하다는 데 이견이 있는 이는 드물 것입니다. 우울과 폭력은 겉보기에는 상반되지만 원인은 비슷합니다. 분노. 분노가 자신을 향할 때 우울이 되고 타인에게 전가되면 폭력으로 나타납니다. 상황마다 다르긴 하겠으나 분노의 시작은 억울함, 옳고 그름을 둘러싼 정의의 문제입니다. 억울함은 진실이 아니라 현실에서 ‘패배’한 사람의 심정입니다. 그러니 인생에서 억울함만큼 얼울한 일도 없습니다.
p 203
분노 표현을 조절하거나 참아야 하는가의 문제는 부차적입니다. 누구의 어떤 분노인가가 중요합니다. 가진 자가 더 갖지 못해 분해하는 것 이외의 모든 분노 표현을 우리는 격려해야 합니다. 분노는 자연스러운 자기 존중과 정의의 표현이며, 폭력은 마틴 루터 킹의 표현대로 가장 지적인 행위입니다.
무엇이 정의인가는 복잡한 문제지만 지금 사회는 성별, 지역, 계급, 장애, 성적 지향성, 연령 같은 사회적 모순으로 인해 사회적 약자와 피해자 집단의 분노만이 분노가 됩니다. 이들의 분노를 가해자의 피해의식과 함께 일반화하여 인간의 보편적 감정으로 보는 데에서 문제가 시작됩니다. 모든 이에게 ‘참으라’는 것은 힐링이 아니라 킬링입니다. 당한 것도 억울한데 참아야 하는 ‘도덕’까지 요구받으니까요.
p 204
분노는 감정이면서 또 감정이 아닙니다. 분노가 감정으로 드러나는 데는 상황 경험 - 인지 - 생각과 판단 - 사고의 체현 등 여러 단계를 거칩니다. 실상 분노는 최후의 지식인 셈이지요. 분노는 인식이지 통념적인 의미의 감정이 아닙니다. 분노는 의식입니다. 의식은 ‘의’와 ‘식’의 인식 경로가 다르기 때문에 어려운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분노가 감정으로 ‘교정’되는 과정에는, 이성의 우월성이 작용합니다. ‘감정대로 행동’하지 않고 이성적인 판단을 했다는 것입니다. 대개 ‘이성적으로 행동하라’는 말은 여러 가지 감정 가운데 특히 분노에 해당합니다. 대중의 분노는 체제를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분노가 감정이라는 인식의 시작은 정신과 육체의 구분입니다. 주지하다시피 근대의 arj의 모든 이분법의 시작은 몸과 정신의 분리인데, 감정은 ‘몸부림’이라는 말처럼 몸과 의식의 경계에서 그 지위가 애매합니다. 사회주의의 경우에는 좀 달랐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구분에서 시작하여 정신노동에 가까울수록 고급 노동으로 위계화 됩니다. 당연히 순전한 정신이나 투명한 육체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소설가는 (머리가 아니라) 손으로 글을 쓰며,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은 두뇌와 감정 능력을 최대한 동원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정신과 육체의 구분은 감정을 ‘감정적으로 인식’하기 위한 장치일 뿐입니다.
p 208
개인의 몸은 당대 사회의 체현입니다. 개인의 상처나 고통은 당연히 사회의 영향으로 인한 것입니다. 인간의 삶에서 사회적이지 않은 것, 언어 밖의 인식, 관계 영역을 떠난 문제는 없습니다. 개인의 상처든 집단 트라우마든 정치적인 이슈인 것이지요. 그러나 유난히 상처나 분노, 감정과 같은 단어들은 개인적인 차원의 것으로 간주당하고 민주주의의 영역에서 배제되어 왔습니다.
이성의 허상과 관념성, 정치 개념의 협소함, 공사 구분 이데올로기의 성별화, 개인과 사회의 대립적 사고는 고통과 치유를 지성의 영역에서 추방했습니다. 기능주의와 구조주의는 대립하지만, 이 부분에서는 공통분모를 형성해 왔습니다. 그들이 세운 정치와 구조의 개념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인간사, 특히 사적 영역이라고 구획해 놓은 부분을 탈정치화, 비가시화한 결과입니다.
p 221
현대인은 거의 대부분 작든 크든 약하든 강하든 사실은 정신적인 아픔을 다 겪고 있습니다. 물론 의학에서 말하는 정신병은 나름 엄밀한 진단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문학자, 철학자가 볼 때에는 사실은 우리 모두 정신적으로 많은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항우울제인 프로잭, 약을 사용할 것이 아니라 철학을 공부하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약국에 가서 약을 먹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아프면 어떻게 하죠? 물론 마음이 아파도 병원에 가고 약도 먹고 교회나 성당이나 절에도 가고 상담도 받습니다. 그런데 잊으면 안 되는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인문학을 하는 것입니다. 인문학 중에서도 철학을 하는 것, 그것이 중요한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p 226
인간은 두 개의 시대를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은 오로지 하나의 시대를 삽니다. 그것이 각자의 현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시간이 지나서 역사가들이 볼 때에는 상대적으로 그래도 안정적인 시대가 있었고, 역사를 기술할 때 하루, 일주일 단위로 얘기하는 격동의 시대가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전후기가 그렇습니다. 그런가 하면 200~300년인데 그저 몇 줄로 넘어가도 되는 시대가 있고, 그것은 지나가서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태평성대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몸담고 있는 시대를 부르는 말이 될 수 없고, 오로지 상당히 세월이 지나서 그 시대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회고적으로 말할 때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p 236
스토아학파의 사유는 ‘어지러운 때에 마음의 평화 찾기’f, 핵심 개념은 ;아파테이아‘입니다. 아파테이아는 합성어로, ‘없다’는 뜻의 ‘아’와 ‘파토스’가 합쳐진 말입니다. ‘파토스가 없다’인데, 파토스의 뜻이 꽤 여러 개입니다. 파토스가 로고스와 한 짝을 이루면, 우리는 이것을 ‘감성’이라고 이해합니다. 아파테이아는 파토스가 없는 상태, 파토스는 명사로서 ‘겪음’,‘겪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인간은 살면서 외부세계로부터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겪게 됩니다. 그 인간이 겪게 되는 수많은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 이것이 아파테이아입니다.
시시각각 밀려드는 수많은 분노, 좌절, 슬픔, 기쁨, 이 엄청난 것으로부터 내가 주인인 상태, 내가 흔들리지 않는 상태, 이 상태를 아파테이아라 합니다.
파토스는 영어로 ‘패션’으로, 패션은 열정, 정영, 수난이라는 뜻입니다.
p 241
영어에서 우선 ‘traquility'라는 용어를 썼습니다. 영어권 학자들이 에피쿠로스학파를 이해하려 무지 애를 쓰며 선택한 용어가 traquility입니다. 이는 보통 ‘고요, 정적’을 뜻합니다. ‘고요’와 ‘정적’에서 한 글자씩 따서 만든 ‘적요寂寥’라는 한자가 있습니다. 적요. 이는 보통 고요한 게 아닙니다. 무지막지하게 고요한 것입니다. 이번 기회에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정적을 얼마나 잘 견디고 얼마나 기꺼이 고요를 누리십니까?
현대인 대부분이 잠깐 동안의 고요조차 견디지 못합니다. 누군가 옆에 있어야 하고, 끊임없이 수다를 떨어야 합니다. 그러다 어찌어찌하다 5분 혹은 10분만 혼자 있어도 무지하게 두렵고 무서운 마음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고요와 정적을 견디지 못하는 시대, 고요와 정적을 견디지 못하는 문화가 현대문화입니다.
그런데 실은 그 적요와 친하게 지내고 적요의 시간을 더 많이 가짐으로써 자기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바로 ‘아타락시아’입니다. 에피쿠로스학파가 주장하는 것이지요.
p 245
우리에게 닥쳐오는 고통과 불안은 정말 다양합니다. 연령별로 다르고 처한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고통과 불안 중에서 인간에게 으뜸가는 고통과 불안은 어디서 올까요? 죽음입니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합니다. 죽음과 관련된 책에는 에피쿠로스의 말이 빠지지 않고 들어갑니다. 어떤 경우는 첫머리에 에피쿠로스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시작하기도 합니다.
“내가 살아있을 때 죽음은 아직 오지 않았다. 죽음이 왔을 때 나는 이미 없다. 그런데 왜 죽음을 두려워한단 말인가?”
에피쿠로스는 불안과 고통의 근원은 죽음으로부터 오는데, 우리는 다행히 죽음을 직면할 일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당당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p 250
우리 인간은 선입관, 고정관념, 편견이 많은 종족입니다. 이것을 없앤다는 건 무지하게 어렵습니다. 이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념은 에포케입니다. 에포케는 판단 중지, 판단 보류, 판단 유보인데 무엇에 대한 판단을 보류하느냐 하면, 최종적 진리입니다. 그들은 우리 인간은 너무도 쉽게 ‘이것이야말로 최종적 진리이다, 이것이야말로 아무런 반론이나 도전이 불가능한 최종적 진리다’라고 믿는다고 지적합니다. 이것이 문제의 출발입니다.
제아무리 수많은 탐구를 했다 해도 ‘그 이상은 없다, 최종적 진리이다’라는 판단은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 안의 모든 분노와 좌절이 거기에서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것을 현대 한국 사회에서 실감합니다.
p 257
생태 위기를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우리 모두 생태 위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여기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지 참 어렵기만 합니다. 수많은 석학이나 유명한 사람이 나와서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변한 게 없습니다. 저는 현실은 낙관적으로 살지만, 미래에 대해서는 굉장히 비관적인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현 시대가 생태 위기 시대라는 것을 아마 다들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미 상식이 된 지 오래라 오히려 무감각해진 측면이 있습니다.
바다, 강, 지하수, 토양이 다 오염돼 있고, 유전자도 오염돼 있습니다. 오염된 환경 속에서 오염된 식품을 날마다 먹다 보니 인성도 다 파괴되었습니다. 사실 사회가 험악해지는 제일 큰 원인 가운데 하나가 먹거리 때문입니다. 우리는 식품을 먹는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화공약품을 먹는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p 260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가장 큰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가 방사능이고 하나가 GMO입니다. 아마 이 두 가지 때문에 인류는 향후 백년을 넘기지 못할 것입니다. 방사능과 GMO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가 한번 오염되면 전 지구가 오염된다는 것입니다. 방사능은 물리적 오염이고, GMO는 생물학적 오염입니다. 체르노빌 핵발전소가 폭발하자 며칠 뒤 1600킬로미터 떨어진 스웨덴에서 방사능 낙진이 검출되었습니다. 미국에서 생산된 GMO식품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자유무역협정’에 따라 전 세계에 수출되고 있습니다.
두 번째 공통점은 한 번 유출되면 되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판도라의 상자처럼 한 번 상자를 빠져나오면 다시 주워 담을 수가 없습니다. 땅속에 잠자고 있던 우라늄을 꺼내 태워서 핵발전을 하고 나면 ‘죽음의 재’가 나오는데 이것은 짧게는 몇 만 년에서 길게는 몇 억 년 까지 없어지지 않습니다.
세 번째가 생물의 몸속에 지속적으로 축적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생물은 먹이사슬에 의해 먹고 먹히는 관계에 있는데, 이 독성 물질들은 최종 포식자의 몸에 가장 많이 축적됩니다. 지구상에서 최종 포식자가 누구입니까?
P 263
생태계가 건강하게 유지되는 첫 번째 비밀이 바로 종의 다양성입니다. 생물종이 다양할수록 생물들 사이의 먹고 먹히는 교류활동이 활발해져 생태계가 활성화됩니다. 먹이활동이 저조하거나 없으면 생태계가 죽어 있는 것입니다.
P 267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려면 생산 수단을 놓치면 안 됩니다. 그 생산 수단 가운데 토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토지는 곧 생태계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생태계가 망가졌다는 것은 땅이 병들었다는 얘기와 같습니다. 부재지주가 경작자처럼 땅을 돌볼 수 있겠습니까? 어림없는 소리입니다. 그들은 그저 땅값이 오를 때만 호시탐탐 기다릴 뿐입니다. 지금 세상이 이렇게 망가진 것은 흙의 소중함을 모르는 자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P 275
사람들의 버킷리스트를 보면 꼭 들어가 있는 것이 여행입니다. 여행은 인류 공통의 희망입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여행을 갈망하는 걸까요? 정신과 의사를 하다 보니 가끔 “동물도 자살을 하나요?” “동물도 정신병에 걸리나요?” 와 같은 질문을 받습니다. 어떨까요? 원래 야생 속의 동물들은 아주 특별한 경우를 빼놓고는 이상한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야생을 떠난다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동물들의 이상행동이 나타나는 가장 흔한 곳은 동물원입니다. 우리에 갇힌 동물들은 빙글빙글 돌거나, 몸을 좌우로 흔드는 것과 같은 이상한 행동을 보입니다. 이를 ‘정형행동’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 털을 뽑거나 벽에 머리를 부딪히거나 자기 살을 물어뜯기도 합니다.
이런 자기 파괴적 행동이 나타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동물들이 살아야 할 자연과 단절된 채 갇혀지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동물원의 비생태적 환경에 대한 기사가 나오면 많은 사람이 빗발치듯 항의합니다. 엄연한 동물 학대이며 그럴 바에는 동물원을 없애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이는 과연 동물들만의 이야기일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는 과연 얼마나 생태적일까요? 굳이 수치로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의 정신건강 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복합적이지만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이 비생태적이고 자연과 단절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P 280
이 이야기는 곧이곧대로 보면 남자는 밖으로 나돌고, 여자는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아주 고리타분한 이야기일 수 있겠지만 사실 두 주인공은 남과 여를 의미한다기보다 우리 안의 이주성과 정착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디세우스는 이주성을 상징하고 페넬로페는 정착성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결국 삶이란 떠남과 머묾의 두 리듬이 교차하는 것이며, 내면의 북소리가 울리면 전쟁에 나간 오디세우스처럼 우리도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 그 새로운 세계에서 페넬로페처럼 뿌리는 내리고 정착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두 리듬의 균형입니다. 늘 일상을 거부하고 새로운 곳만을 찾아다니는 ‘반복혐오증’도 문제이고, 변화를 두려워하고 현실에 안주만 하는 ‘일탈공포증’도 문제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질문을 던져 봅니다. 정착성과 이주성 가운데 자신은 몇 점인가 생각을 해 보세요. 변화를 싫어하고 안정만을 추구하면 1점, 햄릿형입니다. 그리고 변화만을 추구하고 안정을 싫어하면 7점, 돈키호테형입니다. 그 둘 사이가 어느 정도 조화를 이룬다면 가운데인 4점입니다. 여러분은 몇 점일까요?
P 286
일을 하면서는 여행을 꿈꾸고 여행을 가서는 두고 온 할 일을 떠올리는 등 현대인의 마음은 늘 방황합니다. 동명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가 주인공인 ‘나’에게 한 말은 바로 우리들에게 한 이야기입니다.
“당신은 너무 많이 생각해요, 그게 당신 문제예요.”
결국 힐링이란 뇌의 특정 기능의 과잉 상태에서 벗어나 전체적인 균형을 되찾는 것입니다. 생각 과잉에 빠져 있는 현대인에게 중요한 것은 생각을 내려놓으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감각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몸을 움직여야 합니다. 운동은 감각 기능을 활성화시켜 뇌 전체의 균형을 찾는 데 좋습니다.
우리가 온전히 감각을 느낄 수 있을 때 우리는 현재에 존재하게 됩니다. 아이들은 안 좋은 일이 있어도 빨리 잊습니다. 생각 기능이 많이 발달되어 있지 않기에 과거의 일을 후회하거나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미리 걱정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감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며 현재를 삽니다. 그렇기에 아이들은 불행을 빨리 잊을 수 있고 내일의 행복에 저당 잡히지 않으며 바로 오늘 행복할 수 있습니다.
P 287
불행한 사람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과거의 불행을 생생하게 기억해 낸다는 것입니다. 트라우마를 받으면 시간감각이 뒤엉켜 버립니다. 시간이 흘러가지 않고 그때의 감각이나 감정이 계속 남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분들은 그 기억을 떠올릴 때 마치 그 시공간 속에 다시 있는 것처럼 느끼기에 생생하게 기억을 합니다. 이를 내적 심상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과거의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떨쳐내는 분들은 외적 심상으로 바라봅니다. 즉,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경험이 분리되어 ‘현재의 나’가 ‘과거의 나’를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내적 심상은 스크린 속의 주인공이 되어 과거의 일을 재경험 하는 것이라면, 외적 심상은 스크린 밖의 객석에서 관객이 되어 과거에 있었던 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감각과 감정이 덜 떠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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