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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낌새를 뚫어보는 지혜
信天함석헌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를 시험하려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표가 될 만한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당신들이 저녁때에는 ‘하늘이 붉은 것을 보니 날씨가 맑겠구나!’ 하고 아침에는 ‘하늘이 침침한 것을 보니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 합니다. 당신들이 하늘을 보고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왜 시대의 징조는 분별하지 못합니까? 악하고 절조 없는 이 세대가 기적을 요구하나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줄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거기 버려두고 떠나가셨다.(마태 16장 1~4절)
'자칫하다가는’
우리나라는 지금 대통령 자리를 맡는 분이 이것은 ‘위기관리 내각’이라고 이름을 붙이리만큼 위대한 대목에 부딪쳤습니다. 위태하다는 것은 역사의 나가는 길이 갑자기, 미리 짐작도 못하게, 굉장히 험한 난관에 빠졌기 때문에 자칫하다가는 여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나라가 아주 망해 버리든가, 그렇지 않으면 설혹 살아남는다 해도 제대로 올바른 궤도에 올라 발전의 길을 밟게 되려면 몇 십 년, 혹 몇 백 년의 혼란기를 거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나는 '자칫하다가는’이라는 조건을 붙였습니다. 아주 덮어놓고 희망이 없다는 건 아닙니다. 잘만 하면, 정신을 똑똑히 차리기만 하면, 정면으로 날아드는 화살을 앞이빨로 물어 멈추고 다시 그것을, 잽싸게 시위에 먹여 돌이켜 쏘아 적장을 잡는 옛 명장의 솜씨같이, 나라를 건질 뿐 아니라 전화위복으로 민족의 빛을 더하게 할 수조차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온 민족의 정신이 통일되지 않고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자칫하다가는’ 입니다.
그 위기란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서 오게 된 것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이 다 잘 알고 있습니다. 새삼 말하는 것이 도리어 씨알의 제 업신여김 같아 그만둡니다. 그리고 다만 어떻게 하면 그 지혜와 용기를 얻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예수님의 말씀을 빌어 말씀해보기로 합니다.
위에 끌어다 쓴 성경 본문은 예수께서 반대자들의 간교한(참으로 나라를 위해 바른길을 더듬는 심정에서가 아니라, 말꼬투리를 잡아 죽여 버리려는 악의에서 하는) 질문에 대해 대답하신 말씀입니다.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는 다 같이 로마 세력 밑에 있으면서도 서로 세력다툼을 하여 서로 원수로 미워하는 사이입니다. 그러나 참과 사랑과 믿음으로 불쌍한 씨알들을 깨워 건지시려 애쓰시는 예수의 말씀이 부정·부패·권모·흉계로 로마 세력과 타협해 가면서 씨알을 지배·착취하려는 그들의 귀에 다 같이 해적 배를 비추는 탐조등의 불빛같이 무섭고 밉게 들렸을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 공통대적인 예수를 잡기 위해 공동전선을 편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언제부터 “세계의 악은 언제나 잘 협력을 하는데, 세계의 선은 왜 협력을 못하느냐”고 나무랍니다. 그러는 사실은 걱정할 것 없습니다.
악의 협력은 잘되는 것 같지만 오래 못 갑니다. 멀지 않아서 서로 싸워 스스로 심판을 받습니다. 또 선의 협력이 잘 안되는 것 같지만 믿는 마음에서 긴 안목으로 보면 다 서로서로 하나님의 의용대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여기 있습니다.
믿음은 自得하는 것
질문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표가 될 만한 기적을 보여 달라 하는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어떤 놀라운 기적을 행한다면, 아니 믿던 사람도 믿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왜 그 요청을 들어주시지 않으셨을까?
첫째, 그 동안도 이미 기적을 많이 행하신 것을 다 보고 있으면서도 안 민기 때문입니다. 더 큰 기적을 보여준다 해도 아니 믿을 것이 뻔합니다. 본래 증거를 못 보아서 못 믿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그 자체 속에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참 사랑을 하는 사람은 자기 사랑 받을 사람에게 자격을 구하지 않습니다. 전날의 잘못은 물론 현재의 잘못까지를 보면서도 사랑하기를 아깝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 잘못 그 자체가 자기를 향해 사랑에 목이 타 애절히 구하는 음성임을 알기 때문 입니다. 바리사이 사람, 사두가이 사람은 처음부터 예수를 미워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자기의 양과 자기의 양이 아닌 것을 구별해 말씀하시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한동안 죽자 살자 해도 자기 본위의 사랑인 담엔 식는 날이 오고야 마는 것이고, 일단 사랑이 식으면 전날의 고맙던 것까지도 다 따질 거리가 되는 법입니다.
둘째, 그런 경우에는 아무리 보여 달라 해도 못 보여주는 것입니다. 보여주면 모욕이 됩니다. 내게도 모욕, 저에게도 모욕, 생명과 사랑과 참의 근본이신 하나님에게도 모욕이 됩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럼 믿겠다 했을 때 예수께서 움질움질 내려왔다면, 그래도 믿지 않았을 것은 뻔한 것이고, 그때에 그 자기모욕을 한 예수가 세상 어느 구차한 구석에서 빛스럽지 못한 생존을 하고 있었겠습니까? 역시 예수님께는 유대민족의 참혹한 장래를 다 내다보면서도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시고 십자가 위에 죽으시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것으로야만 하나님의 보내신 아들인 것이 증거됐습니다. 우리가 공화당 정치의 잘못을 지적할 때마다 “왜 밤낮 잘못한다고만 하고, 잘한 것은 하나도 말하지 않느냐?” 하는 반문을 받고도 묵묵하고 있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정말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랑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자득하는 것, 스스로 체험하는 것이지 누가 가르쳐주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아무리 사랑해도 자식에게 믿음을 가르쳐주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아무리 사랑해도 자식에게 믿음을 가르쳐줄 수는 없습니다. 만일 가르쳐주어서 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느 부모가 자식이 망하는 것을 그대로 보고 있겠습니까? 또 자식이 부모에게 구해다가 바칠 수도 없습니다. 구해다 주어서 되는 것이라면 어느 자식이 부모가 믿음 없이 멸망으로 가는 길을 가만 보고 있기만 하겠습니까? 믿어도 내가 바라는 것이고 버려도 내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을 맞아들이고 그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사람 가르치는 것을 평생의 사업으로 삼으셨던 공자님도 “분이 나서 하지 않거든 가르쳐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 하는 것도 이러한 뜻이 있습니다. 거룩한 것 자체, 진주 자체를 위해서도 그렇지만 또 그 받는 개나 돼지를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오늘날 종교가 힘이 없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교리의 전달이지 진리의 체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이
나라를 건지는 지혜나 힘도 제 스스로 얻어야 하는 것이지 결코 남이 체험해 얻은 것을 그저 배워서 모방해서 될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공자님은 길에서 얻어듣고 길에서 곧 설교를 하는 것은, 덕을 내버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들은 것이 아무리 좋다, 옳다 하고 고맙게 생각이 되어도 그것으로 정말 내 것이 된 것은 아닙니다. 내 것이 되려면 상당히 긴 시간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덕(德)을 해석해서 득(得)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들어서 이해·동의 정도가 아니라 정말 내 살이 되고 피가 됐어야 내 것, 곧 덕(德)입니다. 그래서 내 살을 먹고, 내피를 마시지 않으면 내 제자가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오늘날의 종교는 거의 다 교리의 종교지, 정말 깨달은 생명의 종교가 아닙니다. 겉을 핥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힘이 없습니다. 휩쓰는 홍수 같은 사회악을 보고도, 날뛰는 폭력주의를 보고도, 그것을 이길 능력은 고사하고 싸워보려는 관심조차 없습니다.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의 이러한 속살을 뚫어보시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감히 변명할 수 없는 자연계의 일부터를 먼저 말씀해놓고 그 담에 신앙의 일을 들어서 책망을 했습니다. “아무리 무식하고, 단순한 사람도 날씨를 볼 줄은 알지 않느냐? 저녁에 놀이 서면 다음날 날씨가 맑고, 아침에 동북새가 뻘겋게 서면 그날은 큰비가 온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 않느냐? 그 날씨가 오기 전에 벌써 그 낌새가 하늘에 나타나기 때문 아니냐? 그와 마찬가지로 정신계의 일도 그렇다. 눈을 들어 보기만 하면 폭풍이 닥쳐올 것을 곧 알 수 있듯이 생각하는 마음으로 살피기만 하면 앞으로 위기가 닥쳐올 것을 환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나더러 표적을 보여 달라는 것은 역사적 현실에 대해 일부러 눈을 감으면서 내게 대해 시험을 하려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러한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경우에 대답을 아니해주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그런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얼핏 보기에 불친절한 것같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그런 질문을 받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정치의 잘못이나 혹은 종교계의 잘못된 것을 비판했을 때 흔히 오는 반대가, 왜 그렇게 밖에 서서 비난만 하느냐? 왜 들어와서 같이 일하면서 바로잡으려 하지 않느냐 합니다. 그럴 듯한 말입니다. 그러나 속아서는 아니 됩니다. 중국 전국시대의 살벌한 정치 속에 살면서 세상을 밝혀보려고 애를 썼던 맹자도 많이 당해봤던 질문입니다. 맹자는 속지 않았습니다. 진리를 가진 사람이 현실과 타협해서 친절이라는 가장 밑에 자기를 굽혀가지고 세상을 건지자는 것은 스스로 속는 어리석음입니다. 그것은 아직도 제 심장의 갈피 속에 숨어서 남아 있는 자기영광을 추구하는 마음을 깨끗이 청산 못한데서 오는 유혹입니다.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실 때 천하만국의 권세와 영화를 한눈에 보여주면서 “내게 엎디어 절만하면……” 하는 속삭임을 들었다는 것은 그 욕심이 얼마나 끈질기게 교묘하게, 사람, 더구나 선한 일을 추구하는 재주 있는 사람 마음속에 깊이 들어 있느냐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경고입니다. 그렇지만 속아서는 안됩니다. 맹자도 현실을 모르는 이상론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물리쳤고, 예수님도 물리치시고 십자가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명의 근본 원리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한다는 것이 그 법칙입니다. 가르침이란 내가 할 것을 대신 해주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살아날 수 있도록 내 속의 하나님, 내 속의 그리스도, 내 속의 부처님을 깨워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친절한 것은 도둑이지, 내 혼을 뽑아먹고 내 속의 하나님을 몰아낸 후 저보다 더한 일곱 악마를 데리고 들어오자는 사탄의 속임수지, 나를 사랑해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는 참 스승이 아닙니다. 참 스승은 때로는 매정하고 잔혹하리만큼 엄한 법입니다. 그들은 대신할 수 없는 것이 생명의 법칙인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그저 친절한 줄만 아는 것은 큰 오해입니다. 가롯 유다에 대한 태도 보셔요. 겟세마네 동산의 마지막 밤 보셔요. 얼마나 매정하셨나? 너를 놔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달 권한도 있다 하는 빌라도 앞에서 얼마나 엄혹하게 침묵을 하셨던가? 꾸벅꾸벅 잠만 자고 있는 것들을 보시고도 옆구리를 찔러 깨우지도 뒤흔들지도 않고 그저 “깨어 기도해라” 하실 뿐이었고, 그 유다 때문에 마음이 민망해 죽을 것 같다 하시면서도 강제로 회심을 시키시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왜요? 강제로 해서 된 것은 깨달음도 믿음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 농부는 곡식이 자라는 것을 돕기 위해 고갱이를 뽑지는 않습니다. 물 주고 비료 주고 김 맨 다음에는 열흘도 스무날도 자라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히 기다리시는 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매정한 듯, 때로는 엄혹한 듯, 우리 마음을 흔드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 사랑입니다. 나를 나무나 돌같이 아니 보시고 혼이 있는 인간으로 보아주시고. 어린이로 여겨 그저 오십 년도 칠십 년도 젖으로 먹이시려 하지 않고 굳은 물건을 먹여 스스로 하는 생명으로 자라기를 기다리십니다. 사람들은 툭하면 하늘이 무심하다 하지만 사실은 제가 무심해 하늘마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잔혹한 듯 내버려두시는 것은 내 속에서 겨울 꽃망울이 자라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지만 결코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신성이, 찾으면 알 수 있도록 만물 속에 나타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찾는 마음입니다. 살아보려는 의지입니다. 하다가 죽더라도 해보자는 용기입니다. 그것 없이는 생명 없습니다. 사람인 담엔 날씨는 스스로 알 수 있듯이 사람인 담에는 시대의 뜻도 생각만 한다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10.26 사건에서 다가오는 시대의 뜻을 읽어 알았던가, 몰랐던가?
세계를 뚫어보는 정신의 눈
답답한 것은 만나는 사람마다 “어떻게 되려는 것입니까?” 하고 묻는 일입니다. 한 사람도 환히 앞을 내다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래 가지고는 예수님한테 꾸중 듣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한테 꾸중 듣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주여, 주여, 우리를 위해 문을 열어줍소서!” 하는데 안에서 대답하기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했다는 말입니다. 큰일입니다. 우리 주님이라고 스스로 믿고 있노라고 했는데 도무지 알지 못한다니 허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더 한심한 것은 한국의 교회가 허망감에도 아니 빠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는 어느 방향으로 나가는지를 몰라 서로 물으면서 거리마다 집마다에서 노래 소리만 질탕하게 흘러나온단 말입니다.
옛날 명나라 사람에 여숙간(呂叔簡)이라는 선비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 말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의리를 알기는 쉬우나 시대의 돼가는 것을 알기는 어렵다. 의리가 뭔지 아는 것은 썩어진 선비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돼가는 것은 뚫린 선비가 아니고는 못한다. 또 시대는 알기가 쉽지만, 그 돼가는 것은 알기가 어렵다. 시대는 눈만 가졌으면 알 수 있지만, 돼가는 것은 내다보는 밝은 눈이 없이는 될 수 없다.
그러면 썩어진 선비와 뚫린 선비의 다름은 무엇이며, 보는 것과 내다보는 것과는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생각하느냐, 아니 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썩어진 선비라니 다른 것 아니고 그저 공부하고 출세하고, 잘살고, 이름나고, 그것만 알았지 사람의 사는 뜻이 뭔지, 역사의 의미는 뭔지, 문명은 발달해서는 무엇하자는 것인지 도무지 깊이 생각할 줄 모르는 것, 그래서 살기는 살지만 속에 아무것도 얻은 정신적인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뚫렸다는 것은 나타나 보이는 현상계에만 붙어 꽃을 찾아 너울거리며 다니는 나비처럼 살다가 서풍이 한번 불 때 어느 티끌 속에 묻혀 그 온데 간데를 알 수 없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의 세계의 저쪽을 뚫어보는 정신의 눈을 길러서 영원 무한한 세계에 이른 것이 있는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이는 것만을 보는 것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능히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를 알 뿐 아니라 미래도 압니다. 예수께서 “너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지만 나는 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보내심을 받아서 왔고 또 장차 그리로 갈 것이다”하신 것은 이 지경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 세상에 있을 동안은 이 세상의 빛이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분에게는 혹함이 없습니다. 종교를 믿는다, 진리를 깨쳐 알았다 하는 것은 그러한 생명에 하나로 한데 둘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송나라 때의 큰 선비 정명도(程明道)도
군자는 그 식(識)을 근본으로 삼고 행하는 것은 그 버금이다.
하고 잘라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지나친 행동주의의 넘쳐흐르는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할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컴퓨터가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처럼 알고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화의 긴 과정을 살펴보아서 우리가 아는 것은 인간은 생각하는 데서 나온 것 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생각함에 의하여서 하나의 새 단계, 생명의 보다 높은 새 한 단계를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명도(程明道)가 식(識)이라고 한 것은 이 정신계를 뚫어보는 힘을 말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시대의 징조는 왜 볼 줄 모르냐 하셨는데, 징조는 우리말로는 낌새입니다. 징조는 한문으로는 징조(徵兆)라 쓰는데 징(徵)은 미(微)자에서 나온 것인데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 않는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있다가 나타나게 될 낌새는 지극히 작아서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어렵지만 반드시 미리 나타나는 것이 있습니다. 생각하는 인간의 근본 지혜는 거기서 시작된 것입니다. 조(兆)는 옛날 나라에 중대한 일이 있을 때는 점을 쳐서 그 좋고 궂은 것을 판단했는데 그 점은 거북의 뼈를 부젓가락으로 지져서 그 타면서 생긴 금을 보아서 했기 때문에 그 금간 것의 모양을 그린 것입니다. 보통 해석으로는 거북은 오래 사는 영스러운 물건이기 때문에 앞 옛일을 말해준다고 믿어서 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 깊은 뜻은 그런 데 있지 않습니다. 그 중요한 비결은 그 준비과정에 있습니다. 그것을 영물로 알고 정성을 들여서 준비하고 그 행동 하나하나를 정성으로 하는 동안에 마음속에서 모든 허튼 생각이 가셔지고 맑고 깨끗한 사심이 없이 누군지 모르는 절대자에 자기를 온전히 맡길 때에 정신적으로 뚫어보는 직관의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 정신으로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며 그 거북뼈 위에 나타난 금을 바라보고 있을 때 공명정대한 판단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거북뼈에 무슨 초자연적인 힘이 있는 것 아니라 그것을 자료로 놓고 들이는 정성에서 시간을 초월하는 정신의 차원이 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빌린다면 그는 자기로 생각을 하려 하지 않고 아버지가 보여주시기를 무한 겸손히 기다립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보여주시고, 들려주시는 것을 받아서 말씀하신다고 했습니다. 그와 같이 자기가 경험하신 영적 사실이기 때문에 자기를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의 한 일을 그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현대 사람은 수백 년 물질주의적인 인생관에 젖어왔기 때문에 말로는 종교를 믿는다 하는 사람도 사실로는 물질적인 현상의 세계만 참이라고 믿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정신의 세계는 신화라 미신이라 심리적인 환상이라 해서 한마디로 치워버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시니 묵시니 하는 것은 말에만 있지 실지로는 믿지 않습니다. 그 결과 옛 사람이 고심하고 정성들여서 개발했던 영적 세계가 아주 묵은 먼지 속에 묻혀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모든 문제가 결국은 폭력에 의해서만 해결되고 있습니다. 만물의 영장이로라고 일찍이 자랑 했던 인간이 개인에도 단체에도 세계에서도, 문제의 해결은 결국 실력에 있다고 믿어버리게 된 것은 인간으로서는 큰 수치입니다.
사람 죽이기 좋아하는 것이 악
그 잘못에 대해 예수는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지만 예언자 요나의 기적밖에는 보여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 시대에 바로 들어맞은 말입니다. 하나님은 믿는다면서 앞날이 어떻게 될 것을 몰라 어쩔 줄 모르고 있는 것은 낌새를 보는 힘이 말라버린 것을 말하는 것인데 그 힘이 왜 말라버렸느냐 하면 악하고 음란한 짓만 하기 때문입니다.
악이 무엇입니까? 생명 죽이기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 우주에 가장 귀한 것은 생명입니다. 우리가 우주선을 만들어 달나라에를 가보면서도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않는 것은 거기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 만일 미미한 미생물 하나라도 발견됐다 해보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이 이렇게 무관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우주에 억억 만만의 천체가 있다지만 거기 만일 생명이 없다면 무슨 맛이 있습니까? 이 살았다는 이것 하나 때문에 종교도, 철학도, 과학도, 예술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명이 가다가 도달한 지점은 무엇입니까? 생명을 천히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로 생겨난 것이 모든 악입니다.
일찍이 현대처럼 인간의 대량 학살을 한 일은 없습니다. 인류의 인류다운 발달을 한 원동력이 어디 있느냐 하면 불쌍히 여기는 심정에 있습니다. 만일 어린것을 불쌍히 여길 줄 모르고 약하 것, 병든 것. 가나한 것을 불쌍히 여길 줄 모르고 모든 좋은 것은 그저 강한 놈만이 가지고, 모든 아름다운 것은 그저 흉악한 놈만이 다 차지했다면 오늘의 문명이 있었겠나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기에 정치의 비결을 차마 못하는 마음에 두었던 맹자는 과연 어진이였습니다. “불기살인자능일지”(不嗜殺人者能一之)란 말은 억만고에 명언 아닙니까? 전국시대의 참혹한 세상을 보고 바보 같던 양양왕도 가만있을 수 없어서 “선생님, 천하가 이렇게 어지러우니 과연 어디 가서 평정이 될 것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맹자는 자신 있게 “하나에 가서 가라앉지요” 했습니다. 다시 묻기를 “그럼 그 하나를 누가 합니까?” 하니, 그때 대답한 것이 아주 간단하게, 여러 학설 정치론을 편 일 없이 한 것이 “사람 죽이기 좋아하지 않는 이가 능히 할 수 있지요” 했습니다. 모든 악이 무엇입니까? 결국 사람 죽이기 좋아하는 것입니다. “망둥이 제 동무 잡아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생물계의 법칙은 제 동무는 될수록 아니 잡아먹는 것입니다. 몸을 가진 이상 다른 생명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지만 무심한 동물이라는 것들도 저와 가까운 동족은 될 수 있으면 아니 잡아먹습니다. 망둥이 제 동무 잡아먹는다는 말이 그래서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작은 생각을 초월한 생명의 근본 생각의 어진 데서 나온 법칙일 것입니다. 쉽기로 한다면 같은 종류에서 잡아먹는 것이 가장 쉽겠지만 생명은 처음부터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선 제 동족에서부터 잡아먹자는 버릇은 어디서 시작됐느냐 하면 만물의 영장이라 자랑하는 이 인간에서 시작됐습니다. 먼저 말했던 불쌍히 여긴다는 말과 모순되는 듯하지만 생각하는 인간의 가장 큰 불행은 이 모순을 행하는데 있습니다.
종교의 목적은 그 모순을 극복하자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본래는 종교에서 나왔으면서도 종교의 가르침에 반대하는 것은 정치입니다. 정치의 한 일은 결국 따지고 보면 전쟁에 있습니다. 전쟁이 발달의 계기가 된다는 말을 버젓이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차마 못할 소리입니다.
악해지면 음란해지게 마련입니다. 보가 터질 때 흐른 물이 논밭과 집을 잠겨버릴 것은 정한 일입니다. 오늘 인류사회는 양심의 보가 터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정치가입니다. 무엇으로 그렇게 했습니까? 기계로, 조직으로 입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다 터쳐 놓고 “우리가 먹고 마시자, 내일은 모른다” 하면 참 신난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제 동생 죽인 죄로 벌 받은 인류의 역사입니다. 악하고 음란한 이 쌍동이야말로 현대의 총아입니다. 그러나 그러면 멸망 밖에 올 것이 없습니다.
요나의 기적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 요나의 기적이 무엇입니까? 구약의 요나서를 읽으면 알겠지만 한마디로 하면 예수 자신의 십자가에 달릴 것을 말한 것입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죽음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사람 죽이기 좋아해서 양심이 거의 다 죽고 그 사나와진 마음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음란에 빠질 대로 빠진 마음에는 천지를 뒤집는 기적을 한대도 믿지 않을 것은 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간악한 질문에 농락은 당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죽음으로써 그 모질어지고 거친 양심을 때리자는 것입니다. 그 결심은 벌써벌써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을 어디까지나 믿어주시는 데서 나온 결단입니다. 아무리 악독해지고 더럽게 미쳐도 그 혼 밑바닥에는 하나님의 모습이 생명의 근본 지혜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믿으신 것입니다. 세상에 이에서 더 거룩한 믿음이 어디 있습니까? 이에서 더 순수한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이에서 더 억센 희망이 어디 있습니까? 스스로 목숨을 내버리며 속에 계신 하나님에 충성했을 때 그 하나님은 꿰뚫는 영의 힘이 되어 자기를 죽여주던 그 인간의 혼을 때리게 됩니다. 문명이 아무리 타락된다 해도 진리는 영원히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아, 당신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그들을 버려두고 주저함 없이 떠나버리셨습니다. 지금 이 단계에서 우리가 우선 배울 것은 이것입니다. 할 말을 다 해주고는 사정없이 떠나는 것입니다. 못 가고 머뭇거리는 것은 미련 있는 마음입니다. 따뜻이가 반드시 사랑 아닙니다. 할 말 다해주어도 아니 들으면 얼음같이 차게 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지근한 데는 언제나 해로운 부패균만 성하게 마련입니다. 참 사랑을 아는 사람은 이미 죽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사에도 인정에도 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이란 말이 얼마나 많은 독한 병균의 온상이 되는지 모릅니다. 사람은 홀로를 두려워 않게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같이 있어서만 가능합니다. 한순간만 있으면 칼 뽑아들며 뽐내던 용기가 다 허튼소리인 것이 증명이 될 줄 알면서도 “너희가 다 나를 버리고 가겠지만 나는 홀로 있는 것 아니라 내 아버지가 나와 함께 계신다” 했습니다. 홀로를 무서워 않는 마음이 아니고는 나라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동지에 달려 있는 투쟁, 신통한 투쟁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는 홀로서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그러나 그러므로 세계 전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홀로를 각오하지 않고는 할 말을 다 하지 못합니다. 할 말을 다 하지 않고 홀로를 견뎌내지 못할 것입니다. 다 한 말 혹함 없이, 두려워함 없이, 낯을 봄 없이, 다 한 말이 마지막 날에 내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나를 지켜 줄 것입니다. 이 사람 낯 보고, 저 조직 염두에 두고, 좌로 기웃 우로 힐끔 하면서 한 말들, 그 말이 누구를 움직이겠습니까? 나라는 여럿에 있지 않고 하나에 있습니다. 씨알은 하나입니다. 하나인데 전체입니다. 맹자의 “정우일(定于一)”의 일(一)을 나는 씨알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나를 지켰으면 어디를 가도 나라가 있겠지만 나 스스로를 못 지킨 놈은 천하 어디가 쏘다니며 무슨 소리를 한다 해도 나라 없는 고아입니다.
할 말을 거침없이 다해주고 미련도 없이 “또 다른 동네로 가자, 거기서도 우리가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 하시며, 스적스적 가시던 예수, 아, 당신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씨알의소리 1980. 1,2월 91호
저작집30; 19- 273
전집20; 5- 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