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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선부 묘지명 (豆善富 墓誌銘)
소재지/출토지
中國 河南省 開封博物館
中國 河南省 洛陽市
시대
당(唐)
연대
741년(唐 開元 29년)
크기
(개석) 가로 27cm, 세로 27cm
(지석) 가로 45cm, 세로 45cm
서체 및 재질
(개석) 전서체
미상
주제분류
묘지명
집필자
안정준
찬자 / 서자 / 각자
미상
「두선부 묘지명(豆善富 墓誌銘)」은 河南省 洛陽市에서 출토되었으며, 묘지석은 현재 開封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 묘지석이 출토된 자세한 경위에 대해서는 파악하기 어려우며, 국내에서는 『隋唐五代墓誌彙編』[洛陽卷] 10책에 수록된 탁본만 확인이 가능하다.註 001 현재까지 제시된 『唐代墓誌彙編(下)』와 『全唐文補遺(4)』의 2종 판독문도 모두 이 탁본을 근거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註 002
『隋唐五代墓誌彙編』의 설명에 의하면 「두선부 묘지명」은 지석과 개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지석은 정방형으로 26행 25열 총 646자이다. 지석의 글씨는 해서체(楷書體)이며, 비면의 중앙부 상태가 일부 좋지 않은 탓에 8~12행의 중부와 상부 일부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15자 정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판독하는데 큰 무리가 없다. 개석은 중앙부에 3행에 걸쳐 ‘대당고두부군묘지명(大唐故豆府君墓誌銘)’ 총 9자가 전서체(篆書體)로 쓰여 있다. 개석의 가장 자리 둘레에는 장식 무늬를 새겼다.
묘지명에 의하면 묘주인 두선부는 개원(開元) 29년(741) 8월 7일에 58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므로 683년에 태어난 고구려 유민 2세대로 볼 수 있다. 묘지명에서는 두선부의 가문이 부풍(扶風) 평릉(平陵) 사람이라고 하였으며, 후한말의 충신인 두무(竇武)를 족부(族父)로 제시하고 있다. 또한 18세조가 후한대에 안문태수(鴈門太守)를 지낸 두통(竇統)이었는데, 영제(靈帝) 재위기에 두무가 환관들에게 화를 당한 일을 계기로 하여 일족이 북방의 황무지[‘朔野’]로 유망하였고, [그곳에서] 자손들이 대대로 거주하였다고 한다. 이후 북위(北魏)가 남천하였을 때 비로소 흘두릉씨(紇豆陵氏)를 사여받았다고 언급하였다.
한편 묘지명에서는 “6세조 보번(步蕃)이 서위(西魏)의 장수로 하곡(河曲)에 주둔하였다가 북제(北齊)의 신무(神武)에게 격파되어 마침내 고구려(遼海)로 달아났으며 이후 후손들이 가문을 이루고 두씨(豆氏)가 되었다.”고 기술하였다. 『위서(魏書)』권75 이주조(尒朱兆)전의 기록에 의하면 6세조인 흘두릉보번(紇豆陵步蕃)은 북위말 하서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북제 고조(高祖)인 고환(高歡)과 이주조(李朱兆)에게 패하여 죽었고 그 무리가 흩어져 도망하였다고 기술되었다. 문헌기록과 더불어 종합하면 흘두릉보번의 사후에 그 일족이 고구려로 망명해온 것이 된다. 즉 북위말의 혼란기에 고구려에 넘어온 유이민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두선부의 가문이 묘지명에 나온 것처럼 실제로 후한대의 두씨(竇氏) 혹은 흘두릉씨의 후손이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두씨 일가가 기록 조작을 통해 한인명문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했다면, 굳이 당대에도 한인 계통인지 여부에 대해 의심되었을 흘두릉씨 관련 계보를 선택했던 점은 다소 의외라고 생각된다. 아마도 두선부 일족이 실제로 530년경 흘두릉보번의 활동과 관련되어 있다가 고구려로 들어왔거나, 혹은 그의 선대가 선비 계통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두선부 일족은 최소 100여 년 이상을 고구려에 머물다가 당군의 침공 때 항복했다고 서술했다. 특히 ‘구이(九夷) 변경요새의 장수를 참하였다’고 하여 당으로 항복하는 과정에서 고구려 변경의 장수를 살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에 귀부한 이후 노주(潞州)와 강주(絳州) 지역에서 무관으로 활동하였으며, 개원 13년(725)에는 황제를 호종하여 봉선제를 올리는데 참여하였고, 동도(東都)의 대화고(大和庫)를 감독하는 임무 담당한 공로로 우금오위낭장(右金吾衛郞將)을 섭직(攝職)하기도 하였다. 이후 개원 29년(741) 8월 7일에 낙도 황성 우위솔부(右衛率府)의 관사에서 5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전한다. 이 묘지명을 통해서 6세기 중반인 북위말의 혼란기에 고구려에 일부 유이민이 넘어왔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으며, 당에 귀부한 고구려 유민 2세대가 당의 번장(蕃將)으로서 활동했던 지역과 역임관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대당(大唐) 고(故)충무장군(忠武將軍)註 001 섭(攝)우금오위랑장(右金吾衛郞將)註 002 상주국(上柱國)註 003 두부군의 묘지 아울러 서(序)
듣건대 갈석(碣石)산註 004은 우뚝 솟아있고, 큰 바다는 유달리 굽이친다고 한다. 구름과 우레가 진동하고 두드리듯 세상에 드문 뛰어난 기품이 매우 성하였도다.註 005 타고난 기품이 신통하고 영묘하며, 능히 날 때부터 어질고 지혜로웠으니, 즉 우리 부군을 이름이다.
군의 이름은 선부(善富)요 자는 휘(暉)이며 그 선조는 부풍(扶風) 평릉(平陵) 사람이다. 18대조인 두통은註 006 한의 안문태수(鴈門太守)였는데 족부(族父)인 두무(竇武)의 난註 007을 피해 북방의 황무지註 008로 유망하였고, 〈그곳에서〉 자손들이 대대로 거주하였다. 후위(북위, 386~534)가 남천(南遷)함에 이르러 흘두릉씨(紇豆陵氏)를 사여 받았다.註 009 6세조 보번(步蕃)은 서위(535~556)의 장수로 하곡에 주둔하였다가 북제의 신무(神武)註 010에게 격파되어 마침내 요해(遼海)로 달아났는데 후예들이 인하여 집안을 이루고 두씨가 되었다.
우리 황제께서 요(遼)註 011가 예를 다하지 않음을 정벌하심에 군사가 현도의 들판에 이르렀다. 군의 부친인 두부는 끝내 먼 조상인 두융(竇融)이 하외(河外)註 012에서 〈후한 광무제에게〉 항복했던 일을 사모하여 마침내 구이(九夷)註 013 변경요새註 014의 장수를 참하여 황제의 진영註 015에 이마를 조아리고 절하였으며, 읍락의 도탄에 빠진 사람들을 부축하여 ▨궐에 귀순하였다.註 016
황제의 조서가 크게 내려졌고 황제의 은혜가註 017 일족에게 미쳤다. 형제 5명은 높은 관작과 지위를 제수 받았다.註 018 이(犁)․목(木) 2주註 019▨▨▨군사를 수여받고 자금어대(紫金魚袋)註 020를 사여 받았다. 군은 악목(岳牧)註 021의 후예로써 해▨검교▨▨▨군사를 제수 받았다.
또 ▨방이 시끄러워짐에 조정에서 불러 일을 맡겼으니, 〈군을〉 노주(潞州)註 022 동제부좌과의도위(銅鞮府左果毅都尉)로註 023 발탁하고 유격장군(游擊將軍)을 더하였다. ▨▨▨병▨ 서쪽 전장에서의 전투에 임하여 빠르게 싸워 크게 이기니 〈황제께서〉 상주국을 제수하고 강주(絳州) 무성부註 024좌과의도위(武城府左果毅都尉)로 승진시켰다.
개원(開元) 13년(725) 호종하여 동쪽으로 봉제사를 올렸다. 예가 끝남에 충무장군이 더해지고 강주 고정부(古亭府) 절충도위(折衝都尉)로註 025 승진하였다. 서국공(徐國公) 소숭(蕭嵩)이 삭방 지역을 안절(按節)하고 겸하여 황하 이서 지역를 순행할 때는 〈군에게〉 비장(裨將)이 되기를 청하기도 하였다.註 026 〈군은〉 진주(晉州) 진안부절충도위(晉安府折衝都尉)로 있을 시에는 결백하고 오점이 없었으며註 027 고상하고 참신하였으니,註 028 혹독한 추위에도 시들지 않는 것과 같았다. 다스림에 능히 이름이 날 정도였으며 훌륭한 명성은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시어사(侍御史)註 029 오원창(鄔元昌)註 030이 동도(東都)의 대화고(大和庫)를 감독하기를 청하였는데, 우리 황제께서 생각하시길 탕장(帑藏)이註 031 임무가 중요하나 그 일을 참고 견디어내는 자가 드물다고 보셨다. 군을 뭇사람들이 추천함에 황제께서 가로되, “그래 보내라”라고 하셨다. 행함이 쌓이고 공이 연이어지니 끝까지 폐하지 않으셨다. 특별히 우금오위랑장을 섭직하였으니 전에 창고를 감독함에 의거한 것이었다.
내가 듣기에 사람이 베푸는 것은 덕이요, 하늘이 빼앗는 것은 수명이라. 오호라, 창천이여,註 032 그 이치를 긍휼히 여기지 않으시는가. 개원(開元) 29년(741) 8월 7일 태부인(太夫人)의註 033 질병을 시중들다가 그 애통함을 견디지 못하여 마침내 낙도(洛都) 황성 우위솔부(右衛率府)의註 034 관사에서 갑자기 죽으니 이때 나이가 58세였다.
소하(蕭何)와 조참(曹參)註 035의 죽음에 애통해하였듯이 큰 슬픔이 동료들을 얽어매었구나. 풍경은 익숙함에서 고쳐지고 연기와 구름은 모습을 잃었도다. 구산(緱山)註 036에서 돌아가지 않고 요성(遼城)으로 돌아오지 않았구나.註 037 사자 온수가 정자註 038종▨. 3일간 피눈물 흘리며 거의 먹지 않고 거친 자리에 누웠도다. 세월이 머물지 않으니 장차 무덤註 039으로 옮겨질지어다.
개원 29년(741) 8월 18일, 낙도 하남현(河南縣) 재택향(梓澤鄕) 망산(邙山)의 들에서 장례를 치르니 예에 맞는 것이었다. 세월이 지나 구릉과 계곡이 갈마들어 변하고 그 묘지 안의 단서 및 성씨와 이름이 섞이고 바뀔 것을 두려워하여 죽은 해를 새겼다. 모두에게 전하여 소멸하지 않으리니 이로써 후세에 알린다. 그 말에 이르기를,
한나라의 외척이 거주하는 땅에서註 040 위씨(魏氏)註 041의 용맹스럽고 위세 있는 신하로다.註 042 동쪽(고구려)의 지파에 나누어 흘러들었고 서춘(西春)에서 자손들이 분파하였구나. 그 계통을 능히 빛냈도다. 그 첫 번째.
덕은 위세와 웅장함으로 떨쳤고 명성은 중앙과 지방註 043으로 요동치는구나. 국가의 창고는 중요한 임무요 〈장안은〉 만방의 도회로다. 복잡한 사무를 다스림註 044은 쉬는 것과 같이 했고, 간악하고 원망하는 자들을 영원히 쉬게 하였도다. 그 두 번째.
공훈註 045이 크게 드러났으나 영화와 현달함註 046은 아직 더해지지 않았구나. 문득 죽음에 이르니 사람과 신조차 탄식하는 바로다. 이를 곧은 돌에 새겨 승하함을 기록하였도다. 그 세 번째.
註) 001
충무장군(忠武將軍):정4품상의 무산관이다(『唐六典』 卷 第5 尙書兵部).바로가기
註) 002
우금오위랑장(右金吾衛郞將) :금오위(金吾衛)는 16위(衛)의 하나로 궁중 및 주야로 순찰하는 법을 집행하는데, 좌·우로 나누어져 있다. 우금오위(右金吾衛)는 장안(長安)의 포정방(布政坊)에 있었는데(『唐兩京城坊考』 卷4 西京 外郭城), 본문의 우금오위랑장이란 금오위에 소속된 익부(翊府)의 좌․우낭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정원은 좌우 각기 1인이며 정5품상이다(『唐六典』 卷25, 諸衛府).바로가기
註) 003
상주국(上柱國) : 훈관(勳官)은 전공(戰功)으로 훈계(勳階)를 얻은 자를 말한다. 최고 훈계 12전(轉)에 해당하며 정2품에 비견된다(『唐六典』 卷第2 尙書吏部).바로가기
註) 004
갈석산 : 지금의 허베이성[河北省] 친황다오[秦皇島]에 있다.바로가기
註) 005
凞和: 熙和와 같음.興盛하고 和樂하다는 의미(『白雪遺音』 八角鼓 春宵一刻).바로가기
註) 006
두통(竇統) : 『북사(北史)』 두치(竇熾) 열전에 의하면 두통은 후한의 대홍려(大鴻臚)를 지냈던 두장(竇章)의 아들이며, 영제(靈帝) 때 안문태수(雁門太守)를 지냈다. 그는 두무(竇武)의 난을 피해 흉노로 망명하였으며, 그 곳에서 부락대인(部落大人)이 되기도 하였다[“竇熾 字光成 扶風平陵人 後漢大鴻臚章之後也 章子統 靈帝時爲雁門太守 避竇武之難 亡奔匈奴 遂爲部落大人”(『北史』 卷61 列傳 第49 竇熾)]. 본문에서 두통이 “삭야(朔野)”로 도망했다는 것은 곧 흉노로 망명한 것을 이를 것이다.바로가기
註) 007
족부(族父)인 두무의 난:“族父武”는 문맥상 후한 말에 있었던 ‘두무지난(竇武之難)’의 두무(竇武)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두무 역시 두선부가 같은 가문으로 주장하는 바, 이때 두무를 ‘족부(族父)인 무(武)’라고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두무는 후한 부풍(扶風) 평릉인(平陵人)이며 자는 유평(游平)이고, 두융(竇融)의 현손이다. 젊어서 경행(經行)으로 칭송을 들었고, 명성이 관서(關西) 지방에서 알려졌다. 맏딸이 환제(桓帝)의 황후인 두태후(竇太后)가 되자 괴리후(槐里侯)에 봉해지고, 성문교위(城門校尉)에 임명되었다. 환제가 죽은 뒤 어린 영제(靈帝)가 즉위하자 문희후(聞喜侯)에 봉해지고 대장군이 되어 정치를 보좌했다. 당시 환관들의 전횡을 반대하던 이응(李膺) 등을 중용했다. 환관들이 반대파인 당인(黨人)들을 향리로 돌려보내 금고(禁錮) 처분을 내린 ‘당고(黨錮)의 옥(獄)’ 이후, 두무는 당인의 금고를 해제하여 그들을 등용함과 동시에 진번(陳藩) 등과 결탁하여 환관 조절(曹節)과 왕보(王甫) 등을 몰아내려했다. 그러나 곧 환관들에게 계획이 탄로 나서 죽음을 맞았다(『後漢書』 列傳 卷69 列傳 第59 竇武). 이 일로 인해 두씨 일족을 비롯한 관련자들이 화를 입은 사건을 본문에서 “族父武之難”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바로가기
註) 008
북방의 황무지 : “朔野”는 북방의 황야지를 뜻한다(漢 班固, 「幽通賦」).바로가기
註) 009
후위(북위, 386~534)가 남천(南遷)함에 이르러 흘두릉씨(紇豆陵氏)를 사여 받았다 : 두통(竇統)이 북위에서 출사하여 흘두릉씨(紇豆陵氏)를 사여 받았고 그곳에서 누대로 대관(大官)을 역임했음이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後魏南徙 子孫因家代 賜姓紇豆陵氏 累世仕魏 皆至大官 父略 平遠將軍 以熾著勳 贈少保․柱國大將軍․建昌公”(『北史』 卷61 列傳 第49 竇熾)]. 북위 효문제(孝文帝)의 한화(漢化) 정책 이후 흘두릉씨는 두씨(竇氏)로 바뀌었다(“次南有紇豆陵氏 後改爲竇氏”(『魏書』 卷113 官氏志9 第19 姓氏 神元皇帝時餘部諸姓內入者).바로가기
註) 010
북제의 신무(神武): 고환(高歡)을 가리킨다. 북제(北齊)의 기초를 쌓아 올린 인물이다. 자신은 제위에 오르지 않았지만, 그의 아들인 고양(문선제)이 북제를 건국한 후에, 묘호를 고조(高祖), 시호를 신무제(神武帝)로 추증하였다.
교감판독문註 001
[01] 大唐故忠武将軍攝右金吾衛郎将上柱國豆府君墓誌并序
[02] [聞]碣石岳峙滄溟殊隩雲雷振鼓間氣凞和稟玆神靈克生賢智則
[03] 我府君之謂也⎵君諱善富字暉其先扶風平陵人也十八世祖
[04] 統漢鴈門太守避族父註 002武之難亡于朔野子孫世居焉至後魏南遷
[05] 賜紇豆陵氏六世祖步蕃西魏将鎭河曲爲北齊神武所破遂出
[06] 奔遼海後裔因家焉爲豆氏⎵註 003[我]註 004皇唐征有遼之不庭兵戈次玄
[07] 兎註 005之野君考夫卒慕遠祖融河外納款遂斬九夷列城註 006之将稽顙
[08] 旌門扶邑落塗炭之人歸誠⎵註 007▨註 008闕⎵天書大降榮寵一門昆季
[09] 五人衣朱拖紫▨犁註 009木註 010二州▨▨[諸]註 011軍事賜紫金魚袋君以岳註 012牧子
[10] 解▨▨註 013▨註 014▨▨▨軍事又以▨方不靜⎵朝廷徵任擢授潞州銅
[11] 鞮府左[果]註 015毅都註 016尉加游擊將軍▨▨▨兵▨臨西戎亟戰超勝授
[12] 上柱國轉絳州[武]註 017城府左[果]註 018[毅]註 019都尉註 020開元十三年中扈從東封禮畢
[13] 加忠武将軍進絳註 021州古註 022亭註 023府折註 024衝都尉徐國公蕭嵩按節朔方兼
[14] 巡河右請爲裨将時註 025晉註 026州晉安府折衝都尉玉潔氷註 027雪歲寒不凋理
[15] 有能名聲華遠播侍御史鄔元昌請監東都大和庫⎵我皇思帑
[16] 藏任重罕有克堪以君衆推⎵帝曰兪往積行累註 028功終註 029[始]註 030不替特
[17] 攝右金吾衛郎将依前監庫註 031竊聞註 032人與者德天奪者年嗚呼蒼旻
[18] 不吊厥理以開元卄九年八月七日侍⎵太夫人之疾不堪其痛
[19] 遂暴殂于洛都皇城右衛率府之官舍時年五十八哀慟蕭曹悲
[20] 纒寮友物色改貫煙雲失容緱註 033山不歸遼城不返嗣子溫璲丁玆
[21] 鍾▨註 034三朝泣血一溢寢苫日月不居將遷幽室以開元卄九年八
[22] 月十八日葬于洛都河南縣梓澤鄕邙山之原禮也恐陵谷遞遷
[23] 紀其蒿里氏号泯替刊其卽年垂諸不朽以示來世其詞曰
[24] 大漢戚里魏氏虎註 035臣分流東派嗣葉西春克光厥緒啓迪後人其一
[25] 德振聲雄名動中外國藏重任万註 036邦都會理劇若閑永息姧註 037憝其二
[26] 勳勞大著榮顯未加奄及徂逝人神所嗟刊玆貞石以紀昇遐其三
표점문
大唐故忠武將軍·攝右金吾衛郎將·上柱國豆府君墓誌 幷序
聞碣石岳峙, 滄溟殊隩. 雲雷振鼓, 間氣凞和. 稟玆神靈, 克生賢智, 則我府君之謂也.
君諱善富, 字暉, 其先扶風平陵人也. 十八世祖統, 漢鴈門太守, 避族父武之難, 亡于朔野, 子孫世居焉. 至後魏南遷, 賜紇豆陵氏. 六世祖步蕃, 西魏將鎭河曲, 爲北齊神武所破, 遂出奔遼海, 後裔因家焉, 爲豆氏.
我皇唐征有遼之不庭, 兵戈次玄兎之野. 君考夫卒, 慕遠祖融河外納款, 遂斬九夷列城之將, 稽顙旌門. 扶邑落塗炭之人, 歸誠▨闕.
天書大降, 榮寵一門. 昆季五人, 衣朱拖紫. ▨犁木·二州▨▨諸軍事, 賜紫金魚袋. 君以岳牧子, 解▨▨▨▨▨▨軍事.
又以▨方不靜, 朝廷徵任, 擢授潞州銅鞮府左果毅都尉, 加游擊將軍. ▨▨▨兵▨, 臨西戎亟戰超勝, 授上柱國, 轉絳州武城府左果毅都尉.
開元十三年中, 扈從東封, 禮畢. 加忠武將軍, 進絳州古亭府折衝都尉. 徐國公蕭嵩按節朔方, 兼巡河右, 請爲裨將. 時晉州晉安府折衝都尉, 玉潔氷雪, 歲寒不凋. 理有能名, 聲華遠播.
侍御史鄔元昌請監東都大和庫, 我皇思帑藏任重, 罕有克堪, 以君衆推, 帝曰“兪往”. 積行累功, 終始不替. 特攝右金吾衛郎將, 依前監庫.
竊聞"人與者德, 天奪者年." 嗚呼! 蒼旻, 不吊厥理! 以開元卄九年八月七日, 侍太夫人之疾, 不堪其痛, 遂暴殂于洛都皇城右衛率府之官舍時年五十八.
哀慟蕭曹, 悲纒寮友. 物色改貫, 煙雲失容. 緱山不歸, 遼城不返. 嗣子溫璲, 丁玆鍾▨.
三朝泣血, 一溢寢苫. 日月不居, 將遷幽室. 以開元卄九年八月十八日, 葬于洛都河南縣梓澤鄕邙山之原, 禮也. 恐陵谷遞遷, 紀其蒿里, 氏號泯替, 刊其卽年. 垂諸不朽, 以示來世. 其詞曰
大漢戚里, 魏氏虎臣. 分流東派, 嗣葉西春. 克光厥緒, 啓迪後人.其一. 德振聲雄, 名動中外. 國藏重任, 萬邦都會, 理劇若閑, 永息奸憝.其二. 勳勞大著, 榮顯未加. 奄及徂逝, 人神所嗟. 刊玆貞石, 以紀昇遐.其三.
註) 011
요(遼) : 고구려를 가리킨다.바로가기
註) 012
하외(河外): 춘추시대 진(晉)나라 사람들이 칭하길 하서(河西)와 하남(河南) 지역을 일러 하외(河外)라 하였다(『左傳』 僖公15年).바로가기
註) 013
구이(九夷) : 고구려를 가리킨다.바로가기
註) 014
변경요새:원문 “列城”은 변새(邊塞)의 성보(城堡)를 가리킨다(『左傳』 僖公15년; 『舊唐書』 德宗紀 下).바로가기
註) 015
황제의 진영[旌門]:고대 제왕의 출행 시에 휘장을 펼쳐서 행궁(行宫)을 삼았다. 행궁 앞에 정기(旌旗)를 세워 문으로 삼았는데 이를 정문(旌門)이라 칭하였다(『周禮』 天官 掌舍).바로가기
註) 016
귀순하였다:“歸誠”은 귀순하다는 의미다(『北齊書』 叱列平傳).바로가기
註) 017
황제의 은혜:“榮寵”은 군왕의 은총을 뜻한다(『後漢書』 來曆傳).바로가기
註) 018
높은 관작과 지위를 제수 받았다 :한(漢)의 제도에서 제후패대(諸侯佩帶)의 인수(印綬)를 자색(紫色)으로 하였고 공경(公卿)은 청색(青色)으로 했다. 인하여 “拖青紆紫”는 곧 관위(官位)가 높고 귀한 자를 일컫는 말이 되었으며, 이를 줄여서 “拖紫”라고도 한다(梁啟超, 『中國專制政治進化史論』 第3章; 『舊唐書』 哀帝紀).바로가기
註) 019
이(犁)․목(木) 2주 : 『新唐書』 卷43下 志 第33下 地理7下 羈縻州 隴右道 河西內屬諸胡 安西都護府條에 의하면 이주(犁州)는 대한도독부(大汗都督府) 소속 15주 가운데 하나이다. 목주(木州)는 문헌에는 보이지 않으나 이주(犁州)와 같이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 내 기미주 가운데 하나로 추정된다.바로가기
註) 020
자금어대(紫金魚袋) : 어대(魚袋)는 당대(唐代) 이래 공복(公服)에 패용하여 관(官)의 등위(等威)를 가리던 물고기 모양의 장식물이다. 당 현종대에 이르러 어대제(魚袋制)가 제도화되었고, 자금어대(紫金魚袋)․비은어대(緋銀魚袋) 등 공복과 어대가 합쳐진 용어가 나타났다. 관직명 뒤의 어대 표기는 의무화되기도 했는데, 대체로 현종 말년에서 당 말기에 이르는 시기에 자금어대는 관계(官階) 4품 이하, 관직 4품 이상인 자가 관직명 뒤에 병기했던 것으로 나타난다(『唐會要』 卷31 輿服上章服品第條; 『通志二十四略』 器服略; 『宋史』 卷152 輿服 5 公服條).바로가기
註) 021
악목(岳牧):“嶽牧”이라고도 한다. 전설 상 요순시대의 4악(嶽) 12목(牧)을 줄여서 이르는 칭호였다(『史記』 伯夷列傳). 후에 “악목(嶽牧)”은 봉강(封疆)의 대리(大吏)를 범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後漢書』 班彪傳; 『晉書』 王敦傳).바로가기
註) 022
노주(潞州):지금의 산시성[山西省] 창즈현[長治县] 지역. 당대 하동도(河東道) 예하 19군데 주 가운데 하나였다(『新唐書』 卷39 志第29 地理3).바로가기
註) 023
좌과의도위(左果毅都尉):절충부(折衝府)의 차관. 정원은 1인. 상부는 종5품하이고, 중부는 정6품상이며, 하부는 종6품하이다. 정관 10년(636)에 수의 과의낭장의 명칭을 따라 과의도위로 바꾸었다(『唐六典』 卷 第25 諸衛府).바로가기
註) 024
무성부(武城府) :『新唐書』 卷39 志 第29 地理3 河東道 河東採訪使 絳州絳郡條에 강주(絳州)의 33군데 부(府) 가운데 무성(武城), 원성(垣城), 익성부(翼城府)가 존재하는데, 이 가운데 그나마 탁본의 글자 획과 유사한 것은 ‘무성부’이므로 기존 판독대로 무(武)로 추독한다.바로가기
註) 025
절충도위(折衝都尉) : 절충부(折衝府)의 장관. 매 절충부마다 정원 1인을 둔다. 상부(上府)는 정4품상, 중부(中府)는 종4품하, 하부(下府)는 정5품하이다(『唐六典』卷25 諸衛府).바로가기
註) 026
서국공(徐國公) 소숭(蕭嵩)이 … 비장(裨將)이 되기를 청하기도 하였다 : 소숭(蕭嵩, ?~749)의 자(字)는 교보(喬甫)이며 호(號)는 체준(體竣)이다. 난릉인(蘭陵人)이며 당의 재상이었다. 소숭은 처음에 낙주참군(洺州參軍)을 역임한 이래 누차 승진하여 상서좌승(尙書左丞)․병부시랑(兵部侍郎)의 자리에 올랐다. 소숭은 신룡(神龍) 15년(719) 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에 재직하던 시절 반간계(反間計)를 써서 토번(吐蕃)의 대장인 悉諾邏恭祿를 제거하기도 했다. 또 이때 張守珪 등 명장을 임용하는 등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토번을 대파하고 이후 재상의 자리에 올랐으며 중서령(中書令)․서국공(徐國公)에 진봉(進封)되기도 했다(『舊唐書』 卷99 列傳 第49 蕭嵩). 두선부의 묘지명에서는 묘주가 당대의 저명한 무관이었던 소숭과 함께 활동했음을 강조함으로써 그 유능함을 과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바로가기
註) 027
결백하고 오점이 없었으며[玉潔]:결백하고 허물이 없음을 형용한 것(晉 王嘉, 『拾遺記』 周靈王).바로가기
註) 028
고상하고 참신하였으니[冰雪]:얼음과 눈처럼 순수하고 청신(清新)함을 형용한 것(『後漢書』 西羌傳論).바로가기
註) 029
시어사(侍御史):어사대(御史臺) 소속 시어사의 정원은 4인이고 종6품하이다. 백관을 감찰․탄핵하고 옥안(獄案)과 송사(訟事)를 추국하는 일을 관장한다(『唐六典』 卷13, 御史臺 侍御史).바로가기
註) 030
오원창(鄔元昌):당 현종대의 관료이다. 사서에는 당대의 혹리(酷吏)로 유명한 나희석(羅希奭)에 의해 하옥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기도 하다(『舊唐書』 卷186下 列傳 第136下 酷吏下).바로가기
註) 031
탕장(帑藏):“탕장(帑臧)”이라고도 함. 국고(國庫)를 의미한다(『漢書』 王莽傳下). 후한 대에는 질(秩) 6백석의 부승(部丞)이 이를 관리하였다(『後漢書』 卷26 百官 大司農).바로가기
註) 032
창천이여:원문의 “蒼旻”은 창천(蒼天)을 가리킴(晋 陶潜, 「感士不遇赋」).바로가기
註) 033
태부인(太夫人):묘지명에서 묘주의 부인을 태부인이라 칭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두선부의 모친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 경우 그의 모친은 58세에 죽은 두선부의 말년까지 생존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두선부의 부친이 귀당(歸唐)한 시기가 늦어도 668년을 전후한 시점이라면, 이때 두선부의 모친[太夫人]이 20살이었다고 가정하더라도 741년에는 연령이 90세가 넘는다. 불가능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당시 평균 수명을 고려할 때 위의 태부인은 고구려에서 넘어왔다기보다는 두선부의 부친이 당에서 새롭게 맞이한 부인일 가능성에 좀 더 비중을 두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바로가기
註) 034
우위솔부(右衛率府):황태자가 거주하는 동궁의 관속으로 10솔부(率府) 가운데 하나이다.바로가기
註) 035
소하(蕭何)와 조참(曹參) :“蕭曹”는 소하와 조참을 가리킨다(『史記』 張丞相列傳).바로가기
註) 036
구산(緱山): 구씨산(緱氏山). 허난성[河南省] 옌스현[偃師县]의 남쪽에 있는 산. 주령왕(周靈王)의 태자인 왕자 교(喬)가 학을 타고 신선이 되어 떠났다는 산으로 도를 수련하여 신선이 됨을 이르는 전고로 쓰임(『列仙傳』 王子喬; 唐 白居易 『吳興靈鶴贊』).바로가기
註) 037
요성(遼城)으로 돌아오지 않았구나 :요동사람 정령위(丁令威)가 신선이 된 뒤 학으로 변해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고사에서 인용된 것으로 보인다(唐 王維, 『送張道士歸山詩』).바로가기
註) 038
정자(丁玆):의미가 분명하지 않다. ‘정(丁)’과 ‘자(玆)’는 불길하고 어두운 일을 가리킬 수 있는데, 문맥상 두선부의 죽음과 연관된 표현으로 보인다.바로가기
註) 039
무덤[幽室]:묘혈을 가리킨다(晉 陶潛 「挽歌」).바로가기
註) 040
한나라의 외척이 거주하는 땅에서:“戚里”는 제왕의 외척이 모여 사는 지방(『史記』 萬石張叔列傳).바로가기
註) 041
위씨(魏氏):북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바로가기
註) 042
용맹스럽고 위세 있는 신하로다:“虎臣”은 용맹하고 무용이 뛰어난 신하(『詩經』 魯頌 泮水).바로가기
註) 043
중앙과 지방[中外]:조정의 내외. 혹은 중앙과 지방(『漢書』 元帝紀).바로가기
註) 044
복잡한 사무를 다스림:“理劇”은 번잡하고 어려운 사무를 잘 다스리다(『後漢書』 趙憙傳).바로가기
註) 045
공훈:원문 “勳勞”. 공로를 가리킨다.(『孟子』 盡心上).바로가기
註) 046
영화와 현달함[榮顯]:영화로움과 지위가 높고 귀함을 가리킨다(漢 蔡邕 「釋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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