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17일(수)
* 시작 기도
주님...
세상의 정욕에 흔들리는 이 마음을 붙잡아 주소서.
따개비가 바위에 붙어 아무리 거센 파도가 몰려와도 흔들리거나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나 또한 주님께 붙은 따개비가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주님만 빨아먹고 사는 주의 따개비가 되게 하소서.
주님은 나의 반석이시오니 그 반석에 찰싹 달라붙어 날마다 공급하시는 생명의 양식으로 살게 하소서.
내 안에 있는 옛 사람의 본성은 그 반석을 떠나서 멀리 도망하려 하오니 이런 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과 한 몸 되게 하소서.
나의 더럽고 추한 죄를 기억합니다.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하게 하옵소서.
오늘도 주님과 함께하는 주의 날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시 109:1-15
제목 :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어린 양 같이.....
1.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2. 그들이 악한 입과 거짓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속이는 혀로 내게 말하며
3.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까닭 없이 나를 공격하였음이니이다.
4.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5. 그들이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사오니
6. 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
7. 그가 심판을 받을 때에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8.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9.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10.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11. 고리대금하는 자가 그의 소유를 다 빼앗게 하시며 그가 수고한 것을 낯선 사람이 탈취하게 하시며
12. 그에게 인애를 베풀 자가 없게 하시며 그의 고아에게 은혜를 베풀 자도 없게 하시며
13. 그의 자손이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게 하소서.
14. 여호와는 그의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시며 그의 어머니의 죄를 지워 버리지 마시고
15. 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그들의 기억을 땅에서 끊으소서.
* 나의 묵상
오늘 본문은 다윗의 많은 시 중에서 몇 안 되는 저주시로 분류된다.
그런데 그 저주가 감히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다윗의 입에서 나온다는 것이 적이 나를 혼란스럽게 하기도 한다.
때로는 성도들에게 다윗도 이런 저주를 했으니 여러분도 간혹 이런 말을 할지라도 가책을 느끼지 말라고 하는 근거없는 이상한 담대함을 불어넣어 주기도 했었다.
이런 억지 주장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다윗은 본문 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과 그의 입술을 통하여 하실 말씀을 기대한다.
나의 찬양의 근본이 되시는 주님은 잠잠하지 마십시오.
나의 대적들은 악한 입과 거짓된 입으로 나를 치며 속이는 혀로 내게 말을 하고,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둘러 진치며 아무런 이유없이 나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나는 저들을 사랑하지만 그들은 나를 대적하고 있으니 내가 할 일은 그저 기도할 뿐입니다.
그들은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그들의 미움을 나는 사랑을 갚았나이다.
그런데 6절부터 갑자기 그 대적들을 향한 다윗의 저주가 19절까지 계속된다.
사실 이 저주는 인간적으로는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이 되나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로서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그 저주의 농도가 진하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그런데 이 말씀을 다른 사본에서는 달리 번역을 하고 있다.
영역본 NIV성경만 봐도 이에 대한 관주와 함께 난하주에 그 해석을 잘 설명하고 있다.
6, Appoint someone evil...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 a라는 관주가 붙어 있고 난하주에 a6 Or They say, “Appoint (with quotation marks at the end of verse 19).
이 말은 다른 사본의 6절의 시작은 ‘그들이 말하기를’로 시작되며 이후 19절까지는 따옴표로 처리가 되어 있다는 말이다.
즉 They say, “Appoint someone evil...”
이는 곧 6-19절까지의 저주의 말은 다윗이 대적자들을 향하여 하는 저주가 아니라 대적자들이 다윗에게 하는 저주를 다윗이 하나님께 아뢰는 내용인 것이다.
이는 오늘 본문 1절을 비롯해 몇몇 곳에서 잘 암시되어 있다.
(1절) 나의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그는 저주의 말 앞에서 잠잠하면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말씀하시게 한다.
(4절)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27-28절) 이것이 주의 손이 하신 일인 줄을 그들이 알게 하소서. 주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 그들은 내게 저주하여도 주는 내게 복을 주소서. 그들은 일어날 때에 수치를 당할지라도 주의 종은 즐거워하리이다.
다윗은 저주의 말 앞에서는 잠잠할지라도 그 저주가 내게는 복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사실 저주하고 참소하는 자는 사탄이다.
그런 자의 영적 실체는 사탄인 것이다.
사탄은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주의 백성들을 참소하여 그들을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려는 궤계를 일삼는다.
이는 신실한 자를 비난하고 참소하는 말로 넘어뜨리려는 사탄의 역사인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6절부터 19절까지의 사탄이 참소하고 저주한 내용을 그대로 하나님께 고하고 있다.
그들의 참소하는 말로 인하여 그가 당하고 있는 그 상처의 중함을 그대로 하나님께 올려드린다.
(22절)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나의 중심이 상함이니이다.
시편 39편에서도 다윗은 그의 대적자들의 행악 앞에서 내가 혀로 범죄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 앞에서 내 입에 재갈을 먹여 잠잠할 것이라고 한다.
(시 39:1-2)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
(7절)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9절)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
이런 다윗의 모습은 십자가 고통을 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예수님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으며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도 잠잠한 양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않으셨다.
심지어, 빌라도의 심문에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으셨으며 자신을 적극적으로 변호하지 않으셨다.
성경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요 5:39), 시편의 신실한 자의 기도는 이런 그리스도의 고백과 일치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비난하고 저주하는 말 앞에서 변명이나 변증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잠잠하셨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베드로 사도가 잘 증거하고 있다.
(벧전 2:22-25)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저주하는 말의 영적 실체는 사탄이다.
사탄은 밤낮으로 참소하는 자이기에 인간은 그 참소하고 저주하는 사탄을 이기지 못한다.
따라서 다윗도 하나님께 탄원하고 있다.
사탄은 언약 안에서 신실하게 사는 이들을 참소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고 넘어지게 하기 위함이다.
사탄의 계략은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져 자기가 하나님 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넘어서 아담의 생명에서 아들의 생명을 얻어 위로부터 얻은 하늘의 생명을 얻게 되면 이 세상의 공중 권세를 잡은 어둠의 영이라도 능히 이길 수 있다.
다윗은 그의 대적자들 곧 사람들의 저주를 받아 비참하게 된 자리에서도 그들을 직접 대적하지도 않고 저주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내게 저주할지라도 주는 내게 복을 주소서.’라고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구원을 확신한다.
다윗으로부터 예수님까지 그를 대적하는 이들 앞에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했던 어린 양과 같이 자기 스스로 대적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그들을 내어 맡긴다.
하나님께서 친히 입을 열어 말씀해 주십사 부탁함으로 탄원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지금까지 나를 비난하고 대적하는 이들 앞에서 내가 당하는 억울함과 비참함 때문에 얼마나 많이 고통스러워하고 억울해 했는가?
나 또한 입술을 열어 그들을 비난하고 나의 결백을 주장하곤 하였다.
그러나 이는 나의 생각일 뿐 결코 주님의 뜻이 아니다.
주님이 주신 말씀 앞에서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나도 걸어가야 할 것이 아닌가?
주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으니 나도 그 길을 걸어야 할 것이 아닌가?
주님께서 순례자의 길을 걸으셨으니 나도 그 순례자의 길을 걸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땅에 나의 저택을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에서 영원한 아버지 집, 거할 성읍, 주의 날개 그늘 아래를 사모하며 바로 거기에서 쉐키나의 영광을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 당장 나의 억울함을 피력하고 해소한들 그것은 오히려 나를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게 할 뿐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어찌됐든 그 억울함을 해소하려고 동분서주했던 나의 지난날의 모습을 다시 한 번 회고하면서 부족하고 연약했던 그런 나를 다시 주님께 내어 드린다.
그리고 오늘 이 아침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습으로 회복되기를 소망한다.
내게 임하는 어떤 어려움과 역경이라도 그것이 바로 주님의 선물임을 알고 은혜로 여기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살기를 바란다.
내 안에 아들이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주님의 뜻을 알기에 세상에 대하여는 초월할 수 있나이다.
비록 내가 억울함을 당하고 고난과 역경에 빠질지라도 그것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무덤의 상황에서 주님과 더 깊은 영적 교제와 사귐으로 주님이 지어주시는 성소 안에 거하기를 원하나이다.
이 땅에서 누리는 영생은 다른 것이 아니라 고난과 저주가 난무할지라도 아버지의 품속에 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사오니 나의 영을 새롭게 하시어 전심으로 주를 찾고 주님 안에 거하는 주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아들의 생명을 가진 자는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이 무어라 참소를 하고 저주를 하든 흘려 넘길 수 있나이다.
오늘도 주님의 말씀이 나를 온전히 덮어 그런 하찮은 말에 넘어지지 않도록 나를 장악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