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이란 비움을 채우는 것이며 비움 속에 차이는 무형(無形)의 용량(容量)이다.
얼은 비워 있어도 힘의 근원으로 차있으며 사물의 핵(核)에 이르는 투사력(投射力)을
갖는다. 그러므로, 얼은 참과 같은 뜻을 지닌다. 사람의 맘이 참으로 차있을 때
온갖 사(邪)가 침범할 수 없다.
차있음을 가득(充滿)하면서도 참(眞)된 것을 말한다. 참은 만물만상(萬物萬象)이
변해가도 변하지 않는 '본디'이며, 〈한〉의 모습 그대로 원만구족(圓滿具足)하여
온 누리에 차있는 것이니 티끌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진리는 먼 곳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우리의 맘 안에서 찾는 것이며
이는 또한 참음(忍耐)이다. 인고(忍苦)하며 인욕(忍辱)하는 곳에서만 참(眞)은 깃든다.
"참으세요"란 말은 "참을 얻으세요"라는 말과 같다. 참고 인내하지 않으면 참 진리
(眞理)는 얻어질 수 없다는 뜻이 '참' 속에 복합(複合)되어 있다. 그래서 참은 충일
(充溢)이며 인고(忍苦)를 동반하는 진리(眞理)의 개념이다.
참은 또한 우리 말로 "참하다" 이며, 착하고 얌전한 성품(性稟)을 말함이니 사람됨이
거칠고 모나지 않음을 뜻한다.
참함 사람, 착한 사람, 차있는 사람이 곧 참사람〔眞人間〕의 모습이며 진리체(眞理體)를
이루는 성품이다.
참〔眞理〕은 앎〔知識〕으로 채워지는 것이나, 앎이 참 자체는 아니다. 지식으로 얻은
진리는 언제가는 무너질 수 있는 속성을 지니므로서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진리는 지식을 초월한 곳에 거주(居住)한다. 사실 인간이 쌓아올린 지식은 완전한 것이
못된다. 지식은 진리에 접근하는 방법이 되기는 하나, 지식은 항상 새로운 고정관념(固定觀念)을
만들어 고정된 척도(尺度)에서 사물을 측량(測量)하려고 한다. 사실상 인간이 지니는 지식의
불완전함을 증명하는 것이 현대문명이 안고 있는 모순성이며, 이율배반적인 역기능적(逆機能的)
요소, 반작용적(反作用的) 내인(內因)들이다. 구체적으로, 지적하지 않아도 공해와 오염과
부작용(副作用)에 시달리고 있는 현대인의 고민에서 우리는 늘 경험하고 실감하며 살고 있다.
구태여 하나를 들자면, 현대의 의약(醫藥)이 질병을 치료하는 구실을 하는 반면 잘못 사용되면
인체를 구조적으로 침식(浸蝕)하는 무서운 역기능을 내포하는 사실만 보더라도 인간의 얕은
지식이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가를 인식할 수 있다. 이외에도 일일이 예를 들자면, 이 지면을
다 메꾸어도 한이 없을 것이다.
사실 인간이 완전한 존재라면 지식은 별로 쓸모 없는 것이다. 인간은 불완전하므로 지식이
필요하다. 지식은 역설적(逆說的)으로 인간을 근시안(近視眼)적으로 만들고 왜소화(矮小化)
하여 틀에 박힌 유형(類型)을 만들어내고 기성개념(旣成槪念)의 노예로 만드는 반작용적
속성을 지닌다.
인간의 과학기술은 아직도 이 거대한 우주의 극히 미미한 한가닥을 붙들고 있을 뿐이다.
부처님 손바닥에서 놀아난 손오공(孫悟空)의 꼴이 된 인간은 어설픈 지식의 노예가
되어 참된 가치관을 읽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지식의 맹신자(盲信者)인 인간은 스스로 인간성을 평가절하(平價切下)하고 있으며
기계문명의 발전에서 오는 반인간적(反人間的) 요소는 심화(深化)되어 차츰 인간을
기계의 노예로 전락(轉落)시키고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마멸(磨滅)해가고 있다. 기계
문명은 방향타(方向舵)를 읽은 배처럼, 풍량(風浪) 속에 목적감각(目的感覺)을 잃은 채
질주(疾走)하는 상태가 아닐는지도 모른다.
지식과 진리 사이에는 어떠한 괴리(乖離)와 벽(壁)이 있는 것인가?
앎(지식)이 참된고 올(얼)바르게 쓰여지지 않는 까닭이다. 인간을 잘못 쓰여진
지식의 오염으로부터 정화(淨化)시키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게 하는 참앎(眞知)을
찾아야 할 것이다. 역기능과 반작용과 심신(心身)의 오염을 몰고 오는 지식을 우리는
진리라 부르지 않는다. 모든 반도덕(反道德)적 기계문명의 모순성을 극복하고 참다운
가치관으로 이어질 때 앎은 참과 하나가 될 것이다.
--- 민족의 뿌리
첫댓글 힘들때마다 참아야 하느니라 하며 참았는데 아하 참된 앎을 알았구나 해야겠네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