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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의 강(江)
이 홍사
좌판에 날개가 닿지 않게 조심해라.
예초기 사고가 잦다는 걸 아는지 형님은 선산 도래솔 그늘에 앉아 소리를 질렀다. 끊었다던 담배를 한 개비 달라고 하여 피던 형님이, 예초기를 메고 좌판 옆의 잡초를 깎는 사촌 동생에게 또 주의를 주었다.
종세야! 좌판 옆에는 그냥 두라니까. 낫으로 깎으면 된다니깐!
다시 고함을 질렀지만 형의 목소리는 예초기 돌아가는 소리에 묻혀 동생에게 들렸는지 모르겠다.
작년에 교대를 졸업하고 올해 초등학교 교사로 임용받은 사촌 동생이 생전 처음으로 예초기를 메고 풀을 치는 솜씨가 어딘가 모르게 어설프고 불안했던 모양이다. 그 소리를 못 들은 동생은 서툰 솜씨로 섬세하게 깎겠다는 듯이 좌판 옆에 예초기의 날을 들이대고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서툴러, 불안해 보이는지 형은 고함을 치지만 보고만 있었다. 형님도 이젠 일어설 기운조차 없는 모양. 내 눈에도 서툴러 보이기는 마찬가지. 예초기란 힘으로 다루는 기계가 나이다.
추석이 임박했다.
애초에는 일요일인 내일 벌초를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사촌과 육촌 동생은 물론 나까지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제주도 부근으로 올라오는 16호 태풍 때문에 내일은 비가 많이 올 거라는 일기예보를 접한 형이 오늘 새벽에야 비상을 걸었다.
내일 일기가 불안하니 오늘 선산의 벌초를 마치도록 하자.
새벽에 내게 전화를 걸어 긴급 호출하고, 사촌과 육촌에게도 그 시간에 긴급전화를 넣은 모양이다.
집안에서는 종손인, 형님의 한마디가 바로 법이다.
최소한 산소나 제사에 관해서는 그렇다. 형은 마흔이 안 되어 축문과 지방 쓰는 법, 제법을 익히고 일찌감치 선산(先山)의 일이나 제사에 관해서라면 제왕의 권좌에 앉아있다. 숙부님께서 살아계신다고 하나 당뇨와 함께 따라오는 합병증으로 숙모의 부축 없이는 거동이 불편한 형편이라 형은 서른을 넘기고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선산을 상속받고 오대 종손으로 제왕의 권좌를 물려받았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언제 예초기를 잡아봤겠는가?
어딘지 모르게 서툴지만, 사촌 동생은 토요일인데 쉬겠다는 생각을 접고 새벽에 전화를 받고 바로 왔고, 육촌 동생 종화는, 종화? 녀석을 설명하자면, 당숙이 돌아가시자 어린 나이에 무슨 사업인가 손을 댔다가 집까지 다 날려 먹고 지금은 제 외삼촌이 경영하는 중소기업에서 통근버스와 화물차를 같이 운전해서 숟가락을 겨우 쥐고 있는 모양이다. 그 녀석은 형님의 전화를 받던 그때 화물차에 납품할 짐을 싣고 있는 중어서 하차하는 대로 오겠노라고 기별을 해 왔다고 했다.
새벽 전화를 받고 나는 현장에 들러 모든 일을 반장에게 미루고, 소장에게 일요일인 내일 근무하겠다고 양해를 구한 뒤에 다시 집에 들러, 아내를 태워 형수가 있는 큰집에 내려주고 바로 산으로 왔다.
아무리 급하게 결정되었고 현장이 바쁘더라도 벌초하는 날 얼굴을 내밀지 않으면 제왕에게 두고두고 씹히는 걸 알기 때문에 설쳤는데 좀 늦었다.
형님은 새벽부터 설쳤는지 선산 아래 도착하니 예초기 돌아가는 소리가 산 아래까지 들리고 있었다. 그때 형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너 어디냐?
그 물음에 늦게 온다고 힐책의 화살이 날아오는 줄 알았다. 그 화살을 피하려고 바로 산 아래라고 하자 형은 목소리가 좀 낮추어 차분하게 얘기했다.
차를 돌려서 항곡리 시장 철물점에 가서 괭이를 한 자루를 좀 사 오너라.
힐책이 아니라 아카시아 뿌리를 캐야 하는데 괭이가 없다는 말이었다. 군소리 없이 나는 차를 돌려 형 말대로 낙동강 다리를 건너 항곡리에 가서 괭이 한 자루를 사서 다시 산으로 왔다. 도착해서 보니 형님과 중학교에 다니는 쌍둥이 조카 둘까지 대동한 채 여름내 웃자란 잔디와 잡풀을 치고 있었다.
오 대 종손인, 형의 지휘하에 벌초는 하는 선산의 산소는 엄청나게 많다. 종조부모와 일찍 교통사고로 일찍 요절하신 당숙과 당숙모의 산소까지 선산에 모셨으니 오늘 벌초해야 할 산소는 손꼽으면 정확히 열네 기나 된다. 산 하나를 통째로 깎아야 하는 셈이다.
낫 한 자루 들고 소풍 오듯이 와서 산소 한 기를 벌초하고 가는 이들과는 달리 형 지시하에 이루어지는 벌초는 우리 집안의 거대한 연중행사다. 중학교에 다니는 조카까지 갈고리를 쥘 정도로 온 자손들이 모여서 해가 기웃할 때까지 해야 하는 대대적인 연중행사에 해당하는데, 점심 무렵이 되면 형수가 아직 산소가 있는 선산의 지리에 익숙하지 않은 아내, 결혼도 늦었지만, 결혼생활 구 년이 넘어 간신히 임신하여 배가 부른 아내를 대동하고 점심을 넉넉하게 해서 나올 것이다.
벌초하는 날은 새벽부터 설치니 점심나절이 되기 전에 배가 실쭉하고 허기가 진다. 그걸 아는 형수는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고기를 비롯해 여러 가지 음식을 푸짐하게 이고 나올 선산으로 올라올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점심을 먹는 동안, 형수님과 아내까지 갈고리를 쥐고 예초기로 쳐놓은 잔디를 긁고 잡풀을 날라야 그날 마칠 수가 있을 터.
단 세 살, 차이가 나는 형님이지만 형님이 제왕으로서 누리는 권좌는 실로 대단하다. 권좌라기보다는 명확하게 종손이 누리는 권리이자 의무다.
돌아가신 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마을 아이들이 소가 먹을 꼴을 배고 아무 산이나 가서 나무를 해서 군불을 때서 쇠죽을 끓이고 산에 풀어놓은 소가 풀을 뜯던 예전과는 달리 산은 금세 우거진다고 하셨다. 그때와는 달리 산업화 사회가 되어가며 산은 점점 우거져서 일은 점점 불어나는데 또 그동안 고인이 되신 분이 아버지를 비롯해 더 많아졌으니 당연히 벌초해야 할 산소의 기수도 불어났다.
농협에서 산소 벌초를 대행해 준다는 소리를 들었다.
돈을 계좌로 송금하고 산소의 위치만 일러주면 예초기를 잘 다루는 전문가들이 벌초를 대행해 준다. 어떻게 따져보면 그게 더 싸게 먹힐 수도 있다.
재작년엔가 벌초하는 날, 산소 앞에 둘러앉아 점심을 먹다가 눈치 없는 육촌 동생, 종화가 그렇게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했는데 그 말을 들은 제왕이 진노했다.
뭐라카노? 돈으로 한다고?
하마터면 육촌 동생의 면상으로 형이 쥐고 있던 숟가락이 날아갈 뻔했다. 형의 진노한 얼굴을 보고 중재에 나설 사람은 나뿐이었다.
벌초는 후손들의 정성으로 해야 해. 아무리 바쁘지만, 우리는 돈으로 해결하려고 들지 말자. 돈으로 해결해야 할 게 있고 돈으로 하지 말아야 할 게 있는 법. 벌초와 명절 제사 때 얼굴 안 보면 언제 얼굴 보냐? 벌초 안 한다고 누가 잡아가는 세상이냐? 그저 후손의 도리고 정성이지.
중재를 서느라 서로 듣기 좋게 말했다.
내 말에 제왕은 분노를 삼키고 겨우 숟가락을 들었고 누구라도, 어떤 일이 있어도 벌초에 빠지면 안 된다고 형님은 거듭 다짐받듯이 말했다.
아무리 바빠도 벌초에는 절대 빠질 생각하지 마라.
말을 꺼낸 종화의 몫으로 굳어진 산소는 종조부모와 당숙을 비롯해 제 어머니인 당숙모까지 네 기나 된다. 그런 녀석이 산주(山主)에다 종손인 형님에게 무슨 대꾸를 할 수 있겠는가? 그런 말을 꺼낸 자체가 죄인이 되는 셈이지.
아무튼, 오늘 처음으로 예초기를 멘 사촌은 기계를 다루는 솜씨가 어딘가 모르게 어설퍼 보인다. 때로는 칼날이 땅바닥에 꽂혀 돌과 흙을 튀기고 예초기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잔디가 보기에도 반듯하지 않다. 옆에 앉아서 잠시 땀을 닦으며 쉬던 내가 하겠다고 나서니 형이 만류했다.
쟤는 당나라 군대를 갔다 왔나? 군에서 제초 작업을 한 번도 안 해본 것 같노? 놔둬라. 쟤도 언젠가는 배워야 한다.
형도 보기에 위태로운지 자꾸 동생을 보고 이래라저래라 소리를 질렀다. 손목에 힘은 나도 이미 다 빠졌다. 몇 기를 예초기를 메고 깎았더니 팔이 덜덜 떨리는 게 힘이 빠질 대로 빠졌다. 말만 예초기를 메겠다고 했지 다시 예초기를 멜 기운조차 없다.
육촌 동생 종화가 늦게 도착했으니, 이제는 육촌이 예초기를 멜 차례인데 종화는 눈치 없이 예초기를 메지 않고, 봉분이나 좌판 부근의 웃자란 잔디를 낫으로 깎거나 예초기로 쳐놓은 풀을 갈고리로 긁어모아 적당한 장소에 버리는 허드렛일만 하고 있었다. 종화를 따라 쌍둥이 조카까지 긁어모은 풀을 골짜기로 갖다 버리고 있었다.
물론, 조카들은 공부에서 해방된 날이니, 소풍 나온 아이들처럼 신이 났지만, 엄마는 언제 점심을 가지고 오나? 기다려지는지 가끔 산 아래를 살피는 형편이 되었다. 녀석들도 배가 실쭉해진 모양.
예초기를 처음 멘 사촌은 요령으로 하는 게 아니라 그저 물리적으로 하고 있으니,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요령이 없어서 그런지 낫으로 깎아도 될 좌판 가까이 예초기 날을 들이대고 있었다. 그런 데는 손으로 깎자고 하려는 순간 할아버지 산소의 좌판에 예초기 날이 부딪쳐 불꽃이 번쩍 튀었다.
그러고는 종세도 기운이 빠졌는지 시동을 끄고 메고 있던 예초기를 벗었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갈고리를 쥐고 있던 육촌 동생, 종화가 예초기 날을 살펴보았다.
예초기 날이 끄트머리가 뭉텅 날아갔는데요.
종화는 우리 형제가 앉은 쪽을 올려다보며 보고하고 지시를 기다리듯이 소리쳤다.
그래? 그러면 안 된다. 중단해라, 잠깐만!
형은 소리 지르고는 담배를 끄고 일어섰다.
예초기 날은 예비로 준비해 왔다.
예초기는 날이 균형이 맞아야만 떨리지 않는 기계다. 한쪽 날 끝이 조금이라도 떨어지거나 부러지면 균형이 맞지 않아 심하게 떨린다. 그러면 예초기를 다루기에 힘이 들고 깎는 풀도 반듯하게 깎이지 않는다.
예초기를 다루는 동안 가장 조심해야 할 게 날이 돌이나 상석에 닿아 부러지는 것이다. 부러진 파편이 원심력에 의해 어디로 날아갈지 모른다. 하여 보안경을 쓰고 기계를 메지 않은 이들은 가능하면 멀리 떨어져 다른 작업을 해야 한다. 형이 공구를 챙기는 동안 나도 일어서 예초기 날이 때린 할아버지 산소의 좌판을 살펴보았다.
예초기 날이 부딪힌 부분은 좌판의 측면 생년월일을 새겨놓은 부분.
생년월일 중에서 태어난 년도, 한문으로 1928년이라고 새겨놓은 부분에 닿아, 한문으로 새기 여덟 팔자 중의 팔자에 조금 흠집이 생겼다. 그 흠집이 난 부분을 손으로 문지르며 1928년생이라고 속으로 할아버지께서 출생하신 연도를 되새겼다. 다행히 글씨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이거나 깨지지는 않았다.
1928년생!
일제 강점기인, 그즈음 출생하신 세대는 특별한 세대다.
1928년생이라고 음각된 글씨에 의미를 두고 다시 한번 손으로 그 숫자를 쓰다듬었다. 1928년생! 속으로 중얼거리며 시대를 잘못 타고 난 세대라는 할아버지께서 들려주시던 말씀이 떠올라 가슴이 아렸다. 한 세기가 넘어 살아계셨다면 할아버지 연세가 백 세에 가깝다.
쉰둘에 췌장암으로 요절한 아버지, 그러니까 당신의 아들을 앞세우신 할아버지는 전쟁을 두 번이나 치른 세대다. 그 세대에 태어난 사람들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할아버지는 두 번의 전쟁에 직접 참전하셨다. 말씀은 두 번이라고 하셨지만, 아들인 내 아버지를 앞세우셨으니, 그건 전쟁보다 더 지독하게 가슴 속으로 치른 당신과의 전쟁 중의 하나라고 할 수도 있겠다.
종손이 되는 형을 제치고, 하는 짓이 기특하다며 유독 나를 총애하시던 할아버지께선 철이 들기 전에 늘 내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시대를 잘 타고났다고, 이 좋은 시대에 반드시 남보다 앞서가는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고 하시며 다짐을 받으시던 할아버지께선 당신의 생애, 궤적을 짤막짤막하게 들려주셨다.
사실이지 그때는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잘 타고난 시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말씀을 하실 적에는 너무 어려서인지 학도병으로 전쟁터에 내몰린 열일곱의 나이가 많은 것으로 생각했다. 직접 군에 가기 전까지는 그랬다.
군 복무를 하며 훈련이 힘들 때마다 할아버지 말씀을 떠올리며 열일곱에 전쟁터에서 총알받이까지 하신 분도 있는데 스물이 넘어서 받는 이까짓 훈련이야 전쟁놀이에 불과하다고 스스로 달래며 남이 힘들다는 군 생활을 가뿐하게 마셨다.
이렇게 말하면 군에서 철이 들었다고 할까, 그때 가서야 비로소 할아버지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전쟁이 얼마나 참혹하고 힘들다는 것에 대해 상상이 가능했다. 늘 무서웠고 배가 고팠다는 그 말씀도 이해할 수가 있었고 열일곱! 전쟁터로 내몰리기엔 실로 어린 나이라는 사실도 군에서 깨달았다.
일제 강점기! 할아버지께선 넉넉지 않은 살림이었으나 청운의 꿈을 품고 동경으로 유학을 가셨다. 그게 전장으로 가는 길인 걸 몰랐는데, 뱃멀미에 시달리며 바다를 건너간 지 넉 달 만에 의용이라는 이름으로 가장된 학도병으로 전쟁터에 강제로 끌려가셨다.
당시에 무작위로 공격만 해대던 일본군은 베트남을 거쳐 태국 정글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을 때였다. 할아버지께서 어린 나이에 그렇게 전쟁터에 끌려가도 집에 계신 증조부님은 모르고 계셨다는 건 당연하고. 거의 일 년이 넘게 동경으로 공부하러 간 아들이 연락이 없어 수소문 끝에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되었다는 사실을 아시고 증조모께서 새벽마다 깨끗한 물 한 사발에 아들의 목숨을 걸어놓고, 공부는 뒷전이고 어느 전쟁터에 있는지 모를 어린 아들이 부디 살아서 돌아오기만을 빌고 빌었다고 했다.
1928년 출생!
열일곱에 동경으로 건너가 넉 달 만에 학도병으로 참전하고 간단한 훈련을 받은 곳이 베트남이라고 했다. 팔십여 명이 동경에서 함께 출발했는데 일본 학생이 반이고 조선 유학생이 거의 반이었는데, 배로 거기까지 가는 데만 거의 한 달이 넘게 걸렸다고 했다. 이동하는 동안은 허기와 뱃멀미,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추워서 떨고 풍랑과 싸우고 전쟁이라는 접하지 않은 행위를 상상하고 공포에 떨었으며, 월남이라고 불리는 베트남 훈련장에 도착하여 훈련 중엔 더위와 장티푸스로 쓰러져서 죽은 조선 친구의 시신을 정글에 묻으며 치를 떨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장티푸스를 두고 꼭 장질부사라고 하셨다.
거기서 늘 허기에 시달리며 한 달 동안 훈련을 받고 다시 이동한 곳이 한참 정글전이 벌어지고 있는 미얀마, 그 당시의 국명은 버어마였다. 할아버지는 그 지명을 두고 항상 ‘비르마’라고 하셨다.
비르마에서 소대 단위로 인원이 재편성되고 치열한 정글전에서 전쟁을 치르는데 누구를 위한 전쟁인지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는 사실을 거기서 깨우치셨다고 하셨다.
누구를 위해서 총을 쏘는지 모르는 맹목적인 전쟁에서, 이름도 모르는 정글의 전장,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총에 맞아 죽지 않기 위해 총을 쏘고, 아무리 생각해도 끝없는 전쟁이고, 살아서 조국으로 돌아가기는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단 하루라도 더 살기 위해서 주는 대로 먹었으며 병기를 다루는 전술을 익혔다는 할아버지.
중, 미 연합국과의 싸움인데 늦게는 인도를 통해 들어온 영국군도 합세하여 일본군이 상당히 위태로운 전장에서 한국인이라는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총질만 해야 했다고 하셨다. 다행히도 그 해에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지며 일본의 패망으로 전쟁이 끝났다. 정글에서 소대 단위로 게릴라전을 벌이던 어린 학도병들은 그 사실조차 몰랐다.
철수 명령도 없이 지휘관들이 어느 날 갑자기 어디론지 모두 사라지자, 조선의 학도병들은 전쟁터에서 도망치는 기분으로 고향이 어느 쪽인지도 모르면서 조선을 향해 뿔뿔이 내달았다는 것이다. 마침 조선 학도병 하나가 할아버지의 뒤를 따랐고, 돌아갈 길이 막막한 어린 학도병 둘, 상의하며 방향만 가늠하고 발길이 닿는 대로 정글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말도 통하지 않고 지도나 나침반도 없는 실정이라 손짓에 발짓을 동원해서 길을 묻고 열대 음식을 구걸하거나 나무 열매가 무슨 과일인지 모르면서 따서 허기를 때우고 잠은 더운 나라 정글의 나무 밑에서 잤고 추운 지방으로 들어와서는 남의 집 헛간이나 같은 데서 숨어서 잤다고 했다. 배는 고파도 그 공포에 질리는 총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살 것 같았다고 했다.
어릴 적에 할아버지의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 실감이 나지 않았다.
우리가 살아서 돌아온 건 먹을 게 있었거나 언어가 통해서가 아니었어. 순전히 눈치로 살아서 돌아온 것이지.
흠집이 생긴 좌판을 쓰다듬으니, 할아버지가 늘 하시던 그 말씀이 귓전으로 흘러갔다. 눈치로 말을 알아듣고 민가에서는 눈치로 얻어먹고 다시 눈치로 방향을 가늠하며 아직 전쟁 중인 줄 알고 다음 동네로 숨어서 이동하고 길을 짚어보는 걷고 또 걸었던 두 학도병의 모습이 예초기 날을 갈고 있는 형의 모습과 겹치면서 눈앞에 펼쳐졌다.
산소 앞에 서면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이 보인다.
강 건너서 보이는 도시가 바로 유서 깊은 선산읍이다. 옛날에는 군청 소재지였지만 지금은 시로 편입되어 지명을 빼앗기고 읍으로 전락했다. 펼쳐진 들판을 가로질러 유유히 흐르는 강을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할아버지의 인생이라는 강은 지금 저 강처럼 순탄하게 흐르지 않았다.
1928년생!
굳이 비유하자면, 폭우와 태풍으로 강이 소용돌이쳤던 세대!
그 소용돌이 속에서 태어나신 할아버지는 당신의 말마따나 ‘비르마’에서 다섯 달이 걸려 중국 본토에 들어와서야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져 전쟁이 끝난 줄을 아셨다는데. 조국이 해방되었다는 소식도 그곳에서 접했고 할아버지와 동행한 그 어린 학도병은 이름도 모르는 남중국 어느 땅에서 뒤늦게 만세를 불렀다고 했다.
자신들이 탈영한 것이 아니라 패잔병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살아남은 것에 대해 골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해방국가의 자유인으로 돌변해서 낮에도 마음대로 걸어서 남의 집에 들어가서 헌 옷도 얻어 입고 일도 해주고 먹을거리를 얻어가며 귀향길에 올랐다고 하셨다. ‘비르마’에서 벗어나니 신고 있던 헝겊으로 된 전투화가 바닥이 떨어져서 버리고 그때부터 맨발로 대륙을 걸었다는 할아버지. 그해가 45년이었는데 할아버지의 지명 ‘비르마’에서 탈영하는 기분으로 나왔는대, 자유인이 되어 중국대륙을 거쳐 두만강을 건너 조선의 고향, 선산까지 맨발로 도착하니 47년이 되었다. 전선과 돌아오는 그 2년의 과정을 할아버지께 들은 그대로 낱낱이 서술하자면 책 한 권이 넘을 터.
전쟁이 종료된 미얀마의 이름 모를 정글에서 고향인 경북 선산까지 이 년간에 걸쳐 어린 학도병 둘이 서로 의지하며 얻어먹고 눈치껏 남의 헛간이나 처마 밑에서 자며 맨발로 걸어오셨다는 말씀을 들으면서도 내 어릴 적에는 상상은커녕, 뭐, 재미있었겠네! 나도 그렇게 한번 해보고 싶다는 충동으로 침을 꿀꺽 삼키며 그 말씀을 들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 나이에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있었으리라는 짐작과 말씀하시는 허기와 추위, 더위는 짐작이 가고 당시 대륙을 통과하는 할아버지라는 누추한 몰골의 모습이 눈앞에 선한다.
할아버지는 학도병에서 돌아와 면 소재지에 새로 생긴 초등학교에 임시 교사로 이 년간 근무하셨다고 했다. 그때 증조부께서 정해놓은 규수, 할머니와 결혼하시고 50년생인 아버지를 잉태하여 할머니 배가 부를 적에 다시 국군으로 입대하셨다. 이미 45년도에 조선경비대라는 이름으로 국군이 창설되어 있었다. 할아버지는 결혼하시고 나서야 입대할 나이가 되신 것이다. 그렇게 어렵게 고향에 돌아왔지만, 격동의 시기, 소용돌이치는 시대의 강은 할아버지를 그냥 두지 않았다.
학도병으로 전쟁을 치른 경력이 인정되고 또 고등 보통학교를 마치고 유학파의 지식인으로 분류되어 군관학교에서 삼 개월의 장교 교육을 거쳐 장교로 임관한 것이다. 그 해가 49년이었다. 그러니까 한국전 발발 팔 개월 전이었단다.
군관학교 훈련을 마치고 소위로 임관하여 포천에서 팔 개월 정도 근무했을 때 한국전이 터졌다. 최전방의 새벽, 불시에 당한 남침이라 전세가 밀릴 수밖에 없었다. 국군의 장비와 전투태세는 열악했다.
전쟁에서 가장 힘든 자리가 소대장이라는 계급. 나를 따르라. 현 전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위의 명령을 받고 소대원을 챙기며 후퇴하고, 눈치껏 보급품을 수령 받는 심신이 피곤한 직위다. 할아버지는 대한민국 소위로서 한국전을 혹독하게 치르셨다. 그래도 학도병 때보다는 조국을 지킨다는 명분이 있어 소대장으로서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밀리고 밀려 왜관 철교를 잘라놓고 고향 부근인 낙동강 다부동 전투, 그러니까 한국전에 중에서 가장 격렬하게 치러지던 다부동 전투에서 한 쪽 허벅지에 총알의 관통상을 입고 부산 국군통합병원으로 이송되었는데.
공교롭게 허벅지 관통상을 입은 그날이 바로 당신의 아들, 그러니까 아버지께서 태어나신 날이라는 사실. 그 사실은 전쟁이 끝나고 병원에서 퇴원하여 고향으로 돌아와서 아셨다고 했다. 고향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전사하신 줄 아셨다고 했다. 당시의 통신 사정으로는 생사를 알 길이 없었다.
할아버지 평생 절룩거리는 세월을 지고 사셨다. 총을 맞은 날은 단순 허벅지 관통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허벅지 아랫부분 무릎을 관통하는 바람에 왼쪽 무릎을 평생 쓰실 수가 없는 상이군인이 되셨고 한쪽 다리를 절룩거리는 여생을 사셨다.
할아버지께서 입원 후송되시고, 인천상륙작전이 펼쳐지고 서울수복이 지나고 51년에 관절이 말을 듣지 않는 뻣뻣한 다리를 절룩이며 고향으로 돌아와 두 살이 된 당신의 아들을 처음 보셨다는데.
할아버지는 다친 무릎보다 다부동 전투에서 부하 세 명을 잃은 것을 더 애통해하시며 평생을 사셨다. 집안 대대로 지어오던 농사를 그만두고 입대하시기 전에 근무하시던 초등학교 교사로 다시 부임을 하시어 정년을 채우고 세월의 뒤안길로 물러앉으셨다.
정년을 채우고는 전쟁이 끝난 40년이 지나고 나서 지역 예비사단에서 다부동 전투의 전사자 유해 발굴 작전에서 할아버지는 절뚝이는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직접 증인으로 참석하셔서 할아버지께서 당시 전쟁 중에 손수 묻은 부하들의 유해 두 구를 기억하시고 발굴하셨다.
두 번째 전쟁이 끝난 지 40년이 지나도 할아버지의 가슴에 상흔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니까 한쪽 다리를 쓰지 못하시는 할아버지께선 평생 전쟁에 시달리며 사신 분이다.
너희들은 시대를 잘 만났다. 조국이 이렇게 발전할 수가 있으니, 배가 고프지 않고 전기가 이렇게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으니 공부하기가 얼마나 좋으냐?
배가 고프지 않고 전등 아래서 공부하는 게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우리 세대에게 던지기에는 난해한 감사와 다행으로 점철된 뉘앙스를 풍기는 말씀.
지금 갈고리를 쥐고 장난삼아 할아버지 산소에 잔디를 긁고 있는 쌍둥이 조카에게 그 말씀을 그대로 전해준다?
왜 배가 고플까? 라면 끓여서 먹으면 되지!
똑같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의아해하는 눈빛을 보면 뭐라고 설명하지?
할아버지와 쌍분으로 묻힌 할머니의 생은 어떠셨을까?
보통학교 선생님이라는 작자에게 시집을 와서 일 년이 채 못 되어 남편을 나라에 빼앗겼다. 그리고 남편의 생사도 모르는 채 전쟁 중에 시부모님을 따라 지금의 경북 청도로 피난길에 올랐고 그곳 남의 집 문간방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단명하신 내 아버지!
일 년간의 피난살이 끝에 다시 시댁으로 돌아와도 남편에게는 소식조차 없었다고 들었다. 시절이 어수선하고 당시의 통신수단으로는 할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할 길이 없어 초조해하고 있을 때, 어느 날 해거름에 절룩거리는 할아버지가 골목으로 들어서는 걸 보고 끝내 울음을 참지 못하고 달려가 할아버지의 가슴팍을 두드리며 통곡했다는 말을 할머니에게 들었다.
어릴 적에는 그 말도 이해를 못 했는데 지금 돌이키니 가슴이 뭉클한 재회의 장면이다. 얼마나 가슴을 졸이며 기다렸을까? 할머니는 할아버지보다 한 살이 많았고 일 년 늦게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바로 형의 의견대로 선산의 모든 산소에 상석을 하고 묘지를 재정비했다.
내가 태어나기 거의 삼십 년 전인 그 시절을 상상하며 고개를 돌려 낙동강을 보았다. 강은 옛날 그대로 흐르는데 사람은 옛사람이 아니고 시절도 그 시절이 아니다. 갈고리를 서로 잡겠다고 다투는 쌍둥이 조카를 보며 저 세대들이 할아버지께서 두 번의 전쟁이나 치른 세대라는 걸 듣으면, 상상이나 가능할까? 슬쩍 이는 자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배가 왜 고픈데? 라면 끓여서 먹으면 되잖아? 그렇게 되물을지 모른다.
그나저나, 저 녀석들이 크면 벌초나 할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장례문화가 급속도로 변해서 있는데, 화장해서 그냥 뿌리거나 수목장이라는 이름으로 나무뿌리 밑에 유골을 묻는 쟤들이 사촌끼리 모여 조상들 산소에 벌초라니 언감생심 바라지 말아야 할 일이다. 벌초라는 연중행사는 우리 세대에서 끝일 것만 같다.
형은 작년 벌초 때 육촌과 사촌, 나를 나무 그늘로 불러놓고 얘기했다.
산소를 이렇게 해두니 벌초하고 관리하기가 너무 힘이 든다. 숙부님께서 돌아가시면 온 산에 흩어진 모든 산소를 한곳으로 옮겨서 조그만 묘석을 세우고, 가족 묘지를 만들자. 앞으로 관리가 문제야.
형의 말에 모두가 공감했다.
앞으로 쟤들이 관리하려면 그렇게 해야 마땅하겠죠.
육촌이 맞장구를 치며 쌍둥이 조카를 들먹이고 나섰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게 언제 실현될지 의문스러웠다. 숙부님 돌아가시면 하자고 했지만, 그때 가서 형의 마음이 또 어떻게 바뀔지 몰라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함이 풀려버린 손으로 풀을 치우다가 자꾸 산 아래를 살폈다. 형수님과 아내가 점심을 가져올 때가 되었을 성 싶은데 종무소식이다. 해는 중천에 올라와 시장기가 느껴졌다. 아내의 뱃속에 든 놈은 아들이라고 산부인과 의사가 말했다. 저놈이 나와서 장성해서도 이 산의 벌초를 이렇게 힘들여서 해야 한다는 건 그리 마음 편한 일이 아니다.
형님의 말대로 숙부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숙모 산소를 옮기면서 모든 산에 흩어진 산소를 다시 재정비해서 가족 묘지를 만들어 관리하기 좋게끔 만드는 일이 자손으로서 도리고 훗날 조상으로서 자손들의 일손을 들어주어는 일이 아니겠는가?
아침에 서둘렀더니 시장기가 느껴지는데 형수님과 아내는 종무소식이다. 배가 고프면 희한하게 나는 짜증이 인다. 현장에서도 마찬가지. 점심 먹기 전에 하는 회의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자꾸 산 아래로 눈길이 갔다. 그때 내 휴대폰이 울렸다. 현장에서 온 전화이거니 짐작하고 받아보니 의외로 아내였다.
웬 전화야? 점심 안 가져오는 건가?
여기 산에 다 왔는데 차 앞 타이어가 펑크 났어요. 산에서 내려와서 모퉁이 하나 돌면 있어요. 내려와서 어떻게 좀 해봐요.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그런 일이라면 직접 내가 나서기보다는 차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종화를 보내는 게 낫다. 돌아보니 종화는 사촌이 벗어놓은 예초기를 막 둘러메는 참이었다.
종화야! 잠깐만.
불러놓고 상황을 얘기했다. 그 얘기를 듣고 있던 형님이 종화가 가는 게 좋을 거라고 동의했다.
스페어타이어는 있는지 모르겠네?
그 한마디만 뱉어놓고 메던 예초기를 내려놓고 빠른 걸음으로 산길을 내려갔다. 종화를 보냈으니 어떻게 하겠지. 이번에는 종화가 벗어놓은 예초기를 형이 직접 메고 시동을 걸었다. 예초기 돌아가는 소리가 골짜기를 울렸다. 종세가 서툴게 깎은 곳을 다시 형이 예초기 날을 들이대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형은 예초기를 다룰 줄 안다.
종세는 형이 예초기 다루는 모습을 꼼꼼히 지켜보고 섰다. 점심 전에 할아버지 산소를 마치려면 시간이 없다. 나는 종세를 불러 점심이 오기 전에 이 산소는 마치자고 갈고리를 쥐어주었다. 종세는 형이 쳐놓은 풀을 갈고리로 긁기 시작했다. 종세가 긁어서 모아놓은 풀을 안아다가 골짜기 소나무 밑으로 날라서 쌓았다.
땀이 등골을 타고 흐른다.
이마에서 흐르는 땀이 눈으로 들어가 손등으로 눈을 훔치며 보니 종화가 빠른 걸음으로 저 멀리 산모퉁이를 돌아가고 있다. 아무리 빨라도, 점심이 오려면 삼십 분은 족히 걸리겠다. 그동안 할아버지 산소 벌초는 깨끗이 마쳐야 한다는 생각에 종세가 긁어서 좌판 옆에 모아놓은 풀을 한 아름 안다가 좀 전에 예초기 날에 부딪힌 1928년으로 음각된 글씨를 보았다. 약간의 흠집이다.
1928년생! 이라고 웅얼거리며 풀을 안고 일어나다가 멀리 강을 보았다.
어라! 저게 뭐야? 그 강 위에 한 소년이 걸어가는 모습이 실루엣으로 보였다. 가만히 보니 소년은 낡은 전투복에 다 떨어진 헝겊 전투화를 신고 힘겹게 걷고 있었다. 지친 듯이 힘겹게 걷는 열일곱 정도의 소년! 다시 보니 그곳은 강이 아니라 어느 정글이었다. 야자수 잎이 사이로 강렬한 햇빛이 소년을 태울 듯이 쏘아대고 있다. 지친 소년은 사방을 둘러보더니 야자수 그늘로 몸을 숨긴다. 그리고 손가락 두 개를 입에 넣어 휘파람으로 어디론가 신호를 보낸다. 그 휘파람 소리가 내 귀에까지 삑 들렸다. 그 소리가 밀림을 울리자 또 한 소년이 나타난다. 앞의 소년과 또래로 보이지만 키가 좀 더 큰 소년이다. 역시 낡은 군복에 지친 모습이다. 그 소년은 그렇게 신호를 받고 앞에 간 소년이 앉은자리까지 와서 그 야자수 그늘에 같이 앉지 않고 지나쳐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첨병이 되어 밀림을 빠져나가는, 교대로 첨병이 되는 두 소년은 한눈에 보아도 학도병들이다. 야자수 그늘에 앉은 소년은 사랑을 두리번거리더니 키가 작은 열대 식물에서 붉은 열매를 발견하고 그것을 따서 허겁지겁 먹기 시작한다. 심한 갈증과 허기를 느끼는 모양이다.
야! 넌 뭐하고 섰냐?
풀을 한 아름 안고 서서 강을 보는 나에게 형님이 지적했다. 잠시 착시현상에 빠져 이상한 광경을 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현실을 직시한다.
어느 틈인지 형이 메고 있던 예초기는 시동이 꺼져 있었고 형의 목덜미에서 흐르는 땀이 티셔츠를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형님! 할아버지께서 열일곱에 미얀마 정글에서 어떻게 살아서 돌아오셨을까?
너 지금 그 생각하고 있었냐?
그래요.
봉분을 깎으며 나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할아버지께서 그곳에서 살아남지 못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
할아버지 살아생전 말씀에 의하면 눈치 하나로 살아오셨다고 했어.
그 말씀은 나도 몇 번이고 들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열일곱 나이가 참 어린 것 같지?
요즘 애들이야 철이 있냐? 가난은 아이들을 일찍 철들게 만든다고 했어. 그 시대에 열일곱이면 철이 다 든 나이지.
형은 메고 있던 예초기를 벗으며 놓고 잔디밭에 그대로 앉으며 대답했다. 그늘로 들어갈 기운조차도 없는 모양이다.
태어나신 연도가 1928년이라는 게 참 가슴 쓰리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생에 관해서 얘기하고 있을 때 쌍둥이 조카 중, 작은 녀석이 수건을 가지고 와서 제 아빠의 목덜미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봐라. 이 녀석도 집에서 안 하던 짓을 하고 있어.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잖아.
그런가요? 하지만 얘가 전쟁에 두 번이나 참전한다고 생각해 봐요.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 거 같아요?
불후한 시대에 태어나셨지만, 할아버진 천운을 타고나신 거야.
그렇죠? 그러나저러나 밥이 언제 오려나? 형님 허기져 보이는데?
그래도, 배가 고플 적에 1928년생을 생각하면 참고 견딜 수가 있어.
종화에게 전화를 해볼까요?
그냥냥 둬라! 바퀴만 바꾸면 금세 오겠지. 배가 고플 적에 1928년생의 허기를 생각하며 1928년생의 벌초를 깔끔하게 마치자.
형님이 일어서자, 제 아빠의 목덜미를 닦아주던 작은 조카 녀석이 말했다.
아빠? 1928년생이 뭐야?
그건 인생이고 살아가는 방법이야. 너 한문 알지? 여기에 한문으로 일. 구. 이. 팔이라고 쓰였잖아. 이 할아버지 얘기야. 나중에 말해줄게.
조카 녀석의 물음에 그렇게 응대하고 형은 갈고리를 잡았다. 조카 녀석은 고개를 갸웃하며 좌판 앞에 쪼그리고 앉아 음각된 1928이라는 글자를 손가락으로 따라 쓰며 일. 구. 이. 팔. 이라고 쫑알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외면하며 멀리 강을 바라보았다.
어라? 강이 왜 저렇게 회색으로 변했지?
아픈 역사를 품은 1928의 뿌연 강을 보면서 웅얼거리는데 멀리 산모퉁이를 돌아서 농로로 달려오는 흰색 승용차가 보였다. 형수님 차다. 분명히 점심이 실렸을 터!
그래 먹어야지!
그 시절 할아버지께선 이 허기를 어떻게 감당하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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