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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9 / 감사하는 믿음이란 뭔가?(딤전4:1-5)
하나님을 믿는 분이 아니더라도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셨다는 것은 다 아실 겁니다.
한번은 아담이 며칠간 늦게 집에 들어오자, 하와가 “여보! 당신 수상해요. 딴 여자 생긴 거 아니에요?”라고 추궁을 합니다.
아담이 어이없어하며 “말도 안 되는 소리. 여기엔 당신밖에 없잖아.”라고 하자 할 말이 없어진 하와는 홱 돌아서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있고 얼마 후, 아담이 한참 잠을 자는데 갑자기 누군가 가슴을 꼭꼭 누릅니다. 하와였습니다.
잠에서 깬 아담이 “당신 뭐 하는 거야!”라고 묻자, 하와가 “별거 아니고, 당신 갈비뼈 개수 좀 세어 봤어요.”라고 하더랍니다.
사람의 심리란 게 분명 아닌 것을 알면서도 질투에 빠지면 그렇다고 여겨 버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질투에 빠지게 되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들리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기 판단과 자기 느낌만을 맞는다고 단정해 버립니다.
성경에도 보면 다윗이 블레셋을 물리치고 개선할 때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매.”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제 견해로는 당시 백성들이 눈치가 없어 보입니다. 그래도 사울이 왕인데 전과가 천이고 신하인 다윗의 전과가 만이라니요.
결국 이 일로 인해 사울에게는 다윗을 향한 질투가 생겼습니다. 사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움을 받을 당시만 해도 대단한 업적의 훌륭한 인재였는데 다윗을 질투하면서부터는 그의 모든 장점이 더는 발휘되지 못했습니다. 나랏일은 뒷전이고 오직 다윗을 죽이는 것에만 온 힘을 다하다가 결국엔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자신이 전사하고 맙니다.
돌이켜 보면 사울의 경우, 다윗을 향한 여인들의 칭송이 비극의 발단이었습니다. 그렇게 질투에 빠지면서 사울은 점차 영민한 판단력을 잃어버리고 스스로 패망의 길로 달려 나간 것입니다.
이렇듯 질투가 발동하면 될 것도 안 되고, 할 수 있는 것도 못 하게 되는 결국을 맞을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질투는 엄청난 자기희생과 감정 에너지를 소모하게 합니다.
1994년에 일본의 사코 다카고라는 여성이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직장 동료의 행복한 결혼 생활이 너무 질투가 나서 8년에 걸쳐 무려 15만 번이나 그 집에 전화를 하다가 체포된 것입니다.
계산상으로는 8년간 하루에 거의 51통 이상씩을 전화해서 상대방이 받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거나 심한 욕을 퍼붓고 끊는 생활을 무려 8년이나 했다는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루에 50통을 전화하려면 일상적인 생활은 거의 불가능해집니다. 전화요금은 또 얼마였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심리학자는 말하기를 질투는 스스로를 죽이는 독약과 같은 것이라고까지 했습니다.
다른 예를 보자면, 모차르트 당시에 비엔나의 궁중 악사 살리에리는 당대 제일의 음악가였음에도 어느 날 모차르트의 재능을 보고는 엄청난 질투에 빠지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렸지요? 질투는 사람의 모든 장점을 덮어버린다고.
살리에리도 질투에 사로잡힌 이후로는 자신의 음악적 재능이 더는 발전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질투를 하다 하다 나중엔 그런 재능을 모차르트에게만 주었다며 하나님을 저주하기까지 했습니다.
질투가 그의 장점을 죽인 것도 모자라 질투로 그의 영혼까지 죽음으로 내달리게 된 것입니다.
결국 그는 미치광이가 되어버립니다. 상대방을 향해 쏘았던 질투의 화살이 자기에게로 돌아와 자기를 죽였던 겁니다.
문제는 교회라고 해서 질투가 피해 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교인이라 해서 오던 질투가 멈춰 서지 않는다는 겁니다.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로 성가대원이던 부부가 결혼 25주년을 기념하여 보름간의 일정으로 유럽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성가대가 질투의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 주일 성수도 안 하고 놀러 다닌다는 말부터 시작해서, 여행 가려면 조용히 갈 것이지 그렇게 티를 내면서 가야 시원했겠냐는 말에 더하여, 평소에 한두 번 싸운 것을 문제 삼아 이혼을 피하려고 여행 간 거라는 말까지 해서, 아무튼 성가대가 부부의 뒷담화로 크게 시끄러웠고 이를 제지하는 사람들과의 반발로 인해 불화가 생기면서 이후 제대로 된 예배 성가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질투가 이렇게 무섭습니다. 질투하다 보니 나 은혜받는 것보단 남 은혜 못 받게 하는 걸 목적으로 삼고, 질투하다 보니 나 칭찬받는 것보단 남 비난받게 하는 일에 앞장서고, 질투하다 보니 용서하고 축복하기보단 눈 흘기고 상처 주는 일만 찾아 행합니다.
그래서 탈무드에 보면 사탄 대회에서 가장 많은 상을 타는 사탄이 질투 마귀랍니다.
결국 질투는 마귀의 역사였던 겁니다. 그렇다면 자명해집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여하한 경우에도 질투를 극복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믿음의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그러자니 우선,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시선과 관심을 집중해야 합니다.
어떤 분이 정의한 걸 보니까 질투란 이웃이 지닌 것을 자기가 소유하지 못한 사실에 슬퍼하는 것이고, 시기란 자기가 갖지 못한 좋은 것을 이웃이 가진 사실에 슬퍼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웃이 가진 것’이든 ‘나에게 없는 것’이든. 다 좋은데 사람들에게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빠졌기에 사람들은 쉽게 질투에 빠지곤 합니다.
그렇다면 그 빠진 한 가지가 뭘까요?
이웃과 나 사이에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린 이웃이 가진 것이 무엇이든 ‘하나님께는 있다.’는 생각과 또한 내게 없는 것이 무엇이든 ‘하나님께는 있다.’라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있는 겁니다.
한번 따라 하세요. “하나님께는 있다!”
말하셨으면 고백한 대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흔히 질투를 말하면서 그 반대말로는 여러 가지를 언급합니다. 상대방보다 더 잘되면 된다고 해서 성공이라고도 하는 사람이 있고, 또 상대방에 대한 질투 대신 사랑을 표현하자며 친절 혹은 상냥함이라 하는 분도 있는데, 사실 질투는 질투하는 대상에게 집중해서 생기는 마음의 병입니다. 따라서 대상에 집중한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서의 질투의 반대말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 믿음이니까요.
혹 이전에 여러분에게도 무언가에 대한 부러움이 있었거나 누군가에 대한 시기나 질투가 있었는지요?
그게 아니라면 누군가와 비교해서, 또는 무언가로 판단해서 스스로 주눅 들거나 기죽어 살지는 않았는지요?
이제부터는 우리에게 믿음이 있으려면 그 믿음 중 가장 첫 번째가 ‘하나님께는 있다.’가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혹 어떤 분은 그럽니다. 모든 게 하나님께 있다는 건 믿겠는데 하나님이 도통 내게는 안 주시는 것 같아 그게 좀 불만이라고.
여러분은 어떠시나요? 하나님이 하나님께 있는 걸 나에게 몽땅 다 주시면 좋으실는지요?
만약 그런 걸 바란다면 아버지 것이 다 내 것이니 당장에 내 몫을 내놓으라고 했던 누가복음의 탕자와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살다 보면 지금의 형편이 부족하고 모자랄 수는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우리의 믿음까지 부족하고 모자라면 안 됩니다.
믿음이 뭡니까? 부족하면 ‘하나님께는 있다.’를 생각하는 게 믿음입니다.
기도가 뭡니까? 모자라면 ‘하나님께 달라고 하자.’라고 하는 게 기도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우린 심령에 질투가 들어오려는 자리를 하나님을 향한 기도로 채워야 합니다. 불만이 차지하려는 자리를 하나님을 향한 감사로 채워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입 속에 마늘이 있으면 밖으로 독한 냄새가 나오겠지만 입 안에 사탕이 있다면 밖으로도 달콤한 향이 나올 것입니다.
같은 이엔로 맘속에 질투와 불만만 있다면 나에게서 드러나는 것도 결국에 질투할 일, 불만스러운 일만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내 안에 기도가 있고 감사가 있다면 밖으로 드러나는 모든 일이 응답이 될 것이고 감사할 일이 됩니다.
여러분이라면 여러분의 삶에서 드러나고 보여지는 것이 무엇이었으면 좋겠습니까?
응답과 감사이기를 원하신다면 당장에 주시지 않는다고 해서, 또한 한 번에 몽땅 주시지 않는다고 불안해하거나 염려할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는 다 있으니까요. 결국엔 다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제 경우, 교우분의 접대로 난생처음 코스요리라는 걸 먹어 본 때를 생각해 보면 당시엔 그게 참 감질나더라고요.
옆 테이블을 보니 각종 요리로 한 상 푸짐하게 차려져 있던데 코스요리라는 건 일단 한 가지 음식을 내오고 홀짝홀짝 먹다 보니 두 번째 음식 나오고, 그렇게 몇 가지 요리가 나오다가 어느 순간엔 끝입니다. 그래서 당시엔 먹으면서도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번 요리를 왕창 먹자니 또 다음 요리가 나올지도 모르겠고 그렇다고 조금만 먹자니 이게 마지막 요리일 수도 있겠다 싶어 먹으면서도 참 고민이 많았더랬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렇게 먹고도 배가 불러요. 소화를 돕기 위한 순서로 음식이 나오다 보니 뒤탈도 없더라고요.
간사하게도 일순간에 마음이 코스요리를 사 주신 분에 대해 은근한 불만이었던 것이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바뀌는 경험을 했습니다.
믿음의 감사가 그렇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코스요리처럼 주시는 “코스로 주시는 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꺼번에 주시진 않지만, 만족할 때까지 계속 주십니다.
제 경우를 봐도, 내 앞에 코스요리가 계속 펼쳐질 텐데 다른 사람 식탁에 뭐가 있는가를 알아 뭐 할겁니까?
이제부터는 지금 나의 인생 식탁에 무엇이 있는지에만 집중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있는 게 없다고요? 모자라고 부족하다고요?
그렇더라도 이젠 저나 여러분 모두가 매사를 판단할 때 세상적인 시각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에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상황을 육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영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로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특별한 안경을 하나씩 주셨는데,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린 매사를 ‘믿음의 안경’을 끼고 세상과 삶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세상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는 것을 볼 줄 아는 믿음의 안경을 써야 하며 그 안경 너머로 이제까지 세상에서 얻은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하나님이 주실 것을 볼 수 있음으로 인해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안경을 벗지 않는 한 믿음의 안경으로는 없는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다 있으니까요. 또 안 되는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다 해 주실 테니까요.
이런 이유에서 예수님께서도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도 그런 의미에서 기록된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라고 합니다.
먼저 본문의 4절 앞부분은 보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확대 해석하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것이 선하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으세요. 하나님은 나에게도 선하십니다. 지금 내게서 되어지는 일들이 하나님이 악해서 나에게 그리되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린 하나님이 선하시기에 결국엔 그 하나님을 믿는 나에게서도 하나님은 이전에 악했던 것, 나쁜 것, 못된 것, 싫은 것 등등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해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이 다 선하심을 믿어, 그것들을 믿음으로 받으며 그 믿음으로 인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할지라도, 상황 때문에는 힘들어도 하나님 때문에는 감사할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는 있다.’라는 이 사실이 우리가 환난 중에도 믿음을, 고난 중에도 감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런 이유를 알고 본문 4절 후반부를 보면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라고 했습니다.
‘감사함으로 받으라!’
그런데 사사기에 보면 미디안 대군과 싸우러 갈 때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삼백 명만 데리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무기도 없이 항아리와 횃불만 들고 전쟁터로 가라 하십니다.
이 상황만 놓고 보면 오늘 말씀처럼 과연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기드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았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감사함으로 받았습니다.
결국 미디안에 맞선 기드온의 결과는 어땠나요?
아군의 피해는 단 하나도 없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왜 사람들은 믿는다면서도 결과는 내가 만들려고 할까요?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로서는 현재의 과정에만 힘써야 하는데, 이렇게 우리가 과정에 힘쓰는 것이 감사입니다.
그럼에도. ‘그래도 진짜 감사할 게 아무것도 없는데요.’라거나 ‘아무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던데요.’라고 하시는 분이 계실 수 있습니다.
오해를 푸셔야 합니다. 성경이 권면하는 ‘감사하라,’는 말씀은 단지 ‘땡큐’ 하듯이 ‘감사해요’라고만 하라는 게 아닙니다.
5절 말씀을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마침 오늘이 추수 감사 주일입니다. 매년 이즈음이면 교회마다, 목사들의 설교마다 ‘감사하자’라는 말이 주된 주제가 됩니다. 그래서 우린 더더욱 감사하는 믿음이 뭔지? 감사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의 제대로 된 감사에 하나님의 제대로 된 응답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방법에 있어서, 본문 5절 말씀에 근거할 때 우리가 진정 감사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고자 하면 무슨 일을 만나든지 대응하기 전에 ‘말씀은 무엇이라고 하시는지’를 먼저 살피고, 행동하기 전에 ‘이 말씀을 따라 힘써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감사를 새에 비유한다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께 기도’는 각각 감사의 두 날개와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날개가 작동해야 우리의 감사는 하나님께 올라갈 수 있고 그래야 하나님의 복과 은혜가 우리에게도 임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억했다가 믿음의 삶에 꼭 적용하세요. 감사는 말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매사에 말씀과 기도로 드리는 감사하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자니 수시로 ‘성경 말씀을 보고 믿으며’, 수시로 ‘믿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해서’ 이제까지는 물론이고 앞으로 있게 될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음으로 해서 버릴 것이 없는 인생 즉 사는 날들 동안 부족함과 모자람이 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늘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