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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의 아들인 이석씨가 공개한 고종황제의 왕실가족사진.
왼쪽부터 의친왕, 순종, 영친왕, 고종, 순종의 왕후인 순정효왕후 윤씨,
옹주? 그래, 그리 멀지 않았던 과거에 우리는 '왕'을 넘기는 나라였다. 어떤 이는 나라를 망하게 한 '이씨 왕조'라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지만 결과가 어떻든 모든 것이 우리가 알고 품어야할 역사가 아니던가...한편으론 그런 비아냥의 생각 조차도 일본이 우리에게 스스로를 낮추도록 뿌리깊게 심어놓은 '망국 국민' 교육에 대한 잔재가 아닐까 싶다.
고종에겐 명성황후와 후궁사이에서 4명의 딸이 태어났지만 3명은 태어 난지
환갑이 다 되어 본 딸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귀하게 여겨졌을까
고종은 이런 막내딸을 항상 가까이에서 지켜보기위해 덕수궁내 준명당을 개조해
소주방 나인이였던 덕혜옹주의 생모인 복녕당 양귀인의 얼굴에는
양귀인은 일본으로 끌려간 딸에 대한 그리움이 병이 되었는지
덕혜옹주(오른쪽)가 다른 학생들보다 높은 좌석에 앉아 행사를 지켜보고 있다
수업을 마친 덕혜옹주가 교문을 나와 마차에 오르려 하는 모습을 찍었다.
일본풍의 교복 치마를 입고 머리에는 양식 모자를 쓴 그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모습이다.
그녀의 표정은 항상 침울했다. 무언가 뚫어지게...무언의 항변이라도 하듯이
굳게 다문 입매와 단아한 표정에서 풍기는 처연한 차가움은
어린나이라고 보기에 믿기지 않은 고독한 기품이 느껴지기도 한다.
일본으로 떠난 이후 펼쳐질 자신의 기막힌 인생을 상상조차 했을까?
1925년 드디어 덕혜옹주에게 일본유학의 명이 떨어졌다.
첫째는 지나치게 영민한 것이고
둘째는 품어서는 안될 그리움을 품은 것이고
세째는 조선의 마지막 황제 딸로 태어난 것이란다
1962년 38년 먄에 그렇게 그리던 고국의 땅을 밟았다.
귀국 후 덕혜옹주는 7년간의 병원 생활끝에 창덕궁 낙선재로 거처를 옮겼다.
덕혜옹주의 궁중유모였던 변복동 할머니와 덕혜옹주의 회갑때 모습.
여전히 큰 눈망울과 굳게 다문 입매는 마치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듯 하다
1972년에는 전 남편인 소 다케유키가 낙선재를 찾아왔지만 옹주는 만남을 거부했다.
대한제국 마지막 옹주의 슬픈 운명을 더욱 가슴 아프게 기억하게 한다.
전하(영친왕), 비전하(이방자여서) 오래 보고 싶습니다.
실의에 빠진 고종에게 마지막 희망의 빛이 되어, 덕수궁의 꽃으로 자나났던 덕혜옹주
어린 덕혜옹주를 무릎에 앉히고 얘기를 나누는 복녕당 양귀인이
호기심에 떨잠을 바라보는 덕혜옹주에게 떨잠을 머리에서 뽑아주었다.
어머니와 조국이 그리울 때마다 꺼내어 보며 마음을 달랬다는 내용이 나온다.
가여운 한 소녀에서 여인으로, 온 몸으로 겪어야 했던 망국의 서러움과
고단한 삶이 이토록 아름답고 화려한 떨잠과 극명히 대비되어 더욱 처연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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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 전왕가
출생-사망 1912년 5월 25일 - 1989년 4월 21일
가족-딸 정혜(자살)-일본이름 마사에
경력-낙선재 거주
1962. 01 귀국
1930 조발성치매증으로 영친왕의 거처로 옮겨 치료
1925. 04 일본 학습원으로 연행됨
구왕가의 일족으로 고종이 60세가 되던 해에 후궁 복녕당 양씨사이에서 얻은 고명딸이다.
1961년 11월, 미국을 방문하던 도중 일본에 들른 박정희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은
이방자여사와 만난 자리에서 덕혜옹주의 얘기를 듣고 무릎을 치며 "그런 분이 있었냐"고 말했고
그 뒤, 박정희 정권에서 제창한 '구황실재산법 제4조 시행에 관한 건'으로 구황족에 포함된
그녀는 1962년 1월26일 오후 12시35분 김포공항을 통해 고국에 돌아왔으며
이후 국가로부터 보조금을 지급받으며 창덕궁에서 생활하였다.
귀국 후 대한민국 국적으로 양덕혜라는 이름의 호적을 받았다.
1962년 1월 26일 귀국할 때까지 정신장애로 도쿄 인근의 마쓰자와 병원에 입원하는
비참한 생활을 전전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일보와 매일신보에서 기자로 일한
덕혜 옹주를 모시던 나인 복순. 일본 순사에게 끌려가 몹쓸 짓을 당할 뻔한 이를 구해준 인연으로 마지막까지 옹주를 위해 온 마음과 몸을 바쳤습니다. 궁중 나인입니다
왕조국가에서 왕실은 한 국가의 근본이 되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일본은 덕혜옹주 뿐만 아니라 많은 조선의 왕족들을 일본의 왕족, 귀족들과 결혼시키는데,
이것은 조선왕실에 일본인의 피를 섞어서 후대로 내려가면서 차츰차츰
조선왕실이 일본 혈통으로 채워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당시로썬 국가의 근본인 왕실이 일본혈통이 되기 때문에
그래서 덕혜옹주를 포함해서 영친왕 등등 많은 조선의 유력인사들을
즉 ‘조선과 일본은 하나다’라는 정책에 따른것이기도 하죠.
덕혜옹주님은 고종황제의 셋째 딸로 1912년 귀인 양씨의 소생으로 태어났습니다.
14살이 되던 1925년에 일본으로 끌려가서 교육을 받았지요.
황제의 딸로 태어나 일본에서 교육을 받게 되었는데 유교문화에 익숙했던 분으로서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패번취현"이란 정책을 단행하게 되었는데
이때까지 있던 "번주"란 집권층을 없애고 중앙집권적인 현을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번주는 몰락하게 되었는데 덕혜옹주님과 정략결혼을 하게 된 이는
대마도 34대 도주(마지막 번주)의 손자였던 쇼다케유키란 사람이었습니다.
조상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던 대마도 도주의 직위를 박탈당하게 되고
허울뿐인 백작 칭호로 한탄하던 그에게 조선 황제의 딸을 주어 위로한 셈이었지요.
또한 황제의 딸을 대마도 도주의 손자와 결혼시킴 으로서 조선과 조그마한
쇼다케유키란 사람은 동경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으며 시서화에 뛰어난
재질을 가진 천재였으며 지금도 대마도에서 존경을 받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양국의 관계라든가, 정략결혼이 그러하듯 상호간의 사랑이 없었기에
부부관계가 원활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고 1951년 이혼하게 되었지요.
1962년에 덕혜옹주님은 귀국하여 낙선재에서 기거하시다가
그러나 한때 두 사람은 사이가 좋았다고 기록되어 있고 마사에라는 딸을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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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는 위의 내용 여기 저기서 퍼서는 짜집기해서 맹그는 동안 ....가슴이 뭉클....눈물도 찔끔 나오더군요....
덕혜옹주의 책을 읽으면서 가슴이 뻐근 했답니다...
아주 오래전에 다큐로 티비에서 보았던 적이 있습니다.
늘 좋은글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어찌나 화가나고 속이 상하던지요...
너무 안쓰고 방치해둔 부식된 머리에서 녹이 조금씩 벗겨지고 있는 느낌입니다.
너무가슴아프고 코끝이 찡해옵니다.
정말 가슴이 아프네요.. ㅠㅠ .. 결코 잊지 말아야할 역사입니다.
우리의 아픈 역사이지여~~~ㅠ.ㅠ
가슴이 먹먹해져옵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