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이런 상황을 남한은 알아야합니다!!! 그 진실을,...... 같은 시간 같은 민족에게 일어나는 비극을 알아야합니다
후기남긴이:안전이 부끄러
후기남긴이: 북한사랑
이 영화를 통해 북한을 향한 마음이 더욱 커져갑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두고 와서 밤낮 기다리며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가까운 우리 반쪽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지만,
뒷전으로 밀려나 있는 실정입니다.
이 영화는 정말 이 시대에 필요한 영화입니다.
영화 보는 내내 가슴이 너무도 아파왔습니다.
그 느낌을 잊지 못해서 이렇게 글로 남깁니다.
꼭 보시기 바랍니다!~
2007년 5월16일
다음날, 우리는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300 키로 정도 떨어진 사막의 게르(몽골 천막)에 여장을 풀었다.
나는 영화사의 H 피디와 게르를 같이 쓰기로 했다. 게르의 조그만 나무문으로부터 왼쪽의 침대에 내가 자리를 잡고, 중앙에 양철로 된 난로와 장작더미 건너편으로 H 피디의 침대가 있었다.
2007년 5월16일, 이날 저녁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여덟 시간이 넘게 사막을 가로질러 도착한 사막 한 복판의 텅 빈 게르촌에는 크로싱 제작팀을 제외하고는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공동 샤워장의 더운 물이 한 방울씩 떨어져 상당히 오래 걸리긴 했지만, 샤워를 할 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개운한 몸으로 저녁 8시30분경 일행들과 식당에 모여 밥을 먹는데, 밥이 먹히지를 않았다. 이제 막 식사를 시작한 일행들에게 미안했지만, 실례를 무릅쓰고 먼저 일어나 게르로 돌아왔다.
좁은 게르 안에는 이미 종업원이 피워 놓은 장작 난로가 활활 타서, 마치 찜질방에 온 것 마냥 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기가 들기 시작했다. 등골부터 소름이 오싹 끼치더니 심장까지 떨리면서 오한이 났다. 처음 경험하는 심한 오한이었다. 더 생각할 겨를 없이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고, 그 위로 담요까지 눌러 덮었다.
조금 있으면 가시리라 생각했던 오한은 두꺼운 이불과 담요 속에 있는 나를 계속 괴롭혔다.
약 1 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서 활활 타오르는 장작더미를 품고 있던 양철 난로는 그 열기가 정점에 이르러 겉 표면까지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얼굴로 오는 열기가 너무 뜨거워 돌아누웠다. 외부에서 전해지는 이 열기와는 상관없이 내 몸은 심하게 떨렸고, 세포 구석구석까지 파고든 한기에 곧 심장이 얼어붙어 버릴 것만 같았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H 피디가 안경너머 걱정스러운 눈으로 달달 떨고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난로에 장작을 계속해서 집어넣었다. 난로가 뜨거워지다 못해 폭탄처럼 터져 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 구토가 시작되었다.
세 번인가, 네 번 이어졌다. 구토가 나올 때 마다 나는 맨 발로 게르밖의 어둠속으로 뛰쳐
나갔다. 밖으로 나갈 때 마다 엄습하는 한기 때문에 구토를 다 마치지 못하고 다시 침대로 뛰어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내 안의 오물들을 빼내면서, 문득 올려다 본 밤하늘..
밤하늘에 별들이 보였다. 쏟아질 듯 가깝게 내려온 수많은 별들이 거대한 양탄자처럼 온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표현할 수 없는 대자연의 거대함과 찬란함이 잠시 동안 한기를 잊게 만들었다. 그리고 어떤 생각이 쏜살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 그랬구나. 그들은 이렇게 죽어갔겠구나”
맞다. 몽골 사막을 헤매다 얼어 죽어 간 수많은 탈북자들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바라 본 풍경도 바로 저 밤하늘을 수놓은 아름다운 별빛이었을 것이다. 지금 내가 느끼는 어찌할 수 없는 오한을 느끼며 사막 어디에선가 누워 한참을 떨다가, 조용히 마른 두 눈을 감았을 것이다.
침대에 돌아와 다시 눕자, 터질 것 같은 심장 속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교만함을 버려라. 겸손해라. 너를 버리고 나를 받아라.”
그날 이후,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를 못했다. 사흘째가 되자 정말 배가 고팠다. 먹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겨우 사흘을 굶었을 뿐인데, 나는 세상에서 제일 배고픈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문득 그들과 조금 더 가까워 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픈농담
1차 한국촬영을 마친 우리는, 2007년 7월 말경 중국으로 건너갔다.
탈북자들이 공안에게 쫓기는 장면을 촬영하던 날은 참 더웠다.
탈북자로 분한 한국배우들이 중국 공안역할을 맡은 현지인들에게 쫓기는 장면이었다.
무더위에 지쳐 살살 뛰는 중국 공안들에게 현지 코디가 이렇게 주문했다.
“실제로 한명이라도 잡는 사람을 제일 먼저 쉬게 해주겠습니다.”
촬영이 시작되자 모두들 전속력으로 뛰었다. 하루 종일 뛰고, 달리고, 또 뛰고, 계속 달렸다.
정신없이 달리는 데, 탈북자들이 핀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핀볼은 한때 어린이들 사이에서 인기 있었던 게임이다. 상자 안으로 연결되어 있는 작대기를 잡고 있다가 핀볼이라 불리는 조그만 쇠공이 굴러 오면 있는 힘껏 공을 튕겨내는 게임이다. 작대기가 세게 때릴수록 공은 멀리 굴러간다. 튕겨진 공은 이리 저리 굴러다니며 상자 안을 둘러싸고 있는 벽에 부딪히는 데, 벽에도 튕겨내는 장치가 되어 있어 다가오는 공을 계속해서 밀어낸다. 공은 단 한순간도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그렇게 굴러다니던 공이 구멍에 빠져 사라지고 나면 게임이 끝난다.
뙤약볕아래에서 혀를 쭉 빼고 멍멍이처럼 헥헥 거리던 나는
“크로싱 촬영하는 게 실제로 탈북 하는 것 보다 더 힘들다”고 푸념 섞인 농담을 했다.
실없는 농담에 함께 뛰던 배우들도 웃고, 주변에 있던 스텝들도 웃었다.
내 옆을 지키던 탈북자출신 사투리선생도 희미하게 웃었다. 그가 웃고 돌아서는 데 그의 납작한 뒤통수가 이렇게 말하는 듯 했다.
“아니. 그렇지 않아. 넌 뛰다가 힘들면 쉬었다가 다시 뛰면 되잖아. 다 뛰고 나면 호텔로 돌아가서 배불리 먹고, 잘 거잖아. 우리는.. 아무리 뛰어도 돌아갈 곳이 없어.”
첫댓글 6.25동란중굶으며고통받던생각이 어렴푸시떠오르면서 소름이끼치는군요.요즘사람들북한을너무몰라요 지옥이요.적그리스도치하의모형그대로입니다. 사람살곳이 못되는곳이북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