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판 위의 갈비 짝
어릴 적 가장 먹고 싶었던 것이 갈비였다.
그 때는 소갈비든 돼지갈비든 닭갈비든 ‘갈비’라는 말만 떠올려도 군침이
돌았다. 그래서 이순(耳順) 가까워지기까지 무슨 한풀이나 하듯 갈비를 즐
겨 먹어 왔다.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아버지가 남긴 깊은 뜻을 헤아리며
1950년대 후반이었던가! 선친께서 어느 고등학교의 입학 시험 책임자로
계신 적이 있다. 당시는 고등학교도 학교별로 시험을 치렀다.
합격자 발표가 나고 얼마 동안 등록 기간을 주었다.
그런 다음 이런저런 사정으로 등록을 하지 못하는 결원이 생기면 학교
나름대로의 기준에 따라 보결 생을 충원하였다.
그 기준은 대체로 성적보다는 기부금, 장학금 등의 명목을 붙인 금품이었
다. 아버지께서는 합격자 발표 때마다 아예 1점 차점자, 2점 차점자, 3점
차점자 등도 발표하여 그 순서에 따라 철저히 보결 생을 뽑는 분으로
정평이 나있었다.
그런데도 입시 때가 되면 우리 집으로 학부형들이 금품을 들고 찾아오곤
했다. 이른바 ‘와이로’(뇌물)를 써서 자녀의 입학을 허가받으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친께서는 입시 때가 되면 집에 들어오시지 않고 어디론가 피신
하시곤 했다.
아버지의 청렴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는 어머니도 어디론가 몸을
피하고 계셨다. 우리 어린 형제들만이 집을 지켰다.
모두가 다 어려웠던 당시에 뇌물이라야 ‘나마까시’(생과자) 상자나 사과
한 궤짝 정도였다.
자녀의 실력이 지나치게 쳐지거나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부형들은
귀한 갈비나 심지어는 쌀 한 가마니 정도를 가지고 찾아 왔다.
부모님이 집을 비우셨을 때, 형과 나는 그 뇌물들을 받은 적이 있다. 학부
형들의 간곡한 사정을 듣고 그냥 받아두어도 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어쩌다 야심을 틈타 아버지께서 잠깐 들어오시면 우리 형제가 모르고 받아
둔 각종 물품들을 보고 크게 진노하시며 다시 되돌려 주라고 엄명을 내리
셨다.
참으로 망연자실할 노릇이었다.
입시 때만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엄동설한에 뇌물 공여자의 이름도 잘
모르고 거처도 잘 모르는데 어찌 다시 반환을 할 수 있는가?
그래도 우리 형제는 아버지의 호령을 수행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명령을 받들기에는 초등학생인 나와 중학생인 형은 벅찼다.
그 꽃같이 빚어 놓은 생과자, 기름기 주르르 흐르는 갈비 짝, 이런 귀하고
맛있는 것을 한번 입에 대보지도 못하고 이집 저 집을 찾아다니며 되 돌려
주는 일은 어린 마음에 너무나 원통(?)하기까지도 했다.
“군침 도는 갈비의 유혹
어느 날이던가?
형과 나는 천근만근이나 되는 갈비 짝을 돌려주려고 뇌물 공여자의 집을
찾아 나섰다.
벌건 핏 물이 흥건히 배인 신문지로 둘둘 포장된 갈비 짝을 어깨에 메고
어린 우리들은 이 거리 저 거리를 헤매며 다녔다.
거리는 한 걸음도 내딛기조차 힘겨운 빙판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버지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고자 힘겨운 뇌물 반환의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형은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속에서 북극을 정복하는 탐험자처럼 묵묵히
앞장서서 갔다. 나는 어린 마음에 일 년에 한번 먹을까 말까 한 갈비를
한 대도 뜯어보지 못하고 선물로 준 것을 다시 돌려주어야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여린 마음을 품고 있어서인지 발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급기야 우리는 미끄러운 얼음판 위에 갈비 짝을 내동댕이칠 수 밖에 없었
다. 내 생각에는 부모님이 지나친 결벽증을 가지고 계시지나 않는가 의아
해 하기도 했다.
선물로 받은 것을 왜 꼭 돌려주어야 하는가?
형이 좀 융통성(?)을 발휘했으면 하며 나는 한참 동안 빙판 위에 앉아서
형에게 눈을 흘겼다. 뇌물 공여자의 집을 못 찾았으면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형의 투철한 사명감으로 역시 반환 작전은 성공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갈비 한 점 뜯어보지도 못하고 형과 빙판 위에 갈비
짝을 사이에 두고 가벼운 실랑이를 벌이던 시절을 못내 아쉬워하며 지냈다.
“궁지를 벗어나게 한 ‘부끄러움”
20대 초반에 나는 서울 시내 어느 여자고등학교의 교사로 초임 발령을
받았다. 그리고 한 학급의 담임교사가 되었다.
추석을 며칠 앞둔 어느 날이던가! 어떤 학부형이 찾아왔다.
정부부처의 고위층 부인이었다.
자기 자식에게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 주기를 부탁을 하고 점잖게 돌아갔다.
정중히 배웅을 하고 돌아와 책상 서랍을 열어 보니 ‘촌지(寸志)’라 했던가
‘미의(微意)’라 했던가 붓글씨로 무어라고 쓰여진 두툼한 봉투가 들어 있었
다.
교무실에는 아무도 없어 본 사람은 없었지만 내 가슴은 쿵쾅쿵쾅 뛰었다.
이 봉투를 받아 둘 것인가 돌려주어야 할 것인가.
내가 국가의 후원을 받아 정통 사범교육을 받은 청년 교사인데, 사명감에
불타는 교육 공무원인데, 교직을 가업처럼 여기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교사
가 되었는데 이러면 안 되지, 총각이 무슨 돈이 필요하나 등 잠시 생각을
하다가 얼른 학부형을 뒤따라 나갔다.
학부형은 벌써 교문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나는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실내화 바람으로 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어갔다. 학부형은 고급승용차를 타고 훌쩍 떠나 버렸다.
이 일을 어찌하나 안절 부절할 수 밖에 없었다. 학부형에게 전화를 했다.
‘이렇지 않으셔도 댁의 따님을 잘 돌봐 드릴 터인데 왜 금전을 두고 갔느
냐‘고. ‘다른 선생님들도 다 그러는 데 뭘 그걸 가지고 그러시느냐’, ‘돈이
적어서 그러냐’, ‘처음이라 그러시는 모양인데 괜찮다’, ‘교장선생님도 잘
안다.
대학원 공부하신다는데 책 사는데 써라’하는 등 나를 다독거리기도 하고
충고하기도 하고, 때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청운의 뜻을 교육계에서 펴고자 하는 당시의 내 젊고 맑은 마음에 한 방울
검은 먹물이 퍼져 오고 있는 것 같았다.
돈봉투를 여학생의 손에 들려 돌려보내자니 교육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것 같고, 감히 고위층 학부형 집을 찾아갈 수도 없고 진퇴양난이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한낱 몇 푼에 사도(師道)를 팔아야 되나? 바른 마음, 바른 행동,
바른 자세를 시간마다 강조하는 국어 선생인데. 별별 오만가지 생각이
오락가락 했다.
그리고 어린 시절 아버지의 야속한 뇌물 반환 작전이 생각났다.
그 순간 그 청렴하고 꼿꼿한 아버지의 아들로서, 다음 세대를 바르게 인도
하겠다고 스스로 선택한 교직의 길을 걷는 자로서 내 손에 떳떳하지 못한
봉투가 건네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상대방에게
호락호락하게 보인 것 같기도 하고 무시당하는 것 같기도 한 ‘부끄러움’이
밀려 왔다.
손이 덜덜 떨렸다. 나로서는 큰 용기를 내어, 돈 봉투를 몽땅 털어 종례
시간에 우리 반 학생들에게 수박 파티를 열어 주었다.
나는 ‘오늘 선생님에게 눈 먼 돈이 생겼다. 우리 모두 맛있는 수박 먹고
대학입시 준비에 찌든 몸과 마음을 시원하게 하자’는 훈시 비슷한 것을
덧붙였다.
그 다음 날 학부형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우리 애한테 이야기 들었다.
그렇게 공개해도 되느냐’고.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그 거액의 돈 봉투를 탐냈더라면, 학생에게 얼마나 부끄럽고 내 자신에게
도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그 후로 30여년 간 내 교직관의 8할은 아버님의 음덕을 입었던 것 같다.
“되풀이되는 부패의 역사”
공직생활을 하면서 ‘부정 부패의 척결‘, ‘청렴한 공무원‘, ‘부패와의 전쟁‘
등의 정책 명제를 귀가 따갑도록 들어 왔다.
그런 정책을 그렇게도 강조하던 지도자들과 그 가족이 엄청난 부패에 연루
되어 법정에 서는 것도 보았다. 부패의 역사가 되풀이되고 있다.
한없이 성실하고 조직 발전에 큰 일을 해낼 것 같던 동료 직원이 ‘부정,
부패, 뇌물, 수뢰‘ 등의 혐의를 받고 공직을 떠나는 것도 비일비재하게
보았다. 부정 부패는 금전 수수뿐만 아니라, ‘인사 청탁, 매관 매직, 학력
위조, 허위사실 유포, 직권남용‘등 참으로 다양했다.
그런데 당사자들은 ‘별 것 아니었는데 재수 없게‘, ‘관행인데 미운 털이
박혀서‘, ‘정치적 음모로‘, ‘내부 고발 때문에‘, ‘줄을 잘못 서서‘ 운운하면서
변명을 하였다.
그들은 공무를 수행하는 공직자로서, 한 가정의 도덕적 푯대가 되어야 하는
아버지로서, 직원들에게 수없이 청렴을 강조하던 상사로서 전혀 자숙하지
않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태도였다.
쇠고랑을 차고 고개 푹 숙이고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모습을 친자식이나
친손자들이 보고 있다는 생각이나 해 보았을까?
스스로는 잘못이 없다고 변명하여도 공직자로서 물의를 빚어낸 것만으로도
부끄러워할 일인데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얼굴이 두꺼운 '철면피'요,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파렴치한
(破廉恥漢)'이 아닐까?.
“청렴'을 비웃는 풍토”
어떤 연구소가 실시한 ‘부패 심리에 관한 조사’에 따르면, 부패 심리는
지도층이나 공직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이 전반적으로 지니
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상당수의 국민이 자기 일을 빨리 해결하기 위하여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아는 사람을 찾아가서 개인적인 일을 부탁하는
것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부정 부패의 책임은 지도층이나 공무원들
에게 있고 의식 개혁이란 나하고는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인다.
이런 태도는 민주 시민으로서의 주인 의식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이다.
그러한 자세를 가진 국민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 사회가 건전하고 살기
좋은 사회로 발전하기는 어렵게 된다.
우리 사회의 부정 부패는 그 책임을 누구에게 돌릴 문제가 아니다.
언제부터인지 ‘청렴 결백한 관리’ 곧 청백리라는 낱말을 입에 올리면 코
웃음칠 만큼 공직자의 가치관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우리 공직 사회에는 청빈한 생활과 봉사에서 긍지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승진과 출세를 위해 돈은 절대로 필요하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선 취하고 보자는 금전만능 의식이 암암리에 널리 퍼져 있다.
돈과 존경이 똑 같은 기준에서 평가되는 가치관의 전도 현상이 긍지도
자부심도 소신도 없는 공무원상을 만들어 내고 있다.
공직자의 청렴은 공무 수행과 관련된 개인적 욕망을 결부시키지 말라는
뜻이다. 공직자의 청렴은 누구나 지키고 싶은 미덕이다.
그러나 막상 이것을 생활 신조로 하면서도 권력과 금력, 그리고 소유욕과
경쟁심이 이 신조를 무너뜨릴 유혹의 손길을 보낼 때 대부분의 공무원은
흔들리고 만다.
청렴은 불교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욕망을 줄여 나갈 때 가능해진다.
그리고 절약과 절제를 바탕으로 어릴 때부터 지속적인 학습에 의해 형성
될 수 있다.
그러나 공무원이 된 후에라도 청렴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고 부끄러운 공직
자로 낙인찍히지 않으려면 부정한 일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끊임
없이 교육시킬 필요가 있다고 본다.
청렴한 업무 수행만이 자신의 직무에 대한 보람과 긍지를 가질 수 있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떳떳해야 위신이 선다 ”
옛날부터 우리 나라에는 ‘청렴하면 위신이 생긴다(廉則生威)’는 <채근담>
의 말을 공직 생활을 통해 몸소 실천한 청백리들의 이야기가 많이 전해
지고 있다.
<대학>이나 <목민심서> 등에도 ‘마음‘이 청렴한 것을 공직자의 필수 조건
으로 들고 있다. 그러므로 부정한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짓인가
를 마음으로 인식하게 하는 교육이 절실하다.
그리고 청백리에게는 국가유공자에게 베푸는 만큼의 혜택을 주어야 한다.
얼굴조차도 본 적이 없는 조상의 공덕을 입어 여러 가지 특혜를 받는 후손
들처럼.
공직을 수행하면서 한 푼의 금품이라도 ‘이 정도는 관행이다',
‘남들도 다 받는데 나만 뭐 특별하다고' 생각하며 거리낌 없이 받는다면,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공직자가 아닐까? 항상 ‘이게 아니지’, ‘이 몇 푼에
내 몸과 마음을 더럽힐 수는 없지’등 조금이라도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청렴한 공직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금품을 주고받는 것만이 부정부패가 아니다. 중상 모략, 음해, 투서
등의 행위도 보이지 않는 부정 부패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부끄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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