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호 의박 성형외과 전문의] "다시 봄이다"
중국인들이 셈이 밝다고들 한다. 그런 중국인들이 존경하는 상인이 있는데 '호설암'이라는 청나라 말기의 상인이다. 그를 다룬 『상경』이란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티 없는 돌과 티 있는 옥의 차이를 구별하라.' 고등학생 영어 시간에 아무 생각 없이 외웠던 "빛나는 모든 것이 금은 아니다 (All that glisters is not gold)" 가 연상되는 문장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세익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구절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뛰어난 상인들은 겉으로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않았나 보다.
'티가 없는 돌'과 '티가 있는 옥'. 티의 있고 없음을 볼 것인가? 돌인지 옥인지를 볼 것인가? 무엇이 소중한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티의 있고 없음보다는 더 깊은 본질이라는 예기인 듯 하다. 티가 있다 해도 소중한 것이 또 뭐가 있을까?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시간이다. 그런데 시간이 소중한 것을 아주 어릴적에는 실감하지 못했던것 같다.
지나온 삶이 길어질수록 남은 삶이 짧아지게 된다. 지나온 삶이 길수록 행복한 기억도 쌓이지만, 후회의 기억도 쌓인다. 지나온 삶이 길수록 삶에 남겨진 '티'도 무수히 많아진다. 이번 생에 나에게 주어진 옥이 이 삶 하나라고 생각하면 티가 있다고 버릴 수는 없지 않을까? 어린 나이에 혜성처럼 나타나 천재적인 능력을 보여주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는 열광한다.
브라질의 축구 영웅 펠레는 열다섯살에 브라질 국가대표가 됐고, 골프선수 타이거 우즈의 어린 시절 데뷔 과정도 누구보다 화려했다. 그뿐만 아니다.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에서 보여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천사같이 빛나는 아름다운 미소, '로마의 휴일'에 등장했던 오드리 헵번의 청순한 모습. 그 빛나는 순간들. 티 없이 맑게 빛나는 그 순간들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그들의 미래에 이어질완벽한 삶을 기대하게 된다.
때론 짧게 때론 좀 길게 그 빛나는 순간들이 이어지고, 우리의 시선 밖에서 그들의 거친 삶은 계속됐다. 어린시절의 막연한 느낌과 달리, 지루하고 치열한 삶은 꽤 오랫동안 때론 거의 전생애 동안 이어진다. 성형외과 의사로서 많은 환자들을 수술했지만 특히 기억에 남는 환자들이 있다. 그 중 한 명이 사고를 당해 얼굴 볼 한 쪽에 거의 20cm가 넘는 긴 흉터가 있던 20대 후반의 여자였다. 흉터의 굴곡이 심해서 짙은 화장으로도 잘 가려지지 않았다. 당연히 사회 생활에도 걸림돌이 됐다. 흉텅를 아예 없애는 수술은 없다. 흉터를 눈에 덜 띄게 줄여주는 수술을 했다. 수술 후에도 상처가 아물고 흉터가 다시 숙성되고 눈에 덜 띄는 수술의 호과가 나타나기까지 약 반년은 걸렸다.
그렇게 수술이 끝나고 치료도 끝났고, 내 기억에서도 사라졌다. 이십년정도 지나 거의 오십대가 된 그 환자가 다시 내 클리닉을 찾아왔다. 얼굴의 흉터는 아주 희미해서 옅은 화장에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그동안 자신의 사업을 했고, 지금은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만족하고 있는 듯 했다. 삶의 시작 즈음에 티가 생기기도 하고 영광의 순간 뒤에 티가 생기기도 한다. 단언컨데 티 없는 인생은 없다.
다시 봄이다. 겨우내 죽은 듯이 흙빛으로 서 있던 나뭇가지에 연두빛 새순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신비롭다. 봄이 오기 위해 우리가 겨우내 한 것은 없다. 그저 시간을 견뎌냈을 뿐. 거저 얻은 봄처럼 우리의 삶도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리셋하고 게임을 새로 시작하듯 삶을 다시 시작하면 된다.